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 *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일상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흘렀다.
새해가 지나, 겨울이 끝나고, 곧 있으면 다가오는 봄.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1년이란 시간 동안 한국에서 가장 많이 거론된 사람을 고르라 하면 모두가 한 사람을 가리킬
거다.
‘국민가수가 된 서아.’
서아는 그야말로 슈퍼신인을 넘어 슈퍼스타가 됐다고 해도 무방했다.
처음 서아를 보고, 부정하던 사람들도 계속해서 들려오는 노래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각종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연말에 있던 시상식에서도 각종 상을 휩쓸었고, 나라는 사람의 여자친구가 아닌, 가수로서 자
신을 알릴 수 있었다.
‘세 번째 작품도 마무리 지었다.’
서아가 데뷔했을 때, 마무리까지 3권 정도가 남은 「절대음감」.
당연하게도 한 해가 지나기 전에 마무리 지을 수 있었고, 주인공과 주변 인물의 이야기 또한 외전으로 4권 정도를 더 쓰고, 확실하게 끝맺음 지을 수 있었다.
스스로는 외전을 너무 긴 게 끈 거 아닐까 하고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다.
그렇다고 곧바로 끝내기엔 그간 등장인물들과 큰 정이 들었고, 주변 이야기도 풀어내야 했기에 걱정을 뒤로 하고 외전을 집필한 거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을 나만 느낀 게 아니었나 보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이 더욱 아쉬웠나 보다.
외전으로 4권을 더 집필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집필해 주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신들과 1년이란 시간을 넘도록 함께한 「절대음감」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나 보다.
‘다음 작품 들어가기 전에 일도 해야지.’
그런 아쉬움을 뒤로한 채, 이제는 일을 하기로 결정했다.
어떠한 사건도 없이 지나버린 1년.
그 시간이 아쉽게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평범한 일상에 흥미로운 만남이 다가왔다.
“그러니까……. 삼송 그룹의 차남이 저와 만나고 싶다는 의견을 전했다 이겁니까?”
“그렇습니다. 웬만해선 좋게 거절했지만, 이정후 부회장과 인연이 있는 게 불안했나 봅니다.”
“재밌네요. 근데 왜 1년 전에 오지 않고, 지금 와서 그러는 걸 까요?”
“… 감히 예상하건대, 슬슬 회장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저희 말고도 여러 사람을 만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흠……. 이정후 부회장에게는 따로 연락이 없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마……. 자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일단 약속을 잡는 걸로 할까요? 저희 그룹도 안정화 작업을 마무리 짓고, 다시 바쁘게 움직여야 하거든요.”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았다.
앞으로 다섯 달 뒤에 수면위로 오르는 무역 전쟁.
그때 가서 대비할 게 아니라, 지금부터 바쁘게 움직여 최대한 많은 이득을 챙겨야 됐다.
JH 그룹이 한국에서야 1순위라고 여겨지지만, 세상 밖으로 나가면 아직까지 성장하는 그룹이었다.
이왕 시작한 거.
전 세계 최고 그룹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그리고 다가오는 전쟁…….’
그때를 생각하면 최소 전 세계적으로 발언권을 가지고 있어야 됐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 전쟁이 마무리되고, 시작되는 한국과 중국의 경제전쟁.
대공황의 시작을 알리는 전쟁을 말하는 거다.
역대 최고로 힘든 시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모두가 2030년에 있는 한, 중 경제전쟁을 뽑을 거다.
계속해서 커가는 한국을 견제하는 중국.
결국은 지켜볼 수만은 없었는지, 말도 안 되는 명분을 들먹이며 경제적 제재를 가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 한국은 우방국인 미국만을 믿고 있었다.
실제로, 이때까지 미국의 도움을 많이 받아왔고.
하지만 그 누가 알았겠는가.
미국과 중국이 뒤에서 입을 맞췄다는 것을.
당연히 기댈 곳이 사라진 한국은 순식간에 경제가 박살이 났고.
그걸 복구하기 위해 한동안은 성장을 포기해야 됐다.
그때 우리 그룹도 고생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린다.
그때를 기점으로 대현 그룹이 파고든 걸 생각하면, 병에 걸리지 않는 게 이상했을 것 같다.
‘원래는 대현 그룹을 짓밟는 게 목표였지만…….’
굳이 막을 수 있는 부분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좀 더 성장해서 한 나라와 견줄 수 있는 그런 그룹이 돼야겠다.
“다음 주 수요일로 약속을 잡았습니다, 회장님.”
“좋네요. 어쨌거나 삼송 그룹은 저희한테 필요한 그룹입니다. 한국을 책임져줄 그룹이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제 생각에는 회장님이 손을 들어 준 사람이 삼송 그룹을 차지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봐야죠. 과연 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쭙잖은 협박이나 별 의미 없는 제안을 들먹이면 그 사람은 치워야죠.”
“다음 주의 약속이 중요하겠군요.”
맞다.
만약, 다음 주에 만나는 차남이 이정후 부회장보다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곧바로 차남을 밀어줄 예정이다.
나에게 돌아오는 이득을 외면할 정도로 이정후 부회장과 인연이 있던 것도 아니고, 나중에 한, 중 경제전쟁을 생각하면 되도록 유능한 사람이 삼송 그룹을 차지해야 됐다.
‘일단 코로나가 닥치면 중국을 한 번 밟아놓는다.’
삼송도 삼송이지만, 일단은 중국의 성장을 한 번 막아놔야겠다.
그래야, 나중에 전쟁하더라도, 좀 더 여유롭게 막아낼 수 있을 거다.
아니…….
어쩌면 막아내는 거 이상으로 반격을 가할지도 모르겠다.
‘천천히…….’
앞으로 10년 하고도 2년 뒤에 있을 경제전쟁.
벌써부터 급할 이유가 전혀 없는 만큼, 천천히 준비하기로 결정했다.
* * *
그 시각.
삼송 물산에 있는 이정재 사장.
자신의 비서한테서 약속이 잡혔다는 보고를 듣고 있다.
“사장님, 방금 JH 그룹과 약속이 잡혔다고 보고받았습니다.”
“그래? 날짜는?”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그때가 운명이 결정되는 날이군.”
비서에게서 보고를 듣던 이정재 사장은 생각에 잠겼다.
이제 회장까지 남은 단 한 걸음.
바로, JH 그룹 회장과의 관계다.
대부분의 대주주를 만나면서 들었던 얘기 중에 가장 큰 공통점.
JH 그룹 회장과 손을 잡은 사람의 편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이란 말인가.
우리 그룹을 남의 손에 맡겨야 된다는 게.
‘그렇다고 거스를 수도 없다.’
억울하지만, 할 수밖에 없는 일.
이제 한국 그룹 중 JH 그룹 눈 밖에 나고서도 살아갈 그룹이 없었다.
대부분의 그룹이 JH 그룹과 엮이기만 하면 바로 상한가를 맞을 정도로 성공이 보장된 수표와도 같았다.
지금쯤이면 거품이 꺼질 법도 하건만, 어째 날이 갈수록 JH 그룹의 위상은 높아져만 갔다.
“형님이 대현 그룹을 처리해주기로 하고 손을 잡았다 했지…….”
“맞습니다. 솔직히 부 회장님 머릿속에서 나온 계획이라고 하기엔 너무 완벽했습니다. 저희 그룹의 실리도 챙기고, JH 그룹의 귀찮음까지 없애 줄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그걸 뒤엎을 카드가 뭐가 있을까.”
“솔직히 저희가 JH 그룹에게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는 저희 그룹이 손해를 보더라도, 회장 자리에 앉는 걸 생각하시는 건 어떠신지…….”
비서가 하는 얘기가 뭔진 알겠다.
나중의 그룹을 생각하기보단 당장 앞에 있는 승계 싸움에 집중하자는 거다.
‘리스크가 너무 큰데…….’
비서가 건넨 방법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만약, 이와 같은 정보를 대주주들이 알게 된다면 곧바로 승계 구도는 물 건너간다고 봐야 됐다.
“그건 너무 위험해. 비밀이 확실히 유지된다는 보장도 없어.”
“… 그렇다면, 혹시 반대편에 서시는 건 어떻습니까?”
“반대편…?”
“솔직히 JH 그룹이 단기간에 큰 성장을 거두긴 했지만, 언제까지나 성공할 거란 보장도 없습니다. 지금 상태라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도박하는 겁니다. JH 그룹의 반대편에 서서 잡아먹고, 그걸 토대로 대주주들에게 어필하는 거죠.”
“… 말이야 쉽지, 그게 됐다면 대현 그룹이 지금처럼 됐겠어?”
JH 그룹을 삼킬 수만 있다면 확실한 돌파구이긴 했다.
그 정도 업적이면 두말할 것도 없이, 회장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거고.
근데, 그걸 어떻게 하냐는 말이다.
“대현 그룹과 손을 잡는 겁니다. 그래서 중국 쪽과 손을 잡고, JH 자동차부터 막아내는 거죠.”
“중국…?”
“지금 중국이 성장하는 속도가 심상치 않습니다. 조만간 세계의 패권을 두고 경쟁할 만큼, 성장하고 있죠. 그런 중국에 힘입어, 대현 그룹과 손을 잡는다면 JH 자동차 정도야 어떻게 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 그건 좀 더 생각해 봐야겠어. 아직 얘기도 안 나눠봤는데, 벌써부터 지레 겁먹을 이유는 없지.”
“그런 방법도 있다는 것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참고하지.”
사실 비서의 마지막 제안에 마음이 동한다.
JH 그룹이 성장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밀릴 정도로 삼송 그룹이 부족한 건 아니었다.
단지, JH 그룹의 가능성을 생각해서 더욱 높게 가치를 매길 뿐 이었다.
그런 JH 그룹에게 굳이 고개를 숙여야 될까?
비서의 말대로, 대현 그룹과 손을 잡고, 거기에 요즘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과 손을 잡으면 JH 그룹 정도는 잡아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이 방법이 위험하단 것도 알고, 실패하면 뒤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뭐를 하든 똑같다.’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이해가 안 가는 게, 도대체 그 머저리를 어째서 도와주냐는 거다.
이럴 때마다 구시대적인 문화가 남아있는 게 짜증 났다.
고작 몇 년 일찍 세상의 빛을 봤다고, 능력도 없는 게 회장 자리에 앉으려고 하다니.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 그거 하나로 모든 단점이 보완된다는 거다.
“김 비서, 혹시 모르니까, 방금 말했던 거 임원들 모아서 계획 짜 봐.”
“… 보안에 신경 써서 회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야지. 너도 목을 걸어야 될 거야. 지금 승계 구도에서 내가 내쳐지는 순간, 우리한테 남는 건 없다. 이 삼송 물산 자리도 간당간당 할 거야.”
“…….”
“형 성격 알지. 위협이 될 만한 건 애초에 남기지도 않아. 형이 회장 자리에 앉는 순간, 삼송 그룹의 회사들은 대부분이 전문 경영인으로 바뀔 거야. 그 자리에 네가 남아있을 수 있을 것 같아?”
“목숨을 걸겠습니다.”
“그래야 될 거야. 형이라면 사소한 뒷 주머니도 그냥 안 넘어간다.”
“… 네, 알겠습니다.”
그래도 다행이다.
머저리 같은 형의 성격이 도움이 돼서.
형이 장남이라는 위치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포섭했다면 지금처럼 쉽지 않았을 거다.
‘형이 회장 자리에 앉으면 대부분 임원이 물갈이된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임원들도 필사적으로 나설 게 분명했다.
임원들의 뒷주머니는 기본으로 100억 단위.
과연 형이 회장 자리에 앉으면 살아나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지.’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됐다.
1년이란 시간.
다른 임원들을 포섭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시간이었다.
이제 슬슬 앉아도 될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황제와도 같은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자리.
삼송 그룹의 회장 자리에 말이다.
‘그래……. 굳이 도움받을 이유가 없잖아.’
황제의 자리는 하나면 족했다.
안 그래도 대한민국은 좁은 영토를 가진 나라.
굳이 권력을 양분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 주에 이야기를 나눠 볼 생각이지만, 만약 자신이 내민 손을 거절하고 갑에 위치에 앉으려고 하는 순간.
그때는 형님과 같이 역사 속으로 묻어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