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 *
달리는 차 안에 앉아 생각에 잠긴 나.
처음 눈을 뜬 지 세 시간 정도가 지난 것 같다.
그동안 냉정한 시선으로 상황을 파악해 본 결과, 지금 나는 과거로 돌아온 게 맞다는 결론이 나온다.
세 시간 동안 이뤄졌던 상황들. 그 모든 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그 날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지만, 그나마 가능성을 고르자면, 반지가 소원을 들어줬을 확률이 높은 것 같다.
‘색깔이 변했다.’
원래는 이 시기에 없어야 할 반지.
내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것도 모자라 영롱한 빛을 내던 반지가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반지가 소원을 들어줬다는 것도 비현실적이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과 내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더욱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 모든 걸 종합해 보면, 제일 가능성 높은 상황이 반지가 소원을 들어줬다는 사실이다.
이것 또한 말이 안 되긴 했지만, 그렇게 따지면 지금 일어나는 모든 상황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 느껴졌다.
‘그나마 다행이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일어났지만, 그나마 다행이라고 느낄 수 있는 게.
세 시간이 지난 지금, 빠르게 현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거다.
아마 과거로 돌아오기 전 글을 썼던 게 큰 영향을 끼친 것 같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상황.
이미 소설 속에서나마 상상하고, 주인공으로서 겪어 본 상황이 아닌가.
그나마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아니, 어쩌면 축복일지도 모르겠어.’
다행인 걸 넘어서 축복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시기는 나에게 소설 속의 주인공처럼 살아 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준 것 같다고 느껴졌다.
“도련님, 30분 뒤면 회장님 댁에 도착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30분 뒤면 할아버지 댁에 도착한다는 말을 전해 온다.
이쯤 되면 결정해야겠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 나갈지.
‘만약 회사에 집중하면, 국내 1위 기업도 노려볼 만하다.’
만약 미래의 기억을 이용해, 회사에 집중한다면 충분히 미래에는 국내 1위 기업이라는 타이틀도 노려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산다면 이전 생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인생을 살면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내가 1위 기업의 회장이 된다고 해서 죽기 직전 글을 썼던, 그때의 행복함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고민되네…….’
고민되기 시작한다.
내가 마지막에 썼던 소설 속 주인공처럼 글을 쓰기 위해 집을 나갈지, 아니면 회사에 남아 엄청난 성공을 거둘지.
한참을 고민에 빠져 생각을 이어 가던 나는 결정했다.
두 가지 다 가져가자고.
지금 내가 돌아온 시기. 충분히 소설 속의 주인공이 돼,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상황이 소설 속에 첫 이야기라면, 내가 설정했던 주인공으로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쓰면서,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나중에는 대현 그룹의 공격을 막아 내고, 역공을 취할 수 있는 그런 인생.
‘그 뒤의 내용은 내가 써 간다.’
그다음의 내용은 직접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가족의 인정을 받는 것을.
마음의 결정을 내린 나는 곧바로 노트를 꺼내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가 과거로 돌아오기 전 소설 속에 적었던 성공의 기회들.
200화 무렵 글을 쓰면서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우리 그룹을 공격해 오던 대현 그룹에게 역공까지 펼쳤던 그 내용들을 말이다.
* * *
할아버지 서재 앞에 서 있는 나.
“회장님, 도련님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라고 그래.”
나를 안내해 주신 분이 할아버지에게 도착했다는 보고를 전하니, 들어오라는 말이 들려왔다.
지금 할아버지의 심경이 많이 좋지 않으신가 보다.
목소리에서부터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내 나를 안내해 주신 분이 할아버지 서재의 문을 열어 주시고는 물러나셨다.
이제는 마음속으로 어떤 선택을 할지 결정 내린 나는 더 이상 무서울 게 없다고 생각해서 곧바로 발걸음을 서재 쪽으로 옮겼다.
“제환아, 이 할아비가 이상한 얘기를 들은 것 같구나. 한참 대학에서 학업을 마무리 지을 네가 다른 일에 한눈을 팔고 있다고.”
“죄송합니다. 군대를 다녀오고 나서 어쩌다 보니 글에 뜻을 두게 됐습니다.”
“지금 뭐라고 한 게냐. 내가 들은 게 제대로 된 정보라는 얘긴 게냐?”
“할아버지에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맞습니다.”
“…….”
아무래도 전생의 나를 생각해 보니, 태도부터 문제였었나 보다.
이전에는 저 질문을 받고는, 어떻게 말해야 할아버지의 화가 풀릴까 걱정하며, 대답을 못 하지 않았는가.
그 뒤로 할아버지의 호통이 날아온 것이고.
하지만 이번에는 당당하게 대답한 게 할아버지에게는 의외였던 걸까? 곧바로 호통이 날아올 거라는 내 예상과 다르게, 그래도 이야기를 이어 가신다.
그렇다고 해서 화가 안 나신 게 아니다. 분명 목소리에 노기가 깃들어져 있지만, 이야기는 들어 보고 싶은 듯했다.
“내가 알기로는 그 글도 순문학 쪽이 아닌, 이상한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던데……. 이것도 제대로 된 정보라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군대에서 처음 소설을 읽고, 처음 설레는 감정을 느꼈습니다. 아마 그때보다 이미 마음이 그쪽으로 옮겨진 것 같습니다.”
“네 이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게냐? 순문학이라고 해도 얼굴을 들고 다니기 부끄러울 판에 판타지 소설?! 네가 정신이 제대로 박혀 있는 게야?! 이때까지 죽어라 하던 공부는 아깝지 않은 게냐고!!”
“그 모든 게 아쉽지 않을 정도로 글을 쓰는 게 행복합니다. 당연히 10년을 넘게 공부한 것도 아깝긴 합니다. 그런데도 마음은 글을 쓰는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그 모든 아쉬움을 감수할 정도로 글을 쓰는 게 너무나 즐겁습니다.”
할아버지의 호통에도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조금은 당황하신 게 보인다.
아마 할아버지는 평소와 같이 자신의 말을 들어줬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분명 전생의 나는 곧바로 할아버지의 말을 들었었고.
하지만 이번 생에는 그러고 싶지 않다. 이미 경험했지 않은가. 모든 걸 포기하고 할아버지 말을 들었을 때 인생의 마지막에 후회밖에 남지 않았다는 걸.
“후……. 제환이 네가 세상을 너무 편하게 살았나 보구나. 내가 실수한 게야. 내 자식들만큼은 남부럽지 않게 살게 해 주려다 보니, 이것들이 세상이 얼마나 살기 힘든지 모르는 게야…….”
“아니요. 잘 알고 있습니다. 돈을 버는 것도 얼마나 힘든 건지 잘 알고 있고요. 그 모든 걸 알고 있어도 도전하고 싶습니다.”
“그 주둥이 당장 안 다물어?! 제환이 네가 직접 10원 한 푼이라도 벌어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게냐!?! 네가 좋아한다는 그 글. 그게 평생 너의 삶을 책임져 줄 것 같느냐? 당장 일이 잘 풀려서 지금 돈이 들어온다고 해도 제환이 네가 쓰는 한 달 비용을 감당 못 해!!”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할아버지 입장도 이해가 간다.
분명 걱정하시는 마음이 크실 거다. 자신이 보기에는 철이 없는 손자가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도전하는 것 같아 보여서.
자신이 일생을 바쳐 만든 그룹에서 일한다면,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 수 있으니.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게 나에겐 행복한 삶이 아니란 걸.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산다고, 내가 행복한 게 아니란 걸.
“제환이 네 뜻이 그렇다면 할아비는 말리지 않으마. 단, 글을 쓸 거면 집에서 나가야 될 게야. 할아비는 말 안 듣는 손자에게 세상이 얼마나 힘든 건지 알려 줄 수밖에 없구나.”
“알겠습니다. 일주일 이내로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할아버지 덕에 부족함 없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할아버지의 마음이 풀리고, 제가 당당해질 수 있을 때, 그때 다시 인사드리러 오겠습니다.”
“아직까지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했구나. 할아비가 장난으로 말하는 것 같은 게냐? 네가 집을 나간다고 해서, 일절의 지원조차 없을 게란 말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바라지도 않고요. 이때까지 받은 것만 하더라도 충분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럼 나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상황과 다르게 흘러가서일까?
그 어느 때보다 당황하신 할아버지가 보인다.
여기서 더 이야기를 나눈다고 해서, 내 의견도 바뀔 리도 없거니와 할아버지 역시 뜻을 바꾸지 않을 걸 잘 알고 있는 나는 그만 물러나겠다는 말을 끝으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자신의 손자가 나가는 걸 바라보는 박대호 회장.
박대호 회장은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가 않았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길래, 자신의 말을 거절하지 못하던 손자가 저런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걸까? 어째서 자신이 생각했던 상황과 다르게 흘러가냐 이 말이다.
‘언제부터 제환이의 눈빛이 저리 단단해졌지…….’
지금 상황이 너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심정이 복잡해진 듯한 기분이다.
언제부터 자신의 앞에서 저렇게 당당한 모습으로 마주할 수 있었을까?
‘저 분위기도 이상하군…….’
그리고 저 분위기.
분명 자신이 이야기 나눌 때 손자에게서 오랫동안 사업을 해 왔던 사람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무언가 결정을 내렸을 때, 어떠한 변명도 없고, 밀어붙이겠다는 저 의지도 의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손자는 저렇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 없이 외부에서 압박이 오면, 그대로 따랐지 않은가.
그나마 무언가를 요구했을 때, 늘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와서 차기 후계자로 내정했지 않은가.
‘하필 달라진 모습으로 반기를 들다니…….’
할아버지 된 입장으로서 손자의 분위기가 바뀐 건 너무나도 희소식이었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자신이 손자를 위해 만들어 놓은 길을 뿌리친 게 너무나 괘씸하게 느껴졌다.
아마 손자는 모를 거다. 자신이 한평생 누리고 온 삶이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지.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자의 달라진 모습에 바깥 생활을 하면서 세상을 알아 가면 얼마나 달라져 있을까?
‘3년 안에는 돌아오겠지.’
3년이다.
자신의 손자를 다시 불러올 시간이.
그동안 세상을 경험하고, 더욱 단단해진다면 회사를 이끄는 데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허허……. 참 모순된 상황이군…….’
지금 이 상황이 모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손자가 자신에게 반기를 들어 언짢은 마음을 느끼면서도, 달라진 손자의 기세에 기뻐하는 자신이.
그래도 이왕 나간 거 손자가 뭘 좀 얻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유의미한 결과가 아니라도 좋다.
단지, 회사를 이끌어 갈 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경험을 얻어도 만족스러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