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글 쓰는 재벌-120화 (120/175)

120화

* * *

‘어떻게 하지…….’

박제환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서아.

말을 듣자마자, 시간이 멈추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솔직히 예상은 하고 있었다.

제환 씨가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아무런 감정 없이 그런 도움을 주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방금 제환 씨가 좋아한단 말.

그동안 듣고 싶었다는 생각을 가짐과 동시에 듣고 싶지 않은 얘기였다.

순수한 욕심으론 고백을 듣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을 생각해서 고백을 듣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신분제도가 사라졌다지만…….’

그래도 재벌과 일반인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더군다나 제환 씨는 재벌 1세.

나는 일반인 중에서 못 사는 위치.

그렇기에 고백을 듣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 부딪혀 더 이상은 꿈을 꾸지 못할까 봐.

‘동시에 듣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듣고 싶었다.

사랑한단 말을.

오늘 제환 씨와 보낸 하루.

너무 행복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행복한 일상을 보내도 되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겁이 났다.

제환 씨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여서.

‘그 말은 고백일 확률이 높았지…….’

아니나 다를까, 들려오는 말은 사랑한단 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동시에 억울했다.

제환 씨도 나를 좋아하고 나 역시 좋아하는 데 순수하게 연애할 수 없는 이 상황이 말이다.

‘한 번만 욕심내자…….’

이기적이란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고민을 해 왔고.

하지만 지금만큼은 욕심내보고 싶었다.

도저히 나 스스로는 선택을 못 할 것 같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진짜 마지막으로 욕심을 내야겠다.

“저도 제환 씨를 사랑해도 될까요?”

“…….”

내가 못 한 선택을 이기적이겠지만, 제환 씨에게 넘겼다.

욕심이 가득 담긴 말을 듣고, 제환 씨의 눈이 커졌다.

무섭다.

이기적이라고 욕할까 봐.

동시에 기대가 된다.

혹시나 이런 나라도 감싸주지 않을까 하고.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저는 선택할 자신이 없어요. 제가 제환 씨의 마음을 거절한다면 한 평생 후회하면서 살 것 같아요. 그렇다고 제 욕심대로 제환 씨를 사랑했다간……. 그것도 후회할 날이 올 것 같아요.”

“저를 좋아하면 후회한다는 의미가 무엇이죠?”

“제환 씨의 배경과 다르게 저는 아무것도 없어요. 미래를 책임져줄 집안도, 그렇다고 번듯한 직업도 말이죠. 심지어 미래에는 제가 집안에 도움을 줘야 될지도 모르고요.”

“… 그런 이유는 저에게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아요.”

“…….”

모르겠다.

하지만 제환 씨라면 저렇게 말해 줄 것만 같았다.

“서아 씨는 제가 배경을 볼 것 같습니까? 제가 서아 씨의 직업을 보고 좋아한 것 같아요? 절대 아닙니다. 서아 씨에게 마음을 뺏긴 건, 서아 씨의 배경 직업 외모도 아닌, 서아 씨의 목소리였어요.”

“하지만…….”

“집안이요? 안 되면 제가 만들어 드릴게요. 서아 씨 집안을 재벌로 만드는 거 저한테 아무것도 아니에요. 직업이요? 제가 나서지 않아도 세상이 서아 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최고의 가수가 될 거예요.”

“제환 씨…….”

“그러니까……. 서아 씨는 외적인 걸 생각하지 말고, 순수한 그 마음을 알려주세요. 저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서아 씨와 미래를 함께하고 싶어요.”

복잡한 생각이 든다.

제환 씨가 이렇게 말한다 해도 그 뒤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을 걸 잘 알고 있다.

재벌들이 외부인을 얼마나 배척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제환 씨도 나만을 봐줬다.’

제환 씨도 외적인 걸 다 제쳐두고, 나라는 사람을 봐줬다.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제환 씨만을 보고 답 해줘야겠다.

“저도 제환 씨 사랑해요.”

“…….”

“솔직히 처음에는 별로 안 좋아했어요. 마냥 겉모습만 보고 좋아하기엔 이전의 데인 게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뒤로 몇 번을 만났을 때. 단 한 번도 제가 생각하는 재벌들처럼 행동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그때부터 조금씩 마음이 갔나 봐요.”

“그럼 저희 연인 사이인 겁니까?”

“… 그렇겠죠?”

진중한 분위기로 대화를 이어가던 제환 씨가 나 역시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는 평소의 제환 씨로 돌아왔다.

진지하지만, 어딘가 엉성해 보이는 그런 제환 씨로 말이다.

“후……. 사실 엄청나게 걱정했습니다. 저 혼자 설레발치는 게 아닌가 하고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솔직히 만날 때마다 나한테 관심 있는가 설레발치기도 하면서 그럴 일 없다고 부정도 많이 했거든요,”

“지금이라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그러게요. 용기 내줘서 고마워요, 제환 씨.”

그래…….

제환 씨도 용기 냈으니까, 나도 용기를 내자.

용기를 내기로 마음먹은 나는 손을 움직여 제환 씨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고, 얼굴을 가까이했다.

쪽―

* * *

“…”

불시에 뽀뽀를 받은 박제환.

진정될 것만 같던 가슴이 다시금 힘차게 펌프질하기 시작했다.

“제 선물이에요. 제환 씨도 용기 냈으니까, 저도 용기 낸 거예요.”

“…….”

잘했다…….

진짜로 용기 내길 잘했다.

‘이런 게 연애라는 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손만 잡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마냥 좋았다.

그 어떠한 행동이 없어도 말이다.

어떻게 단순히 관계 하나가 달라졌다고 이렇게 기분이 좋을 수 있을까.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서로의 어깨에 기대던 나는 슬슬 할아버지 생신에 대해 말하기로 결정했다.

“그……. 서아 씨……. 혹시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부탁이요?”

“네……. 이게 불가항력이라 어쩔 수 없는 부탁인데…….”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 봐요. 도대체 무슨 부탁이길래, 그렇게 뜸을 들여요.”

“혹시 한 달 뒤에 저희 할아버지 칠순 잔치가 있거든요? 그때 저랑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

최대한 용기를 내서 부탁을 건넸다.

그러자 순식간에 굳어버리는 서아 씨의 표정.

역시, 무리한 부탁인가 싶었다.

“그……. 동성 그룹 회장님 말하는 거 맞죠?”

“그렇죠…?”

“… 그분이 제가 간다고 좋아하실까요? 오히려 민폐일 것 같은데…….”

“할아버지가 데려오라고 하시던데요……?”

“…….”

어쩔 수 없다.

여기서 꼬리를 내려 서아 씨를 배려하다가는 거절당할 수도 있으니까.

만약 서아에게 거절의 답변을 들으면 할아버지가 접근해서 무슨 말을 할 줄 몰랐다.

욕심인 걸 알지만, 모른 체 해야겠다.

“저는 괜찮을 것 같은데, 제환 씨 부모님께서 서운해하지 않으시겠어요?”

“… 그럴 수 있겠네요.”

서아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그랬다.

부모님에게 소개시켜 주지도 않았는데, 여자친구라고 할아버지 생신에 데려가면 얼마나 서운하겠냔 말이다.

그렇다고 한 달이란 시간 내에 부모님까지 소개시켜주기엔 서아가 부담을 가질 것 같았다.

‘그러면 되겠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중.

해결책을 못 찾고, 조금이라도 서아의 부담을 덜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렇게 해요. 다음 주에 저도 서아 씨의 가족을 찾아 뵙는 걸로 하고, 그다음 주에는 저희 부모님을 만나는 걸로 하죠……. 괜찮을까요?”

“… 괜찮을 거예요. 저희 가족들 많이 놀라겠네요.”

“싫어하시지만 않아도 다행이죠.”

“싫어할 리가요. 이 얘기는 이걸로 마무리 짓죠. 우리 방금 막 연인 됐는데, 지금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아요.”

“그래요.”

나도 지금의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았기에 알겠다는 대답을 건네고, 서아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서아의 가족은 처음인데…….’

분위기를 해치기 싫었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서아의 가족들을 어떻게 만나야 되냐는 걱정들로 가득했다.

* * *

일주일 뒤.

“여보, 오늘 그 날 아니에요?”

잠에서 깨어나 아침을 먹고 있던 서아네 가족.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지 서아의 엄마가 질문을 던졌다.

“오늘이 그 남자친구 데려온다는 날인가?”

“어디 보자……. 맞네요. 저번 주에 전화했으니까.”

“근디, 도대체 누구길래 우리가 알 수도 있다는 말을 한 거여. 혹시 연예인 아니여?”

“그럴 수도 있겠네요. 서아도 곧 있으면 데뷔한다고 하니까. 우리 서아가 워낙 이뻐야지요.”

밥을 먹던 서아네 가족은 아직까지 정체를 모르는 서아의 남자친구에 대해 추론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다행이다. 우리 누나 평생 솔로로 살 줄 알았는데.”

“성훈이 너는 우리 서아가 얼마나 이쁜데, 그런 생각을 하니.”

“에이, 누나가 이쁜 거야 인정은 하지만 워낙 남자에 관심이 없었잖아. 우리 누나의 마음을 훔친 남자는 과연 누굴까?”

“하기야……. 그때 거 누구냐. 고등학교 다닐 때도 전교 회장이란 놈이 대시도 하고 그랬는데.”

성훈이의 말을 듣고 과거를 회상하던 서아 엄마.

그러고 보니 궁금했다.

어떤 남자길래 서아의 마음을 빼앗은 건지.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서아를 소개해 달라는 사람도 많았다.

물론 서아가 좋아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선에서 끊어냈지만.

하지만 저번 주에 걸려 왔던 전화.

남자에 대한 칭찬으로 가득했다.

‘누구지…….’

우리 가족이 알만 하다는 말을 듣고, 계속해서 떠올렸지만 짐작되는 사람이 없었다.

도저히 궁금증을 참지 못한 자신이 알려달라고 말을 하자, 어차피 믿지도 못 할 거라며 오늘 확인하라는 대답을 건넸다.

“엄마는 어떤 사람이면 좋겠어?”

“엄마야 사지 멀쩡한 사람이면 상관없어. 우리 서아가 굶지 않도록만 해 주고, 서아를 사랑하는 것만 눈에 보이면 돼.”

“아빠는?”

“크흠……. 자신의 가정만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면 아빠도 찬성이지. 아빠가 서아한테 많이 못 해준 걸 조금이나마 보답받았으면 좋겠네.”

“나는 뭔가 기생오라비 데리고 올 것 같은데? 내가 알기론 이때까지 의사랑 돈 많은 남자들이 누나한테 엄청 들이댔거든? 그런 사람들을 다 거절한 거 보면 누나는 얼굴 보는 게 확실해.”

“에이, 얼굴이 먹여 살려준대?”

띵동-

“왔나 보다. 내가 나가 볼게.”

“문 좀 열어 주고 와.”

성훈이도 서아의 남자친구란 사람이 많이 궁금했나 보다.

집에 벨 소리가 들리자마자, 그 어느 때 보다 빠른 속도로 뛰쳐나갔다.

“스읍……. 여보 왜 성훈이가 안 오죠?”

“이놈 자식이……. 손님이 왔으면 우선 인사부터 시키는 게 순서이건만……. 기다려 봐. 내가 갔다 올게.”

성훈이가 한참이 지나도 밖에서 들어오지 않자, 성훈이 아빠가 데리러 간다는 말과 함께 현관으로 나갔다.

그런데 왜일까…….

그렇게 콘 소리를 치고 나간 성훈이 아빠도 어째서 안 오냔 말이다.

‘하여간 이놈의 집구석 남자들은 제대로 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니까…….’

5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남자들.

도저히 앉아서 기다릴 수 없을 것 같다.

“…….”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간 하루종일 안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서아 엄마.

어이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현관으로 향하자 서아와 남자친구로 보이는 남성이 보였다.

‘참 잘생겼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니 어째서 성훈이가 그런 말을 한 줄 알겠다.

저 정도면 자신 역시 젊었더라면 마음을 뺏길 게 분명했다.

“스읍…….”

동시에 저 얼굴이 낯익어 보였다.

우리가 추측했던 대로 연예인이 아닌가 싶어서 곰곰이 생각해 봤다.

자신이 언제 저 얼굴을 봤을까…….

그렇게 한참을 기억을 뒤집던 성아 엄마.

“어머나!! 이게 뭔 일이야!!”

기억 끝에서 찾은 남자의 정체.

심장이 멎는 듯한 감정이 들었다.

저 남자는 우리에게만 낯익은 사람이 아니라, 한국……. 아니 전 세계에서 낯익은 사람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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