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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112화 (112/132)

< 스쳐가는 인연 (3) >

한 줌의 재조차 남지 않고 사라져버린 해적선과 해적들.

화르륵!

칼의 발밑에서 뒹굴던 마이그와 그의 부하들 역시 곧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다시금 피어오르는 화염.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넋이 나간 채 있던 그들은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전신이 순식간에 불타서 소멸했다.

일을 벌였으면 끝마무리까지 확실히 해야 하는 법.

마이그에게 특별한 악감정이 있진 않았으나 자비를 베풀 생각 또한 없었다.

루만의 상단에 뒤탈이 없으려면 마이그 해적단은 오늘 이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깔끔히 사라져야만 했다.

"......"

그 광경에 사람들이 경악했다.

대부분이 두려움이 깃든 눈으로 칼을 바라봤다.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해적들을 모조리 죽여버린 건 그렇다 치고, 선박 하나를 순식간에 불태워 없애버린 것은 상식을 한참이나 초월하는 일이었으니까. 그것도 바로 눈앞에서 목도했기에 충격은 배였다.

그들이 지금껏 드물게나마 봐온 마법사란 존재들은 자그마한 불덩이만 몇 번 피어올려도 금세 지쳐서 헉헉거리는 평범한 인간이었지, 저런 괴물이 아니었다.

"저는 이만 쉬어야겠습니다."

예상한 반응이었기에 칼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이 진정할 시간을 갖도록 그냥 시야에서 사라져주는 게 상책일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기며 아샤리온에게 슬쩍 시선을 돌리니, 그녀의 혼란스러운 표정이 보였다.

지금 상황도 그렇고 여러모로 그녀에게 궁금한 것들이 많았다.

당장 다가가서 대화를 걸어볼까 했으나 일단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머지 않아 그녀 쪽에서 말을 먼저 걸어올 것 같았으니까.

* * *

해적들의 소동으로 항해가 주춤한 것도 잠시.

상단원들은 빠르게 뒷정리를 마치고 다시 항로를 따라 선박을 움직였다.

해적선이고 해적들이고 칼이 전부 불태워버렸기에 사실 정리라고 할 것도 없었지만. 마이그와 아샤리온의 전투의 여파로 갑판 곳곳이 좀 파손된 정도였다.

칼이 숙소방으로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누군가 찾아왔다. 루만이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대마법사님."

조심스레 노크를 하고 들어와 감사부터 전한 그는 칼의 정체에 대해선 일절 묻지 않았다.

칼이 먼저 밝히기 전까지는 감히 물을 용기가 없었던 것이었다.

단지 3대 학파와 같은 대 마법 학파의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거물은 아닐까, 속으로 혼자 추측해볼 뿐.

물론 그런 것치고는 얼굴이 너무 어린 것이 의문이라면 의문이었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루만이었다.

마법에 대해 잘 모르는 그는 막연히 젊게 보이는 마법이라도 있나 생각하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루반은 혹시 항해에 어디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이것저것 조심스레 물어봤고, 칼은 대충대충 대답했다.

한눈에 봐도 그가 잔뜩 위축된 기색이 보여 대화가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칼이 대화를 썩 원하지 않는다는 걸 빠르게 눈치챈 루만은 그만 물러갔다.

그렇게 잠깐의 더 시간이 흐른 뒤.

"......"

침대에 누워있던 칼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문 바깥에서 한참을 우두커니 서있는 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훨씬 일찍, 그것도 숙소방까지 먼저 찾아온 건 의외였기에 칼은 웃음을 흘렸다.

"계속 그러고 있을 생각이야?"

대답은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아샤리온이었다.

"......"

칼을 빤히 바라보던 그녀가 방 안으로 들어와서 문을 닫았다.

칼도 침대에 걸터앉은 채 그런 아샤리온을 바라봤다.

잠시 그녀에 대한 정보를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궁왕 아샤리온.'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참으로 신기한 만남이었다.

미래에 초월자가 될 인물이야 이미 앞서 천검성에서도 만났었으나, 아샤리온의 경우는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그녀는 단순히 초월의 경지에 오르는 것뿐만 아니라, 대광림의 엘프 대족장의 자리를 이어받을 혈족이었다.

한마디로 먼 훗날 모든 엘프들의 왕이 될 존재라는 것이었다.

아샤리온은 여전히 우두커니 선 채  칼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초리는 노려보는 것에 가까웠다.

목숨을 구해준 사람에게 뭔 배은망덕한 태도인가 싶지만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됐다.

"우선은 감사부터 전하지."

"......"

"그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쯤 그 사악한 인간들에게 붙잡혀 끌려가고 있거나 숨이 끊어졌을 터이니. 그 점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하나 있군."

아샤리온이 지그시 칼을 바라봤다.

"대체 생전 초면인 그대가 어째서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이지?"

예상한 물음이 곧장 튀어나왔다.

아까는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이 앞서 그만 말이 먼저 튀어나왔는데, 그녀의 이름을 부른 건 상당히 섣부른 짓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지금이 처음이다.

당연히 칼이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을 합당한 인과관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서부터 설명하지 않는 이상에야 아샤리온의 눈에 깃든 미약한 의심과 적의는 거두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아까 마이그의 말을 들어보면 현재 그녀는 누군가에게 쫓기는 처지이기도 한 것 같았으니까.

칼은 팔짱을 낀 채 빤히 아샤리온을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린 이미 만난 적이 있다."

그 말에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만난 적이 있을 리가..."

그러나 곧 그녀가 흠칫하며 말을 끊었다.

얼굴에 점차 경악이 번지더니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눈빛을 띄었다.

칼은 그 반응을 지켜보며 속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녀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거짓말 탐지기가 작동했구나.'

엘프 대족장의 혈족에게는 대대로 내려져오는 특수한 고유 능력이 있다.

바로 마주하고 있는 상대의 말에서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것.

방금 칼이 한 말은 그녀의 능력이 진실로 판명했을 테니 이렇게 혼란을 보이는 것일 터였다.

이미 만난 적이 있다는 말은 정말로 사실이었다.

단지 컴퓨터 모니터라는 벽을 사이에 두고 있었을 뿐이지.

하지만 그녀의 능력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진 밝혀내지 못했다.

"아니, 그럴 리가... 그럴 수가 없는데...?"

"네가 기억을 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거짓말이 아니..."

"숲을 나와 인간들을 마주하고 다닌 것은 내게 이번이 처음이다. 내 이름을 알려주긴 커녕 대화를 나눈 인간도 몇 없단 말이다. 그런데 그게 대체 어떻게 가능한..."

"......"

이건 또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에 칼은 꾹 입을 다물었다.

아, 대광림 나온 게 이번이 처음이었어?

여전히 눈에서 혼란과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아샤리온을 보며 칼은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우리는 만난 적이 있다. 네 이름도 그래서 알고 있는 거고. 그것까지 일일이 알려줄 생각은 없으니 떠올리는 건 알아서 하라고."

"......"

"그렇게 쳐다볼 것 없어. 적어도 절대 네게 악한 의도를 품고 뒷조사를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니까 말이야."

이 역시도 능력이 진실이라고 알려왔기에 아샤리온은 한층 의심을 덜어낸 기색이었다. 물론 표정은 여전히 떨떠름했다.

어쨌든 칼은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었기에 더 캐묻지는 않았다.

"알겠다. 그대와 같이 지고한 경지의 마법사가 괜한 소리를 하진 않겠지."

"그보다는 네가 처한 상황이 뭔지가 궁금한데. 대체 뭘 했길래 해적들한테 쫓기고 있던 거야?"

"그저 사소한 일이다."

"그닥 사소해 보이지는 않던데?"

"배를 타기 전 다른 왕국에서 마주친 무례한 인간 하나를 반쯤 죽여버렸을 뿐이다. 한데 그 인간이 꽤 고위층의 자제였던 모양이야. 이곳까지 오는 데에도 추적이 계속 따라붙어 빙빙 돌아왔는데, 설마 바다의 도적들까지 매수해뒀을 줄은 몰랐군."

"...역시 사소한 게 아니잖아."

해적들까지 매수할 수 있을 정도면 웬만큼 높은 급의 귀족 가문이 아닐 터였다.

그보다 얜 대족장의 혈육이면서 대체 왜 혼자 돌아다니고 있는 거지?

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럼 이제 다시 대광림으로 돌아가고 있는 중인 건가?"

그 물음에 아샤리온이 어째서인지 아쉬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지. 찾아야만 하는 게 있는데, 홀로 대륙을 돌아다닌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더군."

"...찾아야 할 것? 그게 뭔데?"

"그것까지는 나도 알려줄 생각 없다."

단호하게 말을 끊는 아샤리온을 칼은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잘 생각해보니 그녀가 찾고 있는 게 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얘 아직 바람의 정령왕이랑 계약하기 전이잖아.'

아까 마이그와 싸웠을 때 소환했던 바람의 정령은 중급 정령에 불과했다.

궁왕 아샤리온.

그녀가 궁왕이라 불린 이유는 무인으로서 이룬 일신의 경지도 있지만, 항상 그녀의 곁에 존재하는 조력자의 몫 또한 컸다.

'설마 바람의 정령왕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는 건가?'

아샤리온이 바람의 정령왕과 계약하게 된 시점이 정확히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녀가 정령왕과 계약을 맺기 전까지 그를 애타게 찾아다녔다는 설정은 있었다.

그리고 끝내 찾아낸 위치가 분명...

'아무래도 맞는 것 같은데.'

칼은 멀뚱히 앉아있는 아샤리온을 보며 고민에 잠겼다.

혹시 이번의 만남으로 미래가 비틀려 그녀가 바람의 정령왕을 찾게 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난감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비록 중간중간 난항을 겪기는 했다지만, 그녀는 대 흑마법전 다음으로 대륙에 찾아올 위기에서 인간과 엘프 사이 종족 협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인물이다.

여기서부터 벌써 미래가 어그러진다면 그 중요한 미래 또한 어그러질 확률이 몹시 컸다.

이쪽은 앞으로 마지막 차원의 조각만 모은다면 사라질 인물이었다.

미래의 재앙들을 외면하고 지구로 떠날 마당에, 당장 도울 수 있는 일조차 돕지 않는 건 양심에 무척이나 찔릴 수밖에 없었다.

짧은 고민 끝에 칼은 입을 열었다.

"찾고 있는다는 게 혹시 바람의 정령왕은 아닌가?"

"......!!"

아샤리온이 귀신이라도 본 듯 경악한 눈으로 칼을 바라봤다.

"그, 그대가... 그걸 어떻게...?"

얼마나 놀랐는지 양쪽의 귀까지 위로 쫑긋 세워졌을 정도.

저게 설마 엘프식 감정 표현인가? 칼은 어쩐지 새로운 지식을 얻은 기분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그냥 추측으로 대충 던져본 거다. 반응을 보니 아무래도 맞은 모양이야."

"...추측? 그게 고작 추측만으로 도출될 수 있는 답인가?"

"일단 네가 바람의 정령과 계약하고 있다는 건 나도 아까 봤으니 알고 있다. 그리고 엘프가 숲을 나선다는 건 굉장히 중요하거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없는 일이라는 것 또한 알고."

"......"

"이것만으로도 꽤 그럴듯한 추측이 가능하지. 정령이 힘을 키우는 방식은 새로운 정령을 찾아 기존의 정령과 융합하는 방식이 아닌가? 그러니 네가 혹시나 더 높은 급의 바람의 정령을 찾아 돌아다닌 게 아닐까, 라는 결론이 나온 거다."

그 말에 아샤리온은 반신반의한 얼굴이었다.

뭔가 그럴듯하기도 한데 논리가 너무 빈약했으니까.

당연하지만 칼의 추측은 이미 그녀가 바람의 정령왕을 찾고 있는 사실을 알기에 아무렇게나 내뱉을 수 있는 것이었다.

대충 던져본 거라고 했으니 그녀도 이내 어느 정도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 말이 맞다. 나는 바람의 정령왕을 찾아 대륙을 떠도는 중이었다. 하지만..."

"룬 대륙 동쪽 극단에 있는 흉사곡."

"......?"

"바람의 정령왕은 거기 어딘가에 존재할 거다. 계약을 해낼 자신이 있다면 한번 찾아가봐."

"......!!"

아샤리온의 귀가 다시금 쫑긋 세워졌다. 아까보다도 훨씬 더 높게.

< 스쳐가는 인연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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