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 * *
고급스러운 한 식당.
“하하, 이거 동성 그룹 회장님과 술자리를 가질지 꿈에도 몰랐습니다.”
“이렇게나마 만나 뵐 수 있어서 영광이군요.”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정치 쪽에는 시선을 안 주던 동성 그룹이 저에게 연락이 왔다는 건, 좋은 신호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감사합니다.”
손자가 만들어 낸 현 상황을 최대한 동성 그룹 쪽의 흐름으로 바꾸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박대호 회장.
마침내 차기 대선 유력 후보와의 자리까지 만들 수 있었다.
앞의 남성 말대로 동성 그룹은 그간 정치 쪽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충분히 정치 쪽의 도움이 없어도 그룹을 운영하는 데 큰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형식상의 관계는 있었지만, 긴밀한 관계를 맺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동성 그룹이 출범하고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이며, 다른 사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앞의 남성도 그중 하나.
제환이가 말하길 차기 대통령이 될 사람이라는 말을 전했다.
‘제한이 말이라면 믿을 만하지.’
제환이와 만남을 가진 지 몇 주가 흐른 지금.
처음 나에게 찾아와 계획을 설명했던 대로 상황이 흘러가고 있었다.
제환이가 나이에 맞지 않게, 훌륭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딱 맞아떨어지는 현 상황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런 제환이가 앞의 남성이 차기 대통령이라는 말을 전했으니, 믿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나저나 「회고록」이라는 소설을 쓴 작가는 참 대단하군요. 암울한 현실에 놓인 대한민국을 다시 한번 개혁을 외치고자, 국민들의 손에 촛불을 들게 하다니.”
“그렇게 말입니다.”
“참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더군다나 12년 전, 제가 비서실장에 있을 적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죠. 물론 그때는 정치인들에 의해 시작된 촛불 시위였지만 참 아찔한 감정이 들더군요.”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럼요. 다르고 말죠.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정치인들의 말을 듣고 일어났던 국민과 소설을 통해 현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움직이는 국민. 그 사이에 큰 차이가 존재하죠. 저는 그 차이를 만든 게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 대통령도 몰랐을 겁니다. 자신이 앞서서 외치던 하야를 똑같이 돌려받을 줄은.”
한 가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차기 대권 후보, 그는 작가가 내 손자라는 걸 알고, 나를 떠보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반인들이야 손자의 정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을 거다. 그간 정보를 통제하기도 했고, 손자를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니.
제환이가 「회고록」이라는 소설로 유명해진 지금은 더욱 정보를 신경 써서 틀어막았었다.
그렇다고 해도 앞에 남성이 모를 수 있을까?
다음 정권을 움켜쥘 이 남자가?
끝까지 모른 척할까 고민도 들었지만, 느낌상 알고 말하는 것 같았기에 굳이 나서서 숨기지 않기로 결정했다.
“저는 재벌 3세에 대해 좋은 시선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어려움 없이 자란 아이들이니, 좀 부족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동성 그룹 3세를 보니, 또 다르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요! 좋게 볼 수밖에 없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국민들에게 개혁을 외치게 하다니. 이 얼마나 훌륭한 일입니까. 대한민국 한정으로 20대 중에 가장 영향력이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
“그와 동시에 한 가지 걱정이 들더군요. 그 칼날이 다음에는 저를 향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요.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선거 기간 동안 그 작은 여론 하나하나가 치명적으로 작용합니다. 만약 선거 기간 동안 작가님이 저를 향해 칼날을 들이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 상황을 보니, 큰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에 남성의 말이 맞다.
선거 기간 동안은 그 어떠한 흠집조차 크게 느껴지는 시기. 더군다나 흠집을 일반 기자가 다루는 것과 이번에 말도 안 되는 영향력을 갖춘 제환이가 다루는 거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앞의 남성의 말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 부분은 잘 타이르겠습니다. 아마 지금을 제외하고는 정치권에 개입하는 일도 많지 않을 겁니다.”
“제가 바라는 건 많지 않습니다. 방금 회장님이 말했던 대로 개입하지 않을 것. 이미 상황은 저희 쪽으로 기울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것 또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죠.”
“동성 그룹 또한 많은 양보를 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자칫 대기업 회장들의 큰 반발을 불러올 수 있는 일을 저희 당 의원들과 만나서 중간에 조율을 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움직였을 뿐이죠.”
“그래서 자그마한 도움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다음 정권을 가져갔을 때, 아드님이 원하고자 하는 바 한 가지와 동성 그룹이 원하는 한 가지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방금 대권 후보가 나에게 했던 약속은 충분히 다음 정권 동안 우리 그룹이 한 자릿수로 올라갈 수 있는 발판이 돼 줄 만한 약속이었다.
제환이는 여기까지 예상했던 걸까?
나에게 했던 말 중에 작가로서 동성 그룹에 도움이 되겠다는 말이 있었다.
‘오히려 그룹을 이끌 때보다 영향력이 높다.’
대권 후보가 눈치를 봐야 되는 손자.
만약 내 말을 듣고, 동성 그룹에 입사해 그룹을 이끌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을까?
알고 있다. 지금 상황이 특이하단 걸.
정치인들에게 작은 흠집조차 문제가 되는 시기임과 더불어 선거 기간이라는 특수성, 더해서 지금과 같은 사태를 만들어 낸 손자의 영향력.
두 가지가 합쳐졌기에 가능한 일이란 건 알고 있다.
‘그래도 대단하다.’
이 모든 걸 감안하더라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제는 인정해야겠다.
그때 손자의 결정이 맞았다고.
역시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가장 빛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합니다. 제 손자에게는 잘 전하도록 하죠.”
“다음에 만남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군요.”
“그 의견 또한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슬슬 박차를 가하도록 하죠.”
“박차라면…….”
“저희 당에서 여론을 조사한 결과. 현 대통령이 하야를 해야 된다는 의견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탄핵해서라도 끌어내려야 된다는 의견이 나머지였고요. 아마 12년 전을 생각하고 버티기에 들어간 것 같은데,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원하는 탄핵이니…….”
“그래서 저희 당은 이번 주 내로 입장 표명을 낼 생각입니다. 하야를 해야 된다고. 지금 각 당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다른 당들도 준비를 마쳤다는 말이 들려오고 있거든요. 심지어 여당도 말이죠.”
“거의 끝났다고 봐야 되는군요.”
“손자분도 그에 맞춰서 여론을 한 번 더 불타오르게 만들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말을 전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제환이가 작업하는 일 또한 여론을 움직이는 일이었으니.
생각을 해본 결과, 어렵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 나는 알겠다는 대답을 전했다.
사실 지금 머릿속에는 한 가지 부탁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떤 부탁을 해야 동성 그룹에 큰 이득을 가져올 수 있을지.
머릿속에서 행복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손자와 이야기를 나눠 보겠습니다.”
“그럼 이쯤에서 자리를 마무리하기로 하죠. 다음번에는 손자분과 다 같이 만났으면 좋겠군요.”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럼.”
인사를 하고 일어서는 남성.
계속해서 손자와의 만남을 강요해 온다.
욕심이 나나 보다.
제환이가 가진 영향력이.
물론 지금은 크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있을 테고.
하지만 이번 일이 마무리되고 나서도 제환이 위치가 그대로일까?
제환이의 계획을 듣고 따로 조사해 본 결과, 제환이는 이번 일을 끝으로 단일 인물로서 재벌가의 힘을 가진 사람으로 바뀌게 되어 있다.
그때 가서는 그 누구도 만남을 청하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설령 대기업 회장들이라고 해도 말이다.
‘서로 이용하는 거지.’
방금 만났던 남성.
그와는 지금 관계가 좋다고 끝까지 이어 나갈 생각이 없다.
제환이가 말하길, 앞에 남성보다 우리가 후원하고 있는 검사가 더 중요한 존재라는 말을 들었다.
저 남성은 다음 정권 동안 단물만 빼기로 결정하고는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집회가 일어난 지 삼 주.
서울을 밝히던 촛불들이 이제는 각 지방으로도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목 놓아 외치던 하야의 답변이 돌아왔다.
자신은 의원들에 말을 듣고, 하야할 생각이 없다.
나를 내릴 수 있는 건 오직 국민들 뿐이다.
아마 12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버티기에 들어가려나 보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게 있다면 그때와 상황이 너무 다르다는 거다.
그때는 국회의원들이 급하게 움직여내 만들어낸 탄핵. 더군다나 명분 또한 지금과 다르게 탄핵할 정도의 실수가 아니었다.
‘지금은 다르지.’
지금은 그때와 문제가 차원이 달랐다.
대통령이 특정 당을 지지한 것.
대통령이 국정의 일을 민간인에게 맡긴 것.
두 가지를 비교했을 때, 후자가 말도 안 될 정도의 잘못이란 건 그 누구라도 알 수 있었다.
‘내가 알리기도 했고.’
대통령의 잘못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그때와 한 가지 차이점이 더 존재한다면, 아마 나라는 존재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언론이 아무리 발달됐다 하더라도 지금만큼 사람들에게 대통령의 실수를 부각하지는 못했다.
지금은 국민들에게 전달을 넘어, 그 과정에서 실수를 더욱 크게 만들어 반감을 더욱 올리는 과정까지 마쳤다.
그때와는 다르게 버티기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이제 결과를 지켜보면 되는 건가?’
그리고 버티기에 들어간 대통령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는 일이 발생했다.
각 당의 입장 표명.
12년 전의 일을 겪고서 몸을 사릴 거라 예상한 대통령의 생각과는 다르게 각 당은 대통령이 하야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대통령이 거절했기에, 탄핵 소추안을 발의한다는 말로 바뀌었고.
더군다나 12년 전에는 여당에서 지금과 같은 상황은 말이 안 된다며 본회의장을 점거 농성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여당도 포기했다.’
현 사태를 보면서 눈치를 보던 여당도 자신들의 힘으로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입장을 바꾸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대통령 편은 아무도 없다는 얘기.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애를 쓰고, 떼를 써도 대통령이 청와대에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 말은 내 위치가 바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
지금과 같은 흐름으로 미국 선거까지 마무리 짓는다면, 그때는 대한민국의 두 마리의 용이 탄생하게 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옛말이라 했던가?’
물론 나는 재벌가였기에 개천에서 시작된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을 거다.
이번 일을 끝으로 한국에서는 막대한 영향력을 가진 작가와 이번 사태와 미국의 선거를 정확히 예측한 전설적인 펀드매니저가 탄생하게 될 거다.
재성 씨도 그간 노력을 보상받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얘기.
하루빨리 그날이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그날이 머지않았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