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 * *
“이야……. 우리 박 회장이 웬일로 이런 잔치를 열어?”
“그래도 70살이 됐는데, 한 번쯤은 열어야 되지 않겠어?”
호텔 연회장을 돌아다니는 박 회장.
여기저기서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이 회장도 도착했나 보군.’
그 사이.
입구에서 들어오고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제환이 친구의 할아비이기도 하면서 오랜 지기이기도 한 GL 그룹의 이 회장.
오늘은 기분이 좋은 만큼, 먼저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야겠다.
“이게 누구야. 예전에 내 손자가 글을 쓴다고 하니까, 옆에서 놀리더니, 내 손자의 도움을 받고 그룹의 주가가 올라간 이 회장 아니야?”
“… 자네 오늘 많이 기쁜가 보구만.”
“하하,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그냥 우리 이 회장 얼굴을 보니까 기뻐지고만.”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어, 그래. 우리 제환이 덕분에 요즘 승승장구하고 있다던 승호 왔느냐? 요즘 얼굴이 많이 폈어?”
“덕분에 좋은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즐겁다.
우리 손주 덕분에 덕을 본 사람들의 얼굴을 보니 이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다들 즐기다 가라고. 내가 아주 비싼 음식들로만 준비했으니까.”
이 회장과 더욱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오늘 오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대한민국의 경제를 살리고 있는 사람들이지 않은가.
그 누구도 소홀히 대할 순 없었다.
“… 박 회장님이 그동안 많이 변하신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아주 저놈 자식, 손자 때문에 입이 귀에 걸렸어. 네가 이해하거라, 승호야.”
뒤에서 나를 놀리는 말이 들려왔지만, 애써 못 들은 체하고는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러 갔다,
‘진짜로 올 줄 몰랐군.’
그렇게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중.
이제 막 연회장에 도착한 한 사람이 보였다.
JH 그룹이 급 부상하기 전 한국에서 압도적으로 1위를 달리고 있던 그룹인 삼송.
그 삼성그룹에서 회장 자리에 앉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장남 말이다.
‘물론 어렵겠지만…….’
물론 쉽지 않을 거다.
세간이 평가하길 장남이 갖고 있는 무기는 말 그대로 먼저 세상의 빛을 본 것밖에 없었다.
사업가에게 필요한 두뇌,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 쳐낼 땐 확실히 쳐낼 수 있는 독함까지.
그 무엇도 자신과 경쟁하고 있는 이들보다 앞서 나간 게 없었다.
‘그래도 삼송 가다…….’
그런 걸 감안해도 삼송 가다.
대한민국에서 1위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으며 해외에서도 유명한 그룹이란 말이다.
아무리 회장 자리에 앉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다른 재벌들보다 앞선 사람이란 건 틀림없었다.
그런 사람이 오늘의 잔치에 참석해주니 고마웠다.
“이거 바쁘신데 자리를 빛 내 줘서 고맙습니다. 동성 그룹 회장 박대호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삼송 그룹의 부회장 이정후라고 합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당연히 삼송 그룹의 후계자이신데, 초대장을 보내드려야죠.”
“후계자라고 하기엔 삼송 그룹이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말씀만으로 고맙군요.”
그래도 삼송 그룹이란 타이틀이 어디 가는 건 아닌가 보다.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눠보니 웬만한 재벌가의 사람들보다 괜찮아 보였다.
만약 삼송 가에서 태어나지 않고, 다른 재벌가의 자식이었다면 충분히 회장 자리에 앉았을 재목일 텐데…….
역시 그러기엔 다른 사람들이 더욱 재능있어 보였다.
‘물론 우리 제환이가 최고지만…….’
그런 삼송의 혈육들보다 우리 제환이가 더욱 재능있었다.
이런데, 어떻게 안 기쁠 수 있냔 말이다.
“오늘 박제환 회장님도 이곳에 온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면 나중에 대화를 나눠도 될런지…….”
“그거야 우리 제환이가 결정할 거 아니겠습니까? 역시 우리 제환이를 찾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워낙 뛰어나신 분 아닙니까. 3년이란 시간에 말도 안 되는 성과를 이뤘으니…….”
“하하, 그렇긴 합니다. 말이야 3년이지, 사실 그 누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글로벌 그룹을 만들 수 있단 말입니까. 이 업적은 역사가 기록돼야 할 것이며, 대한민국이 기억해야 될 유일무이한 업적이죠.”
“그렇게 말씀하시니, 빨리 대화를 나눠보고 싶군요.”
“저도 이놈이 빨리 왔으면 좋겠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사업하랴 글 쓰랴 1분 1초도 아까운 놈이니, 오늘 자리에 참석해준 것만으로 고마워 해야 될 판입니다.”
역시 우리 손자다.
삼송 가에서 회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는 앞의 남자도 손자와의 만남을 기다린다.
‘내 꿈이 소박했던 거군…….’
그런 제환이를 두고 고작 10위권을 꿈꿔 왔다니,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참 바보 같은 경영자였다.
심지어 제환이를 제어하려고 했으니, 그놈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했겠는가.
진짜 마지막이라도 제환이의 의견을 존중해준 게 참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생신 축하드립니다. 이제 동성 그룹도 어엿한 10대 그룹 아닙니까. 더욱 의미 있는 생일이겠군요.”
“이게 다 손주 덕이지요. 제가 뭐 잘한 게 있다고, 이런 호사를 누리겠습니까.”
“박제환 회장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한 참, 삼송 가의 남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입구 쪽에서 그토록 기다리던 얼굴이 보였다.
‘이놈 자식이 빨리 좀 오라니까.’
저 얼굴을 보고 싶어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다행이다.
지금이라도 도착해서.
‘저 옆에 있는 아이가 제환이의 연인인가?’
궁금했다.
도대체 어떤 여인이길래, 우리 제환이가 그런 말을 한 건지.
‘이 여자 아니면 앞으로 결혼을 안 한다고?’
참 나…….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얼마나 어이없던가.
누가 반대라도 했냔 말이다.
그냥 얼굴 좀 보자고 한 것 가지고, 완전히 나쁜 할아비로 만들어버린다,
어떤 여인인지 모르겠지만, 빨리 이야기를 나눠봐야겠다.
그동안 많이 궁금했었다.
우리 제환이의 마음을 홀라당 뺏어간 처자가 누군지.
“손자놈이 도착했군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다시 한번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다른 곳으로 향하는 삼성가의 남자.
아마 시간을 두고 제환이와 대화를 나누려나 보다.
그도 그럴게, 지금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을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 * *
“서아 씨, 절대 기죽지 말아요.”
“그럼요…….”
“서아 씨는 제 연인입니다. 분명 안에 들어가면 여러 사람이 다가올 거고, 높은 확률로 그들은 서아 씨를 살펴볼 겁니다. 그들에게 이런 정보 하나하나가 중요하니까요.”
“… 재벌들은 무섭네요.”
“다들 그런 삶을 살아왔으니까요. 그래도 JH 그룹의 위상이 있어서 함부로 판단하진 않을 겁니다. 그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생각도 없고요.”
“저도 용기 내 볼게요.”
연회장에 들어가기 전.
서아를 바라보던 박제환이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많이도 왔네…….’
서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의 시선이 내가 있는 곳으로 모였다.
이내, 연회장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다들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넨다.
“반갑습니다, 회장님. 저는 엔터 사업을 하고 있는…….”
“오랜만입니다, 회장님. 그때는…….”
“이번에 정부와 안 좋은 일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희 그룹도 그에…….”
먼저 다가온 이들은 이전에 인연이 있던 사람들.
모두들 알게 모르게 도움이 됐던 사람인 만큼, 최대한 좋은 인상으로 대화를 나눴다.
“이놈 자식이, 왔으면 할아비부터 만나야 될 거 아니야?”
“생신 축하드려요, 할아버지.”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 거라. 그래서 옆에 있는 처자분이 우리 제환이의 마음을 훔쳐 간 여인인가?”
“반갑습니다, 제환 씨와 교제하고 있는 김서아라고 합니다.”
“호……. 반갑네. 제환이한테 자네 소개 좀 시켜달라니까, 자네 아니면 평생 혼자서 살겠다고 협박을 하더구만.”
“…….”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서아가 나와 마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준다.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 오면서 저 말을 그대로 전했더니 왜 그런 말을 하냐며 핀잔을 들은 상태다.
오면서도 서아를 달래느라 고생했는데, 할아버지가 또 한 번 저 얘기를 하니, 머리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물론 대화를 나눠보지도 않았고, 자네를 처음 본 거지만, 제환이의 마음이 이해가 가네. 참, 고와. 인상이 밝고.”
“… 감사합니다.”
“그동안 사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을 봐왔네. 이제는 그 사람의 얼굴만 보더라도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대충은 알 수 있게 됐네.”
“…….”
“잘은 모르겠지만, 자네 얼굴에는 고집이 보여. 근데 그 고집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것 같고, 뭐……. 그냥 제환이 할아비의 헛소리라고 생각하게.”
다행히 할아버지에게 서아의 첫인상이 좋아 보였나 보다.
역시, 우리 할아버지.
사람 보는 눈이 정확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오기 전에 긴장한 저에게 제환 씨가 말하더라고요. 할아버님께서는 분명히 반겨주실 거라고. 솔직히 겁이 많이 났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끌끌, 회장님이 아니라 할아버님이란 소리는 처음 듣는군.”
“… 실례인가요?”
“그게 아니야. 참 듣기 좋은 말이야. 내가 죽기 전에 손자며느리를 만날 수 있어서 참 기쁘구만. 그래……. 자네에게는 한 기업의 회장이 아닌, 남자친구의 할아버지로 보여진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
할아버님이란 말이 듣기 좋았을까?
연신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던 할아버지가 서아와의 대화를 마치고, 나를 쳐다보며 한 마디 건네신다.
“남자라면 서두를 줄도 알아야지. 이런 처자를 다른 놈이 눈독 들이기 전에 하루빨리 식을 올리 거라.”
“…….”
“왜 그렇게 당황하느냐. 그럼 이 처자 아니면 평생 혼자 산다는 해 놓고, 결혼을 안 하려고 했단 말이냐?”
“그건 아니지만…….”
“그럼 결혼을 서둘러야지. 남녀가 마음이 있고,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빨리 결혼하는 것도 괜찮아.”
“노력해 볼게요.”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당황해하던 내가 노력한다는 말을 건네자 서아도 당황한 게 느껴졌다.
‘2년 이내에 결혼해야지.’
할아버지 말대로 서로의 마음이 있고, 경제적 여유도 있는데 굳이 미룰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2년이란 시간을 두는 이유.
그 시간만큼은 결혼한 서아에게 온전한 시간 투자를 못 할 것 같아서다.
‘한참을 바쁠 시기니…….’
그때만 지나면 서아와 결혼을 하고, 신혼생활을 제대로 즐기고 싶었다.
“그리고 좀 이따 삼송 그룹 부회장이나 만나고 가거라. 아까 보니까 제환이 너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눈치야.”
“부회장이라면…….”
“이정후 부회장을 말하는 거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대화를 나눠서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슬슬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마무리되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삼송 그룹의 부회장과 이야기를 나눠보라고 말을 건넨다.
‘재밌겠네.’
삼송 그룹의 부회장이라면 지금 비서실장님과 전생에 연이 있던 사람.
어떻게 보면 비서실장님과 이어진 게 그 사람 덕분도 있었다.
처음 비서실장님과 만나고, 비서실장님이 전생에 삼송 그룹 킹메이커란 걸 몰랐다면 그냥 지나가는 인연으로 여길 수 있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궁금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고 나를 찾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