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 * *
컴퓨터 앞에 앉아 집필을 이어가는 박제환.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카페에서 서아와 대화를 나누던 중 걸려 온 비서실장님의 전화.
슬슬 그에 대한 반응이 들려올 때였다.
처음에는 별일 아니라고 무시하긴 했지만, 사람인지라 계속해서 신경을 거슬려왔다.
지이잉―
집필을 이어가던 중 걸려 온 전화.
번호를 확인하니 모르는 번호다.
개인번호를 아는 사람이 드문 만큼 나란 걸 확실히 인지하고 걸려 온 전화일 거다.
‘아마 비서실장님이 말 한 내용일 확률이 높겠지…….’
처음에는 무시할까 고민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집필에 집중할 수 없을 것 같다.
기득권이 어떻게 나올지도 모르고.
고민을 이어가던 나는 진동이 울리던 핸드폰을 들고 전화를 받았다.
“누구시죠.”
- 크흠……. 처음 뵙겠습니다. 대통령님 비서실장입니다. 이거 제가 결례를 범한 건 아닌지…….
“제 번호는 어떻게 아시게 된 겁니까.”
- 하하. 좁은 땅덩어리에서 다리를 건너다보면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아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게 많았는데 혹시 시간 괜찮겠습니까?
“무례하군요.”
- 너무 나쁘게 생각하시지는 마시고, 멀리 보면 서로 지인이지 않겠습니까. 박 회장님이랑도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요. 이번에 정권이 바뀔 때도 박 회장님과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어떤 식으로 접근하려나 궁금했는데, 처음은 지연을 이용하려나 보다.
방법이 잘 못 됐다.
지연을 이용할 거면 다이렉트로 전화할 게 아니라 할아버지를 통해서 이야기했어야지.
“무슨 대화를 말씀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 역시 바쁘신 분이시라 그런지, 성격이 좀 급하십니다. 아무래도 JH 그룹이 전 세계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것도 있으니 정부와 이야기 좀 나눠봐야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도움받을 일도 없고, 도움 드릴 일도 없습니다. 그에 맞는 세금도 꼬박꼬박 낼 거고요.”
- 너무 적대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짜증이 난다.
집필에만 집중해도 모자랄 시간에 계속해서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더군다나 명확한 주제를 정하고 전화한 것도 아니다.
꼬라지를 보아하니 만나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려나 보다.
이걸 어떻게 해야 될까.
한 번 자리를 만드는 순간, 집필에 흐름이 끊기는 건 당연한 사실이다.
대통령 비서실장과의 식사 자리는 시작이나 마찬가지다.
아예 처음부터 그런 자리를 피했으면 모를까, 한 번 자리를 가진 이상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도 피할 수가 없었다.
“시간이 없어서 약속을 못 잡겠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 허……. 바쁘신 분에게 제가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 다음에 뵙는 걸로 하죠. 지금은 작품에 집중하고 싶은 시기라.”
- 그래도 좀 서운하군요. 제가 알기로는 최근에 가수 지망생으로 보이는 분과 데이트하시는 것 같던데……. 저에게도 시간 좀 양보해주시죠.
“…….”
잘 못 생각했다.
기득권이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무슨 일을 하는지.
이미 서아의 존재를 눈치챈 상태.
이대로 피하기만 한다면 서아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짜증 나는군.’
이제는 거슬리는 걸 넘어서 짜증 나기까지 한다.
저들도 모르지 않을 거다.
서아를 거론한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단순히 자리를 갖고 싶다는 게 아닌 나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는 걸 암시하는 말이었다.
“한 번 만나도록 하죠. 대신 각오해야 될 겁니다. 부디 정상적인 대화가 이루어졌으면 좋겠군요.”
- 하하. 서로의 마음만 맞는다면 화목한 자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약속 장소와 시간은 핸드폰으로 넣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더 긴 얘기를 하고 싶지 않은 나는 말을 이어가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후에 비서실장님과 승호에게 전화를 걸어 서아의 안전에 각별히 주의를 가져주라는 말을 전했다.
만약…….
만약 기득권이 욕심에 눈이 멀어, 내 주변에 손을 뻗는다면 그때는 못 참을 것 같다.
‘아니지…….’
그 전에 처리할 생각이다.
주변이 피해 보기 전에.
피해를 본 후는 늦었다.
조짐이 보이는 순간 곧바로 파고들어 생명줄을 끊어버릴 생각이다.
‘부디 작품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길.’
대화를 나누고 실망스러운 결말을 불러올 경우.
그때는 오랜만에 돌아가야 될 것 같다.
사업가 박제환으로.
전생의 나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그때로.
* * *
한국에서의 소식을 보고받은 샘 헤임.
“그러니까……. 한국에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 말이지.”
“아직까지 지켜봐야 되긴 하겠지만 코드 구스를 노린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드디어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려고 하는 건가?”
“슬슬 기회가 오는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들려오는 희소식인 것 같다.
코드 구스.
JH 그룹 회장에게 붙인 별명이다.
그동안 미국에서는 오랜 시간 지켜봐 왔다.
그가 JH 그룹을 통해 출사표를 던지는 순간.
그건 확신으로 바뀌었다.
이 남자는 미국의 품으로 들어오게 만들어야 된다고.
그렇다고 섣부르게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는 돈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차라리 탐욕이 가득한 자였다면 많은 혜택을 건네주면서 미국 시민권을 부여했을 거다.
‘돈에 욕심이 없다.’
그게 아니라면 일반인이 상상하는 범주를 넘어섰다는 거겠지…….
예전, 여의도와 월가에서 160억 달러를 가져갔을 때.
그때 구스의 반응은 심드렁하다는 느낌이었다.
이 경우엔 두 가지로 나뉜다.
돈에 욕심이 없거나 160억 달러로는 성에 안 차거나.
웬만해선 전자일 확률이 높았다.
그 누가 160억 달러에 심드렁할 수 있단 말인가.
뿐만 아니다.
그 뒤에 들려오는 소식들.
그것들만 하더라도 평생을 먹고살 만한 돈을 가지게 된다.
그럼에도 심드렁했다.
‘뭐가 됐든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게 없다.’
두 가지 중에 뭐가 맞는 건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겠다.
우리가 제시할 수 있는 것 중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게 없다고.
그러던 차에 들려오는 부하직원의 보고.
한국에서 구스를 노린다는 소식이다.
‘당장은 힘들 수도 있다.’
당장은 그를 미국인으로 만드는 데 어려움을 있을 수 있다.
대신 좋은 인식을 심어놓을 수 있을 거다.
“계속해서 시선을 놓지 말고 있어. 내가 보고드릴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알겠다는 말과 함께 다른 곳으로 향하는 부하직원.
나는 할 일이 남았다.
받은 보고에 내 생각과 앞으로 일어날 상황을 추가해서 보고해야 된다.
‘국장님도 구스를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으니까…….’
그를 생각하니 한국에게 고마운 감정마저 느껴진다.
그가 어떤 존재인가.
세기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재능을 두 분야에 걸쳐 가진 사람이다.
심지어 두 분야가 각각도 아니었다.
문화에서 이루어진 성과를 사업적으로 연결시키는 과정.
이것까지 생각하면 세 가지의 재능이 아닌가 싶었다.
‘한국에서 혁명을 불러왔을 때…….’
그때는 소름이 돋는 줄 알았다.
그전까지만 하더라도 나에게 보고가 올라올 정도의 인물은 아니었다.
부하가 얘기하기로는 로열패밀리 중 미국에서 인기를 일으키는 소설을 쓴다 했기에 흥미만 있었을 뿐.
‘그걸 촛불시위로 연결시키고, 각각 이득을 챙기는 과정.’
그리고 미국의 대선마저 정확히 예측해 자신의 부하에게 지시한 투자.
그 모든 과정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었다.
미래에서 과거로 왔다 해도 믿기 힘들 정도다.
아무리 미래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자칫하면 돈을 전부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
‘담대하기까지 했지…….’
이 기쁜 소식을 빠르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곧바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쯤이면 되겠군.’
보고서를 작성한 지 한 시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내 개인적인 의견을 마지막에 덧붙이고는 국장님을 찾아갔다.
마지막에 덧붙여져 있는 나의 개인적인 의견.
그 무슨 일이 있어도 그와 척을 지지 말고, 최대한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이라는 글자가 적혀있었다.
* * *
약속 당일.
처음 대통령 비서실장이란 사람과 통화를 마치고 많은 준비를 해왔다.
JH 그룹의 각 사장들에게 걸릴 게 있는 지 한 번 더 확인해 보라는 말을 전했고, 다른 가족들에게도 혹시 걸리는 게 있으면 이른 시간 내 조치하라고 말 한 상태다.
‘서아의 안전도 확보됐고 말이지…….’
이제 저들이 걸고넘어질 수 있는 건, 법적으로 사업의 진행을 막는 것.
그 정도 무기는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애초에 그게 무서웠으면 작품을 쓸 시간에 사업적인 자리를 더 만들었을 테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미리 양해를 구한 상태다.
그래도 곁에 있는 사람들을 잘 만난 것 같다.
자신들이 맡고 있는 사업체에 피해가 올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면 싫은 내색이라도 나오는 게 당연한 데, 그 어떠한 내색조차 안 했다.
오랜 시간 사업한 나로서는 알 수 있었다.
진실로 저들은 나와 같이 분노를 하고 있다고.
‘오히려 참지 말라는 말을 들었으니, 말 다 한 거지.’
내 얘기를 들은 사람들 모두가 나보고 참지 말라는 말을 전했다.
그 안에 당연히 동성 그룹도 껴있었다.
예전이었다면 할아버지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작가를 하겠다는 말을 전한 이후로 조금씩 변화해 왔었다.
제대로 느낀 건 어제였다.
혹여나 동성 그룹에 피해라도 갈까 봐, 이때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하니 오히려 역정을 내셨다.
감히 대통령도 아니고 비서실장 주제에 나를 손에 쥐려고 한다며 무슨 일이 있어도 지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질 생각이 없다.’
그간 있었던 일들을 생각하며 약속된 장소로 향하자 한 남성이 보인다.
얼핏 보이기에는 아버지 연세 정도 되는 사람.
전생의 마지막 내 나이와 비슷해 보였다.
“허허……. 이거 바쁜 사람을 부른 게 괜한 일로 부른 게 아닌지, 좀 걱정스럽습니다.”
“얘기를 나눠 보면 알 것 같습니다. 괜한 일인지, 아닌지는.”
“… 너무 언짢게 생각해주지는 마십쇼. 아직 우리는 풀어갈 날이 많지 않습니까.”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랬으면 좋겠다.
오늘 자리가 불편하게 끝나면 앞으로 풀어갈 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경쟁해야 될 날만이 많이 남았을 뿐.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여기 식당이 아주 기가 막힙니다.”
자리에 앉으라는 말을 건넨 남성이 밖에 직원을 불렀다.
그리고는 준비한 걸 안으로 들이라는 말은 건넨다.
그러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음식과 함께 여성 두 명이 들어왔다.
“마음에 드실 겁니다. 가게에서 제일…….”
“불편하군요.”
“끄응……. 아직 젊으신 분이라 제가 주제넘은 배려를 했군요. 자네들 나가 봐.”
나가라는 말을 전하자 여성들이 고개를 숙이고는 밖으로 나갔다.
불쾌하다.
물론 남자들의 비즈니스에서 여성들이 빠질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내가 불쾌한 이유.
‘분명 저번 전화에서 서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앞에 남성이 이전 전화에서 서아에 대한 얘기를 꺼냈었다.
그 정도면 내가 서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파악을 마쳤다는 얘기.
그런 마당에 이런 곤란한 상황까지 연출시키니 남성의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을 것 같다.
‘내 성격도 이미 알고 있었을 테고.’
비서실장은 단지 나를 곤란하게 만들려고 했던 거다.
그리고 확인했을 거다.
이번 대화에 내가 어떤 입장으로 온 건지.
방금 일로 인해 파악을 마쳤을 테고.
‘내가 좋은 마음을 갖고 온 게 아니란 걸.’
그래서인지 굳은 얼굴이 유독 돋보이는 것 같았다.
“자……. 그럼 식사하면서 대화를 나눠 볼까요?”
“그러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