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쳐가는 인연 (2) >
기겁한 채 소리치는 캘루밴을 바라보며 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뭘 그렇게 놀라? 통행세만 내면 순순히 보내주는 놈들이라며?"
"어, 어? 그, 그렇긴 한데..."
캘루밴이 아차 싶은 얼굴로 말꼬리를 흐렸다.
칼은 그 반응에서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자식, 실제론 몇 번 만난 적도 없구만.'
이제 와서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는 게 보였으나 늦었다.
어느새 근처로 다가와 해적선을 응시하던 선원 중 하나가 킥킥 웃으며 말했다.
"뭐, 배에 타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된 초짜에게 영 익숙한 상황은 아니지. 어디 보자, 우리 부행수님이 지금껏 해적선을 한 세 번 정도 마주치셨던가?"
"무, 무슨 소리를!"
"겁이 나면 저번처럼 숙소방에 들어가 계셔도 됩니다. 다 이해합니다."
캘루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칼도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두 자릿수? 지금껏 베어넘긴 해적들이?"
"......"
"대단한걸. 고작 세 번만 마주치고도 수십을 토벌하다니. 해적단을 만나는 족족 너 혼자서 전부 쓸어버린 모양이야."
"끄응..."
캘루밴은 앓는 소리를 내다가 그대로 입을 다물어버렸다.
칼이 놀리고 있다는 사실도 못 깨달을 정도로 눈치가 없진 않았다.
방금까지 부렸던 온갖 허세들의 진실이 무참히 까발려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애초에 누구도 믿은 적이 없었지만 말이다.
'해적단이라.'
칼은 소란이 번지는 갑판을 바라봤다.
선원, 상인, 용병들 모두가 굳은 얼굴로 분주히 갑판 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방금 웃음을 터뜨렸던 선원도 캘루밴을 놀리려던 것뿐이었지, 어느새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무리 통행세만 낸다면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고 한들, 해적은 해적. 그리고 이곳은 망망대해.
애초에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인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은 피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배 크기가 상당하잖아.'
저 마이그 해적단이라는 놈들이 타고 있는 배는 얼핏 봐도 이쪽의 상선보다 더 컸다.
해적 새끼들 주제에 뭐 저리 큰 배를 타고 다니는 건지.
"너무 걱정하진 말게. 놈들과는 질리도록 마주쳐서 완전히 안면을 튼 사이니까 말이야. 이번도 무사히 지나갈 수 있을 거네."
빤히 해적선을 바라보고 있는 칼의 모습을 불안해하는 것으로 봤는지 한 상인이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칼은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당연하지만 칼이 해적선을 가만히 보고 있는 이유는 신변의 안전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다. 저런 피라미 놈들이야 군단 단위로 수백 척이 몰려와도 무슨 문제가 있겠나.
단지, 땅에서야 도적 놈들을 수없이 만나봤어도 바다는 처음이기에 지금 상황에 약간의 생소함을 느끼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무튼 묘하게 긴장된 기류 속에 갑판 위로 사람들이 모였다.
선두에는 상행의 총책임자인 루만이 서있었고, 뒤쪽으로 용병들이 무장한 채 나열하고 섰다.
쐐애액!
그때 가까이 다가온 해적선에서 쇠사슬 몇 개가 날아들었다.
끝에 갈고리가 달린 사슬이 상선의 끄트머리에 정확히 걸려 팽팽히 연결되었다.
"새끼들, 그냥 얌전히 오지 사슬은 맨날 왜 처던지는 건지 모르겠네."
누군가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물론 해적들이 눈앞에 있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내뱉지 못할 말이었다.
그렇게 사슬을 고정한 채 지척까지 접근해온 해적선에서, 몇 명이 높이 뛰어오르더니 이쪽을 향해 떨어졌다.
터엉!
갑판 위에 해적들이 착지했다.
그중 가운데 있는, 차분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십자로 찢어진 칼자국이 목 부근까지 이어져 안면에 크게 나있는 사내에게선 심상치 않은 기세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두가 긴장한 기색으로 사내를 응시했다.
칼은 그가 선장 마이그라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Lv.40]
[마이그 해적단의 선장]
갑판 위에 모인 이들을 살펴보는 마이그의 입가에 웃음이 걸리더니, 곧 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랜만이오, 루만 단주."
과연 상인의 말대로 꽤나 많이 마주치긴 했는지 놈 쪽에서 먼저 아는 체를 해왔다.
매번 호칭은 틀렸지만 중요한 것도 아니었기에 루만도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받았다. 상인 특유의 영업용 미소였다.
"오랜만입니다, 마이그 선장님. 선장님도 무탈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하하, 다행?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고맙지만 입에 발린 말은 됐소."
"입에 발린 말일 리가 있겠습니까? 선장님께서 항해로에 자리를 잡고 계시니 다른 해적들이 날뛰지 못하고 있지요. 저는 정말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진심을 말하는 듯 진지한 루만의 얼굴을 보며 칼은 감탄했다.
감사? 매번 돈이나 뜯어가는 해적 새끼들한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품고 있을 리 있겠는가.
그럼에도 표정에 흔들림 하나 없이 아부를 하고 있는 루만은 모습은 과연 베테랑다웠다.
"여튼, 이건 그런 감사함에 대한 성의이니 받아주시길..."
루만이 고개를 까닥이자 옆에 서있던 수하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겉으로 보기만 해도 묵직함이 느껴지는 주머니. 설마 금화는 아닐 테니 은화가 가득 들어있을 터였다.
"흠."
마이그가 돈주머니를 받아들었다.
이제 서로 의미도 없는 덕담이나 몇 마디 더 주고받은 뒤 각자 갈 길을 가면 되었다.
그러나 그런 루만의 기대는 무산되었다.
마이그가 주머니를 품에 집어넣더니 묘한 눈빛을 지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실은 통행료뿐만 아니라 한 가지 용건이 더 있소이다."
"......?"
"좀 높은 분의 부탁을 받아서 찾아야 할 것이 있거든. 그래서 묻는 것이니, 부디 솔직히 답해주길 바라오."
마이그가 갑판 위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혹시 배에 오른 승객들 중에 수상한 자가 없었소이까?"
영문을 알 수 없는 마이그의 물음에 루만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수상한?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 겉으로 보기에 수상한 자가 없었냐고 묻는 것이오. 예를 들어서 얼굴을 가렸다거나, 혹은 로브를 뒤집어썼다거나... 아니면 인간이 아닌 아예 다른 종족이라거나."
그 물음에 모두의 머릿속에 스치는 인물이 있었다.
승객들 중 정말 하루 온종일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던 자가 한 명 있었으니까.
몇몇은 미처 표정을 관리하지 못했고, 마이그가 그것을 놓칠 리가 없었다.
"...허."
입꼬리를 올린 마이그의 눈빛이 사납게 번뜩였다.
"별다른 기대는 안 했는데, 정말로 있는 모양이군?"
"......"
"그자를 내 앞으로 데려오시오. 찾는 자가 맞는지 확인해봐야겠으니."
짧은 순간 루만의 얼굴에 깊은 고뇌가 스쳤다.
그 역시 마이그가 찾는 자라는 게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썩을, 역시 괜히 태웠나...'
엘프.
루만 역시 로브를 쓰고 있는 자가 인간이 아닌 엘프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는 상당히 신중한 성격이었기에 배에 오르는 승객을 아무나 받지 않았다.
그래서 출항하기 전, 로브를 뒤집어쓴 그녀가 승선을 요청해왔을 때 거절했었으나, 이내 그녀가 후드를 벗고 얼굴을 드러냈을 때까지도 계속해서 거절하진 못했다.
엘프는 그 특유의 아름다운 미모와 자연 친화적인 태도 때문에 신성한 종족으로 여기는 이들이 일부 있었고, 루만도 완전히는 아니었지만 조금은 그런 쪽의 환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살아오며 엘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괜한 짓이었다는 후회가 차올랐다. 역시 태우는 게 아니었는데.
루만이 망설이는 기색을 띄자 마이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단주, 서로 감정 상할 필요가 있겠소?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루만도 알고 있었다. 마이그가 지금 최대한의 배려를 보이고 있다는 걸.
전력의 차이는 명백했다.
수적으로도 밀리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선장인 마이그와 그의 부하 몇 명은 무려 검기를 사용할 수 있는 기사급의 강자였으니까. 애초에 그들은 몰락 기사였다.
그들만 나서도 용병들은 물론이고 배에 탄 이들을 전부 몰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었다.
루만 쪽의 용병들도 꽤나 명성이 있고 실력 좋은 이들이었지만, 기사급의 전력은 한 명도 없었다.
거금을 들여 그런 초고급 전력을 고용하느니 그냥 통행세를 내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을 고용한 이유는 주제도 모르고 달라붙는 떨거지 해적들을 처리하기 위함이지, 이런 괴물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용병들도 그것을 알고 있기에 다급히 루만의 눈치를 봤다.
루만은 참담한 표정으로 입술을 꽉 깨물고서 결국 입을 열었다.
"...안쪽의 객실을 살펴보면 녹색 로브를 뒤집어쓴 승객이 있을 겁니다."
승객을 해적들에게 팔아먹는 일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선원과 상인, 용병, 그리고 다른 승객들.
고작 한 명 때문에 배에 탄 모든 이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만들 수는 없었으니까.
"아, 아버지..."
선박 구석에 박혀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캘루밴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차마 나설 수는 없었다.
칼은 그 옆에 팔짱을 끼고 서서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개판이 나겠군.'
그냥 나설까 싶었지만 조금만 더 보기로 했다.
선원의 안내에 따라 마이그의 부하가 선박 내부로 들어가려던 때였다.
...콰앙!!
돌연 입구의 문이 터지며 그가 피를 흩뿌리며 날아갔다.
그리고 갑판 위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녹색 로브의 엘프였다.
"......!!"
인상을 찌푸린 마이그가 곧바로 검을 뽑아들고 그녀를 향해 돌진했다.
그녀가 신속히 손에 들린 활의 시위를 메겼다. 화살 몇 발이 마이그를 향해 빛살처럼 쏘아졌다.
채앵!
머리를 노리고 날아오는 것만 막고 나머지는 전부 피한 마이그가 그녀의 지척까지 접근했다. 어느새 그의 검에는 붉은 검기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붉은 궤적을 그리며 휘둘러오는 검격. 그에 팔이 베이기 직전 그녀가 외쳤다.
"라프리!"
퍼엉!!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거센 돌풍이 몰아치더니 마이그의 몸을 튕겨냈다.
어느새 그녀의 주위엔 작고 반투명한 새의 형상이 펄럭거리며 떠있었다. 바로 바람의 정령이었다.
갑작스런 전투에 기겁하며 물러나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정령도 정령이지만, 몰아친 바람에 그녀의 로브가 벗겨져 얼굴이 드러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에, 엘프?"
새햐안 피부, 뾰족한 귀, 비단처럼 찰랑이는 녹색의 머리칼과 금안까지.
인간의 것이 아닌 아름다운 외모에 사람들은 한순간 상황도 잊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의 고운 미간은 한가득 찌푸려진 채였고, 원망을 가득 담긴 눈길을 어디론가 쏘아내고 있었다. 루만이 서있는 곳이었다. 선박에서 나누는 대화야 문 반대편에서 그녀도 전부 듣고 있었다.
루만이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쩔 수 없었다지만, 어쨌든 상황은 그녀를 해적들에게 팔아넘긴 것이나 마찬가지였기에.
"빌어먹을 귀쟁이가...!!"
선박 구석으로 날아가다 말고 몸을 가눈 마이그가 분노한 얼굴로 재차 돌진했다.
그녀가 재차 활시위를 메겼다. 쏘아지는 화살. 오러에 바람의 힘까지 더해진 화살은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강력했다.
칼은 선박 위에서 쫓고 쫓기며 전투를 벌이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아니, 정확히는 엘프만을.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을 때부터 칼의 얼굴에는 경악이 번진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게, 왜인지 그녀의 정체가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궁왕 아샤리온?'
녹발, 금안, 바람의 정령 라프리.
모든 특징이 그녀의 정체를 하나로 특정하고 있다.
그녀는 분명 미래의 궁왕, 검도 마법도 아닌 활로서 대륙의 초월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이였다.
쾅! 콰가각!
전투는 치열한 박빙이었다.
마이그는 쏟아지는 화살들을 간신히 피하고 막으며 끈질기게 달라붙었고, 아샤리온은 바람의 정령을 십분 활용해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계속해서 화살을 쏘아냈다.
레벨은 그녀보다 마이그가 더 앞섰으나 정령이라는 생소한, 마이그에게는 낯설 힘이 둘의 수준 차이를 메우고 있었다.
근소한 차이로 아샤리온이 우위에 선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칼은 전투의 결과를 알았다.
전투가 이어질수록 마이그가 점점 정령의 공격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또, 해적은 마이그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쐐액!
사각을 노리고 날아든 사슬이 아샤리온의 발목을 휘감았다.
뒤늦게 바람을 쏘아내 사슬을 던진 해적을 튕겨내는 그녀였으나, 이미 몸이 휘청이며 공중에서의 중심을 잃었다. 그리고 그 찰나의 틈은 마이그에게 있어 완벽한 기회였다.
'이런...!!'
옆구리를 노리고 베어오는 검격을 보며 아샤리온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그 순간 돌연 마이그의 검이 멈추었다.
"......?"
그녀가 얼떨떨한 눈빛으로 눈앞의 마이그를 바라봤다.
단순히 검만 멈춰선 것이 아니었다.
마이그의 몸 전체가 돌연 정지해서 움직이지 않았다. 마이그 스스로도 극심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던 다른 해적들까지도 석상처럼 굳어 미동도 않고 있었다.
"아샤리온."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소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아샤리온이 흠칫 놀란 듯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역시 맞네, 아샤리온."
칼은 그녀의 반응을 확인하고는 헛웃음을 흘렸다.
이 우연한 만남, 그녀와 같은 초대형 거물과의 이런 우연한 만남이 너무도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기에.
슈우욱!
일단 거슬리는 떨거지들부터 처리하기로 한 칼은 포스로 마이그와 부하들을 끌어왔다.
그 광경에 캘루밴을 포함하여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멍하니 칼을 바라봤다.
칼의 앞에 널부러진 마이그와 부하들은 간신히 눈만 움직여 위를 올려다봤다.
"네, 네놈은 대체...?"
"그거 너무 진부한 대사야. 그냥 다물고 있어."
칼은 그들의 앞에 쭈그려앉은 채 고민에 잠겼다.
처음부터 끼어들 생각은 아니었다.
캘루밴의 말을 들어보면 이놈들은 이쪽 항해로를 이용하는 상인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는 듯했고, 이들을 없애버리면 그런 상인들 전부에게 피해를 주는 셈이었으니까.
칼은 악이라고 무조건 처단해야만 한다는 고지식한 정의는 품고 있지 않았다. 이상을 추구하기보단 현실적인 성격이었다.
뒷일을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무작정 일을 벌일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통행료만 내면 순순히 보내준다니 그냥 무시하고 지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그녀를 여기서 죽게 둘 수는 없다.'
궁왕 아샤리온.
그녀는 미래에 무척이나 중요한 역할을 할 인물이었다.
어차피 미래에 궁왕이 된다면 지금 굳이 간섭하지 않아도 알아서 살아남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으나, 이미 칼이 이 세계의 곳곳에 미친 영향은 많고도 다양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서 나비 효과가 되어 아샤리온의 운명에까지 영향을 미쳤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그녀가 이 자리에서 정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이, 이 자식이... 감히 이러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손가락도 하나도 까닥 못하는 주제에 마이그는 여전히 진부한 대사들을 나불대고 있었다.
칼은 고개를 돌렸다.
해적선 위에 있는 수많은 해적들이 일제히 활과 무기들을 조준한 채 이쪽을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까.'
칼은 다시 짧은 생각에 잠겼다.
아샤리온을 살린 게 전부는 아니었다.
이미 루만과 상인들은 이 일에 얽혀버렸고, 이 마이그인지 마이크인지 하는 놈들을 살려보내면 훗날 복수를 하려 들 것이 뻔했으니까.
아샤리온을 죽게 둘 수도 없다.
무책임하게 루만과 다른 상인들에게 위협을 남겨둬 피해를 끼칠 수도 없다.
그러니 죽어서 사라져야 할 이들은 정해져있었다.
통행세만 받고 보내주는 평판 좋은 해적?
뭐 어쩌란 말인가. 그래봐야 결국 해적 새끼들인데.
이들을 죽여 이쪽 항해로를 사용하는 상인들에게 훗날 피해가 된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그래도 당장 상황부터 정리해야지 뭐.
잠시 생각에 빠진 게 망설이는 것으로 보였는지, 마이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애송이 놈이 마법에 꽤 실력이 있는 것 같다만, 저 많은 수를 혼자 다 감당할 수 있겠느냐?"
"......"
"지금이라도 날 풀어줘라. 그러면 얌전히 돌아가겠다고 약속하지. 일단..."
"얘는 자꾸 뭐라 나불거리는 거야."
칼이 마이그의 해적선을 바라봤다.
"네 자신감의 근원이 저거냐?"
감지 마법을 통해 살펴도 갑판 위에 있는 해적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칼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화아악!!
불꽃이 거대한 소용돌이 형태로 용오름치며 마이그의 해적선을 뒤덮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불꽃이 가시고 난 자리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선박을 보며 마이그가 얼빠진 소리를 내뱉었다.
해적선이 있었는데, 없었다.
< 스쳐가는 인연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