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 * *
짝짝―
“크… 작가님. 이제는 하산해도 될 것 같군요. 저 노경호가 인정합니다. 작가님은 저희를 앞서 나간 게 틀림없습니다. 각 문파의 수장들이 회귀한 주인공을 보면 이런 기분일까요?”
“…비유가 좀 특이하군요.”
“갈!! 작가님도 이제는 무협에 익숙해지셔야 됩니다. 무협이란 세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신 줄 아십니까?”
“…….”
“아무튼 저는 가르칠 게 더 이상 남아 있질 않습니다. 천재들을 발견한 범재들이 어째서 질투하는지 조금은 공감이 드는 수업이었습니다.”
작가 사무실에 온 지 약 한 달 하고도 반.
그간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오랜 시간을 붙어 있었던 노경호 작가님과는 이런 장난을 칠 정도로 편한 사이가 됐다.
처음이다. 누군가가 나를 이토록 편하게 대하는 게.
그 누구도 날 이런 식으로 대하진 못했는데…….
이걸 기뻐해야 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새로운 인연이 생긴 것 같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그동안 작품 쓰고 싶은 거 참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작가님의 꿈을 펼쳐보십쇼!!”
“드디어 글을 쓸 때가 됐군요.”
“원래 인내가 길수록 재미는 배가 되는 법. 그간 작가님이 이룩했던 경지는 독자분들께서 판단할 겁니다. 물론 칭찬밖에 없겠지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처음 쓰는 무협이라 조금 걱정됐는데…….”
“…어디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십쇼. 저라서 주먹을 안 든 거지 다른 작가가 들었으면, 한 대 맞아도 합법입니다.”
노경호 작가님이라서 저런 말을 한 거지, 다른 작가였다면 아무 말도 안 했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작업은 이쪽에서 하실 겁니까?”
“사실 보안 측면으로 문제가 많아서, 홍대에 따로 작업실을 구한 상태입니다. 작가님들도 언제든지 놀러 오도록 하세요.”
“오!! 우리의 새로운 아지트가 생겼군요. 앞으로 간식들이 사라질까 봐 걱정했는데…….”
“…….”
노경호 작가님은 나와 헤어진다는 생각보다, 나의 비서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못 먹는다는 생각이 더 아쉬웠나 보다.
“이번엔 나도 형 의견에 동감. 박제환 작가님이 여기 오고 나서 살이 엄청나게 쪘다니까?”
“동지들이여, 자네들의 본거지를 옮길 준비가 되었는가?”
“그건 너무 민폐 아니야?”
“허…….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민폐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민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민폐가 아니게 되지. 왜냐? 박제환 작가님은 민폐라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니까!!”
“…….”
나와의 헤어짐보다, 그간의 편안함이 아쉬운 사람은 노경호 작가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내가 작업실을 옮긴다고 말하자, 글을 쓰고 있던 작가님들이 모여서 대책 회의를 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주제는 먹을거리.
물론 여기 있는 작가님들은 수입이 부족한 게 아니었다.
어디 가서 자랑할 수 있을 만큼의 수익을 올리는 사람들.
‘비서들이 가져다주는 편안함이겠지…….’
아무리 수익이 많고, 돈이 많다 하더라도 일반인들에게는 한계가 있다.
당연히 가정을 가진 사람도 여럿 존재했다.
그런 그들에게 비서들이 가져다주는 고급 음식들은 어떻게 느껴졌을까?
아마 돈만 충분하다면 자신들도 비서를 구하고 싶지 않았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자,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일주일에 한 번씩 작가님 사무실로 가서 회식하기로. 대신 작가님의 작품을 조금이나마 살펴보면서 잘못된 길로 가지 않나 확인도 해주고.”
“좋은데?”
“작가님은 괜찮으세요?”
“뭐… 저야 받은 도움이 워낙 크다 보니, 그 정도야 괜찮죠. 더군다나 작품에 대한 의견을 묻고 싶기도 했고요.”
이런 걸로 싫어하기에는 그간 여기서 받은 도움이 적지 않았다.
작가로서 한 층… 아니, 최소 몇 배는 더 성장하게 만들어 줬다.
무엇보다 작품으로서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었던 나인만큼 그간의 고마움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와… 근데 다들 궁금하지 않으세요? 작가님이 늘어난 필력으로 무협을 쓰시면 어떻게 될까요?”
대화를 나누다 문득 생각난 게 있는 듯 의문을 드러내는 막내 작가님.
막내 작가님만이 가지고 있던 의문이 아니었나 보다. 주변에 있던 다른 작가님들도 관련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다는 둥, 연재 말고 원고로 확인할 거라는 등 자신들도 궁금하다는 말을 전해 온다.
이 의문은 그들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나 역시 가지고 있는 의문.
‘지금 글을 쓰면 얼마나 재밌을까?’
글이 재밌는 걸 떠나서, 내가 얼마나 즐거울까 그게 제일 궁금했다.
처음 과거로 돌아와 글을 쓸 때, 지금도 그때의 감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지금은 그때보다 욕구가 더한 상태.
집필에 들어가서 주인공이 되어 여행을 시작하면, 얼마나 재밌을지 나조차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 * *
‘이곳으로 정하길 잘했군…….’
작업실을 구하기 전 고민이 많았다.
장소를 어디로 정해야 될지 말이다.
경호원들이 보안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하지 않았다면, 노경호 작가님이 있는 곳에서 계속 있었을 정도로 홍대란 장소는 매력적이었다.
그런 만큼 다른 곳으로 가기보단, 이 주변에 작업실을 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구한 곳.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장소였다.
‘어차피 작업을 하는 곳이니…….’
물론 평수가 작은 건 아니다. 그렇다고 남들이 나를 생각했을 때의 이미지를 갖춘 작업실이냐?
그 정도 크기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약 80평 정도 크기의 작업실.
작가로서 사용하기에는 말도 안 되게 큰 구조이지만, 나라는 사람이 작업하는 공간으로서는 조금 부족할 수 있는 크기였다.
애초에 작업을 하는 데 큰 공간이 필요하지 않은 만큼, 크게 불만이 들지는 않았다.
‘좋네…….’
새로운 작업실에 들어가기 전.
오랜만에 홍대 거리를 걸었다.
솔직히 그간 불안한 마음도 컸었다.
만약 세 번째 작이 계속해서 안 써지면 어떻게 하냐는 불안.
글을 썼는데 예상보다 좋지 못한 반응이 들려오면 어떻게 하냐는 불안.
내가 그토록 좋아하던 글이 이제는 쓰기 싫어지면 어떻게 하냐는 불안 등 많은 생각들이 나를 괴롭혔었다.
그럴 때마다 할 수 있다며 나를 위로해 준 홍대의 목소리들.
홍대에서 꿈을 키우며 버스킹을 하는 사람들에게 크나큰 위로를 받았었다.
“하…….”
그럼에도 나오는 한숨.
은연중에 기대했던 그녀와의 만남이 없었기 때문인가 보다.
직접 찾아갈 생각은 없었지만, 우연이라도 한 번쯤은 마주치고 싶었다. 그래서 홍대라는 장소에 더욱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운명이 아니었던 걸까?
그동안 많은 시간을 홍대에서 보냈지만, 그녀와 마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럴 때마다 많은 욕심이 밀려온다.
그녀를 직접 찾아가는 건 어떨까?
전생에서의 실수는 그대로 내버려 두고, 이번 생에 더욱 잘해 주면 되지 않을까?
그녀도 나의 도움이 필요할 텐데…….
마음속에서 나를 자극하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당당히 그녀를 볼 자신이 없었기에 무의식적으로 피해 왔던 것 같다.
‘아직은 아니다.’
이런 마음으로 그녀를 찾아가 봤자, 제대로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할 걸 잘 알았기에 지금은 글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어제부터 계속해서 쓰고 싶었던 세 번째 작.
아니, 한 달 전부터 집필하고 싶었던 작품을 말이다.
이제는 마음의 준비가 됐다고 생각한 나는 정처 없이 돌아다니던 발걸음을 작업실이란 장소로 목표를 정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새로 구한 작업실로 발걸음을 옮기던 도중, 익숙한 지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가 버스킹하던 곳으로 향하는 거리.
오랜만에 그녀가 생각나서일까?
나도 모르게 감상에 젖기 시작했다.
‘맥주라도 하나 마셔야겠어.’
물론 글을 쓰고 싶은 건 맞았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거리를 걸으며 그녀와 추억이 담겼던 곳을 되짚고 싶었다.
나도 모르게 욕심들이 피어오르고 있었나 보다.
마음을 정한 나는 편의점에 들러 그녀와 마셨던 맥주를 구매했다.
그녀를 통해 처음으로 마셔 본 캔맥주.
이렇게 생각하니, 그녀와 함께했던 짧은 시간 동안 처음 경험한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났으니 당연한 건가?’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아르바이트라는 것을 하지 않으면 자신의 가족들이 밥조차 먹기 힘든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다.
당연히 그녀가 버스킹하는 건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늦은 밤 시간.
마침 지금도 밤이었기에 기억에 남아 있던 장소를 구경했다.
맥주를 마시며 작품에 관한 생각을 잠시 뒤로한 채 추억에 잠겨 걷고 있었다.
그런 나에게 청아한 목소리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수많은 버스킹하는 사람들과 섞여서 들려오는 이질적인 소리.
하지만 그 소리를 들은 나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기억 속에서 몇백 번… 아니, 몇천 번은 곱씹었던 목소리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내가 가장 힘들 때, 나에게 가장 큰 힘을 줬던 목소린데…….
혹시나 하는 생각에 두 다리가 굳었다.
혹시나가 아니었다.
확신이었다.
분명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건 그녀인 게 틀림없었다.
전생에 그룹의 성장을 위해 그녀를 나 몰라라 했던 내가 다시 한번 그녀 앞에 서서 눈을 마주해도 될까?
그런 과분한 행운을 내가 거머쥐어도 되는 걸까?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동시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는다.
마치 머리가 굳은 기분.
‘보고 싶다…….’
그럼에도 드는 생각.
그녀를 한 번이나마 보고 싶다는 거다.
어차피 여러 명 있는 관객 중의 한 명으로 보일 터.
혼자 가서 본다고 그녀가 특이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이미 홍대로 작업실을 구했다는 거부터가 어쩌면 그녀와의 만남을 기대했다는 거다.
한 번 부린 욕심, 다시 한번 부려보기로 마음먹은 나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금방 지나갈 소나기죠.”
“…….”
이건 운명인 건가?
내가 가장 힘들 때 나에게 처음으로 위로해 준 노래.
그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노래를 부르는 그녀를 보니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그 얼굴과 전혀 다른 점이 없었다.
전생의 마지막 순간에도 온전히 기억나던 그녀의 얼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다시 볼 수 없는 선택을 한 게 얼마나 후회됐는지 몰랐다…….
노래 부르는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데 얼굴에서 차가운 물방울이 흘러내린다.
뭘까.
이 눈물은 어떤 의미일까?
과거에 성공과 그녀를 저울질했을 때, 나의 이득을 선택한 거에 대한 후회?
그 선택을 함으로써 그녀는 꿈을 위해 도전조차 못 할 걸 알고 있음에도 성공을 택한 거에 대한 후회?
무엇을 생각해도 행복보다는 후회라는 감정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마 나를 위로해 주던 그녀에게 성공을 위한 선택을 했던 게 컸나 보다.
어쩌면 과거로 돌아와 가장 하고 싶었던 선택은 작가라는 길을 걷는 것보다 그녀를 다시 만나, 새로운 관계로 이어가는 걸 바라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런 선택조차 생각하기에 염치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외면해 왔나 보다.
이 눈물이 왜 흐르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한 것 같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그녀를 놓친다면 그 어떤 선택보다 후회할 거라는 걸.
욕심이라고 해도 좋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다.
그 모든 것들을 감안하더라도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KG 엔터테인먼트라…….’
그녀의 꿈을 잃게 만들었던 소속사.
동시에 성공을 위해 싸우길 포기했던 회사.
물론 동성 그룹의 후계자인 내가 고개를 숙일 정도의 회사는 아니었다.
단지, 대현 그룹이 공격해 올 걸 알고 있던 나에게는 단 하나의 흠집조차 위험했었기에 피해 갔던 거다.
그래…….
단지, 흠집이 무서워서 그녀를 포기했던 거다…….
그녀도…….
그녀의 꿈도…….
이런 내가 그녀의 앞에서 다시 선 건 욕심일 수 있지만, 한번 욕심을 부려볼 생각이다.
이번 생은 그런 흠집 따위 전혀 무섭지 않았다.
그것보다 무서운 건 다시는 그녀 앞에 설 용기조차 못 낼까 봐…….
그게 가장 무서웠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