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 * *
비서실장님을 마주한 박제환.
‘역시 알고 있나 보군.’
인사를 건네는 나를 보고 당황하기 시작하는 비서실장님.
주체하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니, 나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처음 회사에서 비서실장님이 나오는 걸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애매하게 접근하다간 할아버지 귀에 들어갈 수도 있기에 퇴근 시간에 맞춰 매일매일 살펴보고 있었다.
하지만 대기업의 전략기획실은 야근이 기본이어서일까?
3일 동안,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는데 4일이 되는 오늘 드디어 퇴근 시간에 나오는 비서실장님을 볼 수 있었다.
“저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어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을까? 피차 다른 사람 눈에 우리 둘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보이면 곤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좋아요. 제가 아는 카페가 있어요. 이야기를 나누기 괜찮은 곳이 있으니 그곳으로 향하도록 하죠.”
“좋습니다.”
“제가 뭐라 불러야 되겠습니까. 마땅한 호칭이 생각이 나질 않는군요.”
즐겁다…….
단순히 비서실장님과 대화를 나누는 것만 해도 너무나 즐거워진다.
역시 전생에서의 추억이 있어서일까? 지금 대화를 나누는 모든 순간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과연 비서실장님은 나를 뭐라고 불러야 마땅할까?
그 전처럼 회장님? 그것도 아니라면, 제환 씨?
상관이 없을 것 같다. 지금 당장은 비서실장님이 나를 모시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나이는 비서실장님이 더 많지 않은가.
이번에는 회장님 말고 다른 호칭으로 불려도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하게 이름을 부르셔도 됩니다.”
“그럼 제환 씨라고 부르겠습니다. 이동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저도 차를 끌고 가야 되는데 그쪽에서 다시 만나면 될까요?”
“아닙니다. 같이 이동하기로 하죠.”
“괜찮으시겠어요? 제 차는 국산 세단인데. 제환 씨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차가 없으니까. 일단 이동하기로 하죠.”
혹시나 자신의 차가 불편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비서실장님.
차가 없다는 나의 말을 듣고, 다시 한번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한다.
아마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재벌 3세가 개인 차량이 없을 거라고는.
하지만 어떻게 한단 말인가. 아직까지는 차의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는데.
글을 쓰면서 새로운 경험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깨닫고 있는 나는 이런 경험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언제나 세 대 이상의 차를 소유하고 있던 내가 차가 없어 비서실장의 차를 얻어 타야 되다니.
오랜만에 비서실장님이 운전하는 차에 올라탈 수 있을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익숙하군요.”
“아, 너무 염치없었습니까? 습관이 돼서 그런지, 죄송합니다.”
차가 없다는 나의 말에 자신의 차로 안내하던 비서실장님.
너무 능숙하게 뒷자리에 앉아서일까?
비꼬는 말투로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사실 이 부분은 내 실수가 맞는 것 같다.
아직 나는 비서실장님과 어떠한 관계로 맺어진 것도 아니고, 더욱이 상관의 입장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뒷자리에 앉지 않았던가.
오랜 습관 때문에 나도 모르게 당연하다는 듯이 뒷자리에 앉아 버렸다.
‘재밌군.’
약 1년이란 시간이 걸려 다시 만난 비서실장님.
비록 모습을 달라졌을지언정, 그 느낌이 그대로 남아 있기에 재밌다는 느낌이 들었다.
두 사람과 만났을 때와는 다른 느낌.
오늘 이야기가 잘 풀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진 채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카페에 도착한 박제한.
역시 비서실장님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 많은 경험을 쌓지 않았을 텐데도, 장소 선정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
둘만이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고, 은밀함을 요구하는 카페.
지금 나눌 이야기에 너무나 적합한 장소이지 않은가.
1년 만에 느끼는 비서실장의 감각에 다시 한번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자, 그럼 저를 찾아온 이유를 말씀하시죠. 제환 씨는 승계 구도에서 제 발로 나간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잘못 알고 있습니까?”
“정보가 생각보다 빠르군요. 맞습니다. 저는 애초에 동성 그룹에 관심이 없으니까요.”
“그럼 저를 찾아온 이유가 뭐죠? 저희 둘이 이렇게 만날 이유가 없을 텐데요?”
“이유가 없다고…….”
둘이 만날 이유가 없음을 정확히 명시하며 거리를 벌리는 비서실장님.
확실히 자신의 의견을 전하는 데 능숙함이 느껴진다.
내가 승계 구도에서 제외되지 않았다면 모르겠지만, 제외된 지금은 저렇게 강한 뉘앙스가 나중에 이득으로 돌아올 수 있다.
흥미로움을 느낀 나는 앞에 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채 생각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과연 어떤 말로 비서실장님을 흔들리게 만들어야 할까?
어떻게 행동해야 전생에 마지막까지 내 곁을 지키던 비서실장님으로 만들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결론만 나온다.
‘전생의 비서실장님으로는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번에 사업을 이끌 것도 아니고, 더욱이 나를 보조하는 태도도 아닌데, 굳이 이번 생에서도 그런 존재로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이번 생에는 조금 다르게 접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 진심이 통할 수 있게.
당신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내 진심이 통하게 말이다.
이전과 같은 만남은 권력으로 이어진 인연이 아닌가.
이번에는 권력과 물욕이 아닌 친분으로 이어지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민호 씨 말대로 지금은 이유가 없을지 모르겠군요. 하지만 그런 이유야 만들어 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이유를 말씀하시는 거죠? 혹시 경영에 참여하실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아무래도 비서실장님이 내 말을 오해한 것 같다.
자신을 찾아온 이유가 다시금 경영에 참여한다고 생각해서일까?
앞으로의 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은 오해였기에 곧바로 정정했다.
“아까도 말했듯 동성 그룹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럼…….”
“한 가지 묻고 싶군요. 민호 씨는 현재 자신의 위치에 만족하십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죠?”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입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모든 걸 바쳐도 결국 누군가의 희생양이 되는 삶. 만족하냐 이 말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왜 제환 씨에게 말씀드려야 되는지 모르겠군요…….”
비서실장이 흔들리고 있는 게 보인다.
내용은 차갑게 그지없지만, 그 안에서 망설이는 목소리.
그 망설임만으로 충분한 대답이 돼 준다.
만족스럽지 않다고.
자신이 죽을 듯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그런 삶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군요. 혹시 회사를 나와 저와 함께 일해 보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까?”
“회사를 그만두고 제환 씨와 일을 한다라……. 이 자리에서 대답을 드리고 싶지는 않군요. 일단 내용이라도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내용이라도 들어 보고 싶다는 비서실장님.
표정을 보니, 나를 무슨 미친놈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말한 내용에 대해서 궁금증이 느껴졌을까?
내용이라도 들어 본다는 답변을 건네 왔다.
‘어떻게 반응하려나…….’
이제부터는 비서실장님에게 미래에 대해 어필을 해야 될 시간인 것 같다.
이번 대화로 충분히 비서실장님의 마음을 돌릴 자신이 있었다.
내가 아는 비서실장님 또한 미래에 대한 선견지명이 누구보다 뛰어나니까.
직접 겪은 미래와 현 상황을 어느 정도 더 해서 가능성만 보여 준다면, 충분히 마음을 흔들 수 있을 것 같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성공이다.’
애초에 목적은 균열을 심어 넣는 것.
지금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이미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더해서 균열의 크기를 좀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는 투자 회사와 함께, 대한민국에 새로운 재벌 그룹을 만들 생각입니다.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로 가장 빠른 시기에, 제일 큰 성장을 기록하는 그런 그룹을 말입니다.”
“…….”
“하지만 저는 한국에서 제일가는 그룹을 이끄는 것보다 글을 쓰는 게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룹을 이끌 사람이 필요했죠. 그 역할을 민호 씨한테 맡기고 싶군요.”
“왜 저한테라는 질문은 일단 제쳐 두겠습니다. 이 질문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방금 들은 말이 황당하게 느껴지거든요. 설마 단순한 포부라고 말하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만약 아무런 계획도 없이 방금 발언을 한 거라면, 실망감이 느껴질 것 같군요.”
굳은 표정으로 계획을 말해 달라는 비서실장님.
어떻게 보면 일종의 시험인지 모르겠다. 자신이 이 자리를 포기하고 나에게 와야 할 이유를 찾기 위한 시험 말이다.
분명 시험과도 같은 상황인데도, 왜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내심 자신이 있나 보다.
비서실장님을 설득할 자신이.
한편으로 기대도 되기 시작했다.
과연 내가 계획해 놨던 것들을 비서실장님은 어떻게 바라볼까?
충분히 가능성을 볼 수 있을까?
비서실장님이 나에게 문제를 내민 동시에 나 역시 역으로 질문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내가 말한 부분을 이해할 수 있겠냐고.
지금의 당신이 내가 이야기하는 계획의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겠냐고.
이렇게 말해도 가능성을 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다.
앞으로의 길에서 비서실장님은 제외되는 수밖에.
무거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비서실장님에게 조금은 격양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민호 씨는 원자력 발전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JH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내가 만들 그룹의 한 축을 담담하게 될 JH 중공업.
형찬 씨에만 의존해야 하는 JH 자동차와 다르게, JH 중공업은 미래를 볼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도 성공시킬 수 있는 회사이다.
물론 가능성을 본다고 성공시킬 수는 없을 거다.
그 과정 속에 많은 제약이 있고, 예기치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니.
하지만 미래를 확신하고 있는 나에게는 JH 자동차와 같이 큰 포텐셜을 가지고 있는 회사 중에 하나라고 생각한다.
과연 민호 씨는 어떻게 생각할까?
다른 사람과 같이 환경을 생각하고 탈원전만을 고집하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원자력 발전소에 대한 중요성을 인지하고는 자신의 의견을 말해 올까?
어떤 방식이든 괜찮을 것 같다.
그것 나름대로 재밌어질 테니.
‘내 이야기를 듣고도 탈원전만을 고집한다면 그때는 문제가 되겠지…….’
만약 내가 전하는 이야기를 듣고도 탈원전이 정답이라고 말하며,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다.
각자의 길을 가는 수밖에.
그때는 비서실장님이 합류한다고 해도, 거절을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아는 비서실장님과 지금의 비서실장님은 큰 차이가 존재하는 것 같으니.
제발 마음에 드는 대답이 들려오길 바라면서, 생각에 빠진 비서실장님의 대답을 기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