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 * *
다음 날.
발이 달려 있지 않은 소문은 그 속도를 감히 짐작할 수가 없다고 했나?
그 말이 맞았다.
단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 야, 괜찮은 거 맞지? 우리 할아버지도 걱정하시던데?
“걱정하지 마라. 너도 알겠지만, 그렇게 생각 없이 움직이는 놈 아니다.”
- 나야 잘 알고 있지. 근데 정치인들을 못 믿어서 그러지. 너도 알다시피 권력 맛을 본 정치인들은 눈에 뵈는 게 없잖아. 우리가 정치인들이 무서워서 피하냐. 괜히 더럽혀질까 봐 피하지.
“그렇긴 하지.”
승호 말이 맞았다.
재벌가들이 정치인들을 피하는 이유.
무서워서가 아닌 더러워서이다.
평생의 권력을 누리는 재벌가와 단기간의 권력을 누리는 정치인.
어떻게 기간제의 기득권을 무서워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그사이에 예외가 있긴 했었다.
3선 국회의원 정도면 단기간이라고 말하기 힘든 권력을 가지게 된다.
나와 등을 돌려서 비서실장도 그런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고.
‘정상적으로만 흘러간다면 말이지…….’
정상적인 흐름으로 지나갔을 때 얘기다.
이번 정권이 좀 더 현명하게 움직이고, 연임을 하는 순간 비서실장의 권력도 재벌가 못지않은 영향력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다음 대선 때 정권이 또 한 번 바뀐다는 걸.
‘더군다나 이렇게 시비까지 걸어오면…….’
더더욱이 이번 정권을 지지할 이유가 없어졌다.
적당히 여당과 야당의 중간에서 분위기 좀 살피다가 한 발짝 물러나려고 했건만, 이렇게 시비를 걸어온다.
“네가 저번에 말했던 중국의 고위직 있지.”
- 국가 광파 전시총국 부국장 말이냐?
“어, 그 사람.”
- 왜, 다리라도 놔줄까? 안 그래도 네 작품에 푹 빠진 것 같더라. 이전부터 만남을 요구했긴 했는데, 너 작품에 집중한다고 거절했었거든.
“그 사람 중국 내에서 어느 정도 힘을 가지고 있냐?”
- 나도 잘은 모른다. 근데 듣기로는 꽌시가 장난이 아니라고 하던데? 서열 15위인가? 그 사람까지 연줄이 닿아 있데. 그래서 차기 국장으로 거론된 사람이고.
서열 15위라…….
생각보다 일이 순조롭게 흘러간다.
중국에서 꽌시를 맺었다는 거는 한배를 탔다는 거다.
즉, 그 사람과 꽌시를 맺으면 나 역시 서열 15위라는 사람까지 연결이 될 수 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무슨 파인 줄은 모르고?”
- 듣기로는 상하이파 쪽이라 하더라고.
“… 괜찮은데?”
- 아직까지는 베이징파가 중국을 이끌고 있다지만, 상하이파도 나쁘지 않지.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고.
심지어 파벌 역시 마음에 들었다.
중국 외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베이징파와 다르게 상하이파는 외국자본과 친화력이 높았다.
미국과도 관계를 맺고 있는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사람이란 말이다.
“자리 좀 만들어 주라. 나도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네.”
- 크……. 참, 그 사람도 불쌍하다. 생각이 왜 이렇게 없냐? 저번 정권을 끌어내린 게 제환이 너 인데 그걸 잊고 시비를 걸어오네. 이래서 정치인들은 권력 맛을 보는 순간 정신을 잃는다니까.
“부탁한다.”
- 그래, 나중에 연락할게.
일단 중국 쪽은 승호의 연락을 기다리면 될 것 같다.
이제 다음으로 해결할 차례.
JH 그룹의 각 지도자들과 좀 만나봐야 될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이번 정권에 피해를 끼칠 수 있을지.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까지 성과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할 겸 말이다.
다음 행동을 결정한 나는 곧바로 중요한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 * *
JH 그룹의 인원들에게 연락을 돌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동안 자신들도 계획을 세운 게 있어서일까?
오랜만에 다 함께 모인 그들의 표정.
지금 상황과 맞지 않게 모두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따, 이렇게 모인 것이 참말로 오랜만이네요.”
“워낙 각자 일로 바쁘니, 어쩔 수 없죠.”
“참말로 다들 반갑소이.”
확실히 오랜만에 보는 거긴 한가 보다.
예전과 만났을 때와 다르게 다들 재벌의 포스가 느껴졌다.
누구 하나 부족함 없이 말이다.
하기야…….
다들 조 단위의 자산을 가진 사람들인데, 웬만한 재벌들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였다.
“다들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아도 호남지역에서 소식이 들어오더군요. 공사 현장에서 시청 직원들이 왔다 갔다 한다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나 봅니다.”
“아따, 그 짝도 그라요? 지도 뭐 조사 좀 한다고 막 들쑤시던디, 지들이 원한 게 없어서인지 별문제 없더라고요. 안 그래도 깔짝 거리는 게 짜증 났는디…….”
“JH 배터리는 미국과 합작회사여서 그런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것 같습니다.”
다들 그동안 느꼈던 불편 사항을 말해 오고 있다.
그런데 왜일까.
분명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어야 정상인데 다들 웃고 있는 게 보인다.
“그라서 좀 짜증이 나서 경고를 혔습니다. 비서실장 친인척 조사 좀 해보니까, 회사를 이끌고 있는 사람 몇 보이데요? 확 그냥 공매도 해서 회사 망가뜨려 버린다고 하니까, 지들은 관련 없다고 꼬리를 말더라고요.”
“이야……. 재성이 너네 회사 유동현금이 조 단위 아닌가?”
“아따, 형님은 무슨 쌍팔년도 사람이데요? 지금 십 조 단위로 늘어난 게 언젠디 한참 전 이야기를 헌데요.”
“… 그 정도로 늘었다고?”
“형님이 몰라서 그러는디, 지금 가상화폐가 노다지여. 더군다나 제일 유망 있는 거래소까지 인수해서 영업이익도 장난 아니고요.”
아무래도 JH 인베스트먼트는 건들기 힘들다고 판단을 내렸나 보다.
무력을 사용할 수 없는 현대에 가장 무서운 무기가 무엇일까.
바로 자본이다.
그런 자본을 가장 쉽게 움직일 수 있고, 가장 많이 갖고 있는 JH 인베스트먼트이니 함부로 건드리긴 힘들 거다.
“저희 JH 자동차도 슬슬 발표하려고 합니다, 회장님.”
“컨셉카 말입니까?”
“맞습니다. 형찬 씨가 연구 쪽에만 재능이 있는 게 아니라 디자인 쪽으로도 말도 안 되는 재능을 가졌습니다.”
“시너지가 장난 아니겠는데요?”
“저도 깜짝깜짝 놀랍니다. 보통 자동차를 만들 때, 컨셉카와 양산형 자동차는 괴리감을 느낄 정도로 많은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형찬 씨가 디자인을 손대니 컨셉카로 만들어진 자동차를 충분히 양산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 미쳤군요.”
“미쳤습니다. 저도 볼 때마다 놀랍니다. 만약 공장이 완성되고 예약을 받기 시작한 순간, 저희 JH 자동차는 물량을 걱정할 틈이 없을 겁니다. 오히려 밀리는 예약에 공장을 24시간 돌려야겠죠.”
이건 뭐 대비할 것도 없는 것 같다.
내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데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의 결과물을 가져온다.
하기야 전생에만 해도 무일푼으로 시작해 정상의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자본까지 지어주니 더한 성공을 얻는 건 당연한 결과인가 보다.
“그……. 회장님? 혹시 배터리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아무래도 대현 자동차도 어느 정도 따라붙었고, 슬슬 다른 자동차 회사도 600km까지는 개발이 완료되고 있어서…….”
“이전에 말했던 1,000km를 달릴 수 있는 배터리 말입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개선안도 슬슬 감이 잡히고 있거든요. 처음에는 용량을 더 늘릴까 생각했지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서 충전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연구를 했습니다.”
“그 말은…….”
“거의 다 개발이 완료되고 있습니다.”
어이가 없다.
그 누구보다 이들의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들은 그 이상의 결과물을 가져온다.
내가 이들의 재능을 오해하고 있었나 보다.
“회장님,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지금 회장님의 작품도 이용하면 어떻겠습니까.”
“제 작품 말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성과에 감탄을 하고 있을 때, 옆에서 김수현 비서실장이 새로운 방법을 제시해 온다.
순간, 흥미가 동한 나는 비서실장님을 바라보며 그 뒤의 말을 요구했다.
“제 생각에는 지금 이용할 수 있는 걸 모두 이용하면 비서실장이라는 사람의 인지도는 밑바닥으로 떨어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말해 보세요.”
“지금 JH 자동차 컨셉카가 나온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저도 얼핏 확인한 바로는 사람들의 기대감을 모으기 충분한 자동차였습니다. 당장 저만 하더라도 구매하고 싶단 생각이 지배적이었고요. 더군다나 JH 배터리의 발전까지. 이걸 이용해서 기사를 내는 겁니다.”
감이 잡히기 시작한다.
하지만 얘기들 더 들어보기로 결정했다.
내가 생각하던 바를 비서실장님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대감을 모으는 겁니다. 동시에 JH 인베스트먼트에 수익률을 알리는 겁니다. 여기서 또 한 번 대중들의 시선이 몰리게 되겠죠.”
“시선이 몰렸을 때 터뜨리자는 거군요.”
“… 역시 회장님이십니다. 분명 관련 기사가 인터넷에 오르는 순간, 저희와 관련된 회사의 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를 거라고 예상합니다. 그 순간…….”
“터뜨리는 거죠.”
“… 그렇습니다. 악재를 한 번에 터뜨리는 순간, 대중들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던 기대감은 원망으로 변할 겁니다.”
“그 원망은 곧 원인을 제공한 대통령 비서실장과 대현 그룹에 쏟을 수 있고요.”
“맞습니다.”
역시 삼송의 킹 메이커 다운 생각이다.
고작 몇 번의 대화를 확인하고 지금과 같은 결론을 내리다니.
물론 중간중간 덧 붙여야 될 게 몇 가지 보였지만, 어쨌든 뼈대는 생각해냈다는 거에 감탄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더해서 작가님의 작품을 잠시 멈추는 겁니다.”
“동시에 악재가 쏟아지고, 그 악재의 원인이 대현 그룹과 비서실장에 의한 견제라고 알려지는 순간, 대중들의 원망을 감당해야겠군요,”
“그겁니다…….”
“하지만 작품을 멈추는 건 안 돼요.”
“… 그렇다면…….”
“대신 그와 비슷한 뉘앙스를 풍길 순 있겠네요. 지금은 괜찮지만 이와 같은 상황이 이어지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작품의 휴재 기간을 가져야겠다고.”
“… 더욱 좋은 방법 같습니다.”
여기에 이들이 모르고 있는 중국의 고위직까지.
이 모든 게 합쳐진다면 판전승 따위가 아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을 거다.
그 순간부터는 대현 그룹과 JH 그룹의 위치가 바뀌게 되는 거다.
대현 그룹은 저 밑으로…….
JH 그룹은 삼송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룹으로.
‘재밌겠네…….’
이날을 기다려 왔다.
한 번에 몰아붙여도 정당성이 우리 쪽에 있는 이 순간을 말이다.
저들은 모르고 있을 거다.
어째서 더욱 견제를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가만히 나뒀는 지.
다 지금 같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참아왔던 거다.
‘지금까지 반응 없는 우리 그룹에 승리의 샴페인을 들고 있겠지.’
그게 얼마나 갈까.
그들이 승리의 행복감을 느끼는 기간을 그렇게 길지 않을 거다.
앞으로 길어야 한 달.
그 안에 승부를 봐야겠다.
그렇게 밑바닥으로 추락한 대현 그룹.
마지막 결정타를 준비하면 될 것 같다.
중국에서 주는 좋은 먹잇감으로.
“다들 방금 대화를 들었을 겁니다. 이 모든 걸 한 번에 터뜨려야 더욱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습니다. 다들 준비하도록 하세요. 제가 신호탄을 쏜다면 곧바로 따라올 수 있게 말이죠.”
“네, 회장님.”
“아따, 고것들 정신 더럽게 못 차리네요. 건드릴 사람이 없어서 우리 형님을 건드리다니…….”
“참…….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들 같군요.”
이민호 사장님의 말이 맞았다.
학습 능력이 떨어진다는 얘기.
괜찮다.
학습을 못 하면 가능할 때까지 몽둥이로 때리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