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나중에 가서는 지금의 행동을 후회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손해만이 가득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전생에 회사를 운영하던 시점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
하지만 못 참겠다.
동생 앞에서 이런 치욕을 당하는 건 죽어도 못 참겠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동생에게만큼은 언제나 든든한 형이 되고 싶단 말이다.
“하하, 재밌네. 나보고 후회하지 말라고? 그룹에서 쫓겨난 충격으로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네 주제에 날 어떻게 후회시킬 건데.”
“…….”
“야, 그래도 오랜만에 재밌긴 하네. 우리 제환이한테 이런 면이 있었어? 하기야 다른 애들 다 굽신거릴 때, 그때도 그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지.”
이제는 나를 동등한 사람으로서 취급도 안 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이었다면, 지금 나의 행동에 분노를 일으켜야 할 민우가 나를 가소롭게 쳐다본다.
이내 나를 비웃던 눈빛이 바뀌기 시작했다.
“근데 사리 분별은 해야지. 아무리 동생 앞이라고 해도 이성은 있어야지. 네가 아직 재벌가라고 착각하는 건가? 자존심 버려. 네 인생에 이제 자존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
“개소리 집어치워.”
“뭐……. 개소린지 아닌지는 앞으로 지켜보자고. 오늘은 승호 결혼식이니까 그냥 넘어간다. 대신 천천히 괴롭혀 줄게. 네 동생이 3년 뒤에 경영에 참여하나? 그때, 네 발언을 뼈저리게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게.”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지금 당장 아무런 일 없이 넘어가는 상황에 안심을?
그게 아니라면 이제 자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 상황에 분노를?
모르겠다. 사업을 하면서도 이렇게 화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이성이 마비된 느낌이다.
도저히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성에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고 하는데, 말을 마친 개자식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혹시 때리려고 하는 걸까? 차라리 때려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명분이 생기도록.
“자, 우리 제환이 요즘 힘들다고 하던데 내가 용돈이라도 챙겨 줘야겠네.”
“…….”
내 앞에 서서 지갑을 꺼내고는 수표를 세기 시작하는 민우.
그러고는 내 주머니에 수표를 꽂아 넣으며 비웃기 시작했다.
“요즘 살기 힘들 텐데, 이런 푼돈이라도 내가 도와줘야지. 우리한테는 몰라도 너 같은 일반인한테는 큰돈이잖아. 맞지?”
“이런……. 씨…….”
“오늘 네가 대든 값은 네 말대로 오랫동안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너로 인해서 네 동생이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걸 지켜보도록 해.”
나에게 다가와 비아냥거리는 말을 전한 개자식이 이내 어깨를 두 번 두드리고는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될까……. 이성이 마비됐음에도 휘두르지 않은 폭력에 안심을? 그것도 아니라면, 무시당하는 상황에서도 반박을 제대로 못 하는 상황에 분노를?
모르겠다. 도저히 평소처럼 냉철하게 상황 판단이 되지를 않는다.
“형……. 괜찮아? 일단 나가자. 주변에 시선이 너무 많다.”
“후……. 그래.”
이렇게 화난 내 모습을 처음 봤을까?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동생이 밖으로 나가자고 말을 건넨다.
나 역시 여기에 있어 봤자, 좋을 게 하나 없다고 판단을 내려 동생과 같이 밖으로 나갔다.
“형, 아까 저 사람이 했던 말 신경 쓰지 마. 어차피 3년 뒤면 나에 대해서 생각도 안 날 수도 있고, 괜히 형한테 자격지심 느껴져서 저러는 거일 거야.”
“형은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정환이 네가 경영에 참여할 때 형이 무슨 일이 있어도 힘이 돼 줄게. 저 자식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고 있어. 그때쯤 되면 너한테 신경 쓸 여력도 없을 거야.”
“나는 진짜 괜찮아.”
재계 순위가 낮은 우리 그룹과 다르게 대현 그룹은 5위 안에 드는 그룹.
한마디로 내년에 있을 대통령 탄핵에 직격탄을 맞는단 얘기다.
대통령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에게 엄청난 비자금을 갖다 바친 그룹 중 하나.
덕분에 내년부터는 주변에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을 거다.
그렇게 겨우겨우 정신을 차릴 때쯤이면, 한 가지가 더 남아 있다.
2018년에 발생하는 미·중 무역 전쟁.
대현 그룹이 두 사건으로 주춤거릴 때, 나는 힘을 기를 생각이다.
아까 나에게 넣어 준 수표. 몇 배로 대갚음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형, 내가 집 데려다줄게. 오늘은 좀 쉬어. 그리고 그룹에 들어올 생각 있으면 말해. 내가 할아버지에게 다시 한번 말해 볼게.”
“형은 괜찮으니까 네 주위나 챙겨. 3년 뒤, 경영에 참여할 때는 너도 정신 바짝 차려야 될 거야.”
“형한테는 그냥 동생으로 보일지 몰라도, 나도 이미 준비하고 있어. 걱정하지 마.”
“그래. 잘하겠지.”
동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점차 끓어오르던 분노가 진정이 되어 감을 느꼈다.
이전까지 분노로 인해 사라졌던 이성이 다시금 정상으로 돌아옴이 느껴진다.
그렇게 차분한 상태가 되자, 한 가지 사건이 떠오른다.
한 달 뒤 있을 마약 파티.
전생에는 대현 그룹이 조치를 취해서 다른 그룹의 자제들만 사건에 연루됐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저 자식도 그 사이에 껴 있다는 걸.
‘오랜만에 이성을 잃게 해 준 거에 대한 선물로는 충분하겠네.’
내년까지 기다리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현 그룹에 적대적인 기자에게 살짝 정보를 흘려 준다면, 분명 한 달 뒤에 있을 마약 파티 기사에 정민우라는 세 글자도 포함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약 정민우라는 세 글자가 기사에 실린다면, 일거양득을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1년 뒤 정신이 없어지는 그때까지 우리에게 향하는 시선을 돌릴 수 있고, 대현 그룹 이미지에 타격을 끼칠 수 있는.
또한 정환이가 경영에 참여할 때 정민우의 입지는 전생보다 좁아지게 만들 수 있는 기회.
‘이건 단순한 선물이다.’
이 정도는 선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아직 정민우에게 보여 줄 게 너무나 많이 남아 있지 않은가.
정민우 말대로 한순간의 즐거움으로 끝낼 생각이 없다.
10년. 아니 어쩌면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끝까지 괴롭혀 줄 생각이다.
* * *
“키야!! 이야……. 이거 엄청나게 쓰네. 이거 무슨 맛으로 먹냐?”
“너도 나이 먹다 보면, 이 소주만 찾게 될 거다.”
승호가 결혼식을 올린 지 3주가 지났다.
그사이에 신혼여행을 갔다 온 승호가 돌아오자마자 나에게 술 먹자는 말을 건넸고, 나 역시 글을 이미 써 둔 상태이기에 흔쾌히 알겠다는 말을 전했다.
그래서 마시게 된 소주.
아마 승호는 처음 마셔 보는 것일 터.
애초에 재벌 3세들이 소주를 먹는 일이 드무니.
먹어도 클럽에서 먹는 양주나, 자기들끼리 마시는 비싼 양주만을 찾았을 거다.
‘나도 사업을 하면서 먹었던 게 아니었으면 안 마셨겠지.’
회사를 이끌기 시작하면서, 사업차 여러 사람과 술을 먹게 됐다.
의외로 사람들은 비싼 양주보다 소주를 원했고, 나 역시 을인 상태였기에 따라서 소주를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 느꼈다.
가격이 싸다고 안 좋은 게 아니라고. 서민들이 즐겨 먹는다고 나와 안 맞는 게 아니라고.
처음 마신 소주는 내 인생의 쓴 부분을 맛으로 표현한 듯한 기분이 들었고.
그때부터 음주는 소주가 주류를 이루게 됐다.
“결혼하니까, 어떠냐.”
“모르겠다. 내가 좋아서 한 결혼도 아닌 거 너도 알잖아. 장인어른이 3선 국회 의원이라 결혼하긴 했는데, 아직까지는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어쩌겠냐. 그래도 이왕 결혼한 거 결혼 생활에 최선을 다해 봐. 괜히 딴 애들처럼 밖에서 다른 짓 하다 재산 분할되지 말고.”
“너도 알잖아. 나는 그런 결혼 생활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이왕 결혼한 거 둘이 잘 맞춰 가 봐야지.”
승호와 어렸을 때부터 서로 모든 걸 털어놓으며 비밀이 없는 사이로 지냈다.
승호의 아버지는 결혼 후에도 여자관계가 복잡해 승호 어머니와 사이가 안 좋은 걸로 알고 있다.
어쩌면 모든 재벌가들이 대부분 이런 결혼 생활을 보내고 있을 거다.
애초에 그들이 연결된 건 사랑이 아닌, 이권으로 인한 결혼이니까.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승호 어머니는 진심으로 승호 아버지를 사랑했고,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자란 승호는 재벌가의 결혼 생활을 안 좋게 보고 있다.
지금 승호가 말한 게 그런 부분일 거다.
결혼 상대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다른 상대를 만드는 그런 결혼 생활.
승호가 제일 싫어하는 부분이 아닌가.
“너라면 아내한테 잘할 거다. 아내는 어때? 너한테 관심이 있어?”
“사실 다른 선도 엄청나게 들어왔는데, 지금 아내랑 결혼한 게 그 이유가 가장 커. 다른 사람들은 내 배경만 봤다면, 아내는 나란 사람을 봐줬거든.”
“그건 다행이네.”
다행히도 승호 아내 또한 승호를 좋아하나 보다.
지금 이야기에서 그게 은연중에 티가 났었다.
만약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승호와의 대화에서 충분히 티가 났을 건데 전혀 그런 티가 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이번에 내 결혼식 와서 안 좋은 일 있었다며.”
“쯧…….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너랑 다르게 다른 애들은 권위 의식이 깔려 있잖아. 전부터 안 좋게 보고 있다가, 마침 경영에서 제외됐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렇게 행동한 거지.”
“미안하다. 괜히 내 결혼식에 와서 안 좋은 꼴이나 보고. 그 얘기를 듣고, 너한테 얼마나 미안하던지…….”
“괜찮아, 인마. 그게 너 때문이냐? 그 자식 심성이 더러운 거지. 하여간 재벌 3세들은 다 정이 안 간다니까.”
그 자식만 그런 게 아니다.
내 주변에 있는 재벌 3세가 대부분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재벌가에서 태어난 자신들과 일반인들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권위 의식.
어쩌면 내 앞에 있는 승호가 특이한 거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거겠지.’
만약 승호 또한 그런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마지막 순간에 내 옆에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니, 지금만 하더라도 경영에서 제외된 나와 술자리를 가지며 어울리지도 않았을 거고.
이번 생에도 승호와는 마지막까지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민우 그 자식, 대현 그룹만 아니었어도 뭐라고 하는 건데……. 하필 그딴 자식이 대현 그룹에 있냐.”
“어쩔 수 없지. 괜히 끼어들었다간 너한테도 똥 튀긴다.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한다고? 뭐 방법이라도 있냐?”
“그런 게 있다. 일주일 뒤에 정민우 그 새끼 좀 바빠질 거다.”
다음 주에 기사에 실릴 마약 파티.
이미 기자를 섭외해 놓은 상태다.
어떻게 보면 정민우에게는 배수의 진이 펼쳐진 걸지도 모르겠다.
‘그 순간을 벗어난다 해도 내가 섭외해 놓은 기자가 있으니까.’
당장 그 순간에 자신의 명단을 뺄 수는 있을 거다.
그때 걸린 재벌 3세들과 대현 그룹의 사람은 힘의 차이가 존재하니까.
분명 대현 그룹이 나서서 다른 애들을 제물로 삼고, 빠져나갈 게 당연했다. 전생에도 그랬고.
하지만 정민우가 마약 파티에 들어가고 빠져나가는 사진을 기자가 풀면 어떻게 될까?
그런 민우가 마약 파티에 참여한 재벌 3세 명단에 빠져 있다면?
어쩌면 그룹 전체로 퍼질 수 있는 불매 운동이 될 수도 있을 만큼 재밌는 상황이 펼쳐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