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법 이론 (4) >
첫날임에도 불구하고 물렁한 수업 따윈 없었다.
막연히 들떴던 대부분의 신입생들은 그제야 루블리온의 높은 악명을 온몸으로 실감하며, 학관 혹은 기숙사 이곳저곳에서 마주쳤던 선배들이 왜 하나같이 피로에 찌든 얼굴들이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의 아카데미 생활에 오한을 느낀 건 덤이었다.
"이쪽인가.
그렇게 며칠이 흐르고, 칼은 수업이 빈 날 시간을 맞춰 한 동아리실을 찾았다.
제 3본관의 5층에 위치한 술식 전개의 응용과 탐구 동아리실.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없이 텅 빈 복도를 가로질러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곧 문 앞까지 도착했다. 가람 교수가 말했던 심화 이론 동아리였다.
칼은 노크를 할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가 문고리를 잡았다. 교수실도 아니고 동아리실에 굳이 노크까지 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철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시야에 들어온 넓은 공간과, 그 중앙에 놓인 제법 큰 원탁.
원탁에는 몇몇 학생들이 앉아있었는데, 교복의 장식을 보니 아무래도 전부 선배인 듯했다.
각자 할 일을 하고 있던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칼에게로 향했다. 의문이 섞인 눈빛들. 칼은 그중 낯익은 얼굴을 하나 발견했다.
'저 사람은...?'
가지런한 흑발과 금색 눈동자.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퀘스트를 수행하며 중앙도서관에서 마주쳤던 바로 그 여학생이었다.
"신입생? 무슨 용무지?"
양피지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던 남학생이 펜을 내려놓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칼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대답했다.
"가람 교수님을 찾아왔습니다. 혹시 안 계십니까?"
"...교수님을?"
의외의 용무였는지,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칼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동아리 가입을 위한 건가?"
"일단은 그렇습니다."
"하핫, 부지런한 신입생이네! 입학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동아리 가입을 하려 하고."
옆에 앉아있던 다른 학생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껴든다. 남학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거라면 굳이 교수님을 뵐 필요는 없다. 입부 서류를 줄 테니 작성해서 재방문하도록."
남학생은 칼이 교수에게 직접 제안을 받고 동아리실에 찾아왔다곤 아예 상상도 못하는 듯했다.
칼이 그 사실을 말해야 되나 잠깐 고민하고 있을 때, 동아리실 안쪽에 있던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름 아닌 가람 교수였다.
"칼 학생!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미 방 안에서 대화를 듣고 있었는지 싱글벙글 웃으며 등장한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순식간에 칼의 앞까지 접근했다. 그 격한 반응에 다른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여기까지 찾아왔다는 건, 결국 내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는 거겠죠?"
"예, 뭐..."
"좋네요! 아주 좋아요! 그럼 마음이 바뀌기 전에 당장 입부 서류부터 작성하도록 하죠. 윌리스, 어서 입부서 한 장 가져와요."
윌리스라 불린 남학생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편히 앉아서 잠깐 부실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요. 이쪽은 모두 2학년 이상 선배들이니까 미리 인사도 하면 좋겠네요."
그렇게 말한 가람 교수는 콧노래를 부르며 도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듯 부실이 고요함에 가라앉았다. 부원들은 다시 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엔 단순히 외부자에 대한 호기심이 아닌, 경악과 놀라움이 섞인 눈들이었다. 칼은 어정쩡하게 서있다가 입을 열었다.
"좀 앉아도 되겠습니까?"
"어, 어. 그래..."
적당히 빈 자리를 잡고 앉자 다시금 부실은 어색한 분위기에 잠겼다. 부원들 역시 여러모로 현 상황이 당황스러운 탓이었다.
가람 교수의 반응으로 보면 그녀에게 직접 제안을 받고 동아리에 입부하기로 된 모양인데, 그 자체가 이곳 부원들에게 있어서 그건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 동아리의 담당 고문인 만큼, 그들은 모두 가람 교수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웬만큼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도 그녀에게 직접 러브콜을 받은 경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그녀의 성격 자체가 후계 양성 같은 것에 욕심이 있는 성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고작 신입생이 그런 그녀에게 직접 입부 제안을 받았다고? 그것도 학기가 시작된 지 며칠 지나지도 않은 때에?
"너... 좀 대단한 녀석이었나 보구나?"
칼은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리를 꼰 채 큐브 같은 걸 만지작거리고 있던 여학생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말을 걸어왔다.
"교수님이 저렇게 밝게 웃는 건 생전 처음 봤네. 평소에도 언성 한 번 높아진 적 없는 분인데.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교수님을 저렇게나 홀린 거야?"
칼은 옅게 웃으며 어물쩡 대답을 넘겼다. 시스템의 능력에 대해 그녀가 단단히 착각했을 뿐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3학년 클라이렛이라고 해. 전공은 술식중첩응용과. 우리 동아리에 1학년이 들어올 줄은 상상도 못했었는데, 아무튼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1학년 칼입니다."
칼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그녀와 악수를 했다. 그녀가 말문을 튼 것을 시작으로 다른 부원들도 각자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나눴다. 딱히 신입생 후배에 대한 텃세 같은 건 없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동아리에 1학년이 들어온 건 처음이라며 흥미로워하는
기색들이었다.
"야, 엘론! 너도 귀여운 후배랑 인사 좀 해. 그 더럽게 재미없는 역사서는 그만 붙잡고 있고."
클라이렛이 테이블의 구석 쪽에 앉아있던 부원에게 소리쳤다. 칼과 도서관에서 마주쳤던 그 여학생이었다.
"......"
여학생, 엘론의 시선이 그제야 읽고 있던 책에서 천천히 칼에게로 향했다. 칼도 그녀를 바라봤다.
완전히 무표정한 얼굴. 지금 상황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는 표정이다. 그녀는 한참이나 말없이 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어쩐지 낯이 익은데."
"아마 중앙도서관에서 마주쳤었을 겁니다."
그 말에 기억이 떠오른 듯 엘론이 작게 탄성을 뱉었다.
"고서를 찾던 신입생."
"네, 맞습니다."
"내가 읽던 책 뺏어갔던 신입생."
"......??"
지금 뭐라는 거야, 얘가?
물론 이쪽에서 먼저 말을 붙이긴 했었지만 순순히 책을 건네준 건 그녀였다. 뭘 멋대로 기억을 왜곡하고 있는 건지.
칼은 조금 황당함을 느끼며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제가 뺏어가진 않았고, 선배님이 직접 건네주셨었죠."
"그랬나. 그랬던 것 같기도."
고개를 갸웃거린 엘론이 다시 시선을 읽던 책으로 돌렸다. 표지가 낡은 걸 보니 이번에도 역사 서적인 듯했다.
'괴짜로군.'
몇 마디 짧은 대화로 칼은 간단히 그녀에 대한 판단을 마쳤다. 옆에 있던 클라이렛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3학년 엘론 울버드. 원래 저런 애니까 너무 신경 쓰진 마. 제 내킬 때 아니면 제대로 대화를 하는 법이 없거든."
"아, 네."
문득 호기심이 인 칼은 인물 정보를 활성화했다. 언행도 언행이지만, 엘론에게선 그 이상의 묘한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래, 첫 만남에서도 분명히 느꼈었던...
"......!!"
순간 칼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잠시 주변의 시선조차 잊고 그녀의 머리 위에 떠오른 타이틀을 멍하니 바라봤다.
"갑자기 왜 그래?"
옆에 있던 클라이렛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칼은 급히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었다.
방금 정말 자신이 제대로 본 게 맞나 칼은 다시 엘론의 머리 위로 시선을 흘겼다. 그만큼이나 그녀의 정체는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그때 부실 안쪽으로 이동했던 윌리스가 입부서와 펜을 들고서 다시 나타났다.
"자, 입부서다. 얼마 안 걸리니까 여기서 바로 작성하면 돼."
"앗! 내가 도와줄게."
"클라이렛, 너는 담당했던 술식이나 어서 마저 정리해라. 벌써 오후인데 언제까지 큐브만 가지고 놀고 있을 거냐?"
투덜거리는 클라이렛을 뒤로 하고 칼은 입부서를 앉은 자리에서 바로 작성했다. 항목이 얼마 되지도 않았기에 몇 분도 걸리지 않아 작성을 완료했다.
- 칼 학생! 입부서 작성했으면 들어와요. 가볍게 면담을 나누도록 하죠.
동시에 가람 교수가 있던 안쪽 방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닫혀있음에도 마력을 타고 소리가 선명하게 전달되는 걸 보아 확성 마법의 일종인 듯했다. 칼은 엘론을 힐끔 다시 바라보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작성한 입부서를 들고서 방으로 들어가자 콧노래를 부르며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는 가람 교수가 보였다. 한눈에 봐도 한껏 들뜬 모습. 앉으라는 듯 그녀가 앞의 의자에 손을 뻗었다. 칼은 자리에 앉은 뒤 작성한 입부서를 내밀었다.
"음음, 좋네요."
입부서를 확인한 가람 교수가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도장을 꾹 찍고는 책상 서랍에 집어넣었다.
"술식 전개의 응용과 탐구 동아리에 입부한 걸 환영해요, 칼 학생."
"......"
"말했던 대로, 이제부터 나는 칼 학생에게 마법 이론을 기초부터 가르칠 거예요. 장담하건데, 제대로 내 지도에 따르기만 하면 칼 학생은 이번 학기가 끝나기 전에 적어도 완전한 2서클을 이루고 3서클의 벽을 마주할 수 있을 거랍니다."
이전에도 했던 이야기. 칼은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들이야 아무래도 좋고, 어쨌든 아카데미에서 쫓겨나지 않을 정도로만 이론을 제대로 가르쳐준다면 충분했다.
"자, 마음 같아선 당장부터라도 지도를 시작하고 싶지만... 찾아온 타이밍이 조금 아쉽게 됐네요. 오늘은 여러모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넘쳐나거든요."
"아, 예. 그럼 적당한 때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이왕 온 김에 동아리 구경이나 좀 더 하다 가는 건 어때요? 선배 부원들이랑 대화도 나누고. 칼 학생이야 목적이 따로 있으니 본격적인 동아리 활동을 하게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두루두루 친분을 쌓아서 나쁠 건 없으니까요. 앞으로의 학사 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
"감사한 조언이지만, 오늘은 우선 입부만 마칠 목적으로 찾아왔습니다. 따로 바쁜 일이 있어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칼은 깔끔하게 잘라 거절했다.
사실 바쁜 일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입부하기로 한 동아리, 그녀의 말대로 더 둘러보아도 나쁠 건 없긴 했다.
하지만 엘론의 정체를 파악한 순간부터 이곳에는 웬만해선 오래 있고 싶지 않아졌다.
"음, 그런가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일단은 칼이 입부했다는 것만으로 만족한 그녀였기에 더 이상의 말은 없었다.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가람 교수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런 칼을 붙잡았다.
"아, 잠깐만."
가람 교수가 책장에서 뽑아 내민 것은 마법서로 보이는 서적이었다.
칼이 의문스런 눈으로 받아들자 그녀가 싱긋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직접 다듬은 기초 이론 마법서예요. 본격적인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 시간을 내서 한번 읽어보면 도움이 될 거예요."
"아, 감사합니다."
칼은 가볍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기초 수준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루블리온의 교수 정도 되는 인물이 직접 집필한 마법서. 중앙도서관에 개방된 적당한 공공 서적들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더군다나 칼의 사정을 빤히 알고 있는 그녀가 직접 읽어보라고 권했으니 내용의 이해도 훨
씬 쉬울 터였다.
이 시대의 지식은 귀하다. 하물며 마법적인 지식이라면 더욱이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루블리온이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라고 한들 소속 교수들도 결국에는 마법사였다. 기본적인 커리큘럼을 벗어난 영역의 지식까지 쉽사리 학생들에게 전수해줄 리 없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가람 교수가 자신이 집필한 마법서를 이렇듯 선뜻 건네준 건, 칼에 대한 진심을 나타내는 방증이기도 했다.
"아, 그리고 칼 학생?"
"네, 교수님."
"굳이 엄하게 금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다른 학생들과 마법서를 공유하지는 않았으면 해요. 집필자로서 썩 내키지 않는 일이거든요."
기껏 정성 들여서 정리한 이론을 개나소나 보여주지 말라는 뜻. 칼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역시 그녀도 마법사였다.
철컥.
그렇게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오자, 바깥의 부원들이 다시금 뚫어지는 시선들을 보내왔다.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클라이렛이었다.
"뭐야? 안에서 무슨 얘기를 한 거야?"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모습. 칼은 간단하게 일축했다.
"그냥 입부 관련 이야기였습니다."
"거짓말! 그냥 입부 이야기인데 교수님이 방음 마법까지 치셨을 리가 없잖아. 응?"
엘론만 제외하고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로 궁금한 기색이었다. 클라이렛의 말대로 단순히 입부 이야기였다면, 굳이 방음벽을 둘렀을 리가 없을 테니까.
물론 칼도 가람 교수가 이야기에 앞서 방음 마법을 활성화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칼이 이곳에 입부한 진짜 목적은 부활동이 아닌 개인적인 지도였다. 당연히 다른 부원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는 이야기었기에 가람 교수가 방음 마법을 활성화한 것도 당연했다.
"정말 별 이야기 없었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살짝만 말해보라니..."
- 클라이렛.
칼의 귀에 대고 은근히 속삭이던 클라이렛이 움찔하며 굳었다. 닫힌 방문 너머에서 마력을 타고 선명히 들려오는 가람 교수의 목소리.
- 금주까지 제출하기로 했었던 크람볼 왜곡식 논문은 벌써 전부 작성을 마친 건가요? 바쁜 후배를 붙잡고 태평하게 놀고 있는 걸 보니 시간이 남아도는 모양이예요. 기대하고 있을게요.
"......"
갑자기 오한이라도 든 듯 한 차례 몸을 떠는 그녀.
이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가 앉더니 아까부터 만지작거리고 있던 큐브도 옆쪽에 가지런히 치워두고는 펜을 집어든다. 종이에 무언가를 기계처럼 써내려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부원들이 한심함 반, 안쓰러움 반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교수님 빤히 듣고 계시는 걸 알면서 왜 자제를 못 하냐. 잠깐이라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혀에 가시가 돋나?"
"시끄러. 너도 할 일 다 끝났으면 내 술식 계산이나 도와줘."
"안타깝지만 이쪽도 아직 태산이다. 교수님께서 기대하고 계신다니 최선을 다하기나 해라."
클라이렛의 어깨가 한층 더 추욱 늘어졌다. 코웃음을 친 윌리스가 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입부를 환영한다, 신입생. 그러고 보니 내 소개를 하지 않았군. 난 3학년 윌리스라고 한다. 일단 직책은 부장이지."
아까 윌리스는 입부서를 가져오느라 인사를 나누지 못했었다.
그나저나 부장이라, 올백으로 반듯하게 넘긴 머리에 안경까지 끼고 있어서 왠지 부를 통솔하는 것 같은 이미지긴 했지만, 진짜로 부장이었다니 칼은 조금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내킨다면 부실을 좀 더 둘러봐도 되는데..."
"아뇨,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오늘은 그만 돌아가볼 생각입니다."
"그래. 그러면 다음에 또 보자고."
부원들은 각자 칼에게 인사를 건네고서 다시 자신들의 일에 열중했다.
가람 교수가 고문으로 있는 것에서 어렴풋이 예상은 했지만, 어떤 분위기의 동아리인지 파악되는 광경이었다.
"또 봐, 신입생."
마지막으로 엘론이 한 박자 늦게 인사를 건넸다. 칼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서 몸을 돌렸다.
그렇게 부실을 나선 뒤, 닫히는 문 사이로 마지막으로 그녀의 모습을 힐끔 바라봤다. 정확히는 그녀의 머리 위 글자를.
"......"
다시 봐도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타이틀이다.
애초에 학생들 중 저런 인물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을 리가 없었다. 입학하기도 전부터 진작 귀에 들어왔을 것이다. 아카데미 내에 소문이 쫙 퍼져있었을 테니까. 그렇다면 설마 정체를 숨긴 채 아카데미 생활을 하고 있기라도 한 건가?
칼은 머릿속이 헝클어지는 기분을 느끼며 미간을 좁혔다.
'대체 어째서...'
[Lv.36]
[루블리온 3학년, 대마법사 로메인 페이지의 손녀]
대체 왜, 무슨 연유로, 대마법사의 손녀가 이곳 루블리온에 있단 말인가?
* * *
기숙사로 돌아오며 칼은 엘론에 대한 생각을 정리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대마법사 로메인 페이지의 손녀라니. 차라리 흑마법사를 발견한 편이 더 나을 정도로 성가신 상황이었다.
"...젠장, 느낌이 영 안 좋은데."
7서클, 인간을 완전히 초월한 절대자.
아무리 6서클의 경지에 시스템으로 이것저것 어드밴티지를 받고 있는 칼이라 해도 감히 대적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혹여나 대마법사와 마주치는 일이 발생하기라도 했다간 아마 매우 높은 확률로 경지를 숨긴 걸 들킬 것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무척이나 난감한 상황이 이어지겠지. 첩자로 의심받아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물론 전부 쓸데없는 걱정에 불과할 수도 있었다.
대충 보아하니 그녀는 신분을 숨긴 채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모양이었고, 그건 즉 그만큼 자신의 뒷배가 누구인지 철저하게 숨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냉정하게 생각하면 대마법사와 직접적으로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게 있다. 일단 엘론이 대마법사의 혈육이라는 사실만으로 잠재적인 위험에 노출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지금이라도 다시 탈퇴할까?'
나름 심각한 사안이라면 심각한 사안이었다. 동아리 입부에 대해서 다시금 신중하게 고려해야 될 만큼.
잠시 고민하던 칼은 이내 결론을 내렸다. 동아리 가입은 계속해서 유지하기로.
어차피 엘론이 루블리온의 학생인 이상, 이렇게 루블리온에 있는 것부터가 이미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 것이긴 했다. 고작해야 같은 동아리 소속이라고 해서 그 위험에 별 차이는 없겠지. 애초에 그녀도 이쪽엔 아예 관심이 없는 기색이기도 했고.
'고민해봐야 머리만 아프지. 아카데미를 때려칠 게 아닌 이상에야 딱히 할 수 있는 게 있는 것도 아니니.'
그나저나 그러면, 그녀에게서 느꼈던 묘한 기분은 대마법사의 혈육이라 그랬던 건가?
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엘론의 존재는 그만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기숙사로 돌아오니 아직까지도 침대에 누워 팔자 좋게 늘어져있는 레븐의 모습이 보였다.
"아함~, 어디 갔다 왔냐?"
고개를 들고선 하품을 하며 휘적휘적 손을 흔드는 레븐. 칼은 의자에 앉으며 대답했다.
"동아리 가입 때문에."
"...엥? 동아리 가입? 벌써? 너 그렇게 부지런한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하기야, 뭐. 일찍이 가입해서 나쁠 것도 없긴 하지. 연구 같은 부활동에 제대로 끼진 못하겠지만 선배들이랑 미리미리 친분도 쌓아놓고 좋... 잠깐, 근데 넌 인맥 같은 거에도 별 관심 없는 놈이잖아? 너 진짜 왜 벌써 가입했냐?"
칼은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굳이 가람 교수에게 직접 제안을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꺼낼 이유는 없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레븐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그래서, 어느 동아리 가입했는데? 나도 고민 중이긴 했는데 그냥 너랑 같은 동아리에 가입할까?"
"마법 술식의 응용과 탐구였나."
"...뭐냐, 그 듣기만 해도 벌써부터 따분해지는 동아리는? 에이, 관둘랜다."
레븐은 금방 흥미가 가셨다는 듯 도로 드러누워버렸다.
"그나저나 동아리 고문 교수는 누군데?"
"가람 교수."
"컥, 그 교수님이라고? 너 감당할 수 있겠냐?"
루블리온에 빡세지 않은 과목이 어디 있겠냐만, 그중 가람 교수의 이론 강의는 이미 며칠 간의 수업만으로도 신입생들 사이에 유독 악명이 자자하게 되었다. 수업 시작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쉬는 틈도 없이 한 호흡으로 이끌고 가는 그녀의 스타일은 이제 막 입학
한 햇병아리 신입생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으니까.
"으, 그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정말 지옥이나 다름없다고. 넌 수업 때 그렇게 시달리고도 동아리까지 가입하고 싶냐?"
이론 수업의 내용은 전부 한 귀로 듣고 흘린 칼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뭐, 아무튼 힘내라."
레븐은 그만 칼에게 신경을 끄고서 도로 눈을 감았다. 일어난 게 아니라 아직도 더 잘 모양이었다. 저 녀석은 종일 뒹굴거리고 있을 셈인가.
칼도 신경을 끄고서 가람 교수에게 받은 기초 마법서를 펼쳤다.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으니 바로 읽어볼 생각이었다.
"......"
그렇게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린 채 내용을 읽어내려가길 약 몇 시간.
놀랍게도 칼은 나름대로 내용을 이해하고 있었다. 일단 내용 자체가 기초적이었기에 그렇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아무리 기초 마법서라 한들 마법 이론에 대한 토대가 아예 전무하다시피 한 사람이 읽는다면, 보통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칼은 정상이 아닌 방법으로나마 6서클의 경지를 이룩한 성위마법사였다. 일단 기본적인 통찰력이 범인의 수준을 한참 상회하며, 시스템의 힘으로 마법을 전개한 수많은 경험이 있었다. 직접 술식을 전개하여 펼친 마법이 아니더라도 마력의 흐름 자체는 이
미 몸에 완벽히 체화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것들이 합쳐져 칼은 원리에 대한 약간의 설명만으로도 내용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름 지구인 관점에서의 결론도 내렸다.
"이거, 아무리 봐도 수학이랑 비슷한데."
입학 시험 때도 얼핏 느꼈던 부분이지만 이제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의 마법 술식이란 지구의 수학과 비슷했다.
사실 놀라운 것도 없었다. 지구나 이곳이나 환경과 문명과 상식의 차이가 있을 뿐, 근본적인 자연 법칙은 동일하니까.
오러라든지 마법이라든지, 이곳엔 지구에는 없는 종류의 온갖 신비들이 넘쳐났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거시적인 시점에서 보면 결국은 이곳도 지구와 동일한 자연의 법칙으로 돌아가고 있는 세계였다.
'그리고 수학은 그런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증명하는 학문이지.'
물론 칼이 수학에 대해 조예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연의 근간엔 수학적인 원리들이 숨어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아무튼 내용이 얼추 이해되니 조금이나마 흥미가 이는 느낌이었다.
칼은 지금껏 펼쳤던 마법들의 술식을 책의 내용과 하나씩 머릿속에서 접목시켜 보았다. 술식이 간단한 1서클 마법들은 지금의 수준으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조금만 더 술식의 원리에 익숙해지면 스킬이 아닌 진정한 '마법'으로서 마법을 펼쳐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니, 한번 지금 당장 시도해볼까?'
간단한 발광 마법 정도라면 어떻게든 가능할 법도 한데?
< 마법 이론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