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 *
세 번째 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한 지 5일 정도가 지났다.
지금 쓰고 있는 한 문장.
1권을 마무리 짓는 문장이었다.
5일 만에 총 25화를 썼다는 얘기.
물론 퇴고를 거치지 않은 원고인 만큼, 완전한 1권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렇다고 해도 말도 안 되는 집필 속도.
만약 작품을 쓰면서 내가 주인공이 돼 성장하는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빠른 속도로 집필하지 못했을 거다.
‘궁금하네…….’
내가 쓴 글이지만 1권을 완성할 동안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서인지, 나 역시 어떻게 1권이 완성됐나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퇴고를 해야 된다는 생각과는 다른 의미.
퇴고를 하는 게 아닌, 한 사람의 독자가 돼서 작품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퇴고하지 말고 순전히 읽어보자.’
결정을 내린 나는 퇴고를 내일로 미뤄둔 채, 글을 읽어보기 시작했다.
…
…
“…….”
간혹가다 댓글 중, 작가에게 군만두만 먹이고 글을 쓰게 만들고 싶다는 말들이 자주 있었다.
지금 내가 그런 심정이다.
작가에게 군만두 가게를 차려줄 테니, 글만 쓰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지금 본 작품의 작가는 바로 나였으니.
작품을 쓴 나조차도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다.
과연 뒤의 내용조차 모르고, 작품을 처음 접한 사람들은 어떻게 느낄까?
어쩌면 살인 협박까지 오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만큼, 내가 쓴 작품이지만 너무나 재밌게 느껴졌다.
마치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살아 숨 쉬면서 작품을 이끄는 것 같은 기분.
내가 글을 설정해서 쓴 게 아닌, 주인공들이 나의 손을 빌려 자신들의 이야기를 펼쳐 나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뒤의 내용은 어떻게 전개되려나…….’
큼지막한 사건은 정해 두긴 했다.
하지만 세세한 전개는 정하지 않았다.
지금 와서 작품을 보니 그게 다행이라고 느껴진다.
어차피 세세한 전개를 정해 봤자, 등장인물들의 행동반경을 줄일 뿐 탄탄한 전개를 가져가진 못 했을 것 같다.
아니, 그 세세한 전개마저 등장인물들이 제멋대로 움직여 자신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갈 것 같았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네.’
작품을 쓰면서, 등장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것 같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다.
비단 쓰면서 뿐만은 아닐 거다.
그 어떤 작품을 읽어봐도,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진짜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느껴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글을 읽으면서 느끼던 거지만, 아직 발전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중간중간 읽으면서, 보완해야 될 부분들이 보였었다.
보완이라고 표현하기도 애매하다.
발전할 수 있는 부분들이 느껴졌었다.
과연 퇴고를 거친 내 작품은 어떻게 될까?
작가인 나 스스로도 퇴고를 마친 글을 하루빨리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님 눈이 뒤집히겠네.’
장담한다.
내 작품을 본 팀장님 눈이 뒤집힐 거라는 걸.
오랜만에 좋은 소식을 들고, 팀장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기쁜 마음이 든 나는 앞으로의 전개 방향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 * *
박제환 작가님 사무실에 도착한 노경호 작가.
“근데 작업하고 계시면 어쩌죠?”
“그럼 조용히 맛있는 거나 먹고 가면 되지.”
“…형님, 혹시 본 목적이 음식은 아니죠?”
“뭐… 겸사겸사?”
아예 아니라고는 못 하겠다.
그동안 작가님의 비서분이 사 왔던 음식들은 작업하면서 먹은 음식 중에 가장 맛있었다.
물론 그런 음식들을 안 먹어 본 건 아니지만, 작업실에서 먹어 본 적은 처음이어서 그런지 그런 느낌과 합쳐진 분위기가 너무 좋았었다.
“두 분만 오신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한창 집필할 시기라 저희만 왔습니다.”
“경지가 낮은 사람들은 본디 수련에 몰두하는 게 강호의 도리죠.”
“…….”
“그럼,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가겠습니다.”
역시 박제환 작가님.
경지가 낮다고 할 수 있는 동료 작가들도 챙기는 걸 보니, 얼마나 마음씨가 넓은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원래 저런 포용력도 높은 무력에서 나올 수 있는 거다.
한국에서 무협의 무력을 담당하는 것은 바로 자본.
작가님의 무력은 100위 안에 들 수 있는 만큼, 저런 한마디 한마디가 멋있게 느껴졌다.
‘나도 경지가 올라가는 기분이군.’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작가님과 같이 있으면 나 역시 경지가 올라가는 기분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면 경지가 아니라 어깨였지만.
“어떻게… 작품은 잘 쓰고 계십니까? 그때 표정을 보니까, 얼마나 글을 쓰고 싶어 하는지 느껴지던데…….”
“마침, 방금 1권까지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퇴고도 마친 상태고요.”
“오!! 어때요? 저희가 알려 준 노하우가 도움이 좀 됐나요?”
“도움 수준이 아니라, 경지가 한 층 올라간 것 같은 느낌입니다.”
“허허……. 화경 경지에 계시던 작가님이 한 층 더 올라간 거면……. 현경?!”
“…박제환 작가님도 형님의 마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나 보군요.”
작가님과 작품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 보니, 몸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작가님의 작품은 나에게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과 동시에 말이다.
확인하고 싶다. 무협이란 무협을 다 읽어본 나에게 신선함을 줄 수 있을지.
신선함이 아니어도 좋다. 작가님의 전 작품들과 같이 그 정도의 재미만 주더라도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작가님의 전 작품들을 하나같이 재밌게 읽었으니까.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원고를 좀 봐도 될까요?”
“저야 오히려 감사드리죠. 읽어보시고 피드백해 주실 게 있으시면 과감하게 말씀해 주세요.”
“형님!! 저도 같이 봐요!! 혹시 혼자 보려고 했던 거 아니죠?”
“막내야……. 찬물도 위아래가 있거늘, 어디서 비급을 넘보려고 하는 것이냐. 네가 작가님의 글을 읽고 심한 내상을 입을까 심히 두렵구나. 절대 너의 글 읽는 속도가 마음에 들지 않은 건 아니다.”
“하하……. 제가 따로 원고 보내드릴게요. 마침 컴퓨터도 여러 대 있으니, 따로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다.
막내랑 같이 보면 온전히 작품에 집중할 수 없다.
작가님의 작품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파헤치면서 읽고 싶었기에, 들려오는 작가님의 말이 반갑기 그지없었다.
“작가님!! 저 준비됐습니다!!”
“…….”
내가 잠시 한눈판 사이에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막내.
나 역시 질 수 없기에, 곧바로 컴퓨터로 향해 작가님의 작품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절대음감?’
파일을 뒤져보니, 작가님의 작품이 보였다.
「절대음감」이라는 제목의 작품.
무협과는 조금 거리가 먼 제목으로 보일 수 있지만, 작가님 작품의 설정을 대충 알고 있는 나는 이보다 어울리는 제목이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집중하자.’
과연 작가님은 전작보다 재밌는 작품을 집필하셨을까?
마침, 지금 당장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지금의 기회에 온전히 집중하고 싶어진 나는 주변의 소리를 완전히 차단한 채, 작가님의 작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 * *
‘몰입감은 있나 보네.’
두 사람이 원고를 확인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는 박제환.
30분이 지나도록, 한눈을 팔지 않는 걸 보면 작품에 몰입감이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전 작품들은 스스로에게 자신은 있었지만, 확신은 부족했다.
그만큼 내가 보는 시선과 다른 사람들이 보는 시선이 다르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번 작품은 달랐다.
그 어떤 사람이 본다고 해도 자신이 있었다.
무조건 사로잡을 수 있다고.
그만큼 나 역시 글을 읽는 내내, 여러 번 감탄을 내뱉었다.
글을 쓴 나조차, 내가 이런 장면을 언제 썼지 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였으니 자신이 없을 수가 없었다.
“와… 미쳤네…….”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글을 읽던 노경호 작가님이 미쳤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드는 게 보였다.
“어때요? 좀 괜찮게 나온 것 같나요?”
“…작가님, 어디 가서 그러지 좀 마십쇼. 이게 괜찮은 거면 저희 작품들은 어떻게 읽으라고 합니까.”
“다행이네요. 반응을 보니 괜찮은 것 같아서.”
“거참. 이 정도면 괜찮은 수준을 넘었다니까요? 와… 아니, 무슨 분석을 하려고 했는데, 단 하나도 분석 못 했습니다. 말 그대로 아무 생각 없이 순전히 재밌다고만 느끼면서 작품을 봤다니까요?”
노경호 작가님의 반응을 보니, 확실히 작품이 잘 나왔단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생각하던 반응이기도 했고.
“작가님,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상황이냐면, 제가 이때까지 읽은 무협만 해도 몇백 작품은 될 겁니다. 그런데도 이 정도의 신선함과 재미를 느낀 거면, 다른 사람들은 그 몇 배의 재미를 느낀다는 거예요.”
“작품을 쓴 작가로서 뿌듯하네요.”
“하……. 이거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의욕을 얻을 줄 알았는데, 순전히 현타가 오네요. 저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런 작품 못 씁니다.”
“그래도 작가님은 읽는 속도가 좀 빠른가 보네요. 막내 작가님은 아직 읽고 계신 것 같은데.”
“저도 처음 계획대로라면, 아직도 읽고 있어야 돼요. 근데 너무 재밌어서 분석이고 뭐고, 다음 내용을 찾고 있는 절 발견했다니까요?”
이번 작품은 자만이 아닌, 자신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노경호 작가님이 인정할 정도의 무협이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은 더욱 재미를 느끼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실제로 내 작품을 읽고 있는 막내 작가님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떨 때는 미소를 짓고 있고, 어떨 때는 화난 표정을. 또 어떤 때는 감탄과 안도감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와… 대박…….”
“어때? 너는 분석하면서 봤냐?”
“아니, 형님……. 이걸 어떻게 분석하면서 봐요. 당장 뒤 내용이 궁금해 죽겠는데 분석까지 어찌한대요.”
“이야…….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확실히 나만 느낀 게 아니었구나.”
“미쳤어요, 형님. 진짜 미쳤다는 말밖에 안 나와요. 이 정도면 대한민국에 무협 붐이 일어날 거예요.”
“키야……. 이제 우리 무협도 낙수 효과를 받을 수 있는 건가?”
“낙수 효과는 받겠죠……. 대신 작가님 작품을 보고 눈 높아진 독자들의 니즈를 충족시키기 위해 한동안 고생해야겠지만.”
내 작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니, 팀장님과의 만남이 더욱 기다려진다.
이런 게 작가로서의 성취감이라고 하는 걸까?
마치 자식을 둔 아버지와 같은 마음이 든다.
내가 아기를 놓고, 내 자식이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받으면 이런 기분이 느껴질 것 같다.
“작가님, 그건 그렇고 뒤 내용은 어떻게 전개할 거예요? 와…. 진짜 안 물어보려고 했는데 궁금해서 미치겠네…….”
“야, 온전히 작품의 재미를 느끼려면 안 들어야 되는 거 모르냐?”
“하긴……. 아니, 근데 보통 재밌어야 기다리죠. 이 정도면 독자들의 원성이 자자하겠는데요? 저희야 1권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행운을 맛봤지만, 독자들은 1화씩 보잖아요.”
“작가님이 두 번째 작처럼 한 번에 풀지 않을까?”
“어떻게 하실 거예요, 작가님? 한 편씩 풀면 분명히 독자들의 원성이 자자할 텐데.”
“그 부분은 팀장님이 결정하실 겁니다.”
이 질문은 답변하기 곤란할 것 같다.
어디까지나 나의 역할은 작품의 집필.
작품을 유통하는 과정은 출판사에서 결정할 몫이었다.
“근데 진짜 못 참을 것 같은데……. 작가님, 혹시 조금이라도 뒤 내용 힌트를…….”
“야!! 작가가 돼서 그 정도도 못 참냐?”
“저도 말해 드리고 싶은데, 글을 쓰다 보니까 제가 정한 전개가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사건을 전개하는 기분이 들어서요……. 큰 틀은 있지만, 제대로 말씀드리기는 곤란하네요.”
“그거 봐라. 작가님이 곤란해하시잖냐.”
내가 속 시원한 답변을 드리지 못해서일까?
막내 작가님이 아쉬움의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막내 작가님을 뒤로한 채 나에게 다가오는 노경호 작가님.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은 목소리로 무언갈 말해 온다.
“그… 작가님? 저만 조용히 말해 주십시오. 제가 비밀로 하겠습니다.”
“…….”
두 사람의 반응을 보니, 세 번째 작품이 망할 일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을 거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