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학 (4) >
정문을 통과해 아카데미 안으로 들어서자 다른 관계자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입학 지원서를 작성해주십시오."
입로에 책상까지 펴고 뭘 하나 싶었는데, 1차 시험을 통과한 지원자들의 정보를 등록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쓸 게 뭐 이리 많아.'
이름, 성별, 나이, 국적 등은 기본이고, 소속했던 학파나 주 계열의 마법까지 작성해야 한다.
귀족의 경우는 신분 증명을 위해 가문의 인장을 찍을 수 있는 항목도 있었다.
애초에 루블리온에서 귀족의 이름을 사칭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 그런 짓을 시도할 미친놈도 없겠지만.
칼은 적당히 신분을 꾸며 하나씩 항목을 작성했다.
나이는 열일곱, 국적은 룬 대륙의 국가 중 하나인 크루스판 왕국, 소속 학파는 체폰 학파에, 주 계열 마법은 화염.
물론 이 중에 칼과 정보가 일치하는 항목은 이름과 성별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나이는 진작 성년이 지났고, 국적은 애당초 존재할 리 없는 데다가, 체폰 학파라는 이름은 방금 막 지어낸 것에 불과했다.
'아무렴 상관은 없지.'
하지만 별 문제는 없었다.
칼의 외모는 무척 동안이라 나이를 낮춰도 이상할 건 없었고, 이 세계에 명성 없는 하위 마법 학파들이야 수도 없이 많이 존재하니 하나쯤 지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으니.
애초에 지원서의 작성은 지원자들을 서로 구분하기 위함이지, 지원자의 정확한 신분 파악이 목적이 아니었다.
제국뿐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온갖 지원자들이 모여드는데 신분 하나 속이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니며, 그것을 루블리온 측에서 일일이 확인할 방도 또한 없었으니까. 사실상 형식적인 절차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매년 이렇게 방대한 규모로 별다른 조건 없이 지원자들을 받는다는 건 제국의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수백 년이라는 긴 세월간 대륙의 패자로 군림해온, 루블리온에 입학할 이들 중 어떤 불온 분자가 섞여있든 얼마든지 통제하고 처단할 수 있다는 자신감.
어찌 보면 오만하게도 느껴지는 그런 체계가 대륙의 수많은 원석들을 발굴하며 지금의 제국을 있게 한 것일지도 몰랐다.
'실제로도 크고 작은 테러들을 당한 역사가 꽤 많다고 했던가.'
하지만 전부 큰 피해 없이 막아내고 주동자들은 모조리 발본색원되어 황실 특수대들에 의해 끔찍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그렇게 단 하나의 예외 없이 확실한 응징을 행하니 현재의 루블리온은 감히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제국의 성역과도 같았다.
아무튼 칼은 지원서를 모두 작성하여 관계자에게 도로 건네주었다.
처음엔 폴리모프까지 하여 확실히 신분을 위장할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곳은 제국의 중심.
현재 황도에 위치해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륙의 대마법사 중 하나인 로메인 페이지가 수호마법사로서 지키고 있는 곳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와 마주치게 된다거나 다른 상정치 못한 경우로 폴리모프를 들키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뒷일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기에 별다른 위장 없이 입학을 택한 것이었다. 딱히 본래 얼굴을 누가 알아볼 리도 없었고.
"입로를 따라서 좌측에 보이는 건물로 이동하십시오."
'28'이라는 숫자가 쓰인 뱃지까지 건네받은 칼은 관계자의 말대로 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광활한 부지, 사방을 둘러싼 온갖 고풍스런 건물들.
이동하는 길에 간간이 학생으로 추정되는 이들도 보였다.
공터 같은 곳에서 각자 마도구를 들고 마력을 제어하고 있는데 야외 실습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카데미 제복으로 보이는 옷까지 입고 있는 것을 보니 정말 학교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괜한 짓을 하고 있나...'
정말 이곳에 입학하는 게 맞는 선택인가?
저런 애송이들 사이에 끼어서 대체 뭘 하라고?
왠지 복잡해진 심경으로 관계자가 가리킨 건물에 들어가니 사람들이 모여있는 모습이 보였다.
앞서 1차 시험을 통과하고 칼보다 먼저 도착한 지원자들이었다.
"어, 칼!"
그중엔 물론 레븐도 있었다.
레븐이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근처로 다가왔다.
"역시 너도 통과했구나! 당연히 그럴 줄 알았어. 하하."
"뭘 하고 있는 거야?"
"나도 몰라. 대기하고 있으란 걸로 봐서 아마 사람이 더 모일 때까지 기다리는 모양이던데?"
레븐의 말대로 이내 두 사람이 더 들어와 총 서른 명이 채워지자 관계자가 입을 열었다.
"시험을 계속해서 진행하기 전, 앞으로의 시험 절차에 대한 간략한 안내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설명을 요악하자면 이러했다.
이제 곧 시작될 2차 시험을 포함하여 4차 시험까지, 즉 지원자들은 앞으로 세 차례의 시험을 더 치르게 될 예정이었다.
그리고 2~4차 시험은 1차 시험처럼 곧바로 당락이 결정되는 방식이 아니라고 한다.
일단 모든 시험을 전부 치른 뒤 각 시험에서 받은 점수를 합산하여, 상대 평가를 통해 최종 합격자를 결정하는 방식이라는 듯 했다.
'하긴, 전부 1차 시험과 같은 방식이면 합격 인원 조절이 어려울 테니까.'
역시 1차 시험은 기본 자격 미달자들을 걸러내는 목적이고, 지금부터가 진짜 시험인 모양이다.
칼은 별 긴장감 없이 이어지는 설명을 흘려들었다.
앞으로 남은 시험들에 통과하지 못할 거란 가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으니까.
대륙 최고의 아카데미라 해봐야 결국은 자라나는 새싹들을 뽑는 시험일 뿐이다.
설마 이쪽이 떨어진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
"지금부터 진행될 2차 시험의 내용은 마법 이론 시험입니다."
칼은 순간 벙쪄서 관계자를 바라봤다.
'...뭐?'
이론 시험?
옆에서 레븐이 중얼거렸다.
"이론 시험이라, 작년까지는 없더니 결국은 되살아났네."
"...되살아나? 뭔 소리야, 그게?"
"아, 모르는구나? 전대 교장이 좀 괴팍한 성격이라 한동안 입학 시험에선 이론 시험이 아예 없었다고 했거든. 마법은 직접 구현하는 현상이지, 펜으로 술식 전개나 하고 있는 건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했다던가."
"......"
"그런데 교장이 바뀌고 이번 학년부터는 보시다시피 부활한 모양이야.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론 시험도 있어야지."
레븐은 이론적인 부분이 꽤나 자신 있는 듯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반면 칼은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다.
진짜로 엿 됐네, 이거.
* * *
시험실을 나온 칼의 표정은 어딘가 허탈했다.
이론 시험은 지구와 비슷하게 시험지를 통해 문제를 푸는 방식이었다.
심지어 문제 형식 중에 객관식도 섞여있었기에 간만에 지구에서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지만, 문제는 그딴 게 아니었다.
'망했다.'
이론 시험은 완벽하게 망쳤다.
당연한 결과였다.
칼은 스킬을 통해 마법을 사용할 뿐인, 이론적인 마법 지식 따위는 조금도 없는 가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지구의 수학이 판타지의 마법 원리와 일치한다는 편리한 설정 따윈 이 세계에 적용되지 않았다.
아니, 자세히 보면 비슷한 점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죄다 모르는 용어들로 도배되어 문제조차 이해하지 못한 게 태반이었으니까.
웬 괴상한 기호들은 물론이고 온갖 기하학적 도형들까지. 흡사 사칙연산도 모르는 이가 미적분 시험을 본 것과 다를 게 없다.
객관식 문제가 꽤 있었고, 또 마력 운용에 관련된 거라거나 그동안 마법을 사용하며 얻은 경험에 비롯하여 손을 댈 수 있었던 문제가 아주 조금 있기는 했지만, 그것들을 전부 감안해도 최하위권은 분명 확정이었다.
"칼, 표정이 왜 그러냐? 시험 망쳤어?"
"글쎄."
"뭐, 확실히 수준이 터무니없이 높기는 하더라. 특히 23번에 그 삼중술식 변형 문제는 진짜..."
1번의 간단한 술식 계산 문제도 풀지 못한 칼에게 레븐의 말은 외계어였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칼은 고민에 잠겼다.
'이대로면 진짜 떨어질지도.'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아직 두 차례의 시험이 남았다는 것.
합격자는 2, 3, 4차 시험의 점수 합계를 통해 뽑는다고 했으니 남은 3, 4차 시험을 잘 치른다면 아직은 가능성이 존재했다.
'진짜 예상치 못한 난관이네.'
왜 당연히 시험 중에 이론 시험이 포함되어 있을 거란 생각을 못했을까? 검술도 아니고 마법인데.
본래는 적당히 평균에 맞춰 시험을 통과할 생각이었다. 굳이 눈에 띌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어쩔 수 없었다.
입학에 합격하려면 남은 두 시험은 좀 더 수준을 높여서 고점을 획득할 필요가 있었다.
"안내에 따라 이동해주십시오."
3차 시험의 진행을 위해 다음으로 이동한 장소는 넓은 광장 같은 곳이었다.
광장 한편에는 한 중년 여성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예상대로 교수였다.
[Lv.54]
[루블리온 아카데미의 정교수]
"3차 시험 감독관을 맡은 헤슬리오입니다. 모두 광장의 외각을 따라서 원형으로 서십시오."
그 말에 따라 지원자들이 광장을 넓게 둘러싸고 섰다.
대체 무슨 시험인가 하니 곧 설명이 이어졌다.
"3차 시험은 자유 마법 시연입니다. 번호 순서대로 한 명의 지원자씩 중앙으로 나와 가장 자신 있는 마법을 펼치면 됩니다."
자유 마법 시연.
말 그대로 마법을 자유롭게 펼쳐 모두의 앞에서 시연하는 시험이었다.
"평가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따로 알려주지 않겠습니다. 다만, 무작정 화려하기만 하거나 수준에도 맞지 않는 마법을 어설프게 펼치고 좋은 점수를 기대하진 않았으면 좋겠군요. 제한 시간은 3분이니 원한다면 여러 개의 마법을 펼쳐도 상관없습니다."
시험은 곧바로 시작됐다.
앞선 설명대로 1번 지원자부터 광장의 중앙으로 나서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화르륵!
명문가의 귀족으로 보이는 1번 지원자가 펼친 마법은 평범한 화염계 마법이었다.
다만, 그 위력은 평범하지 않게 사람 세네 명은 단숨에 태워버릴 정도로 거대했지만.
더해서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거대한 불덩이를 나누어 주위에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했다.
2서클치고는 상당한 위력과 운용력. 화염 마법에 대한 조예가 경지에 비해 꽤 높은 듯했다.
감독관 헤슬리오는 날카로운 눈으로 그 일련의 시연을 지켜보고는 옆에 책상을 두고 앉아있는 조교수에게 뭐라 말을 전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무언가를 적는 걸 보니 점수를 기록하는 듯 싶었다.
"다음 2번 지원자 나오십시오."
시연한 마법에 대해 별다른 평가는 없이 바로바로 다음 차례로 넘어갔다.
다른 지원자들도 순서에 따라 하나둘씩 자신의 마법을 펼쳐 시연했다.
마력을 있는 힘껏 끌어올려 마력량을 과시하는 이도 있었고, 마력을 잘게 나누어 운용 능력을 뽐내는 이도 있었으며, 자체적으로 난이도가 높은 마법을 시도하다가 실패해서 비참한 얼굴로 자리로 돌아오는 이도 있었다.
그렇게 절반가량 왔을 때였다.
"다음 14번 지원자... 흠."
말을 잇던 감독관이 눈에 이채를 띄고 다음 지원자를 바라봤다.
뮬레트 가문의 천재, 줄리엔.
광장의 중앙으로 나선 그녀가 곧바로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화르륵!!
그녀가 펼친 마법은 1번 지원자와 같은 화염 마법이었다. 하지만 캐스팅 속도는 비교도 되지 않게 신속했다.
그리고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쩌저적...!!
한순간 뭉그러지기 시작하더니 얼어붙기 시작하는 화염.
순식간에 결정을 이루어 싸늘한 냉기를 뿜어내는 얼음을 바라보며, 주변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와, 저게 말로만 듣던 뮬레트 가의 비전인가? 속성 변화라니..."
레븐이 중얼거렸다.
줄리엔이 펼친 시연은 화염 마법을 빙결 마법으로 변형시킨 것이었다.
듣기로는 단순하지만 이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말도 안 되는 행위였다.
지금껏 아무런 표정도 없었던 헤슬리오 감독관도 조금이나마 감탄한 기색이었다.
가볍게 목례를 한 줄리엔이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제자리로 되돌아갔다.
"볼 것도 없이 만점이겠네. 아니, 근데 솔직히 가문의 비전을 꺼내는 건 좀 반칙 아니냐?"
작게 궁시렁거리는 레븐의 말을 흘려들으며 칼은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미 전개한 마법의 속성을 변형하는 건 칼도 해낼 수 없는 일이다.
경지의 문제가 아니라 그건 통상적인 마력 운용법으로 불가능한 행위였으니까.
칼이 현재 익히고 있는 아르자크류 서클링이나 창염환처럼 일종의 비전인 것이었다.
'괜히 제국의 마법 명가가 아니군.'
레븐을 포함해 몇 명의 지원자가 더 지나간 다음, 이번엔 어스문 학파의 카인이 나섰다.
후우웅!!
그는 석차에 큰 욕심은 없는지 줄리엔처럼 비전을 내보이지는 않았다.
단지 머리 위로 거대한 바람을 일으켜 날카로운 송곳의 형태로 다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다른 마법들보다 형체 형성이 힘든 바람 속성 마법으로는 상당한 고난도에 속하는 기예였다.
"쟤가 2등이겠구만. 어떻게 바람 마법으로 저렇게 뚜렷한 모양을 빚을 수 있... 아, 다음이 네 차례다."
그리고 카인의 다음 차례는 칼이었다.
레븐의 작은 응원을 받으며 광장의 중앙으로 나선 칼은 한 차례 주변을 둘러봤다.
'그럼, 어떤 걸 보여줄까...'
고득점을 할 방법은 간단하다. 그냥 적당한 4서클의 마법만 하나 펼쳐도 1위는 따놓은 당상일 터.
하지만 높은 서클의 마법은 너무나 눈에 띈다.
앞으로 루블리온에서 어떤 일들을 벌여야 할지 모르는 칼로서는 그건 상당히 부담스러운 선택지였다.
그러니 답은 간단했다.
경지만큼 보이는, 그러니까 알아볼 사람들만 알아볼 그런 기예를 보여주면 된다.
화륵!
사방에 집중된 시선 아래, 칼은 손바닥 위로 적당한 크기의 불꽃을 피워올렸다.
쩌적.
잠시 뒤 불꽃이 꺼지고, 이번엔 냉기가 손바닥 위로 피어올랐다. 칼은 그것을 몇 번 반복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원자들 사이에 자그마한 소란이 일었다.
"뭐야, 저건... 뮬레트 가의 영애를 따라하기라도 하는 건가?"
"속성 변화가 아니라 그냥 두 마법을 번갈아 펼칠 뿐이잖아. 쟤 바보 아니야?"
황당함과 비웃음이 담긴 시선들.
칼의 행동을 그들은 그저 줄리엔을 따라하겠답시고 화염과 빙결 마법을 번갈아 펼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
감독관 헤슬리오만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칼을 바라봤다.
명백히 놀라움에 찬 눈빛.
뿐만 아니라 긴가민가한 채 눈매를 좁히고 바라보던 카인도, 다른 지원자들에겐 별 관심 없다는 듯 서있던 줄리엔의 얼굴에도 이내 서서히 경악이 피어올랐다.
< 입학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