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 *
함께하고 싶다는 말에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박제환.
비서실장님이 나의 말에 미래를 본 것일까? 평소에는 하지 않았을 실수를 해 왔다.
당황한 표정을 보니,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나 보다.
함께하자고.
오늘 이 자리에서 비서실장님에게 조그마한 흔들림을 주기만 해도 성공적인 만남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변수가 생겼다.
그것도 기분 좋은 변수.
혹시라도 당황한 비서실장님이 마음이라도 바꿀까 봐 밀어붙이기로 판단을 내렸다.
“함께하고 싶다는 말, 진심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그, 그게…….”
“혹시 지금 와서 말을 바꾸겠다는 건 아니겠죠?”
“후……. 솔직한 마음은 제환 씨에게 미래에 대한 얘기를 듣기 전에도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아무래도 회사 내 분위기도 이상하기도 했으니까요.”
“…….”
“그러다 제환 씨의 말을 듣고는 확신이 생기더군요. 이건 무조건 함께해야 된다고. 물론 갑작스러운 선택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한번 도전해 보고 싶군요.”
당황스럽다.
비서실장님이 말을 듣다가, 회사 내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말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내 기억상으로는 아직까지 사내 정치가 시작되는 시기가 아니었다.
큰아버지가 훼방을 놓고자, 동성 무역에 개입을 시작한 건 빨라도 4월.
아직 1월인 지금은 회사 내 분위기가 이상할 게 없다는 말이다.
물론 시기가 당겨질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벌써부터 사내 정치가 들어갔다는 말을 들으니, 내심 흠칫한 마음이 들었다.
‘조금씩 바뀌고 있군.’
내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미래 지식.
이것을 무력화시키는 조짐이 벌써부터 시작됐나 보다.
과거로 돌아와 가장 경계했던 나비 효과 말이다.
나비 효과를 의식해서 최대한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벌써 미래가 조금씩 바뀌고 있었나 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이번의 변화로 인해 비서실장님을 더욱 이른 시기에 데려올 수 있는 건가?’
지금의 변화가 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잠시 생각을 해 봤다.
생각해 본 결과.
나쁘지 않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번만 보더라도 상황이 좋은 쪽으로 흘러갔다.
나비 효과로 인해 더욱 이른 시기에 영입할 수 있는 비서실장님.
그로 인해 4개월 동안 할 수 있는 일들.
이것만 생각하더라도 손해는 아니었다.
더군다나 전생 마지막 순간, 소설을 집필했을 때 나 역시 글에 집중하고 싶은 마음에 사소한 부분까지 고려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큰 줄기만 바뀌지 않는다면, 나에게 피해가 오는 일은 없다는 말이다.
나비 효과에 대해서 생각하던 나는 오히려 좋아진 상황에, 이 변수를 이용하기로 했다.
“민호 씨는 저와 함께하는 걸로 생각해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한번 도전해 보고 싶군요. 급여 부분에서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면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 부분은 아쉬운 마음이 들지 않도록 챙겨 드리겠습니다.”
“그렇다면 최대한 빠르게 인수인계하고 합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요. 한 가지 할 일이 있습니다.”
생각보다 이른 시기에 내 편으로 만든 이 상황.
조금이라도 이 상황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했다.
“4개월이란 시간을 주겠습니다. 그동안 회사 내에 남아서 적과 아군을 구별하도록 하세요. 누가 동성 에너지 사장님의 라인을 탔는지, 누가 동성 무역 사장님의 라인을 탔는지.”
“그 부분은 이미 확인을 마쳤습니다.”
“…….”
“시선이 바뀌었다는 걸 파악하자마자 제일 빨리 파악한 게 그 부분입니다. 최대한 시간을 벌기 위해, 그들이 눈치채지 못할 때 정보를 교란시키려고 했거든요.”
비서실장님의 말을 들으니, 다시 한번 접근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부분 때문에 전생부터 비서실장님에게 많은 의지를 했었다.
무언가 상황이 발생하고,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면 이미 완수했다는 답변이 돌아오지 않았던가.
아직 경험이 덜 쌓였기 때문에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도록 하죠.”
“어떤…….”
적과 아군을 완벽히 구별했다고 하니, 그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선물을 받는다면, 동성 에너지 사장. 즉 큰아빠는 큰 곤란함을 겪을 게 틀림없다.
물론 내가 생각하는 대로 상황이 흘러갈지 장담은 못 하지만, 폭탄 하나는 남겨 두고 싶었다.
“이 상황을 이용해서 민호 씨가 살아남기 위해 발악하는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죠.”
“정확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민호 씨는 앞서 말한 탈원전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충분히 도전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 역시 제환 씨의 말을 듣자마자 분명 원전은 필요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걸 이용하는 겁니다.”
말을 듣고 생각에 잠긴 민호 씨.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생각을 하고 있나 보다.
어떻게 보면 간단한 이치다.
내가 가진 떡을 더욱 크게 만들어 상대방이 가로채게 한다.
그렇게 가져간 떡이 알고 보니, 허울 좋은 폭탄이었다.
이렇게 정리하면 편할 것 같았다.
“이때까지 민호 씨가 만들어 놓은 이미지를 이용하는 거죠. 민호 씨는 생각보다 어린 나이에 많은 일을 해 오면서 성공적으로 마무리해, 사장님의 신의를 얻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죠……?”
“당연히 같은 라인일 때야 그 성과들이 자신에게 이득이 되니, 가만히 지켜봤을 거고요. 하지만 지금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까요? 아마 민호 씨가 말하는 프로젝트에서 가능성이 느껴진다면 뺏어 가기 위해 별짓을 다 할 겁니다. 원전이라는 사업. 동성 에너지가 탐내기에 너무 좋은 먹잇감이 아닙니까.”
“하지만 탐낸다고 시도하기에는 정부에서 허락을 안 할 겁니다.”
민호 씨 말대로 정상적인 정부라면 허락하지 않았을 거다.
동성 에너지가 원전을 가져가기에는 명분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 정권에 많은 뇌물을 가져다준 게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 정권에는 이 방법이 통한다.
대통령의 뒤에서 여러 가지 참견을 하는 한 사람이 존재했다.
그는 지금의 대통령과 종교적으로 만나, 육체와 더불어 정신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는 사람.
지금 대통령은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믿고 따르는 그런 존재가 돼 버렸다.
이 사실은 재벌가라면 누구든지 아는 사실.
충분히 이용해 볼 만한 정보였다.
“재벌가들 사이에서 도는 정보가 있습니다. 지금 대통령 뒤에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요. 이번 정권에서 10위권 안에 있는 그룹들은 다 그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을 겁니다. 돈을 많이 주는 사람에게는 법을 개정하기 위해 뒤에서 도와주기도 했고요.”
“아니……. 그게 무슨…….”
“믿기 힘든 사실이겠지만, 진실입니다. 지금 시기가 정권 마지막쯤이라 아마 우리 그룹의 사람도 상대해 줄 겁니다. 이 정보를 이용해서 동성 에너지 라인으로 갈아탄 사람에게 말하는 겁니다. 이걸 활용해서 정부의 도움을 받아 원전 사업에 진출해 보자고.”
“확실히 그게 사실이라면, 아마 동성 에너지 입장에서는 군침을 흘리겠군요……. 지금 눈에 띄는 성과도 필요하고…….”
물론 동성 에너지 입장에서 내 선물을 안 가져갈 수 있다.
그렇게 되더라도 지금과 같은 상황에 한 가지 이득을 더 취할 수 있다.
애매모호한 적과 아군을 확실하게 구별할 수 있다는 점.
정보를 흘리다 보면 그사이에 갈팡질팡하는 사람과 동성 무역에 발전을 원하는 사람들이 분명 판가름이 날 것이다.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는 일.
그렇게 표현하면 될 것 같았다.
“4개월이란 시간이면 충분하겠습니까?”
“4개월 말씀이십니까?”
인수인계를 마치고 정보를 흘리며, 완벽히 적과 아군을 구별하는 일.
내가 아는 비서실장님이라면 4개월이란 시간 동안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4개월까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의 가능성을 보시고 제의를 해 주신 만큼, 이번에 보여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능력을 말이죠. 1개월이란 시간 동안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
1개월 만에 마무리 짓겠다는 비서실장님.
분명 불가능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비서실장님을 보고 있자니, 왠지 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부족하면, 그때 가서 늘리면 되기에 믿어 주고 싶다.
비서실장님을 믿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 주고 싶었다.
“그럼 1개월 뒤에 JH 자동차에 합류해 김형찬 씨라는 연구원을 도와주도록 하세요.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차 업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름을 남길 사람입니다. 옆에서 함께하며, 우리 회사의 미래를 지켜보시죠.”
“알겠습니다. 남은 1개월. 만족하실 수 있는 상황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급여 부분은 그때 가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비서실장님은 이번 일을 보고 자신의 능력을 판단 내려 주라고 말하는 것 같다.
과연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자신이 처리한 일을 보고 얼마 정도의 급여를 매길지.
저런 자신감. 너무 마음에 들었다.
일을 진행함에 있어 사람을 안심하게 만들어 주지 않는가.
전생과 다르게 시작한 새로운 인연에 두근거리는 마음이 들었다.
내 앞에 있는 비서실장님이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까?
내가 준비해 준 재료로 어떻게 요리해서 무슨 음식으로 완성시킬까?
그 음식들을 어떻게 포장해서 적들의 시선을 끌어모을 수 있을까?
비서실장님과 함께하기로 결정한 지금 많은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큰아버지는 독이 든 음식을 무시할 수 있으려나…….’
지금 시기에는 독이 든 줄 모르고, 그저 맛있어 보이는 음식으로 보일 거다.
하지만 이번 정권이 탄핵당하면서, 야당이 공약을 걸어오는 순간.
맛있어 보이던 음식이 사실은 독약이었던 걸 깨달을 수 있을 거다.
내가 준비한 선물을 받을지 안 받을지 모르겠지만, 노크 정도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 달 뒤. 민호 씨의 계약서를 작성할 때, 지금 생각하는 숫자가 바뀌었으면 좋겠군요.”
“분명 그러실 겁니다. 배경은 모르겠지만, 능력은 자신이 있거든요.”
서로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그 뒤로도 어떻게 일을 진행할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 자리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한 달 뒤에 만날 우리.
그때도 지금처럼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 * *
식사 자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온 이민호.
이번 식사 자리에서 나눈 대화의 마지막쯤.
잊고 있던 사실이 생각나면서, 나도 모르게 흠칫하고 말았다.
분명 나와 대화를 나눈 박제환은 이제 막 스물여섯 살이 된 걸로 알고 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전혀 그런 부분을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사장님이 젊은 모습이라면 저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사람이 동성 그룹을 이끌었어야 했는데…….’
어째서 회장님이 그토록 화가 나셨는지 알 것 같다.
나라도 저런 재능을 가진 사람이 경영에 참여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한다고 하면 너무나 안타까울 것 같았다.
회장님 같은 경우에는 안타까움이 분노로 변했을 테고.
‘나한테는 다행이다.’
동성 그룹은 아쉽겠지만, 나에게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저렇게 빛나는 사람과 미래를 함께할 수 있어서.
그것도 처음의 시작을 같이할 수 있어서.
대화를 나누면서 계속해서 욕심이 났다.
저 사람 옆에 서고 싶다고.
같이 미래를 만들어 나가고 싶다고.
그런 욕심이 나도 모르게 본심으로 튀어나와서 함께하자는 말을 뱉었는지 모르겠다.
이와 이렇게 된 거 보여 주고 싶다.
이제는 사장님이 돼 버린 그에게 내가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앞으로 한 달. 조금은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처음인가……?’
제대로 능력을 발휘하는 게 처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늘 경계했다.
언제나 눈에 띄는 사람은 경계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으니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조금씩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었었다.
앞으로 남은 한 달. 남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다음 만남이 기대된다.’
빨리 일을 마무리하고 다시 만나고 싶다.
과연 그때는 어떤 일로 날 놀라게 할까?
제환 씨와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회사에 오래 남아 있을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재밌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재미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남은 한 달을 최고의 상황으로 마무리 짓기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