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다들 궁금한가 보네.’
할아버지와의 대화를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중에는 의아한 눈빛도 여럿 보였다.
아마, 서아가 어떤 사람인 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지고 있을 게 분명했다.
‘보통 재벌가들은 건너 건너 아는 사이니까…….’
그들은 서아가 어떤 집안인지 추측하고 있을 거다.
재벌들은 웬만해선 여인을 만날 때, 사랑으로 상대방을 고르지 않았다.
연인이 됐을 때, 자신들의 재산에 얼마나 이득이 되는가.
대부분이 사랑보다 재산에 대한 욕심이 더 컸다.
그렇기에 저들의 기준대로 추측하고 있을 거다.
‘굳이 설명할 이유는 없겠지.’
저들의 궁금증을 풀어주기 위해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반가운 얼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한쪽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가족이 보였다.
이미 서아와 인사를 나눈 사이였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서아를 데리고 가족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미리 와 계셨네요.”
“당연히 미리 와 있어야지. 그래도 아버지 칠순이잖냐.”
“다른 친척분들은요?”
“곧 있으면 다들 올 거다. 요즘 들어 동성 그룹이 하도 바쁘다 보니까, 서로 얼굴 보기가 쉽지 않네.”
“그러게요.”
“우리 며느리가 좀 긴장한 것 같네. 긴장할 것 없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제환이한테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 뿐이니까.”
서아가 가족들한테 인사를 건넬 때.
아버지는 서아의 목소리를 듣고, 긴장하고 있단 걸 눈치챘나 보다.
사실, 서아에게 있어 이런 자리는 어색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힘이 되는 말을 건넸나 보다.
‘틀린 말도 아니고.’
더군다나 아버지가 건넨 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서아에게 뭐라 할 사람도 없었고, 직접 다가와 험담할 사람도 없었다.
물론 뒤에서 어떤 식으로든 평가하고, 험담할 순 있지만, 그 점은 어떻게 막을 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겪어야 될 일이니까.
“어머, 우리 며느리가 왜 긴장을 해요. 서아야 엄마랑 같이 인사 나누고 올래? 친척분들도 만나고, 다른 사람들한테도 인사해야지.”
“어머님…….”
“말이야 연인 사이지, 서로 마음이 있으면 나중에 결혼할 거 아니야. 엄마는 아들 둘이라 그런지, 그동안 딸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 시간 지나서 엄마랑 놀러 다니다 보면 어차피 안면을 익혀야 될 사람들이야. 제환이도 있는 자리에서 하는 게, 훨씬 편할 거야.”
“… 좋아요, 어머니.”
어머니가 서아를 아껴 하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솔직히 처음에는 걱정도 많았다.
아무리, 어머니가 잘해 줄 거라는 막연한 상상을 하고 있었어도, 현실은 다를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생각 이상으로 어머니가 서아를 이뻐해 주셨다.
자신 빼고는 남자밖에 없는 집안이어서 그런지, 새로운 가족 구성원에 서아가 추가된 걸 반기셨고, 원체 여자에 관심 없던 내가 처음으로 말씀드리는 거여서 그런지, 더욱 좋아하셨다.
그렇게 칠순 잔치는 진행되고, 슬슬 생일이 마무리돼 가고 있었다.
‘자, 그럼 이야기를 나눠 볼까?’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소식.
삼송 그룹의 부회장이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했었다.
나 역시 무슨 이유인지, 궁금한 마음이 컸기에 곧장 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내 생각대로라면 그렇게 부족한 사람은 아니다.’
삼송 그룹의 부회장이나 되는 사람이 칠순 잔치에 참석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두 가지의 경우가 있었다.
실제로 나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
그게 아니라면 나와 대화를 나눔으로써 이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거다.
어떤 경우든 부회장이 챙길 수 있는 이득은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행동으로 옮기기 쉽지 않지.’
지금은 JH 그룹이 국내에서 급부상하는 시기.
여론에서는 연신 삼송 그룹과 비교하고 있는 상태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고개를 숙이고, 이곳에 온 것만으로 큰 용기가 필요했다.
“반갑습니다. 저희 할아버지 생신에 참석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반가워요. 대한민국을 지금까지 키우는데, 일생을 보내신 동성 그룹 회장님의 생신이라면 당연히 참석해야죠.”
“아까 할아버지 얘기를 들어보니, 저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이거 동성 그룹 회장님에게 큰 배려를 받았군요. 혹시 한 쪽에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요?”
“그러도록 하죠.”
혹시라도 사람들이 대화를 들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삼송 그룹 부회장이 예의를 차리며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자리를 안내했다.
“하시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사실 기업가라면 누구라도 회장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겠습니까? 저 역시 그 사람들 중 한 명이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자리의 무게라는 게 있죠. 같은 행동을 하더라도 누가 하냐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상송 그룹의 부회장님이라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 같군요.”
“… 어째서 회장님을 만난 다른 사람들이 운이 아닌 실력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겠군요. 나이에 맞지 않게 대화를 풀어나가는 방식도……. 속을 꿰뚫어 보는 눈빛도 다르군요.”
부회장님이 놀라는 것처럼 나 역시 놀라고 있었다.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부회장님을 향한 세간의 평가가 잘 못 된 게 아닌가 싶어질 정도다.
‘위치선정이나 표정 모든 게 완벽하다…….’
대화를 나누는 위치.
내가 사람들을 등지게 하는 위치로 유도했다.
그와 동시에 무슨 내용이 있든 웃는 표정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이걸 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당연히 즐거운 대화를 나누고 있을 거라 생각할 거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들어 주변에서 JH 그룹 얘기를 많이 듣고 있습니다. 저희 삼송 그룹을 넘어서 전 세계를 노리는 그룹이라고 하더군요.”
“…….”
“저도 경영인인지라 처음에는 승부욕도 불타올랐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인정해야죠. 지금의 JH 그룹보다 앞서 나간다고 한다면 그건 자신이 아니라 자만이겠죠.”
놀랐다.
이렇게 쉽게 인정할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나야 미래에 대한 확신이 있었고, JH 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한 회사들이 앞으로 얼마나 성장할지 잘 알고 있으니, 확실하게 삼송 그룹을 앞섰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에 이 남자는 아니지 않는가.
“한 달 전에 있던 컨셉카 발표. 아주 잘 봤습니다. 그걸 보고 처음으로 감탄했습니다. 저 자신조차 가지고 싶은 자동차들을 단기간에 만들어내다니……. 당연히 인정해야겠죠.”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자동차를 잘 만들어도 결국에는 한계가 있거든요. 저희 삼송 그룹은 그 한계 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 뒤에 있던 JH 인베스트먼트의 실적 발표, 그리고 중국에서 많은 혜택을 갖고 온 JH 자동차. 이 둘을 생각하니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겠더군요. JH 그룹이 국내 제일가는 그룹이란 걸.”
이제는 슬슬 궁금해진다.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기 위해 이런 칭찬을 해 오는 걸까?
단순한 칭찬일 수 있지만, 대화의 흐름을 보니 뒤에 얘기가 더 있어 보였다.
“그래서 한 가지 제안 드립니다. 저희 삼송 그룹과 MOU를 맺어주실 수 있습니까?”
“흠…….”
MOU를 맺어줄 수 있냐는 부회장님.
놀라운 마음보다는 내가 왜라는 감정이 먼저 들었다.
삼송 입장에서야 커가는 JH 그룹을 생각하면 무조건 MOU를 맺는 게 이득이었다.
그걸 인정했다는 건 높게 평가하지만, 굳이 그걸 받아줘야 되는 이유를 못 찾겠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제가 그 제안을 받아서 얻는 이득이 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한 참 회장 자리를 두고 승계 싸움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집안 단속도 안 되고 있는데, 그걸 부회장님께서 정하실 수 있는 건지 궁금하군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부회장의 손이 얼굴로 향하더니, 최대한 웃음이 나오는 걸 참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이내 굳은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재밌네요. 동시에 뿌듯하군요.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간다고 평가받는 JH 그룹 회장님조차 모를 정도로 정보를 은폐했다니.”
“그게 무슨…….”
“제가 능력이 부족해서 회장 자리를 안 가져온 걸로 보이십니까?”
“…….”
“지금 상황이 저에게 이득이기에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저를 무능력한 경영인이라고 평가하게 두는 동시에 자기들끼리 싸워 최대한 힘 빠지도록 말이죠.”
“… 가족들 중 그 누구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그럼요. 돌아가신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말이죠. 고수는 삼 할의 실력을 숨긴다고 하던가요? 그렇다면 팔 할을 숨기고도 승계 싸움에 참여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확실히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숨기는 게 가장 나은 방법이다.
동시에 가장 어려운 방법이다.
자칫 잘 못 하다가 주변 사람들에게 무능력하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위험한 상황.
실제로 앞에 남성 역시 그와 같이 평가받고 있지 않은가.
“그게 과하면 독이 되더군요. 다른 사람들이 괜히 자신의 능력을 드러내는 게 아닙니다.”
“물론이죠. 대신 드러낼 사람에게만 철저하게 들어내야죠. 능력을 보고도 발설을 못 하게 말입니다.”
“…….”
“이미, 대주주들은 저에게 약점이 있거나, 저에게 미래를 맡긴 사람들 뿐입니다. 그들만 해서 경영권은 충분히 가져올 수 있죠. 회장 자리를 못 가져와서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끼리 싸우다 지쳤을 때……. 하나도 남김없이 가져오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갑자기 없었던 흥미가 생기기 시작한다.
내가 착각하고 있었나 보다.
전생엔 무능력한 남자가 유능한 비서실장을 만나, 회장 자리에 앉은 줄만 알고 있었다.
‘단지 드러내지 않은 것뿐이다.’
이제 보니 비서실장도 자신을 숨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나 보다.
치밀하다.
그것에 걸맞은 인내심 역시 갖고 있었다.
‘궁금하네.’
이제 알겠다.
충분히 MOU를 체결할 능력이 있다는 걸.
그와 동시에 궁금했다.
내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 건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인정하죠. 제가 부회장님의 진면목을 알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궁금증이 듭니다. MOU를 맺고 저희 그룹이 어떤 이득을 가져갈 수 있을지.”
“간단합니다. MOU를 맺고, 저희가 사업적 파트너가 된다고 해도 주가를 올릴 수 있는 데에는 한계가 있겠죠. 차라리 다른 글로벌 기업과 손잡는 게 나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주가가 올라간다고 회장님께서 좋아할 것 같지도 않고요.”
“맞습니다.”
“그렇다면 그들과의 차별점을 제시함과 동시에 그 제안이 회장님의 마음에 들어야겠죠.”
말을 이어가다 한 템포 쉬더니, 웃는 표정으로 이어 말하는 부회장.
“귀찮은 일을 저희가 다 하겠습니다. 국내에 남아있는 대현 그룹의 잔재들. 저희가 맡아서 처리해 드리죠.”
“…….”
“아무리 JH 그룹이 대현 그룹을 짓밟을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따른 반대급부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눠서 대현 그룹을 인수한다더군요. 과연 그 방법이 JH 그룹에게 이득일까요?”
“아니겠죠.”
“이득보다 귀찮음과 불필요한 인력들이죠. 그걸 저희 삼송에서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
확실히 알겠다.
이 사람 삼송의 주인이 될 거라고.
누구한테도 말하지 않은, 그렇다고 무시할 수만은 없는 문제.
그걸 정확히 찔러서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제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