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글 쓰는 재벌-95화 (95/175)

95화

* * *

어디서부터 말해야 될지 고민하는 서아.

‘하… 믿어도 되는 건가?’

나도 모르겠다.

분명 저번 경험을 생각하면, 말하지 않는 게 옳은 결론이었다.

근데 왜 이렇게 답답할까?

앞의 남성에게 그간의 일을 말하면 조금은 답답한 마음이 가실 것 같았다.

“사실…….”

결정을 내린 나는 이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풀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노래를 불러 캐스팅되고. 그렇게 소속사에서 보석 취급받고, 데뷔를 준비하고 있을 때.

그러다가 마주친 김제앙 상무에 대한 이야기를.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풀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다시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은 애써 외면해 왔나 보다.

나 스스로 괜찮은지 알았다.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보다 하고, 애써 담담한 척해 왔나 보다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에서 꺼내며, 계속 설명을 하고 있는 지금, 노래를 좋아해도 도전할 수 없는 이 현실이 너무 미워지기 시작한다.

내가 노래를 못 불러서도 아니다.

그렇다고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다.

‘그 사람과의 잠자리를 거절한 게 잘못인 건가?’

분명 말을 술자리였지만, 그 끝은 잠자리까지 이어진 자리일 거다.

그걸 알고 있는 내가 어떻게 술자리를 나간단 말인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성공을 위해 잠자리를 가진다는 건 차라리 죽는 것보다 싫었다.

꿈을 접고 나서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때의 거절을 후회해 본 적은 없었다.

단지, 이런 사회가 원망스러웠을 뿐.

‘하… 이걸 말하는 게 맞는 건가?’

이때까지의 일을 말하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앞에 남성도 그와 같은 재벌 3세.

단순히 나의 외모를 보고 접근했을 확률이 높다.

더군다나 이 남성도 접근할 때, 성공이라는 달콤한 미끼를 건네왔다.

저번에 겪은 일도 있으면서, 쉽게 사람을 믿어버리는 내가 너무나 싫었다.

“많이 힘들었겠군요.”

“…….”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단지… 그런 사람으로 인해, 저까지 안 좋은 선입견이 있을까 봐 그게 걱정되네요.”

“…아니에요.”

그 사람을 대신해서 사과하는 남자.

내가 생각했던 반응과 다른 결과로 이어져서인지 마음이 복잡해진다.

이때까지 가식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나 봤기에 가면을 쓴 사람은 잘 걸러낼 수 있을 거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복잡해진다.

앞에 사과를 건네는 남성의 마음이 진심이라고 느껴져서.

사람을 너무 쉽게 믿는 건가?

모르겠다.

그래도… 내 선택의 결과가 안 좋을지 몰라도, 한 번 더 바보 같은 선택을 하고 싶었다.

멍청하다고 욕해도 좋다.

그만큼… 그만큼 사람들 앞에서 다시금 노래 부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 * *

‘많이 고생했나 보네.’

글을 쓰기 시작한 이후로 남들의 감정을 더욱 잘 느낄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간 그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만약 서아 씨가 저의 접근이 부담스럽다면,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단… 한번 도전이라도 해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한 사람의 팬으로서 서아 씨의 노래를 응원하고 싶거든요.”

“저를 왜 이렇게 도와주려고 하는 거죠?”

뭐라 해야 될까? 전생에 연인이었기 때문에?

연인이었지만 나의 욕심 때문에 그녀의 꿈을 응원 못 해줬다는 사실에?

모르겠다. 뭐라고 대답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전생부터 가졌던 생각.

그녀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이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방금 말했듯 팬으로서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 서아 씨의 노래를 듣고, 그때의 위로는 아직도 잊지 못할 것 같거든요. 서아 씨의 위로를 바라는 건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많은 사람이 원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게 전부인가요?”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서아 씨가 걱정했던 대로 관심을 가진 것도 맞습니다. 단지, 제가 가진 것을 이용해서 접근하려는 게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서 알아가고 싶은 생각을 하고 있었고요.”

“…….”

“하지만 이전의 일도 있고 하시니, 믿기 힘드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랑 연락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신 꿈을 포기하지 말아 주세요.”

이번 만남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말해 주고 싶다.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내가 부담스러워서 꿈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갖지 말라고.

“제가 GL 엔터에 연락을 해두겠습니다. 한 번만 더 사람을 믿고, 도전해 주세요.”

“고마워요…….”

“그럼 제가 팬 1호인 것만 기억해 주시죠.”

“…팬 1호는 따로 있는데요…….”

“…….”

“대신 팬클럽 회장으로 생각할게요.”

“고맙군요.”

“그리고… 연락은 계속하셔도 돼요. 제가 재벌이라는 두 글자에 선입견을 품고 있었네요. 개개인으로 판단했어야 됐는데…….”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맙네요.”

다행히 마지막이라도 좋은 이미지를 남길 수 있었나 보다.

진실된 마음으로 다가갔기에 지금의 대화가 더욱 뜻깊게 느껴졌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한 꾸민 대화가 아니어서 말이다.

“우리 서로를 너무 모르는 것 같네요. 괜찮으면 좀 걸으면서 이야기할래요?”

“좋습니다.”

서아에게 있던 마음의 벽이 조금은 허물어졌나 보다.

이 뒤에 비서실장님이 준비한 장소가 많았다.

일반인들은 한 번이라도 가기 힘들 정도의 장소들.

하지만 그런 장소들보다 단순히 길거리를 걸으며 서아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게 더욱 기쁘게 느껴졌다.

* * *

비서에게 보고 받고 있는 이승호 상무.

“그러니까… 라이언 감독이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소문이 진짜라 이거지?”

“그렇습니다, 상무님.”

놀랍다.

그전까지도 제환이의 글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라이언 감독이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난 지금, 그 어떤 때보다는 놀라운 감정을 느끼고 있다.

단순한 감독도 아니고 무려 라이언 감독이다.

한 작품을 찍을 때마다 최소 1억 달러의 규모로 움직이는 사람.

그런 규모에도 불구하고 투자자들이 제발 투자를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사람 말이다.

“확실히 제환이가 대단하긴 한가 보네요.”

“저희가 생각하는 것 보다, 해외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 직원들이 조사하면서 생각보다 높은 인기에 놀랐다고 합니다.”

“허… 그 정도입니까?”

“섣부른 판단일 수 있지만, 지금 해외에서 손흥만 선수보다 인기가 높을지 모릅니다.”

“…아무리 그래도 손흥만 선수보다 높겠습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분야의 차이 같습니다. 손흥만 선수는 축구라는 분야에 국한됐다면, 작가님은 모두가 접할 수 있는 글과 그림이지 않습니까. 많은 홍보를 하지 않고, 매스컴에 드러내지 않아도 이 정도 인기면… 솔직히 마음먹고 홍보하는 순간, 손흥만 선수의 인기를 따라잡는 게 어렵지 않을 거라고 판단됩니다.”

제환이의 성공을 보면 배 아프다는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런 감정도 어느 정도 차이가 보였을 때 느끼는 감정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뜻밖의 성공을 한다면, 묘한 감정이 느껴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제환이의 성공은 그 사이에 있는 차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간극이 컸다.

경영이면 경영, 글이면 글.

그 두 개를 잇게 만드는 유연성까지.

뭐 하나 내가 추측할 수도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니 제환이의 성공을 보고, 마냥 감탄밖에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김 비서, 이걸 이용하면 KJ 그룹보다 앞서 나갈 수 있지 않겠어?”

“무조건입니다, 상무님. 이거랑 더해서 다음 작품 발표까지 하고는, 우리 회사와 계약을 맺었다는 게 알려지면 확실해서 앞서 나갈 수 있습니다.”

“그때 제환이가 말했던 사람은 연락 왔어?”

“…아직 안 왔습니다.”

“연락이 오면 다른 사람한테 티 내지 말고, 은연중에 도와주도록 해. 제환이도 대놓고 밀어주는 건 싫어할 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무조건 우리 회사에 남을 수 있도록, 모든 걸 동원해. 안 보이는 위치에서 광고를 밀어준다든가 해서 말이야. 아무리 제환이가 친구라지만, 우리 회사에게 큰 양보를 해주는 건 그 여자로 인한 거니까.”

“예, 상무님.”

제환이와 오랜 시간 붙어 지낸 나는 알고 있다.

절대 정만으로, 우리 회사와 계약 맺은 게 아니라는 걸.

제환이가 이전에 말했던 그 여자 덕분에 우리 회사와 계약을 맺은 거다.

그 여자와 KJ 그룹의 김제앙 상무와 마찰로 인해서 말이다.

당연히 제환이 입장에서는 그다음으로 평가받는 우리 그룹을 찾은 거다.

이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제환이와 우리 그룹의 연결고리를 끊어 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른 사람은 특혜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이 제환이만큼의 영향력을 우리 그룹에게 가져다줄 수 있냐고.

‘이 상황만 잘 이용하면 KJ 그룹을 앞서 나갈 수 있다.’

KJ 그룹의 주력 사업은 엔터 쪽.

이번에 라이언 감독이 우리 그룹과 계약을 맺는다는 소식이 들리는 순간, 우리 그룹과 KJ 그룹의 위치는 바뀌게 될 거다.

더해서 제환이의 다음 작품.

시간이 날 때마다 제환이의 첫 작품을 읽어본 나는 알고 있다.

이번 작품이 훨씬 재미있다고.

당연히 작품이 재미있으니, 성공할 거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중국 시장도 크고 말이지.’

미국 시장과 비견될 정도로 큰 중국 시장.

아니, 어쩌면 수익적인 걸 따지면 중국 시장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이번에 두 시장만 잘 챙긴다면, KJ 그룹과 경쟁에서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최선을 다하기로 결정했다.

* * *

“여기가 미스터 팍의 나라인 건가?”

“…감독님, 선글라스를 함부로 벗으시면 안 됩니다.”

“뭐, 어때. 누가 날 알아본다고.”

“벌써부터 알아보는 사람이 한두 명씩 있는 것 같군요. 한국 공항에는 여러 기자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사진이 찍힐지 모릅니다.”

“크흠… 그것참 불편하군.”

계약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온 라이언 감독.

여기서 사진을 찍혀 화제가 되는 순간 곤란함을 겪을 것 같았다.

아무리 자신이 잘 나간다고 하지만 경쟁자들 역시 방심할 수 없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

내가 팍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왔다는 걸 알려진 순간, 그들 역시 빠르게 짐을 챙겨 한국에 올 거라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그놈들이 경영진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하니까, 빠르게 움직여야겠군.”

“지금이 가장 적기입니다. 모두가 망설이고 있을 때인 지금이 말이죠.”

“팍이 한국의 로열패밀리라고 했던가?”

“알려진 사실로는 그렇습니다. 더해서 이번에 월가에서 큰 충격을 가져다준 JH 인베스트먼트 있지 않습니까. 그 회사도 팍이 주인이라고 합니다.”

“…신도 참 가혹하지.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재능을 가져다줬군.”

더욱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동시에 걱정도 들기 시작했다.

이곳에 오면서 계약이 될 거라고 자신했던 이유는 꽤나 많은 계약금과 어디에서 보기 힘든 계약 조건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월가를 강타했던 회사의 주인이라는 소식.

한순간에 내 자신감을 떨어뜨리게 해준다.

‘이거 간절한 쪽은 팍이 아니라 내가 되겠군.’

아무래도 이번에는 자존심을 조금 내려놓는 한이 있더라도, 빠르게 움직여야 될 것 같다.

‘그러려면 차라리 사진 찍히는 게 낫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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