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할아버지와 대화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는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나와 서아의 관계.
요즘 유행하는 말로 그린 라이트에 가까웠다.
한 마디로 연인 사이가 아니란 얘기.
아직 정식으로 고백도 못 했는데, 졸지에 아버지도 아닌 할아버지 생신에 초대하게 생겼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 없는 게, 만약 초대하지 않는다면 할아버지가 나서서 서아를 만날 수도 있었다.
그런 건 싫었다.
차라리 남자답게 거절당하는 한이 있어도 직접 말하고 말지 남의 입을 빌리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하냐…….’
어떻게 해야 할아버지 칠순 잔치에 자연스럽게 초대할 수 있을까…….
도저히 혼자만의 생각으로 답을 찾지 못할 것 같은 나는 조력자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했다.
- 웬일로 전화를 다 하시냐. 지금 한 참 바쁘실 분이.
“바쁠 게 뭐 있냐. 이제 공장도 제대로 돌아가고 있고, 정부한테서도 최대한 협력하겠다는 말을 들었는데, 내가 할 게 있을 리 없잖아.”
- 얘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얌마, 너는 작가야. 사업가 아니라고. 안 그래도 기사 보니까 비축분 거의 떨어졌다며. 너 만약 흐름 끊기게 만들면 가만 안 둔다.
“…….”
조언을 듣기 위해 승호한테 건 전화.
최근에 있던 일을 두고 바쁘다고 말 한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 주변 사람들이 사업적인 걱정은 하지 않고, 모두가 작품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심각한 상황에 처했어.”
- … 뭔데…. 설마 월가에서 공격이라도 해? 그것도 아니면 중국에서?
“… 아니, 그게 아니라……. 한 달 뒤에 할아버지 생신인 거 알잖아. 그 자리에 서아를 초대하라 하네?”
- 너 지금 뭐 하냐? 사람 놀리냐? 누가 보면 JH 그룹이 망할 정도의 사건이 생긴 줄 알겠네. 그냥 말해. 서아 씨에게 관심 있으니까, 한 번 가족을 보면 안 되겠냐고.
“… 그게 맞는 거냐?”
헷갈린다.
승호의 말이 정답인 건지.
분명 아닌 것 같은데, 또 승호가 결혼 선배인 걸 생각하면 내가 틀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야, 남자는 자신감인 거 모르냐? 그리고 막말로 네가 아쉬울 게 뭐냐? 솔직히 서아 씨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하고, 매력이 있다고 하지만 너는 한국 제일가는 그룹 회장이야. 자신감을 가져.
“서아 씨 데뷔는 언제 하냐. 계속 말은 들려오는데…….”
- 아마, 한 달 이내로 할 것 같다. 기대해라. 그때쯤 되면 너희 할아버지한테 소개 안 시켜줘도 이름만으로 알 수 있을 거다.
“자신 있나 보네.”
- 맞아. 너 작품 보고 성공할 거란 자신 있었거든? 서아 씨도 똑같아. 무조건 성공한다.
“다행이네…….”
- 근데 이거 대박 아니냐? 너랑 서아 씨 결혼하면 2세는 도대체 뭘 시켜야 되냐? 노래시키기엔 작가로서 능력이 아쉽고, 그렇다고 작가 시키기엔 노래가 아쉽고.
승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서아와 나 사이에 자식이 생기면 어떤 걸 시켜야 될까.
어쩌다 대화가 이쪽으로 흐른 지 모르겠지만,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문제인 것 같다.
‘잠시만…….’
생각해보니까, 간단한 문제였다.
굳이 고민할 이유가 없단 말이다.
“간단하잖아. 첫째는 사업, 둘째는 작가, 셋째는 가수. 이렇게 하면 다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 오!! 간만에 머리 좀 썼네? 근데 고백이나 성공하고 말해라. 김칫국 마시지 말고. 그리고 서아 씨 데뷔하기 전에 열애설 안 나게 조심하고. 아니다 차라리 열애설 나는 것도 괜찮겠네. 어쨌든 형 말 듣고 당당하게 말해라.
“고맙다. 다음에 술 한잔하자.”
- 됐고, 작품이나 집필해서 보내라. 네가 보낸 거 다 읽은 지 오래니까.
“… 그래.”
승호 말대로 당당하게 나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선 가장 처음 해야 될 일.
서아 씨와 만나 대화를 나누는 거다.
‘작품도 중요하지만…….’
작품도 중요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선은 할아버지 말을 전해야 되는 게 먼저니까.
절대, 서아 씨의 얼굴이 너무 보고 싶고, 미칠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 * *
다음 날.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어젯밤 갑작스럽게 만날 수 있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서아 씨가 흔쾌히 알겠다는 대답을 건네줬다.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알 수 있었다.
좋은 출발점에 섰다고.
하루 전도 아닌, 몇 시간 전의 약속을 흔쾌히 허락해주다니…….
“회장님,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 괜찮아요. 이전에도 계획 한 거 하나도 못 한 거로 기억하는데…….”
“그때의 과오는 잊어주시길. 무슨 일이 있어도 두 분의 안녕을 위해, 그리고 대한민국에 후손을 남길 수 있도록 최고의 코스로 모시겠습니다.”
“… 잘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깔끔한 옷을 입고, 집 앞으로 향하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비서실장님이 보였다.
이전에 서아와의 만남에서 비서실장님의 계획이 하나도 안 통해서일까?
이전의 과오를 두 번은 반복하지 않겠다며 비장한 표정을 짓는다.
“오늘은 그때와 다르게 코스를 짰습니다. 일반인도 부담스럽지 않을 만한 코스로, 가볍게 미술관을 시작으로 저녁에는 한식, 그 후에는 가볍게 음주를 즐길 수 있도록 눈 맞춤 코스를 계획했죠.”
“…….”
“어젯밤, 소식을 듣고, JH 그룹의 머리를 담당하는 모든 이가 모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서 나온 결과 부담스럽지 않은 계획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서아 아가씨의 성격상, 자신에게 맞지 않는 사치라고 느낀다면 부담스러워할 가능성이 높았으며 오늘은 동성 그룹 회장님 칠순 잔치 초대 소식…….”
“출발해도 될 것 같습니다.”
“… 네, 회장님.”
차에 올라탄 비서실장님이 어제 얼마나 고생해서 계획을 짰는지에 대해 설명해 왔다.
비서실장님의 얘기를 듣고만 있다가는 하루가 지나갈 것 같은 나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막았고, 곧바로 서아가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제환 씨. 반가워요. 비서실장님.”
“반갑습니다, 아가씨.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에요, 서아 씨. 어제 너무 갑작스럽게 약속을 잡은 건 아닌지…….”
“괜찮아요. 그렇지 않아도, 좀 심심했는걸요? 제환 씨 소식을 들어보니까 바쁠 것 같길래, 일부러 연락 안 한 거예요.”
“… 배려 감사드립니다.”
꽈득―
그 어느 때보다 대통령 비서실장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한 마디로 이때까지 뜸한 서아 씨의 연락 원인이 그 자식한테 있다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아도, 줄어든 연락에 무슨 잘못 했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 그 개자식 때문이었나 보다.
“그나저나 JH 그룹 일이 잘 풀린 것 같더라고요. 어제 기사를 보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감사합니다. 아마 서아 씨가 옆에서 응원해 준 덕분 아니겠습니까.”
“에이, 제가 뭐라고요. 하는 거라곤 응원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인데.”
“그것만으로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나저나 곧 데뷔한다고 하던데, 가족들의 반응은 어떻던가요?”
“말도 마요. 데뷔 소식을 알리니까, 집 안이 눈물바다가 됐다니까요? 얼마나 기뻐하던지, 꼭 성공해서 가족들 편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할 거예요.”
“… 보기 좋네요.”
아마 그런 가족들이 있기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나 보다.
언젠가 봐야 될 장인어른.
전생에는 보지 못한 사람이기에 어떤 사람인지, 궁금증이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편하게 구경할 수 있으시라고 미술관을 하루 빌렸습니다. 편하게 데이트하시길.”
“… 감사합니다. 가시죠, 서아 씨.”
“… 네, 가요.”
도착했다고 말을 전하는 비서실장님.
미술관을 빌렸다는 말보다 데이트라는 단어에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비단, 나만 느낀 게 아닌가 보다.
평소와도 같이 대화를 나누던 서아도 데이트라는 말에 얼굴이 빨개지더니 말 수가 줄어든 걸 확인 할 수 있었다.
뭔가 달라진 분위기가 좋다고 느낀 나는 차에서 내리기 전, 비서실장님에게 엄지손가락을 올리고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우와…. 미술관 처음 와 봐요.”
“그런가요?”
“제환 씨는 이런 데 자주 와 봤겠죠?”
“뭐…….”
미술관 안에 들어선 서아가 날 보고 초롱초롱한 눈빛을 하며 자주 와 봤냐는 질문을 한다.
차마, 솔직하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몇 번 못 와봤다고.
전생에서나 현생에서나 미술관에 올 틈이 없었다.
전생에서도 그 누구한테 뒤처지지 않게, 죽도록 일만 해서 이런 데 올 시간도 없었고, 지금 생 역시 바쁜 일상을 보내왔기에 미술관은 나에게도 낯선 공간이었다.
그렇다고 저런 눈빛으로 질문해 오는 서아에게 실망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 저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네요. 이 그림들이 왜 몇백억 가치를 하는 걸 까요? 저도 그 정도의 가치를 볼 안목이 있으면 좋을 텐데.”
“제가 괜히 흥미 없는 곳으로 데려왔나 보군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절대 아니에요. 지금 얼마나 신기한데요. 그냥 신기해서 그렇지, 절대 흥미가 없는 건 아니에요.”
“다행이군요.”
솔직히 나 또한 미술적 가치를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다.
값을 매겨지는 방법도 특이하다고 생각한다.
경매를 통해 그림의 가치가 정해지는 것.
그게 과연 진실된 가치일까?
나 역시 아직까지 그 정도의 안목이 없나 보다.
“그럼 다음 장소로 갈까요?”
“그래요. 이 정도면 미술관 경험 다 했다. 제 생에 이렇게 편한 상태로 미술관을 경험할 줄 몰랐네요.”
“만족하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제가 나중에 세계적인 가수가 돼서 배로 돌려줄게요. 저도 받고만 사는 성격이 아니거든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잘 알고 있다.
받고만 사는 성격이 아니란 걸.
그래서 편한 길을 두고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자 고생길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렇기에 좋아하는 거다.
그렇게 미술관을 나온 우리는 한식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마지막 코스인 한강으로 향했다.
처음에는 요트를 생각하던 비서실장님이 아침에 말했든 서아가 부담을 느끼기라고 할까, 오리배를 준비해주셨다.
‘이게 더 낫군…….’
호화로운 요트에서 야경을 보고 술을 마시는 것보다 이렇게 오리배를 경험하는 게 더 좋아 보였다.
서아의 표정도 마찬가지였다.
전생에서는 오리배가 아닌, 요트에서의 경험이 있었다.
요트를 타고, 그곳에서 술을 마실 때.
지금처럼 편안한 표정이 아니었다.
마치, 자신이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한 표정을 지었었다.
“아, 좋다!! 제환 씨랑 이런 경험 하니까, 더 좋네요. 나는 이런 경험 할 줄 몰랐는데.”
“저 역시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오리배를 타고, 서아 씨와 치킨을 먹으면서 맥주를 즐길 줄 몰랐네요.”
“그래요? 제환 씨는 특이한 것 같아요. 이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회사의 주인인데도 불구하고, 저랑 만나면 뭔가 연애 경험 없는 스무 살 초반 남자 같다니까요?”
“… 서아 씨도 연애 경험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 에이……. 저는 간접경험 했어요. 드라마도 많이 보고. 하지만 제환 씨는 드라마 안 봤을 거 아니에요.”
너무 좋았다.
남의 눈치를 안 보고, 오리배 위에 올라타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웃고 있는 지금 상황이.
“그건 그렇고, 뭐 할 말 있는 거 아니에요? 만날 때부터 뭘 말하고 싶은 표정인데.”
“… 티 났습니까?”
“그럼요. 제환 씨가 표정을 얼마나 못 숨기는데.”
그렇지 않아도, 아침부터 고민했었다.
언제 할아버지 생신에 대해 말해야 되고, 어떻게 말 해야 될지.
그게 표정에서 다 드러났나 보다.
‘지금 말하자.’
어느 정도 술을 마셔서 취기가 오른 지금.
취기를 빌려 지금 말하면 될 것 같다.
“저, 서아 씨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