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 * *
우리 가족이 할아버지 집 안으로 들어가자, 여기저기서 시선이 몰리는 게 느껴졌다.
이전에 왔을 때 받던 시선과는 조금 다른 느낌.
아무래도 바뀐 내 상황에 대한 시선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 다들 형 보면서 수군거리는데? 이거 사인이라도 해줘야 되는 거 아니야?”
“그냥 신기해서 쳐다보시는 거겠지.”
“우리 형, 해리포터 쓴 작가처럼 된다더니, 한국 한정으로는 그 이상이 된 것 같은데?”
“…….”
이 상황이 낯설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나를 보고 정환이가 장난스럽게 놀려오기 시작했다.
평상시라면 이 정도로 당황스러운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 테지만, 이런 시선을 할아버지 집에서 받는다 생각하니, 조금은 낯설게 느껴져 정환이에게 침묵으로 답변했다.
그런 내 반응이 재밌었을까?
할아버지 집 안으로 들어가고 나서도 정환이는 나를 놀려댔고, 결국 참지 못한 내가 꿀밤을 한 대 때리고 나서야 녀석은 겨우 조용해졌다.
“어머! 동서 벌써 왔어? 조금 천천히 오지 그랬어. 아직 음식 준비가 다 안 됐는데…….”
“에이, 제가 도와야 되지 않겠어요, 형님. 그래도 아버님이 드실 건데.”
“괜찮아, 이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어. 아 참, 내 정신 좀 봐.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빨리 방에 가서 조금 쉬고 있어. 내가 마저 준비하고 있을게.”
“…고마워요, 형님. 제환이도 급하게 오느라 조금 피곤하다고 했는데.”
“그럼 안 되지. 제환이가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서라도 좀 쉬라고 해야지.”
“…….”
작년과는 확연히 달라진 큰어머니의 반응.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재벌이라는 특성상 한번 우위라는 인식이 심어지면,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태도가 달라지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런 큰어머니를 바라보는 어머니 표정을 보니, 확실히 제대로 효도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사람은 못 느낄 테지만, 오랜 시간 어머니를 봐 온 나는 알 수 있었다. 어머니가 굉장히 기뻐하고 계신다는 걸.
그간 어머니가 받은 스트레스를 잘 알고 있기에, 오랜만에 아들 노릇을 한 것 같아 뿌듯한 감정이 들었다.
‘그래도 생색은 내게 해줘야지.’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큰어머니. 덕분에 조금이나마 휴식을 취할 수 있겠네요.”
“어유. 뭐 내가 하는 게 있나. 일하는 사람들이 다 준비하는 건데. 그냥 지켜보는 거니까 불편해하지 말고 편히 쉬도록 하렴.”
큰어머니 말대로, 대부분의 일은 집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이 하고 있었다. 그래도 배려받은 사실은 달라진 게 없기에, 형식상이나마 감사의 인사를 전한 나는 가족들과 함께 짐을 푸는 곳으로 향했다.
* * *
“어우, 속 시원해. 우리 제환이가 성공하니까 대우도 달라지네.”
“형이 크게 성공하긴 했나 봐. 큰엄마가 저렇게 180도 달라진 거 보면.”
“내가 피곤할까 봐 배려해 주신 거지.”
“아이고. 우리 아들은 착한 걸까, 아니면 착한 척을 하는 걸까. 누가 봐도 아들이 성공하고 나니까 뭐 하나라도 떨어지려나 저러는 거잖아.”
“어쩔 수 없죠. 그렇게 자라 왔고, 그렇게 배워왔는데.”
“누구 배에서 나왔는지 몰라도, 참 어른스럽네.”
방에 들어온 어머니가 그간 쌓아온 스트레스를 풀었다며, 지금 상황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정환이도 그 의견에 동의한 건지, 어머니의 말에 힘을 실어주는 말을 덧붙였다.
“여보, 그래도 너무 그러진 마. 우리가 달라진 게 아니야. 제환이가 달라졌을 뿐이야.”
“내 아들이 달라진 건데 우리가 그러면 좀 어때서. 그리고 매일 이러나? 오늘 같은 날이야 즐기는 거지, 다음은 이러지도 않을 거네요.”
“혹시나 해서 말해 봤어. 형님도 속이 많이 상할 거야. 이번에 준비하던 원전 산업이 제환이가 가져가게 돼서, 위치가 애매해졌으니까.”
“에효……. 참 명절마다 서로 눈치 보면서 하는 게 씁쓸하긴 하네.”
똑똑―
가족끼리 모여 이야기하며 쉬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방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끼익―
들어오라는 말을 건넴과 동시에 곧바로 열리는 문.
열린 문 사이로 쭈뼛하게 서 있는 친척 동생이 보였다.
“혜지구나? 누가 우리 데리고 오라고 시킨 거야?”
작은아버지의 외동딸 혜지.
혜지가 우리 가족을 찾아올 일은 극히 드물었기에 혹시 누군가 심부름시킨 게 아닌지 어머니가 질문을 던졌다.
도리도리―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드는 혜지.
아직 중학생밖에 안 되는 나이여서일까? 오랜만에 보는 친척 동생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럼 무슨 일로 온 거니?”
“혹시, 오빠 사인받을 수 있어요……?”
“제환이 사인?”
“네……. 친구들 사이에서 오빠 엄청 유명하거든요. 얘들이 사인 부탁한대요.”
“우와……. 형은 좋겠다? 친척 동생한테 사인도 다 해주고.”
사인받을 수 있냐며 어색한 표정으로 종이를 내미는 혜지.
나에게 있어 사인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있는 종이에다가 혜지가 불러주는 친구들의 이름을 적으며, 사인해 주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번 연도 중순 정도인가?’
전생 이번 연도 중순에 집안에 안 좋은 사건이 발생했다.
혜지가 베란다에서 떨어진 것.
그때 당시에 사고라는 말을 전하며, 조용하게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석연치 않은 구석들이 느껴졌다.
일단 혜지가 베란다에서 떨어질 일이 잘 없다는 것.
얘가 흡연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활동적인 아이도 아닌데 굳이 베란다 위에 올라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소식을 전하는 작은아버지의 표정.
그때는 가족들에게 큰 관심이 없었기에 크게 의아함을 느끼지 않았지만, 뭔가 숨기는 게 있었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순한 사고일 수도 있지만, 혹시나 혜지가 안 좋은 생각을 하고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 뒤에도 성인이 되기 전까지 혜지의 밝은 모습을 좀처럼 본 적이 없던 것 같다.
‘정신 병원을 다니던 게 베란다에서 떨어진 트라우마가 아니라 다른 이유였다면?’
성인이 되고 나서 병원에 다니며 표정이 점차 돌아오기 시작했지만, 만약 안 좋은 일로 그런 결정을 했다면 이번 생은 막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짚고 넘어가자.’
이번 명절이 지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혜지가 준 모든 종이에 사인을 마치며,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자, 됐어. 혹시 또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오빠가 도와줄 테니까.”
“네……. 감사합니다…….”
조용한 목소리로 허리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마음을 전하는 혜지.
저렇게 귀여운 아이가 혹시……. 혹여나 안 좋은 일을 당하고 있다면 참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제발 단순히 사고였길 바라는 마음으로 혜지가 나가는 뒷모습을 지켜봤다.
“형, 왜 그런 표정 짓고 있어. 사인해 준 게 싫어서 그래?”
“응? 아니야. 좀 피곤해서 그랬나 보네.”
“에효……. 일 좀 적당히 좀 쉬면서 해라. 몸 망가질라.”
혹시나 안 좋은 일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 그 감정이 고스란히 표정에 드러났나 보다.
정환이가 표정이 왜 그러냐는 말을 건넸고, 아직은 정해진 게 없다는 생각을 한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이 순간을 넘어갔다.
식탁에 모여 있는 동성 그룹의 구성원들.
‘나도 부담감을 느끼고 있던 건가?’
과거로 돌아오면서 가장 먼저 생각했던 게 글을 쓰는 데 집중하자는 거였다.
만약 일이 잘 못 돼 수입이 없더라도, 글을 쓰기만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 말이다.
이제껏 그런 마음을 갖고, 다른 부담감은 없었다고만 생각해 왔다.
지금 와서 보니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분명 작년과 같은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훨씬 편안하게 느껴졌다.
작년에도 경쟁을 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없었기에 식사 자리가 편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대성이 너는 이번 연도에는 무엇을 할 생각이냐.”
“…아무래도 준비하던 게 사라져서 좀 더 찾아봐야 될 것 같습니다.”
“에잉, 쯧. 아직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는 게냐?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이번 정권을 민주당이 잡은 이상 그룹 차원에서는 원전 산업을 할 수가 없어. 미련을 버리래도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고 있나 보구나.”
“…….”
작년과 똑같은 질문으로 시작되는 식사 시간.
큰아버지는 아직 자신이 준비하던 원전 산업이 뺏겼다고 생각해서일까?
평소라면 쉽사리 드러내지 않을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채, 할아버지 마음에 들지 않은 대답을 내뱉었다.
‘사람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일들은 부정하지.’
큰아버지 입장도 이해가 간다.
자신이 도전해 보고 포기했더라면 지금만큼 억울한 감정을 느끼진 않을 거다.
하지만 아무런 도전도 못 해보고,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자신이 준비하던 걸 조카에게 넘겨야 되니 얼마나 속이 쓰리겠는가.
그건 그거고, 경영인답지 못한 행동에 조금은 실망스러웠다.
아무리 기분이 나쁠지언정, 이런 자리에서는 티를 내서는 안 됐다.
여기서 자신의 기분이 나쁘다고 이해해 줄 사람도 없었거니와 그런 생떼를 받아 줄 사람 또한 전혀 없었다.
“지우, 너도 네 아비랑 같은 생각인 게냐?”
“아버지 마음은 이해가 가지만 어쩔 수 없는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정부가 출범하자마자 곧바로 외치는 탈원전을 생각하면, 할아버지 말씀처럼 그룹 전체에 피해가 올 수 있으니까요.”
“아비보다 아들이 낫구나.”
“하지만 아버지 마음도 이해해 주십시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채 포기해야 했다면 모르겠지만, 모든 준비를 마치고 나서 제환이한테 넘겨야 된다고 하니 얼마나 속이 쓰리겠습니까.”
“…그래도 아비를 생각하는 아들이 있으니, 대성이 너도 아주 아쉽지는 않겠구나.”
역시 마지막까지 나와 경쟁하던 지우 형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에게 마음에 드는 대답을 건네고, 혹여나 큰 아버지가 마음이 상하시기라도 할까 봐 뒤에 말을 덧붙인다.
지금 상황에서 정답에 가까운 대처였기에, 정환이가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환이도 정당하게 얻어내야 된다.’
솔직한 말로 내가 외부에서 확실히 도움을 준다면, 정환이가 동성 그룹을 차지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거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다. 정환이도 경쟁을 통해 곤란함을 겪고,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서 동성 그룹을 차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견디기 힘들 때는 도와야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니, 지우 형에게 조금이나마 미안한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전생에서는 이런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데, 심경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아마 글을 쓰면서, 주인공이 되어 여러 가지 상황들을 헤쳐나가다 보니, 나도 모르게 숨겨놨던 감정들이 깨어나고 있었나 보다.
‘나중에 제대로 정리하자.’
아직까지는 복잡한 심경에 당장의 정답을 내리지 못한 나는 앞으로 동성 그룹에 대한 경쟁을 다시 한번 고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현이 너는 어떠냐?”
“그렇지 않아도 아버지께 말씀드릴 게 있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질문이 큰아버지를 지나, 아버지 차례로 넘어가자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할아버지에게 말할 게 있다는 아버지.
전생에는 없었던 일이었기에 무슨 일인가 하는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