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120화 (120/132)

< 입학 (7) >

"뭐야? 방금 그건..."

"뮬레트의 영애가 졌다고?"

이내 정적이 깨지고 지원자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한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어째서 반격에 나서려던 뮬레트 영애가 바닥에 쓰러진 건지 상황을 파악한 이는 없었으나 눈앞에 펼쳐진 결과는 명백했다.

줄리엔이 쓰러졌고, 상대는 여전히 멀쩡히 서있다. 조교수 케드가 선언한 대로 그녀의 패배였다.

"...허!"

결착의 순간을 정확히 꿰뚫어본 건 바크롱이 유일했다.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칼을 바라봤다.

'저놈 좀 보게나?'

교슈이기 이전에 과거 전장에서 수십 년을 굴렀던 베테랑. 그런 바크롱이기에 많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줄리엔이 여러 패널티를 스스로 자처하긴 했지만, 그것을 감안하고도 칼의 전투는 무척이나 훌륭했다.

마력체 분할, 제어, 공격 궤적, 타이밍 등, 그 모든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실용적이고 효율적이었다. 단순히 마법전에 대한 훈련을 많이 해왔다고 가능한 것이 아닌, 타고난 전투 감각과 아마 실전에서 쌓았을 많은 경험이 합쳐졌기에 보일 수 있는 모습.

그렇기에 생각했었다. 애송이들 사이에 벌써부터 제법 떡잎이 보이는 놈이 있다고, 전투과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싹이 나타났다고.

한편으론 상대가 나빴다고도 생각했다. 경지의 차이는 거의 절대적이니까.

처음 대응은 어설펐어도 금세 칼의 공격에 적응해가는 뮬레트 영애의 모습을 보며, 그녀의 경지가 조금만 더 낮았으면, 이라고 생각하며 아쉬워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전부 착각이었군.'

애초에 처음부터 전력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줄리엔이 막 반격에 나서며 틈을 보였다고는 하나, 마지막 순간 칼이 날린 포스는 결코 그의 수준에서 해낼 수 있는 수준의 기습이 아니었다.

경지를 숨긴 것은 아닐 터였다. 칼에게서 느껴지는 마력량은 아무리 높게 쳐봐야 명백히 3서클의 아래였으니.

저 성년도 되지 않았을 애송이가 사실은 6서클의 성위마법사고, 그렇기에 이쪽의 감각을 가볍게 무시할 정도로 마력을 은닉할 능력이 있는 게 아닌 이상에 말이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훨씬 더 자질이 뛰어나다는 거겠지.'

바크롱이 칼을 응시했다. 좀 전보다 배는 더 흥미가 차오른 눈길로.

이 루블리온에 천재는 많다. 다양한 분야에, 다양한 인재들이 존재한다.

저 28번 지원자의 경우는 마력 운용과 전투 감각이라는 줄기에 재능이 특화된 것일 터.

한편 쓰러진 줄리엔은 여전히 반쯤 넋을 놓은 얼굴이었다.

"...방금, 그거 어떻게?"

칼은 그녀의 물음에 간결히 답해주었다.

"그냥 운이 좋았을 뿐이야."

"......"

"네가 너무 방심했잖아? 3분 끝났다고."

비록 인지도 못하고 당했다지만 그녀는 그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인지조차 못했기에 더더욱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운 따위가 아니다. 애초에 별달리 방심을 하지도 않았지만, 온 신경을 집중했었더라도 아마 마지막 공격은 못 막았을 것이다.

그렇게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내버려두고, 칼은 제자리로 걸음을 옮겼다.

'대충 다 끝났나.'

4차가 마지막이라고 했으니 시험은 이것으로 마무리였다.

여전히 입학이 정답인지는 모르겠다. 그 전에 과연 3, 4차 시험의 점수로 이론 시험의 참사를 무마할 수는 있을까.

뭐가 어찌 됐든,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어처구니없게 떨어지지나 않았으면 했다.

설마 이론 시험에 최소 점수 같은 거라도 있는 건 아니겠지?

* * *

루블리온 아카데미, 교수 집회실.

"유독 눈에 띄는 인재들이 많은 것 같더군요. 올해 신입생들 중에는."

술식변형과 소속 교수의 말에 주변에 앉은 다른 몇몇 교수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교수들은 별다른 반응 없이 살펴보던 서류에 계속 시선을 둔 채였다. 이번 입학 시험의 결과가 정리된 서류였다.

사흘에 걸친 입학 시험이 마무리된 뒤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신입생 선발은 모두 마쳐졌고, 새학기 시작과 정식 입학 전에 남은 과정은 이제 일대일 면담뿐이었다. 별 의미는 없는, 형식에 가까운 절차였지만.

지금 이 자리는 신입생들의 정보를 살필 겸 각자 면담을 맡을 신입생들을 정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저 짧은 면담일 뿐이고, 무작위로 정해버리면 더할 나위 없이 간단하고 편하겠지만, 개인적으로 관심을 가진 신입생이 있는 교수들도 있었으니까.

"자, 새학기 준비로 다들 할 일들이 넘쳐나지 않은가?"

상석에 앉아있던 노교수가 가볍게 박수를 쳐서 어수선한 분위기를 환기했다.

"시간 허비할 것 없이 빠르게 정하도록 하지. 우선은 수석과 차석부터."

그에 교수들의 눈이 반짝였다.

수석과 차석, 이번 입학 시험에서 1, 2위의 성적을 거둔 신입생들.

고작 입학 시험에 불과하긴 하나, 대륙 각지에서 모여든 온갖 기재들 중 가장 두드러지는 두 천재에게 관심이 끌리지 않을 리 없었다.

"수석이야 뭐... 예상한 대로군요."

서류에 적힌 석차를 살피며 한 교수가 중얼거렸다.

제국 제일의 마법 명가, 오르빅 공작가.

그곳의 삼녀이자, 대마법사 로메인 페이지조차 감탄했다는 불세출의 천재. 제나스 오르빅.

이번 년도의 신입생들 중 유일한 4서클이니 별다른 설명이 필요할까?

수석이라는 수식어가 빛이 바랠 정도로 그녀는 홀로 격을 달리하는 존재였다.

"4차 시험에서 그녀의 시험 감독관을 맡았었는데, 고학년 최상위권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겠더군요."

"손색이라, 순수한 재능으로만 따지자면 비교 자체가 민망할 것 같네만."

"하하, 괜히 불세출의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니겠죠. 그나저나 차석은..."

차석의 이름에 붙은 성 또한 모를 수가 없는 가문이었다.

"차석은 뮬레트의 영애였군요."

몇몇 교수들이 묘한 눈빛을 띄었다.

그도 그럴 게, 줄리엔 뮬레트와 제나스 오르빅은 어렸을 적부터 서로 라이벌에 가까운 관계인 걸로 상당히 유명했으니까.

물론 라이벌이라고는 하지만 모든 면에서 압도적인 쪽은 제나스였다.

뮬레트 가문이 제국에서 손에 꼽는 마법 명가라지만 오르빅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특히 재능적인 부분은 말할 것도 없었다.

줄리엔 또한 충분히 천재의 범주에 들 마법적 자질을 지녔지만, 제나스에 비하면 모닥불 앞의 촛불처럼 초라한 것이었으니.

"그나저나 이번에 어스문 쪽 원로의 제자도 입학을 지원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공동 3위에 있는 카인이라는 이름입니다. 흠, 지원 번호를 보니 뮬레트의 영애와 같은 그룹에서 시험을 치뤘던 모양입니다?"

"참, 그러고 보니..."

한 교수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시선을 돌렸다.

전투과 소속 교수인 바크롱이 앉아있는 쪽이었다.

"뮬레트 영애가 4차 대인마법전 시험에서 상대 지원자에게 패배했다는 말을 언뜻 들었던 것 같은데요. 바크롱 교수님."

회의엔 관심 없다는 듯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바크롱이 그를 힐끔 바라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네."

"아, 그게 정말이었습니까?"

"소문이 좀 퍼졌던가?"

"예, 제법 퍼졌습니다. 아무래도 그 뮬레트 가의 자제니까요. 별 대단치도 않은 상대한테 방심했다가 어이없게 당했다고..."

그 말에 바크롱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군. 그런 식으로 퍼졌단 말이지."

방심? 어이없게 당해?

하긴, 대련을 관전했던 지원자들의 입장에선 그렇게 보였을 법도 하다.

바크롱의 입장에선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지만 칼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 이 자리에서 꺼낼 생각은 없었다.

본래 그의 성격이 입 아프게 떠드는 것과도 멀었기니와, 점찍어둔 싹을 괜히 다른 교수들이 눈독 들이게 하기도 싫었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상위 석차의 신입생들부터 하나둘씩 담당이 정해졌다.

애초에 교수들 간에 담당 희망이 겹치는 신입생은 몇 명을 제외하곤 없었기에 회의는 대체로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바크롱은 팔짱을 낀 채 그 광경을 따분하게 지켜봤다.

그 역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신입생은 있었지만 굳이 면담을 도맡을 생각은 없었기에.

'그나저나... 어이가 없구만.'

바크롱은 헛웃음을 흘리며 다시금 칼의 입학 석차를 확인했다.

4차 대인마법전 시험에선 분명히 최고점을 줬을 텐데, 대체 이전 시험들을 얼마나 망쳤길래 이런 석차가 나온 거지?

"......"

한편 바크롱과 같이 칼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는 교수는 한 명 더 존재했다.

심화이론과 소속의 정교수, 가람 크레아.

강렬한 흥미가 담긴 눈으로 물끄러미 칼에 대한 정보를 살피던 그녀가 곧 입을 열었다.

"저, 이 신입생의 면담은 제가 맡아보고 싶네요."

* * *

"아, 빌어먹을."

칼은 천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푹신한 침대 시트에 온몸을 푹 파묻은 채로.

이곳은 루블리온 아카데미 내의 기숙사.

이론 시험의 참사를 극복하고 무사히 신입생으로 선발된 칼은 등록금을 지불하고, 입학 증서와 학생증을 발급받고, 그 밖에 여러 번거로운 과정들을 거친 뒤 기숙사에 입주해 현재 일주일 가까이를 이곳에서 머물고 있었다.

조금 더 여유를 뒀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굳이 새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아카데미 바깥에서 숙소를 잡고 있을 이유도 없었기에 적응도 할 겸 일찍 기숙사에 들어온 것이었다.

문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고만 있자니 마음속의 의구심만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말 여기서 팔자 좋게 이러고 있는 게 맞는지, 완전히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건 아닌지.

물론 그렇다고 정말 빈둥거리기만 한 건 아니었다.

도서관, 창고, 그리고 그 밖에 등등 나름대로 단서를 찾아보기 위해 아카데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폈다. 하지만...

'죄다 허탕이었지.'

한번 관계자 외에는 출입이 금지된 구역들도 들어가봐야 하나?

하지만 그런 장소도 이 더럽게 넓은 아카데미 내에는 한두 군데가 아닐 터였다.

무엇보다 가장 짜증나는 건 아무것도 확신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시스템은 그저 '루블리온 아카데미'라고 했지, 이 아카데미 내에 마지막 차원의 조각이 숨겨져있다곤 확실히 말하지 않았으니.

'대체 왜?'

이쯤 되니 의문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왜 하필 이따위 애매하기 그지없는 단서인 것인지.

처음에는 그저 마지막 차원의 조각이라 시스템이 쉬운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생각했었다.

그런데 정말 그게 이유인가? 단순히 이번 차원의 조각이 마지막이라서? 지구로 귀환할 수 있는 최종 루트에 돌입해서?

"......"

고민을 거듭해봐야 답은 나오지 않았다. 또한 시스템에게서 답이 돌아올 리도 없었다.

칼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슬슬 허기가 지니 식사나 하러 가야겠다.

차원의 조각 문제로 마음은 답답하지만 근래 아카데미 내에서의 생활은 꽤 편하긴 했다.

기숙사 방도 넓고, 필요한 시설도 다 깔끔히 갖춰져 있고, 식사의 질도 무척 훌륭했으니까.

철컥.

그렇게 방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바깥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

웬 놈인가 했더니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한 손에는 짐을, 다른 한 손에는 열쇠를 든 채 방 안으로 들어온 레븐이 칼을 발견하고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오, 방 넓네. 잘 지내고 있었냐?"

기숙사 방은 기본적으로 2인실이기에 따로 허가를 받지 않는 이상 혼자 사용할 수 없다.

당연히 방을 홀로 사용하고 싶었던 칼도 허가 요청을 해보긴 했지만 거부당했기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된 것이었다.

그나마 룸메이트 정도는 정할 수 있었기에 그나마 안면이 있는 레븐과 같은 방을 선택했던 것이었고. 레븐은 아카데미 바깥에 있다가 이제야 기숙사로 입주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너 면담은 끝냈어?"

"...아, 맞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던 중 칼은 깜빡 잊고 있었던 걸 생각했다.

새학기 시작 전, 기간 내에 지정된 교수를 찾아가서 면담을 해야 한다는 걸. 뭐 이렇게 귀찮은 게 많은 건지.

오늘 내로 찾아가서 후딱 끝내든지 하기로 하고 칼은 1층 식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선은 밥이 먼저였다.

< 입학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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