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쳐가는 인연 (1) >
디아클 왕국의 항구도시 란드.
두 사람과 작별한 후, 칼이 몇몇 도시들을 거쳐 도착한 목적지였다.
현재 칼이 위치한 곳은 몬 대륙이고, 제국으로 향하려면 당연히 항해를 통해 도로 룬 대륙으로 건너가야 했다.
몬 대륙으로 건너왔을 때 처음 발을 디뎠던 항구도시는 본래 이곳이 아니었으나, 쥬레인과 세피엘을 마르하겔에서 멀찍이 떨어진 자유도시에 데려다주며 거기서부터 가장 가까이 위치한 곳을 찾아오게 된 것이었다.
"어서오세요!"
우선 식사부터 하기 위해 여관에 들렀다.
주근깨 가득한 종업원 여인이 방긋 웃으며 반겨왔다.
칼은 적당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식사를 주문한 뒤, 팁을 더 얹어주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룬 대륙으로 향하는 배편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있습니까?"
"룬 대륙이요? 음..."
여인이 기억을 더듬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답했다.
"아마 한 척밖에 안 남았을 걸요? 선착장으로 나가면 청색 깃발이 꽂힌 부두가 있는데, 거기에 정박된 배들이 룬 대륙으로 향하는 선박이에요. 출항 시간이 언제인지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그 말에 칼은 식사도 하지 않고 곧바로 여관을 나와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곳 몬 대륙으로 올 때도 승선할 배가 한 척도 없어 군선을 타고 건너왔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종업원 여인의 말대로 청색 깃발이 꽂힌 부두에는 한 척의 배가 남아있었다.
칼은 곧바로 선원들에게 물어 선박의 주인을 만났다.
선박은 데루팜이라는 이름의 상회가 소유한 상선이었는데, 이 세계에서의 선박이란 본래 대부분이 상선이었기에 이상할 것은 없었다. 배 한 척 한 척이 귀한데 단순한 운항의 목적으로만 사용되는 선박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항해를 하며 물자들을 나르는 김에 승객들도 받아 태워 조금이라도 더 부가적인 수익을 내는 형태인 것이었다.
'꽤 큰데.'
상선을 살피며 칼이 느낀 감상이었다.
대륙 간 항해가 웬만한 크기의 선박으론 어림도 없다고는 하지만, 그것을 고려하더라도 꽤 거대한 크기의 선박이었다.
놀라울 것도 없긴 했다. 애초에 다른 대륙을 넘나들며 상업 활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규모의 상회라는 의미였으니.
'그래도 이쪽으로 넘어왔을 때 탔던 죄수 호송선보다는 작네.'
물론 국가 소유의 군선이 민간의 상선에 비교될 대상은 아니었다.
"배에 승선하고 싶다고? 이거 참 아슬아슬한 때에 찾아왔구만, 젊은 친구."
상행의 총책임자는 푸짐한 인상의 중년 사내였는데, 눈만큼은 상인 특유의 날카로운 빛을 띄고 있었다.
자신을 루만이라고 소개한 그는 껄껄 웃으며 곧 선박이 출항할 예정이었다고 알려주었다.
칼은 속으로 안도감을 느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관에서 여유롭게 식사를 마치고 나왔으면 정말 어처구니없게 배를 놓쳤을 수도 있었던 것이었다.
칼은 그 자리에서 바로 그에게 돈을 건네주었다. 승선비는 8실버였다.
꽤나 거금이었으나 대륙을 건너는 항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렇게 비싼 가격도 아니었다.
솔직히 어느 정도가 합리적인 값인지는 칼도 정확히 몰랐지만, 대놓고 바가지를 씌우는 게 아닌 이상에야 굳이 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자금 사정이 쪼들리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남아있는 선박도 이것 하나뿐이었으니까.
"항해 동안 지낼 방은 좀 좋은 곳으로 내주셨으면 합니다."
칼은 8실버 대신 그냥 금화 한 닢을 건네주었다.
긴 항해 동안 좁아터진 단칸방 객실에서 생활하는 건 아무래도 꺼려지는 일이었기에.
인벤토리에 썩어나는 돈을 아끼자고 그런 불편을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곧장 배에 승선한 칼은 입꼬리가 귀에 걸린 루만에게 직접 숙소방을 안내받았다.
과연 황금의 효과는 확실했는지 꽤나 넓은 방이었다. 낡게나마 침상까지 존재했다.
몇 가지 사항들을 전해준 뒤 루만은 다시 볼일을 보러 떠났다.
풀썩.
칼은 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침대에 몸을 뉘였다.
손으로 머리를 베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인벤토리 정리나 할까.'
정리라고 하지만 사실 보관되어 있는 물건들을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인벤토리는 아공간의 개념인데 안쪽의 물건들이 어지럽혀질 리가 있겠는가.
인벤토리를 떠올리자 머릿속에 보관품들이 떠오른다. 식량, 무기, 마도구, 이런저런 잡다한 물건들 등등...
"...흠."
눈을 감은 채 그것들을 살피던 칼은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성검 드류탄데.
그리고 최근에 얻은 신검 라스칼리아.
자신은 마법사인데 어째 계속해서 검만 얻고 있다는 것을.
물론 마법사에게는 딱히 별다른 무기가 필요없었다.
보통의 게임에서는 지팡이를 들고 다니지만 이곳은 현실이었다. 게임이 기반이긴 했지만 엄연한 현실.
마법사의 마력을 증폭시켜준다거나 하는 사기적인 아이템 따윈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마법을 저장할 수 있는 마도구가 존재할 뿐.
그리고 그런 마도구가 마법사에게 안겨주는 이점은 편이성이지, 전력 강화가 아니었다.
또 애초에 마도구가 마법사만 사용이 가능한 물건도 아니었고.
'아, 그러고 보니 지팡이도 있긴 했지.'
잠시 잊고 있었다.
설정상 이 캐릭터의 스승 되는 인물이 남긴 유산.
하지만 지속성 마도구인 것도 아니고, 저장되어 있던 마법은 진작 소모한 상태였기에 지금은 그저 나무 막대에 불과했다. 나중에 메인 스토리와 관련이 있을까 싶어 버리지는 않았지만.
성검과 신검, 칼은 인벤토리에서 두 자루 검을 모두 꺼내들고 번갈아봤다.
문득 상념이 마르하겔의 왕성에 닿았다.
'아란헬에서 어떤 식으로 나올까.'
3왕자 카이번이 왕성으로 끌어들였던 대형 폭탄.
무려 두 명의 간부가 몬 대륙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건 아란헬에게 있어서도 심각한 전력 손실이자 중대 사안일 터.
간부 둘이 죽었으니 놈들도 무척이나 조심스럽겠지만, 앞으로도 계속 얌전히만 있을 리는 없었다.
분명 마르하겔을 중심으로 죽음의 내막을 밝히기 위해 움직이거나 하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왕성 내에서 악마까지 출현한 마당에 흔적을 잡은 교단과도 언젠가는 얽히게 될지 모르니...
왕성을 떠날 때까지 별다른 일들은 없었지만, 또 언제 어떤 위협이 마르하겔에 다가올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무사히 극복하길 바라야겠지.'
어쨌든 아란헬과 악마, 두 왕자가 끌어들인 폭탄들을 처리한 것만으로 칼로서는 해줄 만큼 해준 것이었다.
그들을 계속 왕성 내에서 암약하게 두었다면 마르하겔은 말할 것도 없이 파멸의 길을 걸었을 테니까.
나머지는 온전히 그곳에 남은 자들의 몫이었다.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데반에게 왕성을 테러한 괴한들의 정체가 아란헬이라는 사실과, 그들에 대한 정보도 조금이나마 귀띔해줬었으니, 언젠가 찾아올지도 모르는 위기에 잘 대비할 수 있길 바랄 뿐이었다.
도로 인벤토리에 검들을 집어넣은 칼은 육포를 꺼내 우물우물 씹었다.
식사도 제대로 못 하고 승선한 탓에 허기가 졌다.
* * *
배가 출항하고 난 뒤, 시간이 흘러 해가 서서히 저물어갈 즈음.
칼은 바람을 쐬기 위해 숙소방을 나와 갑판 위로 나섰다.
선원과 상인, 용병, 그리고 다른 승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몇몇 나와있었다.
적당히 한곳에 자리를 잡고서 점점 주홍빛으로 진해지는 석양을 구경하고 있자니,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말을 걸어온 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나이는 대충 또래로 보였는데, 꽤나 부티가 흐르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녀석이 눈매를 가늘게 좁히고 이쪽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을 이었다.
"네가 뱃삯으로 금화 한 닢을 지불했다는 걔 맞지? 흠, 행색은 어째 생각보다 평범한데?"
"......"
칼이 빤히 바라보자, 청년이 이내 싱긋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캘루밴이라고 한다. 직위는 이 상행의 부행수라고 할 수 있지."
"...부행수?"
이런 애송이가?
그때 마침 주변을 지나가던 한 상인이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부행수는 무슨! 그 녀석은 행수님의 아들이오! 말이 무척 많은 놈이니까 적당히 상대해주는 편이 앞으로 남은 항해 동안 정신 건강에 이로울 거요."
그에 상인을 째려본 캘루밴이 헛기침을 하며 도로 고개를 돌렸다.
"저 늙다리 말은 무시해. 누가 뭐래도 나는 엄연한 부행수니까."
"그런 것치고는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 같은데."
"아랫사람들과 격의 없이 지내는 거라고 해두지. 말은 저렇게 해도 속으로는 모두가 날 존경하고 있다고."
칼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말하는 게 꽤내 웃긴 녀석이었다. 상인이 스스럼없이 대하는 태도를 보니 성격도 썩 나쁘지는 않아 보였고.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녀석이 접근해온 이유는 단순했다. 심심해서.
배에 탑승한 승객들 중 제 또래가 칼밖에 존재하지 않아, 대화를 나눌 적당한 상대가 이쪽뿐이었던 것이다.
"나이도 나랑 얼추 비슷해 보이는데, 룬 대륙엔 무슨 일로 혼자 넘어가는 거야?"
"혹시 직업이 무슨 모험가라도 되나? 모험가들은 유적에서 한 탕만 거하게 쳐도 금화를 한 궤짝 가득 번다고 하던데."
"우리 상회가 얼마나 큰 규모의 상회냐면 말이야, 보유한 선박 수로만 따지면 지금 향하는 목적지인 케이드 왕국 제일의..."
과연 상인의 말대로 캘루밴은 무척이나 말이 많은 놈이었다.
쉬지 않고 떠들어대며 칼에 대해 묻거나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았다.
칼도 따분하던 참이었기에 적당히 상대해주며 대화를 나누었다.
"......?"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문득 느껴지는 묘한 기운에 칼은 시선을 돌렸다.
갑판 위로 녹색 로브를 뒤집어쓴 누군가 나와서 구석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 저 사람 또 나왔네."
캘루밴도 따라서 시선을 옮겨 바라보고는 중얼거렸다.
"객실에 있는게 답답한가? 아까부터 계속 갑판 위로 왔다갔다 거리는 것 같더라고."
"......"
"하여튼 좀 이상한 사람이야. 얼굴도 로브로 가리고 있고. 아버지도 저런 수상한 사람은 웬만해서 승객으로 안 받는데, 왜 태운 건지 모르겠단 말이지."
"사람이 아니네."
"...응? 뭐?"
"아무것도 아니야."
칼은 로브의 타이틀을 빤히 바라봤다.
[Lv.38]
[엘프 궁사, 정령 계약자]
이건 또 무슨 뜬금없는 엘프인지.
거기다 무려 정령 계약자였다.
정령, 이 세계에서 가장 베일에 싸인 신비 중 하나.
정령의 존재에 대해서는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자의 앞에만 모습을 드러내며, 자유자재로 나타나고 사라지는 특유의 능력 탓에 강제적으로 포획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엘프는 그런 정령들이 가장 사랑하는 종족이었다.
때문에 인간이나 다른 종족들 중에는 정령과 계약한 이가 손에 꼽는 반면, 엘프들 사이에선 정령 계약자의 비율이 아득히 높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희귀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칼은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로브로 가리고 있다 한들 범인을 초월한 인지 능력으로 성별을 파악하는 것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탓에 금방 도로 눈을 돌려야 했지만.
'정령 계약자라...'
그러고 보니 게임을 플레이할 때도 정령사 직업은 없었지. 현실 고증인가?
칼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만 그녀에게 관심을 껐다. 꽤 신기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 * *
항해가 이어지는 동안 칼의 생활 패턴은 단순했다.
숙소에 박혀 책을 읽다가, 식사나 바람을 쐬기 위해 바깥으로 나오면 할 일도 없는지 넉살 좋게 붙어오는 캘루밴과 잡담을 나눴다.
"그러고 보니 말이야, 칼."
"음?"
"너는 뭐 가지고 다니는 무기도 하나 없냐?"
"글쎄, 딱히 없는데."
"아니, 혼자 대륙을 떠돌며 여행하고 있다며? 그러다 도적들을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캘루밴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허리춤에 차인 검을 툭툭 두드렸다.
"자고로 사내라면 검 한 자루 정도는 차고 다녀야지. 상인의 길을 걷는 나도 검술 정도는 익혔다고."
"오... 그것 참 대단한데."
"흐흐, 그렇지? 항해를 하다 보면 해적들을 만나는 일도 비일비재하거든. 아, 이걸 말했었던가? 내가 지금까지 베어버린 해적들의 수만 두 자릿수가 넘어가는데..."
허세일 게 뻔한 이야기들을 캘루밴이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칼은 적당히 들어주다가 따로 궁금한 부분을 물었다.
"지금 나아가고 있는 항해로에서도 해적들이 출몰하고 그런가?"
"응? 그야 당연하지."
이어진 캘루밴의 설명을 설명을 들어보면 이러했다.
본래는 이쪽의 항해로도 약탈이 들끓던 해적들의 앞마당이나 다름없다 했었는데, 그로 인한 피해가 너무 막심해지자 십 년 전 디아클 왕국에서 대규모 해적 토벌에 나섰었다고 했다.
덕분에 해적들의 수는 대거 줄어들고, 겨우 생존한 해적들도 크게 데여 그제야 왕국의 눈을 의식하며 전략을 바꿨다고 한다.
다른 항해로의 해적들처럼 웬만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통행세만 받고 선박들을 멀쩡히 보내주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기본적인 관례로 굳혀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요즘 이쪽 항해로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해적단은 '마이그 해적단'이라는 놈들인데, 들리는 소문으로는 선장 마이그하고 부하 몇 명이 은퇴 기사라 하더라고."
한 해적단이 항해로 하나를 독점하면 다른 해적들의 세력은 당연히 억눌러진다.
그렇기에 상인들에게도 이러한 상황이 나쁜 것은 아니었다. 물론, 항해로를 독점한 해적단이 관례를 잘 지키는 놈들일 경우에 말이다.
"그래도 마이그 해적단은 통행세만 받으면 다 얌전히 보내줘서 상인들 사이에 평판이 좋지."
칼은 헛웃음을 흘렸다.
해적들 주제에 평판이라니, 뭔가 어이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칼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캘루밴이 씩 웃음을 지었다.
"해적 새끼들 주제에 평판이라니, 좀 웃기긴 하지? 그래도 별 수 있나. 놈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까 다른 해적단들은 하나도 없이 항해로가 깔끔한 거거든. 일종의 필요악이라는 거지."
"......"
"뭐, 그런 것만 아니었어도 해적 놈들은 내가 진작에 다 베어버렸을 텐데 말이야. 사실 내 검술도 고명하신 기사님에게 직접 시사받은 검술이거든? 마이그 해적단, 그깟 퇴물 기사 놈들쯤이야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그래?"
바다 저편을 가만히 응시하던 칼이 손가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그 엄청난 검술을 뽐낼 기회가 온 것 같은데."
"...응?"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캘루밴의 시선도 돌아갔다.
멀리서부터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한 척의 배.
캘루밴이 다급히 망원경을 꺼내들어 선박을 확인했다. 그리고 곧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돛에 그려진 검이 교차된 문양.
이쪽의 항해로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무리는 단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마... 마이그 해적단이다!"
< 스쳐가는 인연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