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 * *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박제환.
재성 씨를 만나 이야기를 나눈 지 10일 정도가 지났을까?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 보겠다는 재성 씨의 문자가 도착했다.
이런 문자를 보고 있으면, 비즈니스를 제외하고서 인간적으로서도 좋은 인연이 생긴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기분이 좋아진 나는 한번 열심히 부딪쳐 보라는 문자를 보내고는 다시금 앞에 펼쳐진 노트에 집중했다.
앞에 펼쳐진 노트.
내가 과거로 돌아와 제일 먼저 작성한 계획표다.
노트를 바라보던 나는 제일 중요한 표시로 돼 있는 항목에 펜을 꺼내 줄로 그었다.
방금 그은 항목.
재성 씨에게 투자하기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첫걸음은 뗐다.’
아주 중요한 단계이면서 가장 초기의 단계.
재성 씨에게 투자하는 게 과거로 돌아와서 해야 될 제일 중요한 선택 중에 하나였다.
이번에 성공적으로 일을 마무리한 것 같아 뿌듯한 감정을 느끼며, 다음 단계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재성 씨는 돈과 영향력을 위한 준비였다.
그렇다면 남은 단계는 무엇을 위한 준비일까.
과거로 돌아오기 전 마지막까지 나를 힘겹게 했던 대현 그룹, 그들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에 대한 투자.
어떻게 보면 재성 씨와 마찬가지로 큰 비중을 다루고 있는 인물이다.
‘다행히도 지금은 큰 빛을 보지 못하는 인물이다.’
지금 다니던 회사에서 나와 자신이 차린 회사로 기업가치 10조를 달성한 남자.
그것조차도 경영을 못 했다는 평이 주였었던 사람.
오직 기술력만 가지고 10조 원을 달성한 자동차 업계에서는 전설적인 사람.
이런 수식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번에 접촉해야 될 사람이다.
대현 그룹과의 원한 측면에서 보면, 재성 씨보다 더욱 중요한 위치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 남성이 최고의 자리로 오르는 분야.
대현 그룹의 주력 사업인 자동차 분야이지 않은가.
또한 공교롭게도 이 남성이 불합리함을 느끼는 회사는 기어 자동차. 대현 그룹의 산하에 있는 회사이다.
이 부분을 생각해서 그에게 접근한다면, 충분히 공공의 적을 두고 힘을 합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비서실장님에게 접촉해서 경영을 맡긴다.’
만약 일이 잘 풀려서, 투자가 진행이 된다면 그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줘야 했다.
전생에 모든 사람이 그에게 부족하다고 말하던 부분이 바로 경영이다.
마침, 나는 경영에서 최고의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전생에서 마지막까지 나의 곁을 지켜 주던 이민호 비서실장님.
나의 수족이 돼, 일을 처리하면서 한 번도 아쉬움을 주지 않던 사람.
경영에서의 능력도 확신이 드는 게, 마지막으로 비서실장님에게 준 회사는 사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합쳐지면, 엄청난 시너지가 날 것 같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설렘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비서실장님이 사내 정치에 밀리기 시작한 건 올해 6월인데…….’
시기도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이번 남성에게 접근하면서, 그에게도 회사를 정리하고 새로운 출발을 할 시간을 줘야 됐다.
비서실장님도 6월 정도에 접촉을 할 수 있으니, 모든 일의 시작을 6월로 정하면 될 것 같다.
이렇게 생각하니 6월에 많은 일이 몰려 있는 것 같다.
자동차 회사의 설립과 비서실장님과의 접촉.
현재 대통령 탄핵을 위한 투자의 본격적인 준비.
이 모든 게 6월 달에 이루어지지 않는가.
앞으로 다가올 6월.
그날을 기점으로 미래를 위한 발판은 많은 역할을 해 줄 거다.
도약을 위한 발판.
내가 앞으로 할 도약에 얼마만큼의 힘을 실어 줄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새해가 밝은 아침부터 일어난 나는 노트를 펴고 다시 한번 계획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일단 그 사람에게 접근하기 위해선 어떠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내가 알고 있는 정보.
그의 나이와 이름.
근무하고 있는 회사 등을 알고 있다.
이 정도 정보만 하더라도 흥신소에 부탁하면, 어떤 상황에 있고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거다.
‘제발 잘 돼야 할 텐데.’
이 사람에게는 당장의 수익을 바라지 않는다.
미래에 대현 그룹을 무너뜨릴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되길 바랄 뿐.
이 사람에게 부족한 건 자본과 경영 능력.
자동차에 한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 지식과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자본과 여건이 충족된다면, 날개를 펴고 하늘 높이 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번에 만남이 재성 씨와의 만남보다 중요할지 모르겠군…….’
어떻게 보면 이 사람이 재성 씨보다 더욱 대단한 업적을 세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일푼으로 조금씩 돈을 불려 나가는 것과 무일푼으로 돈을 깎아 먹으며, 연구를 진행하는 것.
그 연구 결과물로 시장 가치 10조 원으로 탈바꿈시키는 것.
미래를 알고 있는 나지만, 후자는 시도조차 못 할 것 같아 보일 정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가.
‘애초에 집중하는 분야가 다른 거니까.’
애초에 전문 지식이 다르다.
전생에 나는 경영에만 집중했었지, 자동차에 관한 전문 지식은 전혀 접해 보지도 못했었다.
우리 그룹인 동성 그룹도 자동차 쪽과는 관련이 없기에 더욱 그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다.
만약 두 번째 남성까지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나중에 가서는 재계 5위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올라간 내 회사가 동성 그룹과 MOU를 맺으면 어떻게 될까?
대현 그룹이 함부로 하지 못하는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성장한 그룹으로 전생에 나를 공격하던 대현 그룹을 야금야금 깎아 먹을 생각이다.
종국에는 우리 그룹이 흡수할 수 있도록.
압도적인 재계 1위인 삼오 그룹과 경쟁할 수 있도록.
미래를 생각하고 나니 더욱더 이 남성의 필요성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접근하기 좋은 상황인 것 같은데…….’
흥신소에 조사를 맡긴 지 일주일.
조사를 완료했다는 연락과 함께 택배를 통해 관련 조사 기록이 적힌 종이를 건네받았다.
내용을 확인하니 지금 그 남성이 처한 상황이 나에게는 한없이 좋은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남성에게는 불행한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연구해 낸 자료를 선임에게 뺏기고, 사내 정치를 당해서 오히려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이니.
하지만 나에게는 지금 상황이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좋은 상황인 게 틀림없다.
어째서 엄청난 지식과 선견지명을 갖고 있는 남성이 어려운 길로 향한 건지 의문이 들었는데, 지금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 남성은 사내 정치를 할 줄 모른다.
회사는 사업과 다르다.
자신의 업적을 올리기 위해선, 실력보다는 사내 정치가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이 남자, 정치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인가 보군.’
아마 사람 됨됨이로서는 좋은 평가를 받았을 거다.
누구에게는 정직한 사람으로 보일 테고, 남을 음해하는 걸 경멸하는 사람으로 보일 테니.
그렇다고 해도 회사에서는 악인이 되어야 하는 순간도 있다.
방심을 하는 순간, 자신의 성과는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에게 다 뜯겨 나갈 테니.
어째서 나중에 이 남성을 세상이 평가할 때, 경영은 최악이라는 말을 남겼는지 알 것 같았다.
‘더욱 구미가 끌리는데?’
남성에 대한 정보를 읽어 보니, 더욱더 구미가 끌리기 시작했다.
경영에는 최고의 능력을 드러내는 비서실장님과 관련 분야에서 최고의 지식을 갖고 있는 남성.
두 사람이 합쳐지는 순간 최고의 시너지를 낼 것이 틀림없었다.
분명 두 사람에게 윈윈이 되는 상황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에 대한 정보를 확인한 나는 이번에도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했다.
사내 정치로 신물을 느껴, 개인 회사를 차린 이 남성.
이 남성에게는 연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게 최고의 투자이지 않은가.
더 이상 시간 끌 거 없다고 느낀 나는 옷을 갈아입고 집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 앉아 있는 김형찬.
도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기어에 입사한 시점부터?
대현 그룹의 스카우트를 뿌리치고 기어를 살려 보겠다는 포부 하나로 오만방자한 마음을 가져서?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자동차에 흥미를 가진 어린 시절부터 잘못된 건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이 들었다.
‘그만둬야 되는 건가……?’
이제는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다.
새로운 발견으로 엄청난 성공을 이뤄냈건만, 나에게 쏟아지는 시선은 벌레를 쳐다보는 듯 경멸감이 가득했다.
이게 다 내 성과를 선임에게 먼저 알려 준 것에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처음 연구를 진행하면서 한 가지 아쉬운 감정을 느꼈었다.
공정을 살짝만 바꾸더라도 엔진의 효율을 올릴 수 있을 텐데, 왜 사람들은 이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내가 아는 걸 대기업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한 나는 같이 야근을 하고 있던 선임에게 질문했다.
혹시 이런 공정을 추가한 적이 있냐고.
분명 더 좋은 효율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 결함 때문에 시도하지 않는 거냐고.
내가 볼 때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기에, 아무 생각 없이 선임에게 질문을 했다.
‘그때 눈치챘어야 됐는데…….’
그때 눈치챘어야 됐다.
선임의 눈빛이 바뀐 걸.
왜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마 당연하단 생각 때문이었던 게 컸던 것 같다.
선임을 의심하기에는 너무나 당연한 공정이었지 않았는가.
그래도 눈치를 챘어야 했다.
만약 선임에게 질문을 한 시점에 눈치를 챘다면, 이 정도까지 힘들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 개새끼일 줄을 꿈에도 몰랐으니까.’
공정을 왜 안 바꾸냐는 질문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덤덤하게 말하던 선임.
‘우리 그룹이 대기업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해 봤지.’ 라는 대답을 건네던 선임.
그때만 생각하면 그 덤덤했던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었다.
내 질문을 들은 선임은 그날부터 대부분의 생활을 회사에서 할 정도로 야근을 반복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선임이 발표했다.
자신이 신공정을 발견했다고.
공정을 조금만 바꿔도 엄청난 효율을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내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방법이 다른 사람에게는 엄청난 충격을 줬나 보다.
곧바로 회사에서는 실험에 들어갔고, 결국 엔진의 효율을 올릴 수 있었다.
당연히 성과를 낸 선임에게는 엄청난 성과금과 함께 승진이라는 보상이 내려졌고, 선임의 회사 내 입지는 더욱 탄탄해졌다.
‘그것만 하더라도 괜찮다.’
이해할 수 있다.
어차피 나에게는 당연하게 보이는 변화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으니.
선임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다.
그동안 나오지 않은 성과에 욕심을 낼 수 있으니까.
그저 난 단 한마디를 듣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욕심을 부렸다고.
그런 내 마음이 오히려 욕심이었을까?
선임에게 따로 찾아가 다른 건 바라지 않으니 사과만 해 주면 안 되겠냐 묻자 차가운 말을 나에게 내뱉었다.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면, 징계를 내리겠다고.
거기서 큰 충격을 받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두려웠다.
선임의 말이 현실이 될까 봐.
내가 어떤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징계를 내린다는 말이 현실이 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그 뒤로는 할 일만 하며 기계적으로 출근과 퇴근을 반복했다.
‘이것마저도 보기 싫었었나?’
가만히 있는 나조차도 보기 싫었는지, 그날을 기점으로 선임은 직장 동료들에게 나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야근하고 있는데 자신의 결과물을 훔치려고 했다는 둥.
밤늦게 남아 남의 책상을 뒤진다는 둥.
한순간에 나는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고, 그때부터는 회사가 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버티기가 힘들다…….’
너무나 힘들다.
회사에 출근할 생각만 하면 숨이 턱 막힌다.
내가 큰 걸 바랐던 걸까?
그냥 미안하단 한마디가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아니면, 자동차에 관심을 가진 게 잘못이었을까?
인제 와서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후회만이 밀려왔다.
그렇다고 회사를 그만둘 수 없는 이 현실이 너무나도 암담했다.
분명 기어를 나가는 순간, 관련 업계에서 나는 블랙리스트에 등재 당할 거다.
지금 선임이 로열패밀리에게 관심을 받는 걸 보면,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는 게, 한평생 자동차 연구에만 매진해 왔다.
인제 와서 다른 일을 한다고 잘할 리도 없고 받아 줄 리도 없지 않은가.
‘우리 아내와 딸은 또 어떻게 하고…….’
새로운 일자리를 구한다고 하더라도, 취업까지 오랜 시간이 걸릴 거다.
그사이에 힘들어할 우리 아내랑 딸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제는 그 편안했던 집조차 숨이 턱 막히는 공간이 돼버렸다.
그 어느 곳도 나에게 편안한 마음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어제와 같이 오늘도 답이 없는 문제를 생각하며 놀이터에서 시간을 때웠다.
그나마……. 그나마 이곳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면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은 개운해진다.
“후…….”
이제는 들어가야겠다.
집에서 육아하며, 힘들어하는 아내를 조금이라도 도와야 되지 않는가.
오늘도 말하지 못할 나의 현실에 암담한 감정을 느끼며 발걸음을 집으로 옮겼다.
예전에는 보금자리였지만, 지금은 답답한 공간이 되어 버린 나의 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