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달그락― 달그락―
“어떻게……. 입맛에는 좀 맞습니까?”
조용히 식사만 하는 이 분위기가 싫었을까?
밥을 먹던 남자가 대화를 시도한다.
“뭐……. 괜찮군요.”
“하하, 다행입니다.”
이 자리가 달갑지 않은 나는 대화를 이어 줄 생각이 없었고, 식사만을 고집했다.
슬슬 앞에 남성도 눈치챘을 거다.
내가 자신과의 자리를 반기지 않는다는 걸.
아마 당황스러운 감정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대통령 비서실장이란 자리가 어떤 자리인가.
대통령에게 입김을 넣을 수 있는 정치적으로 엄청난 자리인 건 분명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대통령 임기가 막 시작되는 시점.
정치적으로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자리나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과의 식사 자리를 달갑지 않아 하는 걸 보니 속이 좀 뒤틀릴 게 분명했다.
“술 좀 하시렵니까?”
“한 잔 정도는 괜찮겠네요.”
대화가 없는 식사가 마무리되자 술 한잔하자는 제안을 건네온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자리에 나온 이상 본론은 듣고 들어가야 됐다.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이다.
이윽고 고급스러운 술이 들어왔고, 각자의 잔에 따른 우리는 마주 보며 한 잔을 비웠다.
“요즘 JH 그룹이 국위 선양한다는 소식과 회장님이 쓴 글도 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하니 대한민국의 일원으로서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아가다 보니 좋은 일이 생기는군요.”
“에이, 그게 어떻게 열심히만 산다고 되겠습니까. 회장님의 능력도 출중한 거 아니겠습니까. 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도 한몫하겠군요.”
“그런가요?”
시작됐나 보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간 보기가.
“이전에 도움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대통령님도 손쉽게 선거에서 이길 수 있었고요.”
“이전 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저희 정부에서 한 가지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도움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대현 그룹과 사이가 안 좋지 않겠습니까? 사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작은 곳이지 않습니까. 그런 한국에서 서로 얼굴을 붉히는 것보다 이쯤 하고 화해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만약 손을 잡는다고 하면 저희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와드리겠습니다.”
쯧…….
어떻게 된 게 한 치의 예상도 벗어나지 않을까.
이래서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일수록 멍청해지는 것 같다.
저 남자는 나를 만남에 있어 어떠한 조사도 없었을 거다.
어떻게 해서 대현 그룹과 싸움이 난 건지.
우리 동성 그룹이 어떤 취급을 받았었는지 말이다.
그저 정부에서 지원을 약속하고, 자신의 입김 하나라면 화해시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이 자리에 나왔을 거다.
“그건 좀 곤란하군요. 개인적인 원한이 있어서 말입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잘 생각해보십쇼. 사실 싸워서 남는 이득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JH 그룹과 대현 그룹이 손을 잡으면 글로벌 그룹이 탄생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 말 들으시죠.”
“죄송합니다.”
“… 개인적인 원한이 JH 그룹의 이득보다 앞서 나간단 말입니까?”
자신이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아서인지 표정이 굳어가는 게 보였다.
그렇다고 신경 쓸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나오기 전부터 좋은 결말을 생각하지도 않았고.
“남들은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습니다.”
“… 회장님, 세상을 더 살아 본 선배로서 말을 좀 해드리겠습니다. 남들이 같은 행동을 하는 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직 어려서 그런 건가 본데…….”
“그런가요? 그럼 그때 가서 후회하도록 하죠.”
“… 크게 후회하실 텐데요?”
“근데, 대통령님하고도 말씀 된 겁니까?”
“이런 자잘한 일에 대통령님은 나설 필요가 있습니까? 원래 대통령님은 큰일을 하시는 거고 그 밑에 자잘한 일은 저희가 맡고 있죠. 방금과 같은 일들도 말이죠.”
“아쉽네요. 하도 보자는 연락을 많이 받아서 같은 의견인가 싶었습니다.”
더 이상 속에 있는 말을 숨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사람.
이미 눈빛부터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분노가 극에 달했지만, 체면을 생각해 참고 있는 모습.
어떻게 보면 이 남자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단순한 원한을 가지고, 몇 조를 손해 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단순한 원한이라면 말이지.’
하지만 나와 대현 그룹의 관계는 단순한 원한이 아니었다.
그리고 조 단위의 돈도 나에게는 큰 부분을 차지하지 않았다.
앞에 남성은 그 부분을 간과한 거다.
“슬슬 일어나는 걸로 할까요? 둘 다 원하는 바가 다른 것 같은데.”
“진짜 후회 안 할 자신 있습니까?”
“혹시 이상한 짓을 하려고 하십니까? 가령……. 정치적으로 저희 그룹을 압박한다든지.”
“… 그거야 법이 정해주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거절에 대한 보복은 없겠군요.”
“그 법을 저희가 정한다는 것도 아셔야죠.”
“… 처음 알았네요. 그럼, 이만.”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은 내가 옷을 챙기고 식당에서 나섰다.
그런 내가 못마땅하기라도 했는지, 뒤에서는 악의가 담긴 말들이 들려왔다.
이렇게 마무리하고 나서 괜찮을 수 있겠느냐로 시작해서 후회하지 않을 건지.
애초에 후회할 것 같았으면 시작도 안 했다.
그리고 누가 후회한단 말인가.
저들이 후회해야지.
당분간 바빠질 것 같다는 생각에 짜증이 난 내가 굳은 표정으로 차에 타자 걱정 어린 비서실장님의 말이 들려왔다.
“… 혹시 이야기가 잘 안되신 겁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다들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세요. 어떤 식으로든 보복이 들어올 겁니다.”
“… 바빠지겠군요.”
“비서실장님도 몸 좀 풀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맞군요. 오랜만에 일하는 느낌을 받을 수 있겠네요. 작업실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아니요, 저희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거로 하죠. 어차피 비축분도 많겠다, 당분간은 이번 일에 집중하도록 해야겠어요. 그리고 이 부분도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지 모르니까요.”
“네, 회장님.”
이 일이 오랜 시간 지속된다면 나 혼자만 짜증을 겪을 생각이 없었다.
분명 다음 화가 나오지 않은 작품에 국민들은 의아함을 느낄 거고, 시선이 집중될 때, 이유를 설명한다면 분노가 향할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정부한테 말이지.’
뭐가 어찌 됐든 시작된 싸움.
적이 늘어난 건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누군가 걸어 올 싸움을 참아 줄 정도로 착한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아니, 오히려 좋다.
지금 상황을 이용해 JH 그룹은 명분과 함께 피해자라는 인식을 더 깊게 자리 잡도록 만든다.
‘이번에는 가볍게 넘어가지 않는다.’
상황이 좋은 건 좋은 거고, 짜증이 나는 건 별개였다.
그런 만큼 이번에는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다.
어느 정도 상처를 크게 입혀야겠다고 다짐했다.
* * *
“이런 X발, 어린놈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건방지게 굴어!!?”
불만족스러운 자리를 마치고, 차에 올라탄 대통령 비서실장 이현배.
도저히 화가 풀리지 않는다.
굳이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는 걸, 특별히 대현 그룹의 부탁을 받고 나선 건데 이딴 식의 취급을 받다니.
이게 다 사회 경험이 없는 게 문제였다.
어린놈의 X끼가 고생한 것도 없이 성공하니 선배를 배려할 줄도 모른다.
고생도 겪고, 마음고생 좀 해야 세상이 쉽지 않다는 걸 깨닫는 건데, 그런 경험이 없지 않은가.
지이잉―
안 그래도 짜증 나 죽겠는데, 대현 그룹 인사에게 전화가 왔다.
이번에 부탁을 받은 대현 그룹의 비서.
벌써부터 무슨 말을 해 올지 짜증이 났다.
어쩌면 이전에 받은 사과 박스 때문에 더 짜증이 나는지 모르겠다.
“전화 받았소.”
- 자리가 마무리됐다고 보고받았습니다. 혹시 어떻게 된 건지…….
“내 도저히 안 되겠소. 굳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자식이랑 꼭 손을 잡아야겠소? 그냥 JH 그룹을 없애고, 대현 그룹이 먹어버리는 건 어떻소.”
- 잘 풀리지 않았나 보군요…….
“어린놈의 자식이 너무 쉽게 성공을 맛보다 보니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거겠지.”
지금의 분노를 푸는 것과 사과 박스를 지키는 것.
한 가지밖에 없었다.
화해는 그른 것 같으니 대현 그룹이 마음에 들도록 JH 그룹을 박살 낸다.
사실 사과 박스 따위는 상관없었다.
그 정도야 남은 정권 동안 충분히 벌고도 남을 돈이니.
‘어린 놈이 그딴 식으로 대들어?’
요즘 JH 그룹 회장이 인기 있는 것 같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애써 만든 자리였건만, 그런 성의를 무시하고 그딴 태도를 보인 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원래 사회의 쓴맛은 어른이 알려주는 법.
당장 JH 그룹이 휘청거릴 수 있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교훈을 얻을 수 있을 테니 나쁜 것만은 아닐 거다.
- 남은 사과 박스도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같이 합을 마쳐야 되니 성의 표시로 받아주십쇼.
“… 뭐 준다고 하니 거절은 안 하겠소.”
의외다.
당장 사과 박스를 돌려주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남은 사과 박스까지 준다고 말해 온다.
‘대현 그룹도 어지간히 화났나 보군.’
하기야, 나만 해도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고 있다.
그렇다면 언론 플레이로 인해 수조 원의 손해를 본 대현 그룹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잘은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내가 느끼고 있는 분노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란 거다.
- 그렇다면 저희가 한배를 탄 거라고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최대한 도울 수 있는 건 돕도록 하지. JH 그룹을 대현 그룹이 가져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네.”
- 하하, 이거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될지…….
“… 일이 끝나고 나면 사과 박스는 좀 부족할 것 같은데…….”
-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절대 섭섭지 않도록 보상하겠습니다. 비서실장님도 정치 좀 하신 다음에 푸른 지붕에 주인이 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물심양면으로 도와드리도록 하죠.
“크흠……. 굳이 그런 걸 바란 건 아니지만, 앞으로 잘해 보도록 하지.”
JH 그룹 회장이 괘씸한 것도 문제였지만, 이걸 바라고 한 행동인지 모르겠다.
분명 대현 그룹이 JH 그룹을 삼키기만 한다면 수조가 아닌 수십조의 이득을 챙길 수 있다.
그렇다면 같이 합을 맞춘 나에게 아무것도 떨어지는 게 없을까?
결코 아닐 거다.
저들도 JH 그룹을 먹기 위해선 나에게 보상을 약속할 수밖에 없단 말이다.
“그럼 나중에 만나서 술 한잔하자고.”
- 나중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고 나니 화났던 감정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사실 일이 더 잘 풀린 것 같다.
마음에 들지 않은 자식을 화해시켜서 사과 박스 몇 개 얻는 것보다 다음 대선을 노릴 때,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상황이 훨씬 나았다.
‘JH 그룹이 공장을 증설하고 있다고 했나?’
내가 알기로는 호남지방에 공장을 증설하는 데 몇조 원을 쏟아붓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첫 공격은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다.
건설업 특성상 하루만 날짜가 밀리기만 해도 수억, 어쩌면 수십억의 손해를 보게 된다.
법이야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니, 공사를 중지시키는 데는 어렵지 않을 거다.
결정을 내린 나는 곧바로 전화기를 들어 공장을 짓고 있는 지역의 시청장 번호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때 가서 울고불고하는 걸 보는 것도 재밌겠군.’
공사를 중지시켰을 때, 그 잘난 회장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상상했다.
너무 즐거울 것 같았다.
‘얼마나 버티나 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