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 * *
“이렇게 급작스럽게 스케쥴을 옮겨도 괜찮겠어요?”
“요즘 동성 그룹에 이 할아비의 역할이 많지 않은 것 같더구나. 하도 손주 녀석들이 잘하고 있으니, 나 하나쯤은 좀 쉬엄쉬엄해도 돼.”
귀국하자마자 찾아간 할아버지 댁.
할아버지에게 3일 뒤 컨셉카의 발표가 있을 거란 말을 하니, 혹시 자동차를 미리 확인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던져왔다.
굳이 숨겨야 되는 정보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평가하는 지도 한번 확인하고 싶었기에 할아버지와 함께 JH 자동차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건 그렇고 중국에서 만난다던 사람은 어떻더냐.”
“아주 괜찮은 사람입니다. 사람 대 사람으로 바라봐도 말이죠.”
“… 처음이구나. 제환이 네가 사람 대 사람으로 누군가와 인연을 맺는 게. 확실히 좋은 사람인가 보구나.”
“… 그런가요? 확실한 건, 최소 뒤통수 칠 사람은 아닌 것 같았거든요.”
“그거면 된 게야. 제환이 네 스스로도 대단하지만, 주변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너의 가장 큰 강점은 주변 사람 같더구나.”
할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새삼스레 감사하게 느껴졌다.
방금 들려 온 말대로 나 스스로도 내 능력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주변 사람들의 덕을 많이 본 것 같다.
각 회사의 사장님들.
예전이야 모르겠지만, 지금은 충분히 독립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능력도 갖추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도 독립에 대한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불합리함을 느낄 때, 자신의 일인 것처럼 분노하고 같이 싸워주기까지 했다.
‘그 이상으로 보답하면 돼.’
그들이 나에게 믿음을 주는 만큼, 그 이상으로 보답하면 될 것 같다.
“회장님, 5분 뒤 JH 자동차에 도착합니다.”
“형찬 씨와 이민호 사장님은 뭐라고 하던가요.”
“김형찬 연구소장님은 회사에 안 계시고, 이민호 사장님은 회장님이 예상하신 것처럼 마중을 나온다고 했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건 잘 전달 됐겠죠?”
“물론입니다. 회장님의 의중을 전해 드려서 안내해 줄 사람 한 명만 대기시킨다고 했습니다.”
“좋네요.”
JH 자동차에 도착하기 전.
혹여나 내가 회사에 간다는 소식에 부담을 느낄까 봐, 평상시대로 행동해달라는 부탁을 건넸다.
형찬 씨나 이민호 사장님은 모르겠지만, 사원들이 내가 간다는 소식을 접하면 그 이상의 부담감을 느끼게 될 테다.
그런 허례허식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했기에, 최대한 조용히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쯧쯧. 모름지기 회장 자리에 앉았으면, 사원들의 시선도 받고 책임감도 느껴야 되거늘.”
“… 충분합니다.”
“뭐가 충분하단 게야. 내가 알기로는 단 한 번도 JH 그룹에서 회장님을 봤다는 소문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게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시선은 전생에도 뼈저리게 느꼈었다.
오히려 더 한 책임감도 느꼈고.
그렇게 세월이 지나 느낀 사실.
다 부질없다는 거다.
그런 시선보다 중요한 건 실적이었다.
“그나저나 이번 신차 발표는 자신 있는 게냐?”
“그럼요.”
실적 역시 자신 있었고 말이다.
* * *
“오셨습니까, 회장님. 제가 마중 나갔어야 되는 건데…….”
“제가 원해서 그런 건데, 괜찮습니다.”
JH 자동차 사옥에 도착하고, 뒷문에서 대기하던 직원분의 안내를 받고 따라가니, 기다리고 있던 이민호 사장님이 우리를 반겼다.
“크흠……. 자네 나는 안 보이는 건가?”
“아, 이거 인사가 늦었군요.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JH 자동차를 이끌고 있는 이민호 사장이라고 합니다.”
“나 동성 그룹 회장 박대호야.”
이민호 사장님이 나한테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게, 조금 그랬을까?
옆에 있던 할아버지가 헛기침하며 핀잔을 건넸다.
그걸 들은 이민호 사장님은 곧바로 정식 인사를 건넸고, 서로 악수하며 통성명을 했다.
“그럼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간단한 인사를 마무리하고는 이민호 사장님이 우리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여러 번의 통로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몇 번 갈아 타자 비밀스러운 공간이 보였다.
이번에 발표하기로 한, 세 가지 모델의 컨셉카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였다.
그렇게 몇 분을 더 걸으니 최종적인 공간이 보였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시면 컨셉카를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기대되는군요.”
“이전에 회장님이 보신 상황에서 크게 달라지진 않았을 겁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충분히 대박 날 것 같더군요.”
끼이익―
이민호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며 문을 열자, 나란히 세워져 있는 세 가지 종류의 차가 보였다.
“크……. 다시 봐도 죽이네요.”
세 가지 차 중 가장 눈에 띄는 자동차.
SUV 형식의 자동차였다.
지금 시기에는 아직 시장에 나오지 않은 형태의 SUV.
시장에 나와 있는 SUV보다는 작다고 느껴질 수 있지만, 스포티한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는 SUV였다.
또 다른 하나는 고급스러운 대형 세단.
실내의 정숙성과 내부의 힘을 실은 고급 세단이었다.
사업하는 사람이나, 회장들을 위한 자동차.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SUV와 마찬가지로 스포티한 느낌을 물씬 풍기고 있는 중형 세단이었다.
세 가지 자동차 모두 사람의 눈을 확 끌어들일 정도의 디자인을 갖고 있었다.
지금 시기보다 한 세대 앞서 나가는 디자인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전에 봤던 자동차지만, 다시 봐도 감탄이 절로 나왔다.
한쪽에 모여있는 자동차를 보고 감탄하다가 옆을 바라보니 입을 벌리고 있는 할아버지의 얼굴이 보였다.
하기야…….
저 모습을 보고 웃을 수만은 없는 게, 나 역시 처음 자동차를 봤을 때, 저것보다 과하게 입을 벌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었다.
“… 미쳤군.”
“좀 괜찮나요?”
“괜찮냐고? 내가 내부를 확인한 것도 아니고, 주행을 한 것도 아니지만 확신할 수 있다. 이거 독일 3사보다 큰 인기를 끌 것 같구나.”
“디자인만 보고 섣부른 판단 아닙니까?”
“내가 방금 말했잖느냐. 다른 거는 경험해 보지 않아 모르겠다고. 나는 단지 디자인 하나만으로 독일 3사와 비교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 만약……. 주행 성능이랑 내부 디자인까지 지금과 비슷하다면……. 역대 최고의 자동차 회사가 될 것 같구나.”
처음에는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던 할아버지가 이내 생각에 빠지더니, 자동차의 가치를 매겼다.
하나하나가 독일 3사의 대표 자동차보다 앞서 나갈 거라고 확신하는 할아버지.
나 역시 자신하고 있었다.
대현 자동차 따위가 아니라 독일 3사를 제칠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시장에 선보이기에 앞서 몇 가지 걱정되는 게 있구나.”
“걱정 말입니까?”
“그래. 가장 큰 걱정은 가격. 과연 저런 디자인을 갖고 있고, 그에 맞춘 성능을 도입하면 최소 1억 중반대로 시작해야 될 텐데, 그걸 대한민국 사람들이 쉽사리 구매할 수 있을 까 하는 걱정 말이다.”
가격이 걱정이라는 할아버지.
그 부분은 형찬 씨가 가장 자신있어하는 부분이었다.
이전에 티슬라와 협살할 때 썼던 카드.
각 엔진 모형의 동일화였다.
그것 말고도 세 가지 모델에서 공유하는 부분이 많다 보니, 공정을 하는 데 큰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고, 동일 성능의 모델보다 한참 적은 가격으로 출시할 수 있을 거라는 결과가 나왔다.
‘그리고 보조금.’
더군다나 지금 보여준 자동차 세 가지 모두가 전기 자동차였다.
당연히 정부에서 보조금을 얻어낼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되면 더욱 낮아지는 가격.
“출시가격은 1억 언저리로 잡고 있고, 보조금까지 생각하면 더욱 싼 가격에 구매할 수 있을 겁니다.”
“… 가격은 그렇다 치고,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컨셉카가 아니느냐. 이렇게 나온다면 괜찮겠지만, 만약 이걸 대중들에게 보여주고, 그에 맞지 않은 결과물을 내온다면 더 한 반발을 불러올 게야.”
“그 부분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애초에 디자인을 내놓았던 건 JH 자동차 연구소장인 형찬 씨였습니다. 아마 컨셉카와 양산형 차에서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
보통 컨셉카와 양산형 차에서 큰 차이가 나는 건, 디자인 쪽 부서와 연구 쪽 부서의 타협점을 찾기 힘들어서이다.
하지만 JH 자동차 같은 경우는 두 부서의 최종 결제자가 형찬 씨였다.
당연히 지금 보이는 컨셉카가 두 가지의 타협점으로 나온 결과물이다.
참 아쉽게 느껴진다.
지금 같은 자리에 형찬 씨가 나와서 할아버지의 표정을 봐야 되는데.
자신이 말해 오는 걱정들은 모두 아무 문제 없다는 답변을 내놓으니, 또 한 번 경악하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도대체 무슨 연구를 하고 있는 건지…….’
이곳에 형찬 씨가 없는 이유.
이렇게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또 개선할 무언가를 찾았다며 연구에 몰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희 JH 자동차 잘 될 것 같습니까?”
“… 지금 할아비를 놀리는 게냐?”
“설마요.”
“내 장담컨데 이게 세상에 드러내는 순간, 사람들은 다른 자동차를 구매하지 않을 게야. 모두가 이 자동차만을 기다리면서 돈을 모으고 있을 거라고 자신하지.”
“아주 후한 평가군요.”
“아니, 이것도 박한 평가야. 지금 내 심정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함에 아쉬움을 느끼고 있지.”
디자인만은 보고, 이런 평가를 내리는 할아버지.
과연 전기를 이용해 한 단계 앞서가는 주행 성능과 편리성을 알게 된다면 어떤 평가를 내릴 지 궁금했다.
“완전히 칼을 갈았군……. 대현 자동차는 이제 역사 속에서나 볼 수 있겠어.”
“저만 칼을 간 게 아니거든요. 형찬 씨는 대현 자동차와 큰 악연이 없지만,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칼을 갈았어요.”
“아주 잘 간 칼이 나왔구나. 이걸로 다른 자동차 회사를 벤다면, 버틸 자동차 회사가 없겠어.”
내가 만든 자동차가 아니지만, 할아버지의 평가를 듣고 있으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할아버지 말대로 우리 자동차가 세상에 드러내는 순간, 다른 자동차 회사는 손가락만 빨고 있을 거다.
더군다나 배터리를 공유하지 않는 대현 자동차면 더더욱 말이다.
‘노리는 시장도 겹치면…….’
대현 자동차의 수명이 그렇게 길지 않아 보였다.
당장 공장이 완성되지 않아, 제대로 된 자동차가 나오기까지 좀 걸리겠지만, 딱 그 기간까지가 대현 자동차에 숨이 붙어 있는 시기로 보였다.
1년 뒤에 있는 미, 중 무역전쟁과 시기가 얼추 맞을 것 같다.
‘미, 중 무역전쟁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그때 숨통을 끊으면 될 것 같다.
남들이 갑작스러운 무역전쟁으로 힘들어하고 있을 때, 우리 JH 그룹은 전 세계에서 들어오는 돈으로 헤엄을 치고 있을 거다.
그 돈을 이용해 대현 그룹의 마지막을 장식해 준다.
‘정 씨 일가의 표정이 궁금하군.’
삼일 뒤, 그때부터는 정 씨 일가가 편한 일상을 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뒤에서 쫓아 오는 JH 자동차에 겁을 먹고 하루하루 초조함으로 물든 일상을 보낼 게 분명했다.
그렇게 겁에 질린 채, 1년이 지나면.
그때 정도면 편하게 해줘야겠다.
우리 그룹의 모든 걸 이용해서라도 말이다.
“이 할아비가 손자 덕 좀 봐도 되겠느냐?”
“… 이미 많이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대현 그룹의 미래를 생각하고 있을 때.
할아버지가 무언가 요구할 게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어허. 할아비가 손자 덕을 볼 수도 있지.”
“한번 말씀해 보세요.”
“그……. 저기 있는 대형 세단 있지 않으냐. 할아비가 가장 첫 번째로 가져야겠구나.”
“… 그렇게 하시죠.”
아까부터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것처럼 보이던 할아버지.
대형 세단 자동차가 욕심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