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 * *
“어떻게 돼가고 있어.”
일의 진행 상황에 대하여 묻는 삼송 물산 사장.
요즘처럼 일이 잘 풀린 적이 없던 것 같다.
진행하는 모든 일들이 막힘없이 술술 풀려나간다.
“대현 그룹이랑 이야기를 마쳤습니다. 그쪽도 대현 그룹 회장님이 나서는 게 아니라, 대현 자동차 사장이 나선다고 합니다.”
“… 그건 잘 못 된 거 아니야?”
“아닙니다. 오히려 좋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현 그룹 회장이 전권을 양보했다고 합니다.”
“허……. 그쪽도 어지간히 이 갈았나 보군. 이번 일만 이겨내면 대현 자동차 사장은 회장 자리에 앉겠어.”
“사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거 봐라.
지금도 진행되는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대현 자동차 사장이 전권을 받았다는 얘기.
곧, 대현 그룹이 내 편이란 얘기와도 같았다.
‘관계를 길게 가져가야겠군.’
지금이야 모르겠지만, 내가 회장 자리에 앉은 순간, 대현 자동차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이 쌓여있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다른 혈육들을 견제하는데, 든든한 아군이 있는 것만큼 좋은 상황이 없지 않은가.
“그……. 사장님? 보고드릴 게 또 있습니다.”
“뭔데 그래.”
회장 자리에 앉고 나면 뭐부터 할까 달콤한 상상을 하고 있을 때.
아직 보고가 끝난 게 아닌 건지, 옆에 있는 비서에게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확실하지 않지만,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JH 그룹이 저희 그룹 주식을 매수하고 있다는 말이…….”
“뭐야!?”
“전혀 신빙성이 없는 소문은 아닙니다.”
“… 형님이 아무래도 눈치챈 것 같네. 그래서 부족한 주식을 끌어모으려고 하는 거고……. 그렇다면 JH 그룹은 완전히 형님 편에 들어섰다고 봐야겠군.”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쉬웠다.
좀 더, 늦게 눈치챘더라면 재밌는 상황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와 이렇게 된 거, 조금은 서둘러도 될 것 같다.
“가장 빠르게 주주 총회를 열 수 있는 날이 언제야.”
“… 강제로라도 시기를 당긴다면 최소 15일 안에는 열 수 있을 겁니다.”
“어떻게든 시기를 앞당겨서 주주 총회를 연다. 안건은……. 회장 자리에 어울리는 경영인을 뽑자고 전해.”
“… 예, 알겠습니다.”
그래…….
오히려 잘 된 거다.
이미 대부분 주주들과는 말을 맞춰놓은 상태.
아무리 형이 긁어모아도 최소 10%의 차이가 났었다.
더군다나, 대현 그룹이 나를 지지한다고 발표한다면…….
중립에 위치한 사람들도 내 편이 될 확률이 높다는 거다.
“JH 그룹도 멍청하군. 가만히 있었으면, 명줄을 늘릴 수 있었을 텐데…….”
“어린 사람이 지금까지 승승장구만 해 와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 대한민국의 최고 자리는 아무나 앉는 게 아니라고. 최고의 가문에서 태어난 나 역시 몇십 년을 기다려 온 자린데……. 고작 동성의 핏줄이 그 자리를 넘봐? 이때까지 성공할 수 있었던 건, 나 같은 사람을 못 만나서일 거야.”
그래.
그런 거일 거다.
아니, 그래야 됐다.
그렇지 않으면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갈 테니까.
* * *
“회장님, 삼송 그룹에서 급하게 주주 총회 날짜를 잡았다고 합니다.”
“먹이를 물었네요.”
비서실장님에게 보고받은 박제환이 미소가 번지는 걸 막지 못했다.
드디어, 먹이를 물었나 보다.
사실 천천히 진행할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런데, 삼송 물산 사장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작 그 정도의 정보 제한도 못 하면서 우리 그룹을 먹으려고 해?
이건 완전히 JH 그룹을 동네 구멍가게로 생각하는 일이지 않은가.
그래서 유도했다.
일부러 삼송 그룹의 주식을 매수하고 있단 걸 삼송 물산 사장이 알 수 있게 만들었고, 결국은 내 계획대로 급하게 주주 총회의 날을 잡고 있다 한다.
‘표정이 궁금하네.’
과연 그때 삼송 물산 사장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궁금했다.
그 자리에 안건을 내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확신하고 있을 거다.
자신이 머지않아 삼송 그룹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확신하고 있을 때…….
과반수가 삼송 전자 부회장에게 손을 들어주면 어떻게 될까?
아마, 현실을 부정하고 싶을 거다.
실제로 부정할 확률이 높았고.
“이제 삼송 그룹을 정리하면 저희도 슬슬 움직여야 될 겁니다.”
“… 이전에 말했던 미, 중 무역전쟁을 말씀하시는 거 군요.”
“맞아요. 국내는 삼송 그룹에게 맡기고, 저희는 전 세계적으로 놀아야죠. 고작 한국이라는 작은 땅에서 최고가 되는 건 재미없잖아요.”
“다른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허풍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회장님이 말하니 곧 현실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그래야죠. 그렇게 만들 거고.”
그래야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아진다.
미, 중 무역전쟁을 끝나고, 잠시동안 일어난 한, 일 무역전쟁.
그게 끝나면 다가오는 코로나.
그 후로 있을 전쟁들.
하나하나가 나에게 선택을 요구하는 기회들이다.
‘선택지라도 늘려야지.’
그 기회를 맞이할 때,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를 늘릴 생각이다.
그러려면 삼송 그룹부터 처리해야 됐고.
‘나도 한국 사람이란 건가?’
이렇게 보니, 나도 한국 사람이긴 한가 보다.
내가 목표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선 미국으로 이민 가는 게 맞았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태어난 이 한국에서 최고의 그룹이 되고, 내가 자라난 이 한국이 강대한 나라로 성장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었다.
‘전생에서는 주변국의 압박 때문에 눈치를 너무 많이 봤다.’
역시, 사람은 주변 환경에 따라 생각도 달라지나 보다.
전생에서만 하더라도 동성 그룹을 지키기에 바빴지, 주변국을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당장, 한국을 압박해 오는 다른 나라들보다 대현 그룹이 더 바빴고.
하지만, 한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갖출 수 있을 것 같아서일까?
전생에 주변국으로부터 압박받던 우리나라를 조금이라도 돕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물론 선은 지켜야지.’
그렇다고 호구처럼 마냥 도와줄 생각은 없었다.
그 사이에서 내 실리도 챙길 거고, 명예도 같이 챙길 거다.
“다가오는 3년이 가장 중요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불황을 알리는 3년이면서 그사이에 날아오를 수 있는 시기거든요.”
“… 매번 회장님의 말씀을 들어보면 놀랍습니다. 어떻게 미래에 대한 일들에 그렇게 강한 확신을 가졌는지……. 사실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도 많았고, 그 사람들의 말처럼 흘러가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회장님처럼 확신하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못 봤습니다.”
“저는 미래를 경험했거든요.”
“예전이었다면 웃음으로 넘겼겠지만, 지금은 그게 진실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듭니다.”
“농담입니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말 하나하나를 조심했을 거다.
실제로 미래에서 왔다는 걸 들키는 순간, 어떻게 될지 몰랐으니까.
‘지금은 상관없다.’
물론 들킬 생각도……. 그렇다고 드러낼 생각도 없었지만, 굳이 겁먹으면서 숨길 이유는 없었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내 주변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생겼으니까.
“일단 주주 총회가 다가오기 전에 최대한 주식을 매수하도록 하죠.”
“궁금한 게 있는데, 굳이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어차피 회장 자리에 앉는 건 부 회장일 텐데…….”
“목줄은 채워나야죠. 그리고……. 그 자리에 참석해서 일그러진 얼굴을 구경하고 싶거든요.”
“회장님이 즐거울 수 있도록 많은 주식을 모아놔야겠군요.”
“그렇다고 손해는 보지 말고요.”
“물론입니다.”
이제는 일주일 정도 뒤에 있을 주주 총회의 날.
오랜만에 있는 즐거운 일이라 그런지, 그날이 너무나도 기다려졌다.
* * *
일주일 뒤.
“이야……. 역시 모 기업 본사는 뭐가 다르다니까. 우리 형님이 갖기엔 너무 과해.”
삼송 전자 본사 앞에 도착한 이정재 사장.
오늘부터 내 것이 될 건물이어서 그런지, 새롭게 느껴졌다.
“김 비서. 자네도 잘 살펴봐. 이제 여기서 일하려면 눈에 익혀야 될 거 아니야.”
“영광입니다, 사장님.”
삼송 전자의 건물을 보며 비서와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멀리서 다가오는 익숙한 차가 보였다.
예전이었다면 과분한 자리에 앉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릴 상황.
오늘은 마음에 들지 않던 그 얼굴이 너무나도 반갑게 느껴졌다.
“이게 누구신가. 우리 부 회장님 아니야.”
“많이 신나 보이는구나.”
“그렇고말고. 오늘이야말로 눈에 가시 갔던 사람 위에 서는 날 이거든.”
“그게 누군진 모르겠지만, 퍽이나 불쌍하겠구나. 너 같은 얘를 모셔야 되고.”
“그치? 형님이 생각해도 불쌍해 보이지? 그런데 어쩌나……. 그게 형님이 될 텐데.”
차에서 내린 형을 보고, 곧바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그러자, 기분이라도 상한 건 지, 이상한 말을 내뱉는다.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나 보다.
언제까지 장남이란 타이틀이 자신을 보호해줄지 알고 있나 보다.
‘역겹단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역겨웠다.
이런 인간이 먼저 태어났단 이유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단 게.
만약, 이번에 대현 그룹과의 얘기가 없었다면 회장 자리를 뺏겼을 거라고 생각하니 다시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내가 원래는 자회사 몇 개 정도는 주려고 했거든? 미안하네……. 그게 안 될 것 같다.”
“김칫국을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닌가?”
“그래 보여? 설마 JH 그룹을 믿고 있는 거 아니지? 왜 이렇게 사람들이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거야? 그 인간도 오늘 이후로 내려갈 일만 남았어.”
“그래서 네가 안 된다는 거다.”
“내가? 내가!? 형님이 지금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알아? 장남이란 타이틀 없었으면 진작에 내쳐질 사람이래. 그런 평가를 받는 사람이 그딴 말을 지껄여?”
“좀 이따가 있을 주주 총회 때 알겠지.”
어이가 없다.
도대체 뭘 믿고 저렇게 태평하냔 말이다.
동시에 불안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어째서 불안해하지 않는 걸까…….
왜 회장 자리에 앉을 내가 더 불안하냔 말이다.
“그럼 좀 이따 다시 보는 걸로 하지.”
“하하…….”
툭―
하하…….
내 어깨를 털어주고 올라가는 형님을 보니 웃음밖에 안 나온다.
무슨 자신감인 걸까…….
저 사람은 항상 그랬다.
내가 저 인간을 꺾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하더라도 언제나 장남이란 이유로 나를 앞서갔다.
꽈득-
“언제까지 그렇게 잘난 척 할 수 있나 보자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감에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더 이상 저 얼굴에서 웃음을 못 짓게 하리라고.
혈육이고 뭐고, 저 아래로 처박아 버리겠다고 말이다.
“… 사장님, 곧 있으면 총회가 시작될 시간입니다. 좀 더, 감정을 다스리는 게 어떨지…….”
“후우…….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이때까지 얼마나 긴 시간을 버텨왔는데, 찰나의 감정으로 뜻을 거스를 순 없지.”
“맞습니다, 사장님.”
“김 비서……. 오늘 참석하는 명단 다 확인해 봤겠지?”
“그렇습니다, 사장님. 대부분이 사장님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만 하더라도 과반수의 의결권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근데 왜 저 인간이 태평한 걸까?”
“… 아무래도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게 아닌지 싶습니다.”
그럴 거다…….
아니, 그래야만 됐다.
만약, 지금 상황을 알고서도 저런 표정을 짓는 거라면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 거니까.
김 비서의 대답으로 일말의 불안함마저 털어버린 나는 곧바로 형님을 따라 주주 총회가 열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