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환 (완결) >
마지막 차원의 조각이, 엘론의 심장에 박혀있다고?
메시지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한 순간 칼의 표정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지금, 시스템은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구로 돌아가고 싶으면 엘론을 죽이라고. 그 심장에 있는 마지막 차원의 조각을 회수하라고.
[제한 시간: 300초]
"...이 개씨발 새끼가, 진짜."
시야 한쪽에 제한 시간까지 떠올랐다. 칼은 참지 못하고 욕을 내뱉었다.
살인이라면 익숙하다. 칼은 지금껏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왔다.
하지만 맹세컨대 단 한 번도 선을 넘은 적은 없었다.
지금껏 죽여온 놈들은 적어도 칼의 기준으로는 모두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다. 도적, 범죄자, 흑마법사, 사람의 생명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쓰레기들. 그 기준이라는 것 또한 결국은 칼의 주관에 불과했지만, 어쨌든 적어도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살인은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시스템이 강요하고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서 아무런 죄도 없는 여자아이를 죽이기를.
"......"
새삼 시스템의 악랄함을 느끼며 칼은 엘론을 내려다봤다. 여전히 정신을 잃은 채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은 녀석의 숨통을 확실히 끊고, 그토록 바라던 지구로 돌아가느냐.
아니면 귀환의 기회를 눈앞에서 날려버리고, 이 녀석을 살리느냐.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야, 시스템아. 듣고 있냐?"
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허공을 바라보며 보란 듯이 조소를 지었다.
"그냥 안 갈랜다."
네가 언제까지 네 장단에 맞춰서 놀아줄 줄 알았냐?
"더러워서 지구 안 간다고, 씨발."
이제 다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칼은 포스로 엘론을 들어올리고 허공에 떠올랐다. 상황이 대충 정리되었는지 교수들이 사태를 수습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애초에 제국의 중심부를 괴한들 따위가 습격한 것부터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루블리온의 바로 옆에 붙어있는 것이, 황제가 머물고 있는 황성이다.
루블리온 내의 교수들과 기사들은 물론이고, 순식간에 황성에서까지 전력 지원이 내려와 괴한들을 모조리 쓸어버렸다.
남은 문제는 이제 흑탑주 하나뿐이었다.
칼은 엘론을 다친 학생들을 치료하고 있는 장소에 내려놓고, 흑탑주와 로메인 페이지가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고오오오.
흑색의 거대한 구체가 마계의 심부와도 같은 불길한 기운을 풍겨내며 회전하고 있는 광경. 흑탑주의 결계인가?
주변엔 교수들과, 황궁에서 지원 온 마법사들이 한껏 긴장한 표정들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 안에서 흑탑주와 로메인이 격전을 펼치고 있는 모양이었다.
"씨발."
다시 한 번 욕을 내뱉은 칼은 그곳을 향해 망설임 없이 날아들었다.
"어, 어? 잠깐...!!"
주변에서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기겁하며 말리는 목소리가 등 뒤로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지금 칼은 정말 뭐가 됐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두 대마법사들의 접전? 뭐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곧 구체의 코앞까지 도착했다. 칼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아르자크류 서클링의 전격 마법, 오버로드, 붉은 낙뢰가 구체의 한 점을 노리고 찢어지는 굉음과 함께 내리쳤다.
꽈릉!!
구체에 구멍이 났다. 칼은 그 틈새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그러자 눈에 들어온 광경은 구체의 중심에 둥둥 떠있는 흑탑주와, 바닥에 피를 토하며 힘겹게 서있는 로메인이었다. 그가 결계를 뚫고 들어온 칼을 발견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 지고 있었네."
솔직히 바깥에서도 구체의 마력이 점점 강해지는 것이 느껴졌기에 대충 예상은 했었다.
"여, 여기엔 왜 온 거냐!"
다급히 물어오는 로메인의 모습에 칼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바깥은 전부 다 끝났고, 이제 흑탑주만 처리하면 끝입니다."
"처리?"
순간 가공할 압력이 칼의 전신을 짓눌러왔다. 칼은 이를 꽉 깨물며 간신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흑탑주가 형형히 번뜩이는 눈으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같은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전율적인 존재감이었다. 만약 보통 사람이었으면 이 존재감에 노출된
것만으로도 즉사해버릴 것이었다.
"애송이 놈이 건방진 혀를 잘도 놀리는구나. 로메인까지 죽고 나면 이곳에서 누가 나를 막을 수나 있겠느냐?"
대낮에 제국의 중심을 침공한 테러범이 하기에 한없이 오만한 말.
그러나 그 말을 한 사람이 대마법사라면 그것은 더 이상 오만이 아니었다. 칼은 정말로 여기서 흑탑주를 막지 못한다면 황도가 멸망해버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보다 이놈은 대체 왜 갑자기 여기까지 와서 이 지랄을 떨고 있는 걸까.
쿠우우!!
순간 거대한 흑창이 칼의 정수리로 떨어졌다. 차마 반응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경이로운 캐스팅 속도.
그것을 대신 막아준 것은 로메인이었다. 로메인의 순백색 마력이 흑탑주의 흑창과 격돌하여 서로 소멸했다. 칼은 그 광경을 보며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가볍게 주고받은 한 번의 공방이 칼이 전력을 다해 펼친 마법과 비등한 위력이었다. 과연 대마법사는 대마법사
였다. 6서클과 이만큼 아득한 격의 차이라니.
"다시 결계를 빠져나가라! 사람들을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대피시켜!"
칼은 그런 로메인의 말을 무시하고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꺼내든 것의 정체는 한 자루의 검이었다.
"그나저나 로메인 공."
방금 시체도 남기지 못하고 죽을 뻔한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태연한 태도로, 칼은 로메인에게 물었다.
"예전에 손녀 분의 심장에 무언가 수술이라도 했었습니까? 아티팩트 하나를 박아넣는다거나."
"...갑자기 그걸 왜? 손녀의 심장병 때문에 직접 수술을 한 적이 있었는데..."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칼은 싱긋 웃으며 검을 치켜세웠다.
"그냥, 이제 귀환이고 뭐고 다 글렀다 싶어서요."
<라스칼리아 - 검, 마도구>
고대의 드워프 장인, 툼그바르가 모종의 부탁을 받아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검입니다.
초월의 경지에 이른 명장이 '아다만티움'을 사용해 탄생시킨 신검인 만큼, 그 영혼의 잔재가 세월의 흐름을 왜곡하고 미약하게나마 검에 깃들어 있습니다.
7서클의 대마법, '서먼 메테오'가 일회성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순간 칼이 꺼내든 검을 바라보는 흑탑주의 표정에 경계가 서렸다. 검 안의 막대한 마력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흑탑주로서도 생명에 위협을 느낄 만큼 거대한 마력이.
"그냥 다 같이 뒈집시다."
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라스칼리아에 저장된 마법을 활성화했다.
['7서클 대마법: 서먼 메테오'를 발동합니다.]
동시에 결계 너머에서 어마무시한 마력체가 하강하는 것을 모두가 느꼈다.
흑탑주가 다급히 전력을 다해서 방어 마법을 펼쳤지만 아마 소용없을 것이었다. 이내 순식간에 가까워진 마력체의 어마무시한 규모를 느끼며, 칼은 생각했다. 결국 이런 최후구나, 하고.
....콰아아아아앙!!
시야가 백색으로 물들며 의식이 끊어졌다.
* * *
마치 심해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은 감각.
그 옥죄는 듯하면서도 고요한 감각을 느끼며 칼은 눈을 떴다. 사방이 어둠이었다. 어디가 위고 아래인지 방향 감각조차 없었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뭐야?"
여긴 어디지? 그대로 죽은 게 아니었나? 아직도 흑탑주의 결계 안인가? 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느낌이 아예 다르다.
칼은 기묘하기 그지없는 공간을 둘러보며 몸 상태를 체크했다. 어째서인지 마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보다 몸의 감각 자체가 아예 사라진 느낌이었다. 육체 없이 영혼이라도 된 것처럼...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모험은 이것으로 끝이겠군.]
그리고 갑자기 환한 빛이 터지더니, 별들이 전부 사라진 우주처럼 깜깜했던 공간이 순식간에 환한 백색으로 뒤바뀌었다.
칼은 그제서야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육체가 반투명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칼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대체 뭐야, 이거? 어쩐지 몸의 감각이 없다 했더니 진짜 영혼이 된 거였어?
[너는 죽었다. 그리고 지금은 영혼 상태지.]
"......"
목소리가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잠시 침묵하던 칼이 곧 입을 열었다.
"너 시스템이냐?"
어딘가 낯이 익은 목소리다 싶었다. 이 목소리는 분명히 악신이 숨어있던 유적에서 들었던 그 목소리였다.
그리고 굳이 그것이 아니라도 이 상황에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있을 존재는 시스템 말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곧 작은 웃음소리와 함께 긍정의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이 씨발 개 같은 새끼야."
[......]
"우선 지금 상황부터 설명해봐. 내가 죽어서 영혼이 됐다고? 그럼 여긴 어디냐? 저승이냐?"
[저승이 아니라 내 심상 공간이라고 할 수 있겠군.]
심상 공간? 칼은 인상을 찌푸렸다. 곧 앞쪽에 사람의 형체가 빚어지더니 한 남자의 모습이 나타났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울컥한 칼은 남자를 향해 주먹을 휘두르려고 했으나 그저 통과할 뿐이었다. 그런 칼을 바라보며 시스템, 남자가 쯧쯧 혀를 찼다.
[뭐 하는 짓이냐?]
"씨발, 뭐 하는 짓이냐고? 그건 내가 너한테 할 소리지, 씹새꺄. 내가 너 때문에 몇 년을 게임 속에서 죽어라 굴렀는데."
[그건 그렇지.]
"야, 진짜 이유나 좀 들어보자. 멀쩡히 잘 살던 사람을 난데없이 게임 속에 빠뜨린 이유가 대체 뭐냐고. 응?"
게임 속에 떨어진 이후로 스스로 몇백 번이고 물어본 질문이었다.
이제 그 대답을 해줄 상대가 눈앞에 나타났다. 남자는 칼을 빤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시스템의 창조주다.]
"그건 알아, 새끼야. 말했잖아."
[또한 너처럼 이세계에 억울하게 끌려왔던 지구인이기도 했다. 이세계의 주민들은 나를 마왕이라 불렀지.]
"......?!"
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마왕이었냐? 제국한테 배신당했다는 그?"
[그래.]
"잠깐, 그런데 넌 언데드로 반군을 일으켰다가 결국 제국한테 패배해서 죽은 게 아니었었냐?"
칼이 살던 시대에서 제국은 마왕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멀쩡하게 대륙의 패자로 남아있었다. 그리고 마왕과 관련된 지구인들에 대한 정보는 역사에 조금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은 대체 뭐란 말인가?
남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난 전쟁에서 패배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압도적으로 승리하고 제국을 완전히 괴멸시키는 데에 성공했었지.]
"...뭔 개소리야? 내가 살던 시대에서 제국은 멀쩡히 남아있었잖아?"
[그건 내가 세계의 시간을 되돌렸기 때문이다.]
점점 더 이해할 수 없는 소리들뿐이었다. 시간을 되돌렸다고? 칼은 인상을 찌푸린 채 물었다.
"네 목표는 제국을 괴멸시켜 복수를 마치는 게 아니었나? 기껏 제국을 멸망시켜놓고 시간은 왜 되돌렸다는 건데?"
[놈들에게 있어 너무 편한 최후였으니까. 고작 그것만으로 내 복수심은 가라앉지 않았으니까.]
"...뭐?"
"나와 내 동료들은 오래 전 제국의 마법사들에 의해 이 세계에 소환됐었다. 그리고 마계의 악마들을 상대하기 위해 전투병기나 마찬가지로 키워졌지. 우리가 바랐던 건 어떤 부귀영화도 아니었다. 단지 지구로 돌아가는 것 하나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놈들은
기어코 우리를 배신했지. 이 울분이, 이 증오가 고작 한 번의 멸망만으로 해소될 것 같았나?]
"......"
[그래서 시간을 되돌린 것이다.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리며 놈들에게 끝없는 고통을 선사하고 싶었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표정은 말과는 다르게 공허하기 그지없었다.
[말했다시피 나는 제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었다. 제국을 무너뜨리고 오히려 그 과정에서 깨달음까지 얻어 7서클 너머의 신격에 도달했지. 내가 네게 나눠준 시스템의 힘은 모두 그러한 권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아니, 잠깐만. 그래서 신격이고 뭐고."
칼은 남자의 말을 끊고서 말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정리하자면, 너는 제국에 복수를 하는 데 성공했지만, 그것만으로 분이 풀리지 않아서 세계의 시간까지 되돌려가며 제국을 계속해서 멸망시켰다는 이야기인 거냐?"
[정확히 이해했군. 그렇다.]
"근데 대체 네 복수에 나는 왜 끼어든 거냐고. 어?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내가 왜 게임 속에 떨어진 건데? 애초에 여기가 게임 세계는 맞냐? 아니면 실제하는 세계를 네가 게임으로 만든 거냐?"
[당연히 후자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설명하자면 인과율에 대해 알아야 한다.]
"인과율?"
[이전에 악신이 숨어있던 유적에서도 경험했었을 것이다. 신격을 얻은 존재는 함부로 이 세상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
"어째서?"
[신격을 얻은 존재는 그 순간부터 세계와 분리된, 세계의 인과율을 벗어난 존재로서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신격은 이 세계의 인과율과 상극인 힘이다. 때문에 신이 세계에 일정선 이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려 들면 신이 소멸하거나, 아니면 세
계가 소멸하거나, 더 힘이 센 쪽이 살아남고 나머지는 반드시 소멸하게 되지.]
"......"
[때문에 신으로서 존재하게 된 나는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의 인과율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면서 제국에게 복수할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방법이, 나라고?"
[덧붙여 말하자면 너 이전에도 수많은 지구인들이 너처럼 이곳에 게임 캐릭터가 되어 떨어졌었다.]
"아니, 그래서 씨발. 그 인과율이란 것과 나를 이세계에 조난시키는 거랑 무슨 상관이냐고."
[인과율은 말 그대로 결과에는 원인이 반드시 뒤따라야 하는 법칙이다. 그리고 우주의 모든 세계를 구성하는, 절대적인 법칙이기도 하지. 하지만 신은 인과율을 벗어난 존재이기에, 신이 권능으로 세계에 영향력을 미쳐 나타난 결과는 그 원인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세계의 인과율을 거스르게 되는 것이지. 그래서 앞서 말했다시피 신은 세계에 직접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이다.]
"......"
[그런 인과율 위배를 최소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방법이 보통 신탁을 내린다거나, 아니면 화신체의 몸을 잠깐 빌리는 등의 간접적인 방법들이다. 하지만 내가 하려는 일은 고작 그런 간접적인 형태로 해내기에는 힘든 일이었지. 그래서 나는 방법을 고민해냈고, 끝내
찾았다.]
남자가 칼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다른 차원에서 넘어온 존재는, 본래 그 세계의 주민보다 인과율 법칙이 약화되어 적용된다. 한마디로 지구인들은 이 세계에서의 인과율에 본래 주민들보다 덜 영향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설마."
[그래. 그 설마다. 인과율의 적용을 덜 받는다는 건 지구인들을 매개로 내 영향력을 더욱 크게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
[그래서 나는 지구인들을 이곳으로 불러와 몇백 번이고 몇천 번이고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에 이용한 것이다. 이것이 네가 그토록 원했던 진실이다.]
칼은 잠시 할 말을 잃고서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했고, 눈에는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칼은 헛웃음을 흘렸다.
"너 진짜 개새끼였구나."
사람이 너무 어이가 없으면 화가 나오지도 않는다.
지난 몇 년 동안 이세계를 조난하며 시스템에 증오는 이미 극한까지 쌓여있었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작은 기대도 있었다. 어쩌면 시스템이 이런 짓을 벌이는 데엔 어떤 숭고한 목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드러난 진실은 결국 이 이기적인 병신의 복수를 위해 이용된 것에 불과했다.
마음이 허무해졌다. 이제 뭐가 뭔들 아무래도 좋았다. 칼은 반쯤 해탈한 심정으로 궁금한 것들이나 남자에게 마저 묻기로 했다.
"날 포함해서 지금까지 몇 명이나 네 복수 놀이에 피해를 본 거냐? 그들은 전부 어떻게 됐지?"
"수천 이상이다. 끝까지 살아남아 목적을 이룬 이들은 각자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굳이 게임이라는 방식으로 이 세계에 끌어들인 이유는 뭐냐. 현실에서 실컷 구르기 전에 미리 좀 적응이라도 하라고?"
[그런 이점도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그 또한 인과율의 위배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권능을 발휘하여 너를 이 세계에 떨어뜨렸다. 그런 단순한 인과관계보다, 중간에 여러 과정이 섞이면 인과율의 위배가 최소화된다. 결국 나라는 원인으로 하여금 네가 이
세계에 떨어졌다는 사실에는 달라지는 게 없지만, 비록 무의미하고 쓸데없더라도 중간에 섞인 과정들이 인과율의 위배를 최소화한다는 것이지. 눈 가리고 아웅이나 마찬가지지만 실질적인 효과는 뛰어나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시간을 돌리는 거야말로 이 세계의 인과율 법칙을 제일 위배하는 짓거리 같은데, 어떻게 세계의 시간을 수백 수천 번이나 되돌렸다는 거냐?"
[세계의 시간을 돌리는 건 극히 미미한 인과율 위배다. 어차피 되돌려진 미래를 기억하는 자가 없다면 세계 주민들의 입장에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까. 세계의 시간이 역행했다는 '결과'를 인식하는 자가 없으니, 인과율에 의한 반작용도 미미하다는 것이다.]
"...마지막에는 왜 그딴 엿 같은 주문을 한 거냐? 엘론을 죽여 차원의 조각을 회수하라니."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넌 지금까지, 적어도 네 스스로가 정한 기준에서는 무고한 사람을 해한 적이 없었으니까. 과연 지구로의 귀환까지 포기하며 그 신념을 끝까지 지킬까 궁금했을 뿐이다."
"빌어먹을 새끼."
남자는 이게 마치 마지막이라는 듯 칼이 묻는 것들에 대해 모조리 술술 대답해주었다.
그렇게 궁금했던 것들을 모두 해결한 칼은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래서 결국, 죽은 나를 네 심상 공간으로 끌고 온 이유는 뭐냐?"
[......]
"끝까지 살아남아 목적을 이룬 자들만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며. 난 도중에 죽었으니 아웃 아닌가? 아니면, 마지막 뒈지는 길에 진실이라도 알고 가라고?"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 선택에 달렸다. 이대로 죽을지, 아니면 다시 소생할지. 이 세계에 계속해서 머물지, 아니면 지구로 돌아갈지. 이제부터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뭔 개소리야. 소원이라도 들어주겠다는 거냐?"
[아니, 내 신격을 너에게 모두 넘길 생각이다. 나는 그만 소멸할 것이다.]
"...뭐?"
[시간을 되돌리며 온갖 다양한 방식으로 제국을 농락하고 무너뜨렸다. 하지만 이제 그 짓거리도 지치는군. 복수는 질리도록 했으니 내게 남은 건 공허함뿐이다.]
남자가 그렇게 말하며 눈을 감았다. 그 표정에는 어떠한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곧 순식간에 남자의 몸이 흩어지며 사라졌다.
"......!!"
동시에 칼은 온몸으로 전해져오는 미증유의 강대한 힘을 느꼈다.
심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신의 힘, 신격.
마력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초월감을 느끼며 칼은 깨달았다. 남자가 정말로 신격을 모두 전해주고 소멸했음을. 그리고 자신이 신이 되었음을.
칼은 헛웃음을 흘리며 허공에 손을 그었다.
갈라진 공간 너머로 높은 고층 건물들이 보였다. 자동차가 보였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토록 바라던 지구의 풍경이었다.
"...이제 정말 돌아갈 수 있겠군."
지금까지 겪었던 수많은 모험들이 머릿속에 스쳐지나간다.
칼은 갈라진 균열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만 고향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귀환 (완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