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법 이론 (3) >
데이빗은 케돈 가문의 장남이었다.
제국에서도 제법 명망이 있는 가문의 적자인 그는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루블리온에 입학했다. 루블리온은 대륙 제일의 아카데미, 실력과 인맥을 동시에 쌓기엔 이만큼 적합한 곳도 없었으니까.
과연 그 위명에 걸맞게 루블리온에는 소문으로만 듣던 유명 인사들이 득실거렸다. 특히나 고대했던 그녀 또한 있었다.
대 마법명가 뮬레트 가의 자제, 성년이 되기도 전 벌써부터 4서클을 바라보고 있는 천재.
언젠가 가주인 아버지를 따라 황성의 연회에 갔을 때 멀리서나마 줄리엔을 본 적이 있었던 데이빗은 그때부터 쭉 남몰래 줄리엔을 흠모해왔었다. 물론 줄리엔은 그의 존재조차 몰랐지만.
그렇기에 배정된 반에 줄리엔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속으로 환호성마저 내질렀었다. 그러나 동시에 좌절감과 수치심도 느꼈다. 첫만남이 그야말로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이 빌어먹을 놈 때문에...'
데이빗은 눈에 적의를 가득 담고서 반대편의 남학생을 바라봤다.
이름이 칼이라고 했던가? 성도 없는 평민에 불과한 놈.
줄리엔이 입학 시험의 대인마법전에서 누군가에게 패배했다는 소문은 금세 퍼졌기에 데이빗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의 주인공이 지금 눈앞에 서있는 칼이라는 것 또한.
'뭔가 비겁한 수를 쓴 게 분명하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줄리엔이 고작 듣도 보도 못한 학파의 나부랭이 따위에게 패배했다는 건 말이 되겠는가?
물론, 그런 것치고는 아까 전에 봤던 서로 꽤 친해보이던 모습이 거슬리긴 했지만, 데이빗은 그것을 줄리엔의 관용으로 이해하고 정신 승리를 선택했다.
분명 뮬레트의 영애는 그런 졸렬한 술수를 간파하지 못한 것마저 자신의 실책으로서 인정하고, 이 무지렁이 놈에게 차별 없이, 귀족다운 태도로 인사를 받아주는 친절을 베푼 것뿐이리라...
설마 첫날부터 실습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이번 마법전은 좋은 기회였다.
저 건방진 놈을 밟아버리고 뮬레트의 영애에게 눈도장을 제대로 찍을 기회.
'여기서 네놈의 바닥을 전부 까발려주마.'
우월한 격의 차이를 보여주며 칼을 단숨에 제압해버리는 상상을 마친 데이빗은 입가에 씩 미소를 걸고서 시선을 돌렸다.
주위를 둥글게 둘러싼 학생들의 한편에 줄리엔의 모습이 보였다.
"......?"
데이빗은 당황했다.
어째서인지 이쪽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썩 밝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어딘가 심통이 난 듯한 표정.
'...저 애는 뭔데 짜증나게.'
실제로도 현재 줄리엔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상대를 지목할 수 있다면 자신의 차례에 칼을 선택할 수 있었을 텐데, 데이빗이 그 기회를 낼름 채가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미 대련을 마친 학생을 다시 고를 수는 없을 테니 이번 실습에서는 칼과 다시 대련할 기회가 없다. 다음 실습 때를 다시 노려야 할 터였다.
그렇게 데이빗이 본래와는 정반대의 의도로 줄리엔에게 눈도장이 찍히고 있을 때, 칼은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한 변의 크기가 대략 3m는 될 법한 넓은 정육면체.
바닥에 깔린 육면체 형태의 마력 타일들은 마치 거북이의 등껍질을 연상케 했다.
"그럼 규칙에 대해 설명하겠다."
잠깐의 텀을 두고 바크롱의 설명이 이어졌다.
"바닥에 깔린 마력 타일들은 밟을 때마다 색이 칠해진다. 보시다시피 한쪽은 빨강, 다른 한쪽은 파랑이다."
그 말대로 현재 데이빗은 밟고 서있는 타일은 붉게, 칼이 밟고 서있는 타일은 파랗게 색이 채워진 채였다.
"대련이 시작되면 번갈아 타일을 한 칸씩 이동할 기회가 주어진다. 그렇게 해서 대련이 끝날 때까지 더 많은 타일을 자신의 색으로 더 많이 물들인 쪽이 승리한다."
타일을 바라보는 칼의 눈에 미약한 흥미가 깃들었다.
형태를 보고 대충 예상은 했는데 역시 그런 식이었나.
"이미 상대의 색으로 칠해진 타일을 밟으면 자신의 색으로 덧씌울 수 있다. 상대가 위치한 타일 또한 침범하여 색을 덧씌울 수 있다. 그 경우엔 상대 측에선 타일 밖으로 도로 나갔다 들어와야 색을 되찾을 수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앙을 보도록."
루바스와 칼을 포함하여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중앙으로 향했다.
마력 타일 판을 생성한 마도구가 둥둥 떠있는 정중앙 타일은 다른 타일들과 다르게 이미 황금색으로 색이 채워져 있었다.
"중앙의 황금색 타일을 차지한 쪽은 상대편을 마법으로 공격할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무제한은 아니고 황금 타일을 차지한 순간과, 그 뒤로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한 번씩이다."
"......"
"하지만 타일을 이동하지 않고 계속해서 황금 타일을 차지하고 있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면 자신의 차례가 돌아올 때마다 상대를 공격할 수 있겠지. 공격을 받는 상대에게도 당연히 방어할 권한이 주어지나, 완전히 방어하지 못하고 현재 위치해있는 타일 밖으로 벗
어나게 된다면 패배다. 전부 이해했나?"
두 사람이 번갈아 타일을 이동하며 땅을 차지한다.
중앙의 황금색 타일을 차지한 자는 타일을 이동하는 대신 상대를 공격할 권한이 주어진다.
그 공격에 상대편은 방어할 수 있으나, 현재 위치한 타일 밖으로 조금이라도 벗어나게 된다면 그 즉시 패배.
어렵지 않은 규칙이었기에 칼과 데이빗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대련이라기보다는 어째 게임에 가까운 룰이었기에 지켜보는 학생들 또한 흥미진진한 분위기가 되었다.
"좋아, 둘 모두 이걸 착용하도록."
바크롱이 씩 웃으며 고개를 까닥이자 조교가 두 사람에게 팔찌를 건네주었다. 마법전의 기본 안전 장치인 실드 마도구였다.
"어이."
마도구를 손목에 착용하고 있는데 들려오는 목소리에 칼은 고개를 들었다.
데이빗이 비웃음을 가득 담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는 아주 기세등등했지? 족보도 없는 평민 자식이 겨우 운 좋게 루블리온에 입학했다고 말이야."
"......"
"여기서 네 주제를 제대로 깨닫게 해주마. 부디 건방지게 지껄였던 것만큼의 실력이 있길 바라지."
칼은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그렇게 마도구를 착용한 칼과 루바스는 지시에 따라 타일의 양측 끝으로 이동했다.
서로 거리가 완전히 떨어진 이곳에서부터 타일을 하나씩 차지하며 대련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바로 중앙부터 차지한다.'
데이빗은 자신만만한 눈빛으로 중앙의 황금색 타일을 바라봤다.
작전은 간단했다. 곧바로 중앙까지 직진해서 공격권을 선취하는 것.
다른 타일들이나 야금야금 갉아먹으며 대련에서 승리할 생각 따윈 없다. 데이빗은 마법으로 칼을 찍어누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바크롱의 말에 데이빗은 조금 낭패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차례는 지목당한 칼부터 시작이다. 자, 그럼 바로 대련 시작."
황금 타일은 칼과 데이빗, 양측에서부터 정확히 열 칸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그렇기에 둘 모두 황금 타일을 노린다면 먼저 이동을 시작한 쪽이 당연히 선공권을 차지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음, 어쩔까.'
칼은 잠시 황금색 타일을 응시하다가 저멀리 반대편으로 시선을 옮겼다. 데이빗의 표정엔 여전히 적의가 가득했다.
칼은 그런 데이빗을 바라보며 피식 웃고는 중앙을 향해 앞쪽으로 한 칸 타일을 이동했다.
그것을 도발이라 생각했는지 데이빗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데이빗도 응수하듯 곧바로 중앙을 향해 한 칸 이동했다.
"오오, 바로 맞붙으려나 본데?"
"마법사라면 당연히 정면 승부지."
주변에서 지켜보는 학생들이 작게 술렁였다.
차례가 돌아오자마자 칼은 망설임 없이 다시 앞으로 한 칸 이동했다. 데이빗도 지지 않겠다는 듯 앞으로 이동했다.
둘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주변의 술렁임은 점점 커졌다. 바크롱 또한 재밌다는 표정으로 대련의 양상을 지켜봤다.
저벅.
그렇게 중앙의 황금 타일까지 서로 세 칸 정도 남게 된 시점.
이동을 마친 데이빗의 표정이 돌연 묘하게 변했다.
여기까지 이동하고 보니 문득 깨닫게 된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좀... 너무 가까운데...?'
둘 모두 황금 타일을 향해 이동했다면 종래엔 서로 위치한 타일이 완전히 맞붙게 된다.
이대로 칼이 선공권을 차지하면 데이빗의 입장에선 타일 한 칸 만큼의 짧은 거리에서 공격을 받아내야 될 판이었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데이빗의 얼굴에 서서히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아니, 진작에 알고야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가까워지고 나니 현실감이 돌아온 것이었다.
데이빗은 칼을 바라봤다. 칼은 이번에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앞으로 전진했다.
'저 자식은 아무렇지도 않냐? 공격에 실패하면 바로 내 차례인데?'
상대가 이미 위치해있는 타일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했으니, 칼이 만약 공격에 실패한다면 다음은 데이빗의 차례다.
심지어 그렇게 되면 칼은 말 그대로 코앞의 거리에서 데이빗의 공격을 방어해야만 했다.
한데 그 사실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칼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했다.
괜히 자신만 초조한 것 같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데이빗은 입술을 깨물며 다시 앞으로 전진했다.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도 없었다. 먼저 물러서는 쪽이 겁먹고 꼬리를 내린 걸 인정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지켜보는 바크롱은 즐겁다는 듯 클클 웃음을 흘리며 눈을 반짝였다.
지금껏 자신의 수업을 거쳐간 많은 학생들이 이 대련을 경험했고, 그럴 때마다 반드시 한 번씩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지금과 같은 상황이었다.
다른 작전을 잘 세우는 것도 좋다만, 역시 이런 치킨 게임이 대련의 진짜 묘미인 것이었다.
황금 타일까지 각각 남은 거리는 두 칸.
칼은 이번에도 전진했고, 데이빗 역시 이를 악물고 전진을 택했다. 한 칸.
이제 칼이 마지막으로 전진하여 황금 타일을 차지하면 코앞의 거리에서 선공권을 가진다.
데이빗은 한껏 긴장감을 끌어올린 채 방어를 준비했다. 그러나...
"......?"
데이빗은 순간 벙찐 표정을 지었다.
황금 타일까지 바로 한 칸을 남겨두고 돌연 칼이 옆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어? 쟤 뭐 하냐?"
"갑자기 왜 방향을 꺾어?"
지켜보던 학생들 사이에서 소란이 더해진다. 바크롱도 이런 상황은 예상치 못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하자는 거냐, 지금?"
데이빗은 이동을 마치고 태연히 서있는 칼에게 물었다.
칼이 입가에 웃음을 걸고 황금 타일은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귀하신 귀족 나으리한테 먼저 양보해드린 것뿐인데? 사양하지 마."
"......"
이 미친 새끼가?
자존심에 완전히 금이 간 데이빗은 칼을 죽일 듯 노려보며 황금 타일을 향해 이동했다. 그리고 곧장 마법을 전개했다.
퍼어엉!!
시뻘건 화염이 폭발하며 칼이 서있는 자리를 강타했다.
바로 지척의 거리에서 이루어진 마법 공격. 다른 학생들이 보기엔 저걸 과연 제대로 방어할 수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슈우우...
그러나 화염이 가시고 난 자리에 칼은 여전히 태연하게 서있었다.
어느새 펼쳐진 실드 마법엔 조금의 균열조차 없었다. 데이빗은 충격받은 듯 멍한 표정이었다.
이 정도 거리라면 방어한다고 해도 충격에 튕겨나가야 정상인데, 칼은 너무나 멀쩡한 모습이었기에.
'자, 잠깐! 이렇게 되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칼이 이번에 황금 타일로 이동한다면 방어해야 하는 쪽은 자신.
지금처럼 타일 한 칸 간격도 아니다. 둘이 함께 황금색 타일에 서게 되니 완전히 코앞의 거리에서 칼의 공격을 방어해야 했다.
데이빗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나...
저벅.
이번에도 칼은 황금색 타일을 향해 이동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주변의 다른 타일로 이동해 땅을 차지할 뿐이었다. 그리곤 데이빗을 향해 싱긋 웃었다.
"난 착하니까 계속 양보해줄게."
"......"
"뭐 해? 귀족 나으리. 공격 안 할 거야?"
데이빗은 그제야 깨달았다. 바크롱과 주변의 학생들도 모두 깨달았다.
칼은 애초에 공격권을 차지할 생각이 없었다는 걸.
"이, 이 빌어먹을 놈이!"
해일처럼 몰려드는 모욕감과 수치심을 느낀 데이빗은 격분하며 다시 전력으로 마법을 전개했다. 녹빛이 일렁거리는 칼바람이 공기를 찢으며 몰아쳤다.
콰과과곽!!
하지만 이번에도 칼의 견고한 실드를 뚫을 수는 없었다. 칼은 하품을 하며 다시금 한 칸 이동했다.
쾅! 콰앙! 콰과광!!
그 뒤로도 데이빗의 공격은 계속되었으나 전부 부질없었다.
어떤 종류의 마법을 전개해도 공격들은 모조리 실드에 가로막혀 소멸되었고, 그럴 때마다 데이빗의 얼굴에 패배감과 절망감만 더해질 뿐이었다.
어느새 타일의 3분의 1 가량이 전부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그제서야 데이빗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칼은 시시하다는 얼굴로 이동을 멈췄다.
"......"
어느새 주변은 침묵에 가라앉은 채였다.
학생들은 모두 충격받은 얼굴로 칼을 응시하고 있었다. 오직 줄리엔만이 역시 자신의 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반쯤 신난 표정이었다.
잠시 뒤 바크롱의 어이없다는 듯한 헛웃음이 침묵을 깨고, 대련의 종료를 알렸다.
"승자, 칼. 대련은 이어서 계속한다."
< 마법 이론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