133화
시간에 맞춰 총회가 열린 곳으로 향한 이정재 사장.
그는 자신이 눈이 잘못 된 건가 하는 착각을 하고 있다.
이곳에 올 거라는 생각하지 못한 인물.
JH 그룹 회장이 참석해 있었다.
주식을 매수하고 있단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총회에 참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오히려 좋았다.
자신이 회장 되는 모습을 직접 보여줄 수 있으니.
자신의 형에게 붙은 걸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줘야겠다.
“이게 누굽니까. JH 그룹 회장님 아니십니까. 저번에 만나고 연락이 없어서 서운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이 자리에 참석했다는 건 저와 친해지자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혹시나 해서 질문했다.
이것이 화해의 요청인지 하고.
역시, 그런 뜻으로 참석한 게 아니었을까?
내 말을 들은 JH 그룹 회장이 무슨 소리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군요.”
“… 오늘 주주 총회의 메인 안건이 무엇인지는 아십니까?”
“그동안 비어있던 회장 자리에 어울리는 경영인을 뽑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그렇다면 우리 JH 그룹 회장님께서는 그 자리에 누가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알고 있지만, 확신을 가지기 위해 질문했다.
질문을 들은 JH 그룹 회장은 왜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냐는 듯 대답을 건넨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지금 부회장 자리에 앉아 있는 이정후 부회장님이 회장으로 올라서는 게 맞는 것 같군요.”
“그거 재밌군요. 저랑 생각 차이가 있는 듯합니다.”
또다시 무슨 말이냐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짓는 박제환 회장.
“그렇습니까? 저는 당연하게 이정후 부회장님이 회장 자리에 앉을 줄 알았는데……. 그렇다면 사장님은 누가 회장이 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야, 가장 능력 있는 사람이 앉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말 입니다. 그렇다면 이정후 부회장님이 앉는 게 맞는 거로군요.”
“…….”
꽈득―
아래서부터 기분을 잡쳤는데, 이곳에서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대답하는 박제환 회장.
분명 알고 있음에도 놀리기 위해 저런 말을 하는 게 확실했다.
‘조금 이따가 누구 말이 맞는지는 알겠지.’
지금 화내봐야 바뀌는 건 없었다.
조금 이따가…….
회장 자리를 누가 가지는지, 결정되고 나서 구경해도 괜찮을 것 같다.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저 표정이 일그러지는 그 모습을.
이정재 사장은 자신이 회장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움직일 생각이었다.
삼송 그룹과 대현 그룹이 협업하는걸.
그리고 둘이 힘을 합쳐 JH 그룹의 입지를 줄여나가는 걸 목표로 할 생각이었다.
그 생각을 박제환 회장도 잘 알고 있어서일까?
대화를 통해 나누던 신경전을 웃는 표정으로 마무리 지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건넨다.
“그럼 조금 이따가 뵙죠. 그때도 지금처럼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이고 계시길 응원하겠습니다.”
“… 제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JH 그룹이 승승장구하고 있으니 사리 분별이 부족하신 것 같습니다.”
“뭐……. 앞으로도 승승장구할 예정인데, 굳이 사리 분별 해야 되나 싶군요. 더 이상의 언쟁은 서로의 기분만 상할 것 같습니다. 그럼 조금 이따 이야기를 나누는 걸로 하죠.”
후…….
그래…….
참아야 된다.
괜히 회장 자리에 앉기 전에 JH 그룹과 불화를 일으켜, 대주주들에게 불안함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됐다.
지금은 일말의 변수마저 통제해야 되는 상황.
최대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며, 조용히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 * *
“지금부터 삼송 전자 주주 총회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주주 총회가 시작된다는 말에 정신을 차린 박제환.
아까의 대화를 생각하니 재밌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삼송 그룹의 혈육이라고 다 재능 있는 건 아니었나 보다.
그저, 아래에서 바라볼 땐, 재능 있어 보였을 뿐.
일종의 플라시보 효과와도 같았나 보다.
방금 대화를 나눈 이정재 사장.
아직까지도 자신의 상황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아니, 의심조차 못 하고 있다는 게 맞았다.
‘눈치를 못 채도 최소 의심은 해야지…….’
어째서 내가 이 자리에 참석했는지.
왜 이정후 부회장이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 건지, 한 번쯤은 의심해야 됐다.
하지만 그의 표정을 바라보니, 일말의 의심조차 없는 듯했다.
간단한 안건들이 여러 번 나오고, 총회가 무르익어 갈 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 긴장감이 서린다.
긴장하는 게 당연했다.
마지막 안건 하나로 삼성 그룹의 주인이 결정되니까.
‘문제는 왜 이정재 사장이 희열을 느끼고 있냔 말이지…….’
참…….
이제는 어리석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이제 마지막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그동안 주주분들은 오랜 기간 비워진 회장 자리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으셨을 겁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이정재 주주님이 안건을 냈습니다. 그 자리를 채울 때가 됐다고 말입니다.”
사회인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정재 사장의 표정이 점차 의기양양해진다.
“후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후보로 거론된 두 분이 있습니다. 삼송 전자 이정후 부회장, 그리고 삼송 물산 이정재 사장입니다.”
회장 후보로 두 명이 거론되고, 두 명의 연설이 있었다.
“제가 회장이 된다면 여러 회사와 힘을 합쳐, 다시 한번 온 세상에 삼송 그룹이 건재함을 알리겠습니다. 제가 맡은 삼송 물산을 보면 외신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이 점을 높게 평가했으면 좋겠습니다.”
이정재 사장의 연설이 먼저였다.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회장이 된다면 JH 그룹과 손을 잡고, 전 세계에 한국을 대표하는 그룹들이 어떤 그룹인지, 똑바로 보여드리죠.”
그다음이 이정후 부회장의 연설.
우리 그룹과 협력한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내뱉을 줄은 몰랐는지, 이정재 사장의 눈이 커진 게 보였다.
이내, 아무런 상관이 없을 거라는 듯 비웃는다.
“그럼 투표가 있겠습니다.”
투표가 있겠다는 말과 함께,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용지를 나눠준다.
용지를 받은 모든 이가 주변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는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뜻을 전한다.
재밌었다.
다른 총회와 다르게, 투표용지로 진행된다는 게.
아마, 이정후 부회장의 배려일 거다.
투표가 끝나고도 사람들이 이정재 사장에게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도록.
“이번 투표는 익명으로 진행되는 점 유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전에 두 명이 함께 합의된 내용이어서일까?
이정재 사장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모두의 투표용지를 한쪽에 모아, 두 명이 공증하고 투표용지를 한 장 한 장 펼치기 시작했다.
용지가 펴질 때마다 각 후보 이름 앞에 숫자가 적힌다.
의결권을 가지고 있는 주주들이 가지고 있는 주식의 수.
처음에는 이정재 사장에게 많은 숫자가 몰렸었다.
그와 함께 이정재 사장의 표정이 더없이 밝아져만 갔다.
시간이 점차 흐르고.
계속될 것만 같았던 이정재 사장의 독주는 끝나고, 점차 이정후 부회장에게 표가 몰리기 시작한다.
그것에 맞춰 이정재 사장의 표정이 더 없이 초조해져 간다.
“… 이정후 부회장님이 과반수로 회장 자리에 앉게 됐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용지까지 펼치고 나서 사회자의 입에서 나온 말.
이정후 부회장이 회장 자리에 앉게 됐다는 말이었다.
그게,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졌을까?
상황을 지켜보던 이정재 사장이 현실을 자각하지 못하더니, 시간이 흘러 소리를 지른다.
“이게 무슨 말이야! 어떻게 된 일이냐고!! 당신 똑바로 확인한 거 맞아!?”
“… 저는 누구의 편도 아니며, 옆에서 확인하고 있던 분도 공증을 섰습니다.”
“거짓말하지 마! 이건 음모야! 이게 현실일 리가 없다고! 김 비서, 당장 가서 확인해. 만약 하나라도 잘 못 된 게 있다면 당신 죽을 줄 알아.”
계속해서 난리를 치던 이정재 사장.
그 모습을 보던 이정후 부회장은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이정재 사장에게 다가갔다.
“그만두지 못하겠느냐.”
“… 그래……. 네 X끼가 사기 쳤구나. 재능이 없으니 사기를 치는 거야……. 그러고도 네가 무사할 것 같아!!!?”
짝―
“…….”
분노를 참지 못한 이정재 사장이 이정후 부회장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그 모습을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정후 부회장은 손을 들어 올려, 곧바로 이정재 사장의 뺨을 쳤다.
‘화끈하네.’
그 모습을 본 난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래도 가족이면 조금은 힘을 줄일 법도 한데, 누가 봐도 있는 힘껏 뺨을 쳤다.
“이러니까,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거다.”
“… 네가 뭘 알아……. 고작 세상을 먼저 본 네가 뭘 아냐고!!”
짝―
“정신 차려라. 추하구나.”
“…….”
“투표용지를 개표하는 과정은 녹화가 돼 있다. 정 뭣하면 돌려 보거라. 그만큼 네가 받는 충격만 더 커질 테지만.”
“X발……. 그럴 리가 없어……. 내 쪽에 있는 인사들만 해도…….”
“네 쪽이라는 증거는?”
“…….”
자신이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다고 생각해서일까?
이정후 부회장의 말을 들은 이정재 사장의 눈이 더할 나위 없이 흔들렸다.
이내, 무슨 말인지 깨달은 듯, 이곳에 참석한 사람들의 얼굴을 한 명씩 훑어봤다.
그리고는 상황을 파악이라도 했는지, 조소를 지으며 의자에 걸터앉았다.
털썩―
“… 그래……. X발, 내가 제대로 낚인 거였군…….”
“영원한 아군은 없지. 아니……. 애초에 너의 인사라는 보장도 없단다.”
“젠장……. 이거 제대로 당했잖아? 그렇다면 임원들 전부가 다 형님 편이었던 거야?”
“편이 아니다. 저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줬을 뿐이지.”
“하하, 재밌네……. 그럼 나는 원하는 바를 제시하지 못했단 건가?”
“우리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당근을, 너는 채찍을 들었단 거지.”
의자에 주저앉은 이정재 사장이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올리며 나를 바라봤다.
“그럼, 저 사람은……. 저 사람도 당근을 내밀었던 거야?”
“반대다. 저 사람이 우리에게 당근을 주는 위치다. 너는 주제 파악을 못 했던 거고.”
“재밌네……. 재밌어……. 우리 삼송 그룹이, 아니지……. 너의 삼송 그룹이 고작 3년 된 그룹보다 못 하단 거야?”
“아쉽지만 그렇다. JH 그룹이 가지고 있는 기술, 그것들은 미국에서도 탐내고 있어. 네가 한국에서 왕 노릇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전 세계의 인사들을 만나면서 허리를 숙이고 다녔지. 이게 너와 나의 차이다.”
이제 이정재 사장도 현실을 자각한 듯 보였다.
화를 내기도 지쳤는지, 의자에 걸터앉아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 이거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진 거잖아?”
“너무 상심하지 마라. 다른 혈육들 보단 네가 뛰어났으니까.”
“그래서……. 그 결과가 이거야?”
“어쩔 수 없다. 아무리 능한 지도자라도 패배하는 순간, 패잔병에 지나지 않으니.”
“그래……. 내가 다른 혈육들보다 유능했던 게 아니라, 겁이 없던 거였나 보네……. 어쩐 지 주주 총회를 여는 데도, 다들 자신이 맡은 거만 지키려고 노력하더라고.”
“이미 그들을 만난 상태였었다.”
“… 쯧.”
체념한 듯한 이정재 사장이 또다시 나를 바라본다.
그러고는 말했다.
“축하합니다, JH 그룹 회장님. 감히 주제도 모르던 천둥벌거숭이를 보며 재밌었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애써 위로하지 않았다.
“뭐……. 재밌긴 하더군요.”
실제로 재밌었으니까.
“JH 그룹 회장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 동생은 삼송 물산에 남아있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정후 부회장이 나를 보며 부탁했다.
어떻게 해야 될까…….
고민 끝에 나온 결론.
별로 상관없을 것 같다.
애초에 이정재 사장이 나에게 더러운 수작을 부린 것도 아니고, 계획하던 바도 이정후 부회장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
더군다나 대현 그룹에게 골탕도 먹였으니, 굳이 내칠 이유는 없던 것 같다.
“그렇게 하시죠.”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나중에 갚도록 하죠.”
이번 일을 통해 많은 걸 얻었다.
대현 그룹에게 골탕을.
삼송 그룹의 주인은 나와 협력하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우리 그룹을 쫓고 있는 삼송 그룹에게 빚을 지게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