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 * *
팀장님과 만난 지 일주일이 지난 오늘.
드디어 두 번째 작의 대략적인 플롯이 정해졌다.
제일 처음으로는 이야기를 진행함에 있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주인공.
주인공에게 서사를 부여했다. 주인공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고 어떤 환경에 노출됐는지.
주인공의 서사를 시작으로 주변 인물들을 한둘씩 설정해 나가기 시작했다.
설정하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은 주인공의 감정이었던 것 같다.
과연 주인공은 일을 처리하면서 어떤 감정을 가지고 회사를 운영할까?
도덕적 신념이 부족한 주인공은 어떻게 생각할까 같이 많은 의문을 던지며, 서사를 써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결정한 게 제일 잘 알고 있는 인물을 주인공의 서사에 부여하는 방식이었다.
‘전생의 나를 주인공으로 하면, 더욱 몰입해서 글을 쓸 수 있다.’
전생의 나는 내가 설정한 주인공과 비슷한 면모가 있다.
일을 진행하면서 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이득만을 바라보는 주인공.
이 점이 전생의 나와 이번 작의 주인공이 가지는 공통점이었다.
그런 주인공으로 차기작을 진행하면, 더욱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아 그것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생각해 나갔다.
지금까지 짜둔 플롯은 대략 100화.
글을 쓰면서 언제든 내용이 바뀔 수 있기에, 더 이상 플롯을 그만 짜고 이야기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처음 작품도 사람들에게 많은 관심을 받아 뿌듯한 감정을 느꼈지만, 이번 작품은 첫 작보다 더욱 사람들의 공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생에 회사를 이끌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게 발전이다.
일을 진행하면서 능숙하지 못하고 매끄럽지 못하더라도 괜찮았다. 발전하면 되니까.
하지만 무슨 일을 하든 발전이 없는 사람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기준에서는 나라는 사람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런 마음가짐이 회사를 이끌면서 나에게 큰 힘이 돼줬기에 이번 작품이 전 작품보다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사람들에게 비춰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있었다. 분명 사람들이 좋게 봐줄 거라고.
이때까지 적어 놓은 플롯들, 큰 줄기만 보더라도, 벌써부터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정한 큰 줄기들을 빨리 하나씩 풀어 나가고 싶은 나는 곧장 컴퓨터 앞에 앉아, 1화부터 글을 써 나가기 시작했다.
타닥타닥―
글을 쓰면서 느끼는 거지만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는 것 같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 그들도 그 노래의 주인공이 돼서 감정을 이입하면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네줄 수 있었다.
연기를 하는 배우. 그들 또한 배역에 감정을 이입해서 연기하면, 사람들에게 더욱 집중할 수 있는 힘을 불어넣어 준다.
그리고 글을 쓰는 작가.
지금 내 경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마치 나 자신이 주인공이 된 것처럼 사건을 풀어나가니, 글에 현실감이 더해지기 시작한다.
아마 글을 읽은 사람도 느낄 수 있을 거다.
자신이 글 속의 주인공이 된 것 같다고.
‘빨리 보여주고 싶다.’
글을 진행하는 나에게 드는 또 하나의 생각.
빨리 이 글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다.
이 글을 팀장님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리고 인정받고 싶다.
이번 작품도 사람들에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다음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
또 한 번 자신들에게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줬다고.
그다음… 이다음은 할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다.
내가 즐기면서 글을 쓰고 있다고.
내가 쓰고 있는 주제는 충분히 할아버지도 흥미를 가지면서 읽을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면서 전생에 느낀 나의 경영 철학을 넣어 볼 생각이다. 과연 할아버지는 이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을 가지실까?
이 작품 또한 성공하고, 할아버지에게 작가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글 쓸 때가 제일 즐겁군.’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매번 느끼는 거지만, 즐겁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현실에서 하지 못했던 것들을 글 속에 주인공이 되어 사건을 풀어 나가는 이 순간.
즐거움을 넘어 어떠한 쾌락까지 느껴졌다.
웹소설을 쓰는 사람들을 보면, 최소한의 살 수 있는 조건만 보장되면 글만 쓰고 싶다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이제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글을 쓰기 위해서 다른 걸 포기해야 된다는 선택지가 생긴다면, 모든 걸 포기하고 글을 쓰고 싶을 만큼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하지 않은가.
일을 마치고 다시금 집필하는 시기라 그런지, 더욱 행복하다는 감정이 느껴진 것 같았다.
* * *
다른 그룹 회장과 식사 자리를 갖은 박대호 회장.
“박 회장, 자네 손자는 어떻게 됐어? 경영에서 진짜로 제외시킨 거야?”
“크흠… 뭐 어쩔 수 있나. 자기가 싫다는데. 어릴 때부터 부족한 거 없이 자라다 보니, 자신이 받은 기회가 얼마나 행운인 건지 모르는 게야.”
같이 밥을 먹고 있는 GL 그룹의 이 회장.
점심부터 재수 없게 아픈 부분을 찔러온다.
안 그래도 요즘 연락이 안 되는 손주 놈 때문에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기에 괜히 손주에게 서운함이 밀려왔다.
아무리 경영에서 제외시키고 집을 나가라 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에게 연락을 안 한다니. 이래서 손주 농사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말이 돌아다니는 거다.
“그럼 자네 손주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승호한테 물어보니까 뭐 글을 쓴다고 하는 것 같던데?”
“계속 아픈 부분을 왜 이렇게 건드리는 거야? 자네도 제환이 그 자식의 재능을 알고 있으면, 그렇게 쉽게 놀리지도 못해. 이득을 위해서 판을 짜고, 그에 맞춰서 움직이는 능력. 나도 가끔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인데, 그걸 경영에 사용하지 않는다니……. 그러니까 속이 더 쓰린 거 아니겠어.”
“허허, 우리 박 회장 속 좀 쓰리겠어. 그렇게 자랑하던 손주 자식이 그룹을 뿌리치고 나가 글을 쓴다니까.”
“지금 놀리는 거야? 안 그래도 손주 자식 때문에 승계 구도가 어지러워져서 요즘 그룹 내에서도 시끄러운데, 자네까지 그렇게 놀리면 내가 뭐가 되나.”
지금 와서 후회가 되기 시작한다.
제환이에게 집을 나가라고 했던 날, 그때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취미로 글을 쓰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때 이후로 계속해서 그날이 후회됐었다.
아마 욕심이 나서 그런 게 아닌가 한 생각이 든다.
제환이가 자라면서 보여줬던 것들. 그건 다른 자식들에게 볼 수 없는 독기였다.
다른 자식들은 아무리 말을 하고, 당근을 제시해도 자신이 흥미가 없는 것에는 노력하는 척만 할 뿐, 그 누구도 진심으로 달려들지 않았다.
하지만 제환이만은 달랐다.
아무리 자신이 흥미가 없고, 목표가 없어도 내가 요구하는 것은 그 누구보다 독기 있게 파고들어 결국 유의미한 결과를 얻어냈다.
그런 제환이에게 많은 것을 바라고 있어서 그날 더욱 화를 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제환이라면 충분히 글을 쓰면서도 다른 자식들보다 회사를 잘 이끌 수 있을 텐데, 인제 와서 생각하니 그날이 너무 후회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다시 불러들일 수도 없고…….’
지금 상황이 진퇴양난인 게, 그렇다고 제환이를 다시 불러올 수도 없다.
제환이를 빠르게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 그간 했던 노력들이 제환이가 경영에서 제외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제환이를 다시 경영에 참여시켜 봤자 독이 될 뿐, 그 누구에게도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았다.
“아무튼 힘 좀 내라고. 승호 말 들어보니 그쪽에 재능이 엄청나다던데. 혹시 모르지 않나, 해리포터를 쓴 작가처럼 유명해질지. 그렇게 되면 자네 집안의 사람 중 제환이가 가장 부자 되는 거 아니야? 하하.”
“자네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아무리 우리 제환이가 글에 재능이 있고, 무슨 일이든 잘해 냈다고 하더라도 그건 제한이 있지 않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여튼 내 말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제환이한테 다시 잘하라는 거야. 자네 제환이를 제일 많이 아꼈는데 이대로 사이가 지속되면, 제환이가 자네를 먼저 찾아올 것 같아? 용서를 하는 것도 용기야.”
“…….”
이 회장의 말이 맞다.
솔직히 용서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다.
단지 용기가 없을 뿐.
괜히 이 회장과 식사 자리를 가져서 마음이 심란해졌다고 생각한 나는 그 책임을 이 회장에게 물도록 만들었다.
“자네 때문에 안 되겠어. 오늘은 나랑 술 한잔함세.”
“뭐야?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딱 보니까 손주가 보고 싶은데 자존심 때문에 연락도 못 하고 있고만, 괜히 나한테 뭐라 그래.”
“에잉, 쯧… 됐고, 오늘 자네랑 술 한잔할 테니까 도망갈 생각 마.”
“허허, 우리 박 회장이 술을 다 먹자 하고, 참 속이 많이 상했나 보네. 그래, 오늘은 내가 박 회장 술친구 해줘야겠어.”
그나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자신의 옆에 이 회장이 남아 있어서.
아마 내 위치에 있는 사람 중 이 회장처럼 같은 위치에서 편하게 술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요 1년간 보지 못한 손주 자식 때문에 마음이 울적했는데, 오랜만에 이 회장과 술자리를 가지려니 조금이나마 괜찮아지는 것 같다고 느껴졌다.
할애비 속도 모르고, 연락도 없는 손주 자식.
조만간 항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의 그룹이 뭐라고 우리 손주가 하고 싶단 걸 그렇게 말렸는지…….
만약 내 말을 듣고, 손주가 그룹을 이끈다 해도 후회하는 모습을 본다면, 아마 가슴이 찢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생각하니, 오히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인 손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행복한 인생을 사는 손주를 볼 수 있게 돼서.
“자, 그럼 회사 일 정리할 게 있으니까, 저녁에 보자고.”
“이따 보게.”
결국 저녁 술자리를 가지기로 한 이 회장이 오늘 일을 마치고 만나자는 말을 전했고, 나 역시 그룹에 남은 일이 있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일을 마무리하러 향했다.
* * *
JW 출판사 사무실에 있는 이철민 팀장.
“팀장님, 만화책으로 만드는 거 완성됐다고 합니다!!”
작가님과 만나고 이 주가 지난 지금, 드디어 만화책이 완성됐나 보다.
근래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려 왔는지 모르겠다.
하루가 지나가면 지나갈수록 그 하루가 너무나 아쉽게 느껴졌다. 그런 하루하루의 아쉬움을 조금이라도 달래기 위해 이번 일에 팀원들과 최선을 다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물이 드디어 완성됐다.
“언제 확인할 수 있는 거야?!”
“아마 내일쯤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공장에서 곧바로 보낸다고 했으니까 하루는 걸리지 않겠습니까?”
내일쯤이면 확인할 수 있을 거라는 김 대리의 말.
충분히 납득할 만한 대답이다.
완성되자마자 곧바로 보내서 도착하는 게 내일일 테니.
납득은 하지만 도저히 가만히 손 놓고 기다리지는 못할 것 같다.
지금 당장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마음이 초조해진 나는 이대로 기다리기엔 하루가 너무나 길게 느껴질 것 같아 결정을 내렸다.
지금 당장 공장을 찾아가자고.
내가 찾아가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도 확인할 수 있을 거다.
만화책으로 나오는 「절대자는 휴식을 원한다」 작품을.
“김 대리, 수고했어! 나 먼저 공장에 좀 찾아가 볼 테니까, 김 대리도 하던 거 마무리하고 퇴근해!!”
“아니, 팀장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저도 같이 갑시다. 어떻게 내일까지 기다려요!!”
“김 대리님!! 이거 섭섭합니다. 저도 곧 업무 끝나니까 같이 가는 걸로 하죠!?”
“참고로 저도 곧 끝납니다.”
우리 팀원들 모두가 이번 프로젝트에 사활을 걸어서일까? 다들 내일까지 기다리기에는 힘들다고 생각했는지, 공장으로 향한다는 나의 말을 듣고 다들 같이 가자는 말을 전했다.
이번 프로젝트는 모두가 함께하는 거인 만큼 혼자 가는 것보다 다 같이 가는 게 낫다고 판단을 내린 나는 팀원들에게 전했다.
“다들 5분 안에 마무리하고 출발하자고!! 오늘 일은 내일의 우리에게 맡긴다!!”
“네!!”
“네!!”
다들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5분 안에 마무리하자는 나의 말에 힘찬 대답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