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 * *
다음 날.
오늘은 다음 정권의 여당 대표가 될 남자와 만남이 있는 날.
지금 시기에 그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사람이었기에 이번 만남이 재밌을 것 같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계획에 없던 사람이어서인가?’
사실 이 남성과의 만남은 그 어떠한 계획에도 없었다.
전생에 썼던 마지막 글이나, 이번 일을 진행하면서 계획했던 것들에서도 말이다.
이제는 정치권에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만큼,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에 들어온 연락을 확인하고는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이때의 그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 과연 전생에 봤었던 대로, 그는 날카로운 식견을 가지고 있을까?
젊은 시절의 그를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들뜨는 것 같았다.
“반갑습니다, 작가님. 올바른당의 이석준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박제환 작가입니다.”
식당에 들어 온 나를 발견하고 허리를 숙이고는 손을 내밀며 인사하는 남성.
첫인상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호칭에서부터 오늘 많은 준비를 했다는 게 느껴졌다.
보통 나와의 첫 만남을 가진 사람들은 작가라는 호칭보다는 회장이라는 호칭을 부를 확률이 높았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작가보다는 회장이라는 직함이 높은 위치에 있으니.
하지만 그간 나에 대한 조사를 해와서일까? 회장이 아닌, 작가라는 호칭으로 나를 불렀고, 나 역시 그런 호칭이 마음에 들었기에 그의 첫인상이 괜찮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가 대접해야 됐는데,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아닙니다. 요즘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공개적인 곳보다 제가 편하게 다니는 이곳이 낫습니다.”
“이곳은 제가 계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정한 장소이고, 얻어먹을 정도로 돈이 부족하지는 않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석준 씨 입장에서는 자기가 계산하는 게 나았을 거다.
상대방에게 계산을 미룬다는 건, 다음 만남도 있을 거라는 무언의 약속이었으니.
그런 기대를 내가 계산한다는 말로 없애서일까? 그는 조금은 어두워진 얼굴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일단 밥부터 먹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죠. 오늘 만남이 긍정적으로 끝났으면 좋겠군요.”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달그락― 달그락―
밥을 먹으면서, 석준 씨를 살펴보니 확실히 싹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대화를 이어 가지 않고 밥을 먹자는 말을 건네면 조급함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석준 씨는 밥을 먹으면서도 어떠한 티를 내지 않으면서, 여유롭게 대화의 시간이 다가오길 기다리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할까요?”
“좋습니다.”
서로 분위기를 살피며, 식사를 마무리하자 차가 들어왔다.
차를 들고 입에 가져다 댄 나는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말은 넌지시 건넸다.
“일단 대화에 앞서 한 가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질문이라…….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이곳에 나오신 건 작가로서인지… 그게 아니라면 사업가로서 저와 만남을 가진 건지 질문드리고 싶습니다.”
“…….”
나쁘지 않았다.
두 개를 나눠 대화에 임하는 자세.
대화에 들어가기 전 확인하는 질문.
그사이에 어떠한 불쾌감이 느껴지지 않게, 적절히 완급 조절을 하는 걸 보니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박제환으로서는 석준 씨를 만날 명분이 적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저도 인간 이석준이 아닌, 정치인 이석준으로 대화에 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사실 이번에 연락드린 건 어떻게 보면 도전에 가까웠습니다. 작가님의 작품을 통해 결과론적으로 민주당이 정권을 가지고 가게 됐죠. 야당에 있는 저로서는 연락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해합니다.”
“하지만 도전하지 않으면, 앞으로 제자리에 안주할 것만 같아 한번 용기를 내봤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저는 미래를 봤을 때, 영향력을 가진 정치인이 될 자신이 있습니다. 그에 맞는 준비도 해왔고요.”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말과 함께 눈빛이 변하는 석준 씨.
어떤 준비를 해와서 나를 설득시킬지 궁금증이 들었다.
“성인인 만큼, 감정으로 호소하지 않겠습니다. 사업가로서 나오셨다기에 그에 맞는 조건을 걸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정치를 하면서 JH 그룹에 많은 편의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한번 도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자신을 도와달라는 석준 씨.
아직까지는 그렇게 끌리지 않았다.
지금 석준 씨가 나에게 내민 카드는 그 어떤 정치인이 오더라도 내밀 수 있는 카드.
아직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졌다.
“부족하군요. 석준 씨가 어떻게 저를 판단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가 가진 영향력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정치인들이 움직이는 발걸음 하나하나에 국민들이 반발을 하는 시대가 다가올 겁니다. 그때 가서 다음 세대에 적응하지 못한 정치인은 회장님을 돕는 데 쉽지 않을 겁니다.”
“석준 씨는 다르다는 건가요?”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다릅니다. 지금 모든 정치인들이 잘못 판단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모든 사람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색깔을 확실하게 가져가는 정치인이 사람들에게 지지받게 될 거죠.”
“흠…….”
“제가 회장님에게 도움받고 싶은 건, 이 사이에 균열을 심는 겁니다. 회장님이 저를 믿고 생산 공장 부지 선정권만 준다면, 민주당의 앞마당인 호남 지방으로 찾아가 사람들에게 설득할 겁니다. 지역으로 가르지 않겠다고. 다음 정권부터는 지역별로도 표가 나뉘겠지만, 나이 별로도 표가 나뉘게 될 겁니다. 저는 20대, 30대에 균열을 심는 거죠.”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지 잘 알 것 같다.
석준 씨는 자신의 색깔을 가져가면서, 다른 색깔에 균열을 심는다는 얘기 같았다.
균열은 이번에 지을 생산 공장이 그 역할을 해줄 거고.
‘다음 정권을 확정 지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솔직히 이다음 정권을 야당이 가져갈지 조금은 걱정이 되고 있었다.
전생에 야당과 여당의 투표 차이는 약 26만 표.
조금의 나비 효과가 결과를 뒤바꿀 만큼 근소한 차이였다. 저 약간의 차이도 앞의 이 남성이 중간에 끼어들어서 겨우 상황을 뒤엎을 수 있었던 거다.
만약 나비 효과로 인해 다음 정권도 민주당이 가져가면 어떻게 될까?
생각해 봤지만, 꽤나 곤란함을 겪을 것 같았다. 이미 할아버지에게 검사를 후원하며, 이번 정권과는 형식상의 관계만 맺으라는 말을 전했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이번에 넘겨받기로 한 원전 산업.
원전 산업 또한 다음 정권이 그대로 이어진다면, 꽤나 골칫거리로 작용할 여지가 다분했다.
이것저것 생각을 이어 가며, 득실을 따지던 나는 다음 정권을 확정시키기 위해 앞에 남성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석준 씨 또한 나를 이용하는 것.
서로가 서로를 필요했기에 가능한 거래인 것 같다.
“아직까지는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많이 남아 있지만,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도움을 주신다면,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드릴 자신이 있습니다.”
“그 말을 믿어보도록 하죠. 만약 앞으로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 서로가 떠날 수 있다는 걸 기억해 주시죠.”
“물론입니다. 절대 후회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직 해드리고 싶은 말은 많지만, 행동으로 보여드리는 게 나을 것 같군요.”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생산 공장은 석준 씨가 나서서 가져가지 못한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석준 씨는 야당에 속한 인물. 직접적으로 석준 씨가 생산 공장의 부지를 정한다면, 나와 이번 정권의 사이가 애매해진 만큼 조금은 우회해서 호남 지방의 마음을 사야 했다.
‘여기까지 생각해 왔으면, 지켜볼 만하겠는데.’
방금 내가 한 말에 진의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해결책을 냈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 해결책을 알고 있지만, 말해 줄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직접 호남 지방의 마음을 산다고 한다면 실망감이 클 것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회장님의 승낙이 떨어지면 호남 지방에 있는 여당 의원을 만날 생각입니다. 다음 정권에서 한 자리와 이번 생산 공장의 부지 선정 권한을 약속해 준다면, 굳이 민주당에 남아 있으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끝이 아닐 텐데요.”
“다음 대선에서 탈당하고, 저희 쪽으로 부를 생각입니다. 그렇게 되면 해당 의원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 균열을 심어줄 수 있겠죠.”
“다행히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왔네요. 최대한 해당 시의원과 도의원을 만나 혜택을 양보받았으면 좋겠군요.”
“잘 타이르면 많은 양보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의견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난 것 같다.
전생에서 다른 사람들은 석준 씨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하는 발언과 행동 하나하나에 감탄을 느꼈었다.
얼핏 보면 가볍게 느낄 수 있는 발언에 숨어 있는 정치적 의미들. 그 모든 것들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지 않았던가.
전생에 느꼈던 것들을 지금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 이번 만남이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도 우리는 앞으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난 또 한 번 석준 씨에게 놀라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계속해서 나누는 대화에서 드러나는 미래에 대한 그의 예견. 석준 씨도 전생을 경험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앞으로 미래를 제대로 꿰뚫고 있었다.
이 남성과는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나는 서로 제대로 된 연락처를 교환할 수 있었고,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질 수 있었다.
* * *
명절 당일.
그동안 연락이 왔던 사람들과 만남을 가져서일까?
시간은 금방 흘러 또다시 설날이 다가왔다.
과거로 돌아와 제대로 된 설날을 경험한 게 두 번.
매번 겪을 때마다 변해 가는 나의 상황에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번에는 100억이었던가?’
저번 설날에는 1년에 100억을 벌었다는 얘기로 친척들을 놀라게 하는 소식을 전할 수 있었다.
그 소식을 전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이번에는 약 16조의 수익을 얻고, 할아버지의 집으로 향할 수 있게 됐다.
과연 친척들은 달라진 나를 어떻게 대할까?
큰어머니는 아직도 동성 그룹에서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나를 견제하려고 해올까?
원전 산업을 나에게 넘겨주게 된 큰아버지는 나를 안 좋게 생각하지 않을까?
달라진 상황에서 오랜만에 만나는 친척들이어서 그런지, 많은 궁금증이 들기 시작했다.
“아들, 이번에는 어깨 펴고 당당하게 가자. 우리 아들이 아버님보다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데 이제는 뭐라 못 할 거 아니야.”
“어머니…….”
“그렇게 쳐다보지 말렴. 엄마가 말을 하지 않았지만, 그동안 우리 아들이 글을 쓴다고 얼마나 비웃던지. 이런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엄마도 몰랐지 않아?”
“정환이 너는 조용히 하지 못해? 내가 이번 명절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형. 효도한다 생각하고, 이번 명절 화이팅.”
“…….”
할아버지 집으로 향하기 전 만난 가족.
저번과는 다르게 당당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좋은 거겠지?’
나를 위로해 주던 작년과 다르게, 당당하게 할아버지 집으로 향하는 어머니를 보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