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 * *
놀이터에 있는 남성을 바라보는 박제환.
마치 세상에 배신당한 사람이 있다면, 저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의 모습은 악에 받쳐 있었다.
지금이 가장 최적의 타이밍인 것 같다.
그에게 달콤한 사탕을 건네줄 시기가.
이틀을 더 기다린 보람이 있었을까?
달콤한 말을 내뱉으며, 손을 내밀자 나의 손을 붙잡는 남성이 보인다.
발판을 만드는 작업이 80% 가까이 완성돼 간다.
이제는 마지막 퍼즐만 맞추는 일만 남은 셈.
악에 받쳐 있는 남성과 이야기를 나눠 보면 될 것 같다.
“괜찮으면 점심을 대접해 드려도 되겠습니까? 곧 있으면 점심시간이니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죠.”
“좋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놀리는 거라면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기분이 좋다.
분명 남성이 경고를 해 오는 건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지 모르겠다.
아마 세상에 자신의 재능을 빼앗기기만 하던 사람이 뭔가 각성한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악에 받쳐 눈이 충혈된 이 남성.
저 태도가 맞는 거다.
요즘 세상에 착한 사람은 손해만 보는 구조.
다가오는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부정하는 게 맞는 태도란 말이다.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지도 모를 남성이 정신을 차린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마음가짐마저 달라진 남성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면 어떻게 될까?
벌써부터 곤란함을 겪어야 할 대현 그룹을 생각하니,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맛있게 들어요. 둘만이 있는 공간이니 주변 의식하지 않으셔도 돼요.”
“…….”
강남에 위치한 소고깃집.
은밀한 사업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자주 이용하는 가게다.
우리가 나눌 이야기가 그 정도로 은밀함이 필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사람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당신은 이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당신의 전 직장인 기어가 사람을 잘못 판단한 거라고.
아마 저 사람은 기어를 향한 분노가 한 단계 더 올라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침묵에 휩싸인 식사를 마무리하자, 조용히 식사하던 남성이 나에게 말해 온다.
“이제, 용건을 말씀하시죠. 복수를 해 주겠다는 말은 뭐고. 당신은 누구시죠?”
“급하시군요.”
남성의 표정을 보면 마음속에 엄청난 분노가 남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급했다.
이제는 나의 사람이 될 남자.
이런 식으로 성급하게 일 처리를 하는 건 앞으로도 바라지 않는 방식이다.
만약 계약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이 상황을 이용했을 것 같다.
분노로 이성이 마비된 남성에게 판단이 어렵다는 걸 이용해 계약을 진행했을 거다.
하지만 확신이 있다.
이 남성이 나와 계약할 거라는 걸.
확신을 가진 이상, 마비된 이성은 지금 대화에 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충격을 줘서라도 대화를 한 번 끊고 가야겠다고 판단을 내렸다.
“아니지……. 당신이 누구든 상관없어요. 저에게 복수할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하겠어요. 노예가 되라고 해도 기꺼이 당신의 노예가 되겠습니다.”
역시나 지금은 대화할 준비가 안 돼 있다.
분노를 가지고 사람들에 대한 실망과 자신에게 향하는 실망은 괜찮다.
근데 딱 거기까지. 자신의 분노로 인해 상황 파악을 못 하는 건 멍청한 짓이다.
내 입장에서는 좋기야 하겠지만, 나를 언제 봤다고 누구든 상관없다는 말을 건네는가.
평생을 함께할 동업자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이기에 조금은 충격을 주더라도 정신 좀 차리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김형찬입니다.”
“혹시 혼자 생활하고 계십니까? 부인이나 아이 생각은 안 하시나요?”
“…그게 무슨…….”
“지금 김형찬 씨가 하는 짓이 혼자서 죽자 살자 달려드는 게 아니면 뭡니까? 복수만을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한다는 말과 같은데 그 짐을 혼자서 짊어질 수는 있습니까? 그렇게 복수하면 의미는 있습니까?”
“…….”
내 말의 워딩이 조금 강하게 느껴졌을까?
분노로 가득 찬 얼굴이 내 말을 듣고는 붉으락푸르락하기 시작한다.
이내 몇 초가 지났을까? 점차 분노가 사라지고 김형찬 씨의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땅으로 향하는 시선.
아마 자신의 행동이 어땠는지 생각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지금 김형찬 씨는 그저 분노를 삭이기 위해, 모든 걸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
“그렇게 복수에 성공하고 나서 그 후에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미래는 없습니까? 가족도 생각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냉정하게 지금 상황을 바라보세요.”
“…….”
땅으로 향하던 시선이 더욱더 내려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땅을 바라보다 입술을 깨무는 형찬 씨.
이내 마음을 바꿔 먹은 건지 바뀐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까와 다른 의미의 질문이다.
무엇이든 하겠다가 아닌, 무슨 행동을 하는 게 맞느냐는 질문.
만족스럽진 않지만, 사람이 한순간에 바뀔 수는 없기에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어떻게 하는 건 형찬 씨의 몫입니다. 저는 형찬 씨에게 투자할 생각입니다. 제 투자를 받고 회사를 키워 기어 자동차에 복수를 하든, 연구를 진행해 형찬 씨를 비웃었던 그들을 생각하며 보란 듯이 성공하든 그건 형찬 씨의 몫이죠.”
“투자라 하면 어떤 말씀이십니까.”
“회사를 하나 설립할 생각입니다. 그곳의 연구소장을 맡아 주세요. 계약금 2억, 연봉 3억. 지분 5퍼센트. 그 외 성과금은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죠.”
“자본금은 어떻게 되죠?”
“자본금은 1년 차에 20억, 2년 차 50억, 3년 차 100억 이렇게 점점 늘려 나갈 생각입니다. 이건 최소한의 자본금. 만약 더 필요하다고 말씀하시면 판단을 내린 후 더욱 늘려 드릴 생각입니다. 이 자본금은 형찬 씨가 연구하는 데 다 쓰셔도 되고 남기셔도 무방합니다.”
“…….”
여기까지가 내가 준비한 조건이다.
지금 당장만 본다면 형찬 씨에게 가는 지분이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
지금 당장은 그럴지 모른다.
회사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고, 매출이 나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형찬 씨의 지분을 늘려 줄 생각이다.
처음부터 높은 지분율을 갖고 시작하는 것과 성과를 낼수록 올라가는 지분율.
지분을 양보하는 내 입장에서는 후자가 더 좋지 않은가.
더군다나 지금 형찬 씨에게는 동기가 존재하고 있다.
기어 그룹에게 복수하겠다는 동기.
지금은 그 어떤 동기보다 형찬 씨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돼 줄 거다.
“회사 지분은 형찬 씨가 성과를 내면 그때마다 올려 드리도록 하죠. 절대 후회하지 않게 대우해 드리죠. 지금보다 훨씬 성공한 사람이 돼 있을 겁니다.”
“좋습니다. 솔직히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무일푼으로 일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하지만 투자자님의 말을 듣고, 머리가 띵해지기 시작하더군요. 투자자님 말대로 저만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지금이라도 정신을 차리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충분히 유리한 입장에서 조건도 더 낮게 잡을 수 있었는데, 저를 배려해 주신 거 감사합니다. 배려라고밖에 표현할 말이 없군요. 지금의 배려, 미래에 그 이상으로 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거 참 든든하군요.”
다행히도 형찬 씨가 정신을 차린 것 같다.
분노로 이성이 마비된 형찬 씨가 정신을 차렸으니 이제는 일 이야기로 넘어가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지금 내 상황.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다.
물론 내가 형찬 씨를 도와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다면, 성과를 낼 수 있는 기간도 빨라질 테고 회사가 커 가는 속도도 빨라질 거다.
‘그렇게 되면 내 시간이 없다.’
어디까지나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은 내 인생에 주가 아닌 부가 되어야 한다.
방금 생각한 것처럼 일을 진행했다가는 글 쓸 시간도 없이 하루하루 일에만 집중해야 됐기에, 시간이 걸려도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다시 얻은 인생. 전생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지 않은가.
“형찬 씨가 괜찮다면, 당분간은 회사 내실을 잡는 데 집중하고 싶군요. 방금 연구소장으로 말씀드렸지만, 앞으로 몇 달까지는 형찬 씨가 사장 역할을 해 주세요.”
“정확한 설명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제가 회사 운영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제가 자본금을 넣어 드리면, 그 금액을 이용해 형찬 씨의 환경을 만들도록 하세요. 연구할 수 있는 환경, 연구에 필요한 인원들, 회사를 운영하는 데 있어 필요한 환경을 형찬 씨가 주도해서 만들도록 하세요.”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회사 내 시스템이 다 저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뭐든 좋습니다. 한번 만들어 보도록 하세요. 형찬 씨가 만족할 만한 회사를.”
서로가 윈윈일 거다.
회사에서 상처받은 형찬 씨는 자신의 사람들로 회사를 구성할 수 있고, 나는 시간을 아낄 수 있다.
나중에 회사의 내실이 잡히면, 그때 비서실장님을 불러오면 될 것 같다.
전생의 비서실장님이 그때쯤이면 사내 정치에 실패를 경험할 때. 그때부터 지금 만드는 회사는 날개를 달고, 하늘 높이 날아오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법인을 만들어서 20억을 먼저 입금해 드리도록 하죠. 부족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회사명은 JH 자동차로 정하겠습니다.”
“입금되는 즉시 움직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 뻔했는데,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이 은혜 두고두고 갚아 가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고개를 숙이는 형찬 씨.
그런 형찬 씨에게 나 역시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서로 감사의 표시를 담은 인사를 하고는 계약 이야기를 이어 가기 시작했다.
회사를 어떻게 운영할지부터 시작해서 계약은 어떻게 진행할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한 참 지나고 계약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 * *
계약을 마무리 짓고 집으로 향하는 김형찬.
하마터면 오늘 큰일이 날 뻔했다.
아침에 쓰레기 자식을 보고 끓어오르던 분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할 뻔했다.
분노로 인해 가정을 생각하지도 못하다니.
어쩌면 노예 계약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나를 배려해 준 투자자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달칵―
오랜만에 놀이터에 들어가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유일한 안식처인 놀이터를 들르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는 게 얼마 만일까?
단지 회사만 그만뒀을 뿐인데, 너무나 많은 게 달라진 것 같다.
“오빠 왔어?”
“아빠!! 아유니 아빠 얼굴 그림 그려따? 엄마가 자기 안 그려따고 뭐라 해떠, 혼내 줘!”
나를 발견한 아내와 딸이 반겨 주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나에게 그림 한 장을 들고 달려오는 아윤이.
아마 아내와 같이 그림 공부를 하고 있었나 보다.
“어디 보자……. 우리 아윤이가 아빠 어떻게 그렸나 한번 확인해 볼까?”
과연 아윤이는 나를 어떻게 그렸을까?
아윤이가 들고 있던 그림을 확인하니, 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나의 그림이 보인다.
“아빠!! 이렇게 웃어죠!! 아빠 요즘 힘드러!! 속상하단 말이야.”
“…….”
나도 모르게 회사에서 받던 스트레스를 집 안에서 은연중에 드러냈나 보다.
자신이 그린 그림처럼 웃어 주라는 말을 전하는 아윤이.
미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를 바라봐 주는 가족들을 두고 어리석은 선택을 하려고 했다니.
그와 동시에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이제는 그림 속에 있는 나처럼 환하게 웃어 줄 수 있어서.
“오늘 우리 가족 외식할까?! 아빠가 쏜다!!”
“꺄아!! 아빠 최고!! 엄마 나 자래써?!”
“우리 아윤이가 아빠 기분 좋게 해 줬나 보네. 아윤이 아빠한테 뽀뽀.”
그동안의 일이 미안한 마음이 든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어 주며 가족들과 오랜만에 외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