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 *
“야, 어떻게 생각하냐?”
박제환 작가 사무실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 길에 막내 작가한테 질문을 던진 노경호 작가.
아까는 글을 읽고 나서의 충격이 가시지 않아 깊은 생각을 못 했었다. 그러다가 밥을 먹으면서 작가님의 작품에 대해 떠올리니 중간중간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감정을 나만 느끼고 있는 건지 궁금해서 옆에 있는 막내에게 물은 거다.
“형님……. 솔직히 저는 지금 생각해 보니까, 겁이 납니다. 제가 아무리 글을 쓰고 노력해도 그런 글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
“모르겠어요. 형님에게 미안한 말일 수 있지만, 제가 제일 인정하는 형님의 글을 읽으면서도 이런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솔직히 저도 그 정도는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요.”
“이 시끼가…….”
“근데 도저히 박제환 작가님의 글은 엄두가 안 나요. 어디서 저에게 극강의 재미를 줬고, 어디서 사이다를 준 건지……. 한 장면을 위해 얼마나 깊이 있는 빌드업을 한 건 지……. 따라 할 엄두가 안 납니다.”
역시 나만 느끼던 게 아니었나 보다.
방금 막내가 넌지시 건넨 말은 나도 밥을 먹으면서 느끼던 바였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
다른 사람들은 모를 거다.
한 장면을 위해 얼마나 많은 빌드업을 했고, 단어 하나하나를 얼마나 심도 있게 배열했는지.
위기감으로 다가올 수 있는 답답함을 기대감으로 바꾸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도 모르겠다.
단순히 어림짐작만 가능할 뿐.
나 역시 막내와 같은 생각이다.
저건 내가 따라 하지 못하는 경지다.
그전 작품들은 재미있게 읽었을지언정 이 정도의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작가님의 플롯만 있으면, 저 정도는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이번 작품은 아니다.’
이번 작품은 작가님이 플롯을 주고, 써보라 해도 그 정도의 재미를 독자에게 줄 자신이 없었다.
말 그대로의 인 외의 경지.
“야. 그 감정에 잡아먹히지 마라. 인정할 건 인정하고 가자.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 찢어진다잖냐.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한다.”
“후……. 그래야죠. 그냥 답답해서 말해 본 거예요.”
“우리도 열심히 써야 돼. 너도 글을 봤으면, 알 거 아니냐. 무협 시장이 얼마나 커질지.”
“그것도 두려운 거에 한몫합니다. 분명 시장이 커진다는 건 사람들이 작가님의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는 건데…….”
“당연히 당장은 힘들 수 있어. 하지만 당장만 견뎌내면 우리 수입은 한 층 더 올라가고, 사람들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을 거다.”
막내에게 조언이랍시고 말을 건네지만, 나에게 하는 말이란 걸 나 자신은 알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한 나도 오늘은 글을 못 쓸 것 같다.
내가 쓴 글이 만족스럽지 않을 걸 잘 알기에.
“야, 맥주나 한잔하고 털어버리자.”
“그래요, 형님.”
작가님의 글을 보고, 복잡한 생각이 든 나는 막내와 맥주를 마시며 조금이나마 글에 담긴 노하우를 내 글에 적용시킬 방법을 찾아가기로 결정했다.
* * *
다음 날.
‘어떻게 할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작품에 대한 고민이 아닌, 그녀에 대한 고민.
어떻게 해야 자연스럽게 도울 수 있을까?
‘승호를 도와주면서 동시에 그녀도 챙긴다.’
그러다가 내린 결론은 승호를 도우면서 동시에 그녀를 챙기자는 결론이다.
승호가 운영하는 회사가 마침 엔터 사업.
분명 내가 줄 수 있는 도움과 승호가 줄 수 있는 도움이 명확할 거다.
나는 지금 작품에 들어가기 전 승호한테 들릴 생각이다. 그러고선 승호네 소속사와 계약을 맺는다.
‘당장 미국에서의 영향력을 챙길 수 있다.’
계속 미국에서 들려오는 「절대자는 휴식을 원한다」에 대한 소식.
내가 승호네 회사에 몸을 담는 순간, 승호네 회사가 영향력이 올라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해서 어제 퇴고를 마친, 「절대음감」이라는 작품.
이 역시 중국에서의 영향력을 챙길 수 있을 거다.
그러다가 운이 좋아 중국에서 영화화를 하자는 제안이 온다면, 중국의 영향력도 더 크게 챙길 수 있다.
‘이건 곧 KJ 그룹이 서아를 함부로 못 한다는 거와 같지.’
그렇게 영향력이 올라간 소속사에서 서아를 영입하면 어떻게 될까?
원래라면 굳이 KJ와 척지면서까지 영입하려고 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나와 서아를 묶어서 승호의 회사인 GL 엔터에 몸담는다면 또 다른 결과물이 나올 거다.
승호에게 도움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서아에게도 다시 한번 꿈을 꿀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방법.
그래서 오랜만에 승호와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하냐.”
- 그냥 일하고 있지. 오랜만에 연락하네.
“그동안 좀 바빠가지고.”
- 그러시겠죠.
“혹시 화났냐?”
- 설마. 화나기보다는 제환이라는 자식이 얼마나 바쁜 사람인지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화난 게 아니라, 삐진 거였구나?”
- …….
“만나서 이야기나 하자.”
- 그럼 두 시간 뒤에 보는 걸로 하자. 장소는 매일 보던 곳.
역시 승호는 삐진 게 틀림없다.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해서 변명할 수도 없는 게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승호와의 관계는 챙기고 갔어야 됐다.
그만큼, 전생의 마지막부터 해서 끝까지 내 옆에 남아준 친구였으니까.
그동안 소홀했음을 인정한 나는 앞으로 잘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두 시간 뒤의 만남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 * *
“그래서… 도대체 바쁘신 분께서 무슨 일로 미천한 저를 다 찾아주셨습니까.”
“…….”
오랜만에 만난 승호.
전화 통화를 하면서 느낀 게 맞았나 보다.
이 자식 단단히 삐졌다.
“미안하다. 앞으로 잘할게. 그리고 오늘 좋은 소식 들고 온 거니까 너무 그러지 말고.”
“장난 좀 쳐봤다. 근데 진짜 무슨 일로 연락한 거야? 좋은 소식은 뭐고.”
“요즘 너희 회사는 좀 어떠냐?”
“우리 회사? 그냥 별일 없이 흘러가고 있는데?”
“욕심은 없고?”
“얀마, 욕심이 있다고 다 되면 그게 사업이냐? 너도 알다시피 KJ 그룹이 앞에서 버티고 있으니까, 쉽게 뚫기 힘들더라고.”
“너 내가 대현 그룹이랑 해서 판정승 얻어낸 거 알지.”
“그것 때문에 말 많았잖아.”
승호 말대로 내가 대현 그룹과의 경쟁에서 첫 번째 경쟁을 승리로 가져오면서 대한민국 재벌 사이에 말이 많았었다.
동성 그룹의 힘이 생각보다 크다는 얘기와 너무 나대는 게 아니냐는 의견들.
그런 의견들 중 공통점은 더 이상 그들이 우리 그룹을 이전처럼 대하지 못한다는 거다.
예전이었다면 직접적으로 말했을 내용들도 앞에서 못 말하는 거 보면, 동성 그룹의 달라진 위치를 간접적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맞아. 말 많았지. 너도 KJ 그룹이랑 한번 경쟁해 보는 건 어떠냐?”
“…무기가 없다.”
“내가 너희 소속사로 들어간다면?”
“힘은 되겠지만, 너의 힘이 엔터 사업에 결정적으로 큰 한 방이 없어.”
“지금 미국에서 내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건 알고 있을 거야.”
“「절대자는 휴식을 원한다」라는 작품? 사실 그것 때문에 연락하고 싶었는데, 친구들끼리 사업적으로나마 연락을 하는 게 좀 그렇더라고. 어쨌든 그걸 감안해도 부족해.”
승호가 말하는 부분은 내가 대현 자동차와 경쟁할 때 내세웠던 JH 배터리 같은 한 방이 부족하다는 얘기일 거다.
승호 입장에서 「절대자는 휴식을 원한다」는 JH 자동차 정도의 무기.
결코 JH 배터리만큼의 힘은 없었다.
‘그걸 「절대음감」으로 메꾼다.’
그 아쉬운 부분을 이번 작품으로 메꿀 생각이다.
다른 사람들은 의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장 내가 한국에서 성공을 확신할지언정, 중국은 또 다른 시장이니까.
하지만 나는 단언컨대 자신할 수 있었다.
이번 작품은 무조건 먹힐 거라고.
그 전에 중국에서 인기 있던 무협을 다 읽어본 상태.
거기서 제일 인기 많은 작품조차 내 작품과 비교해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기에 자신할 수 있었다.
「절대음감」이 JH 배터리 같은 역할이 돼 줄 거라고.
“어쨌든 내가 너희 회사에 들어가면 경쟁을 할 수 있잖아. 완전히 뒤집긴 힘들더라도.”
“아무래도 그렇지?”
“사실 지금까지 출판사에서 맡은 일들도 어떻게 보면 업무 과다였어. 유통에 힘써야 될 사람들이 마케팅이나 다른 부분까지 신경 쓰는 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으니까…….”
“오케이, 그 정도는 내가 도와줄 수 있지.”
“…말은 똑바로 해야지, 승호야. 도와주는 건 나다.”
“그게 그거지.”
그게 그거면 안 된다.
서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면 내가 도와주는 형식이 돼야 했다.
“대신에 한 가지만 양보해라.”
“양보? 그게 뭔데?”
“내가 원하는 아티스트를 밀어줘. 실력은 내가 보장할게.”
“네가 아는 사람이 있어?”
“어쩌다 보니, 알게 됐다.”
“네가 그렇게 자신할 정도면 실력이 좋을 텐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사실 그 사람이 KG 소속사에 있다가, KJ 그룹 물려받을 사람이랑 우연히 마주쳤거든?”
“설마……. 야… 그래서…….”
내가 넌지시 꺼낸 이야기를 듣고, 눈을 게슴츠레 뜨기 시작한 승호.
대화 흐름상 어떤 얘기가 나올지 조금씩 짐작이 가나 보다.
“맞아. 스폰 제의를 받았고, 그녀는 거절을 했다. 때문에 연예계에 도전장조차 내밀지 못했다. 이게 결과야.”
“…그래서 네가 도와준다고 한 거구나.”
“오해는 하지 마라. 겸사겸사 너 도우려고 하는 거니까. 그리고 너도 알잖냐. 지금 JH 그룹이면 굳이 그 사람을 겁낼 이유가 없다는 걸.”
“대신 흠집은 나겠지.”
“흠집이 무서웠으면 대현 자동차와 전쟁도 안 일으켰겠고.”
“그 흠집이 지금 상황에선 더욱 커지지 않았을까?”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역시 승호도 어린 나이에 뛰어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지금 사태를 정확하게 예측하다니.
승호 말대로 KJ 그룹만 생각했다면, 흠집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대현 그룹과 KJ 그룹이 나라는 공공의 적을 두는 순간, 조금은 힘들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승호한테 명분을 주는 거다.
이 전쟁에 참여해서, 전리품을 나눠 갖지 않겠냐고.
“잘 생각해라. 이 경쟁에서 이기는 순간, 너희 그룹이 가져갈 위치를.”
“확실히…….”
“그리고 참고해라. 나는 KJ 그룹을 가만히 둘 생각도 없다는 걸.”
“…도대체 그녀라고 불릴 만한 사람이 누구냐? 내가 아는 너는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여자라서가 아니라, 한 가수를 돕는 거다.”
“…….”
다시 한번 눈을 게슴츠레 뜨는 승호.
“너도 장가갈 때가 다 됐나 보구나?”
“…….”
“너 방금 말하면서 입꼬리 올라간 거 알고 있냐?”
“…….”
“어지간히 빠졌나 보네. 그래, 친구 좋다는 게 뭐냐. 다음에 데리고 와. 대신 네 말대로 가수에 대한 재능이 있어야 뭐라고 할 말도 있는 거 알지?”
“물론이지.”
가수에 대한 재능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다.
이때까지 그녀만큼, 나를 위로해 준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재능이 조금 없으면 어떤가. 이미 허락까지 받은 상황에.
애초에 GL 그룹에서 밀어주기로 결정한 이상, 어지간히 못 부르는 게 아니라면 일정 이상의 성공은 보장된 셈이다.
‘그녀에게 꿈을 꿀 수 있는 기회를 준 것만으로 감사하다.’
뒤에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단지, 그녀가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고맙게 느껴졌다.
이게 전생에 대한 죄책감에 비롯된 결과인지, 그게 아니라면 그녀라는 사람을 잊지 못했던 나의 미련인지 모르겠지만, 이번 생은 잘해 보고 싶었다.
다음 생이 있더라도 후회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