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착 (2) >
"......"
한 청년이 창가에 서있었다.
청년의 정체는 다름 아닌 쥬레인이었다.
한밤중에 이렇게 하염없이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건 여러모로 생각과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면 정말 왕위를 잇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군.'
무리가 아닌 정도도 아니다. 이미 절반 이상의 확률은 될 터였다.
쥬레인 또한 현재 왕성의 분위기와 흐름은 파악하고 있었으니.
'이제는 왕실이나 다른 세력들 쪽에서도 나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고.'
왕성 내 분위기는 여전히 살얼음판과 같았다.
왕족이 왕성 내에서 암살을 당할 뻔한 것.
그리고 왕실의 검이자 방패인 수호기사들이 죽음을 맞이한 것.
더군다나 그로 인해서 광명전은 완전히 폐허가 돠디시피 했다. 이쯤 되면 단순한 반역이 아니라, 마르하겔 왕성이 테러를 당한 것에 가까웠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으니 모두가 눈치를 보며 사리는 건 당연했다.
현재 상황을 제어하고 주도할 수 있는 건 암습을 당한 당사자인 쥬레인과 1왕녀뿐이었다.
그리고 1왕녀의 세력은 이젠 아군과 다를 게 없었다.
암습 당일의 바로 다음 날, 그녀와 마법사장 살라딘과 짧게 마주했을 때 그들이 내보였던 감정은 호의와 체념에 가까웠으니.
암습에서 생명의 빚을 지고, 무엇보다 수면 아래에 있던 칼의 존재를 확인한 이상 1왕녀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 왕위는 결국 5왕자 쥬레인이 계승하게 될 것이며, 결코 척을 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관계를 새로이 다지고 싶다면 협의 따위가 아니라 완전히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재차 방문해올 의사를 밝혔으니 내일이면 1왕녀 쪽과도 이야기를 완전히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이었다.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 되도 않는 같잖은 명분으로 감히 쥬레인과 수호기사들의 행보에 제동을 걸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쥬레인은 가라앉은 눈빛으로 밤하늘에 떠오른 별들을 바라봤다.
'...어쩌다 보니 정말 여기까지 왔군.'
문득 상념은 몇 달 전으로 되돌아갔다.
용각 산맥에서 칼을 처음 만났던 바로 그때로.
돌이켜보면 모든 게 기적인 것만 같았다.
암살의 위기에서 몇 번이고 구해주고, 창염환의 비밀을 밝혀내고, 그로써 수호기사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아무것도 없던 허울뿐인 왕자가 이제는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아득히 높은 곳에 있던 2왕자조차 더 이상 넘을 수 없는 벽이 아니었다.
그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기는 커녕 무엇 하나 자그마한 것조차 이루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절박했기에 그랬지만, 여유가 생긴 지금도 쥬레인은 여전히 칼의 정체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정체가 무엇인들 어떤 의미도 없었으니까. 또한 칼이 그것을 원치 않았으니까.
쥬레인에게 있어 칼의 존재는 그저 은인이자 구세주였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은 은혜를 입어서, 이 빚을 언제고 갚을 수나 있을까 염려만 차오를 뿐이었다.
"전하, 밤이 깊었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쥬레인의 시선이 방 한구석으로 돌아갔다.
세피엘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띈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이 심란하고 복잡할 때 창가에 서서 하늘을 응시하는 건 쥬레인의 오랜 버릇이었다. 항상 쥬레인의 곁에 붙어있던 그녀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빤히 세피엘을 바라보던 쥬레인이 입을 열고서 물었다.
"세피엘."
"예, 전하."
"일이 전부 끝나고 나면..."
입을 우물거리던 쥬레인이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마르하겔의 성을 버리게 된다면."
이미 이전에 언급했던 것이었다.
일이 전부 마무리되고 칼이 곁을 떠나고 나면, 쥬레인은 더 이상 왕성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본판의 창염환을 익힌 것은 진짜 5왕자 쥬레인이 아닌 바로 그였으니까.
애초에 왕위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왕족의 신분에도 별 미련은 없기는 했다.
어렸을 적부터 쥬레인은 성벽 안의 안락한 삶보다, 바깥의 자유를 더 갈망하고는 했었으니.
그렇기에 모든 것이 끝나고 왕성을 떠난다 하더라도 그에 대한 걱정이나 유감은 조금도 없었다.
칼 또한 원한다면 누구도 모르게, 또한 누구도 찾을 수 없게 왕성을 나가는 것을 도와주겠다 했었으니 아무런 문제는 없었다.
다만, 세피엘에게는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지금까지의 고생에 대해 그 어떠한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되는 셈이었으니까.
모두가 광명전을 떠날 때 끝까지 남아 묵묵히 곁을 지켰던 세피엘이다.
왕가의 의식을 치르기 위해 왕성을 떠날 때는, 그것이 죽을 자리나 다름없을 거라는 걸 알고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따랐다.
그래서 다음 말이 뱉어지지가 않았다.
내가 왕성을 떠나고, 마르하겔의 성을 버리게 되어도 그때도 계속해서 곁에 남아줄 것이냐고.
"......"
그런 쥬레인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세피엘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그 앞으로 다가갔다.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이지만 쥬레인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전하께선 제 삶을 구원해주셨습니다."
쥬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를 구한 건 내가 아니라 카이루스 형님이지 않느냐."
세피엘은 본래 산골 마을의 평범한 소녀였다.
그러나 도시를 구경하기 위해 처음 마을 밖으로 나왔던 날, 불법 노예상에게 납치를 당했었다.
난데없이 잃어버린 삶의 자유, 혹독한 학대 속에 이리저리 떠돌던 그녀를 구원한 건 다름 아닌 1왕자 카이루스였다.
사찰을 겸해 왕성 밖으로 나왔던 그가 우연히 불법 노예상들의 근거지를 토벌하는 과정에서 그녀를 마주한 것이었다.
기적적으로 자유를 되찾은 세피엘은 자신이 본래 살던 마을로 돌아가고자 했다.
1왕자 카이루스 또한 그녀를 가엾게 여겼기에 수하들을 시켜 그녀를 무사히 고향에 데려다주고자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마침내 돌아간 마을은 이미 도적들의 소굴이 되어있었다.
주민들은 대부분이 죽었고, 일부 살아남은 이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어 비참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 형제들 또한 도적들에게 진작 죽음을 맞이한 지 오래였다.
도적들은 그 자리에서 카이루스의 기사에 의해 모조리 도륙을 당했으나, 당시 어렸던 그녀가 받은 충격과 비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온갖 학대와 굶주림을 견디고 몇 년 만에 돌아온 보금자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빨리 왔다면. 자책감이 마음을 터질 듯 쥐어짰다.
자책감은 분노와 복수심으로 변질되었고, 그녀는 다시 기사를 따라 카이루스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카이루스는 인정과 호의가 넘치는 인물이었기에 그녀는 왕성의 광명전에 자리를 잡고 검까지 배울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검술을 연마하는 목적은 하나였다. 마음속에 들끓는 열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병사든 기사든 되어 닥치는 대로 도적과 범죄자 놈들을 베어버리다 보면, 적어도 살아가는 원동력은 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5왕자 쥬레인과 만났다.
카이루스의 친동생인 쥬레인 또한 광명전에서 그와 함께 생활하고 있었으니, 둘의 마주침은 당연한 일이었다.
[넌 누군데 자꾸 여기서 검을 휘두르고 있어?]
[...저한테 신경 끄십시오.]
[와, 대체 몇 시간 째 휘두르고 있는 거야? 나는 조금만 휘둘러도 금방 팔이 저려서 못하겠던데. 나이도 어린데 대단하구나!]
[제발 좀 저리 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나이는 저보다 왕자 전하가 더 어리십니다.]
"전하 또한 마찬가지이십니다."
만약 쥬레인이 없었다면.
"전하께서 제게 다가와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여전히 방황하며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을 겁니다."
그렇기에 1왕자 카이루스조차 죽음을 맞이한 지금, 쥬레인은 그녀의 삶의 전부나 마찬가지였다.
쥬레인이 곁에 없이 홀로 살아간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니 언제까지고 따르겠습니다."
투박하고 무뚝뚝한 말이었으나, 뜻은 충분히 전해졌다.
옅게 웃음을 지은 쥬레인은 그녀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아직까지 그분의 이름도 제대로 모르는군."
세피엘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은 이제부터 자신이 세이온이라고 했을 뿐, 아직까지도 본명을 알려주지 않았다.
만약 일이 전부 끝난다면, 그때는 부디 이름을 알 수 있길 바라는 두 사람이었다.
* * *
1왕녀 클로아가 마법사장 살라딘과 함께 찾아온 건 해가 중천에 뜬 낮이었다.
더 이상 그녀가 쥬레인을 만남에 있어 주변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셨습니까."
다른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반쯤 폐허가 된 객전이었으나, 멀쩡한 응접실은 몇 개 있었다.
클로아는 쩍쩍 갈라진 바닥을 내려다보며 작게 헛웃음을 짓고는 쥬레인의 앞에 앉았다.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는 것이냐?"
"적응이 되서 그럭저럭 지낼 만합니다."
"정 불편하다면 내 궁전으로 잠시 거처를 옮겨도 된다만..."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간단하게 안부를 주고받은 뒤, 클로아는 곧장 본론을 꺼냈다.
"우선 다시 한 번 인사를 해야겠지. 나와 살라딘 공의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해선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
"빙빙 돌려 말하지 않으마. 나와 궁정의 마법사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전면으로 너를 지지할 것이다."
클로아가 쥬레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니, 지지하고 싶다고 말해야겠구나. 부디 내 뜻을 받아들여주었으면 한다."
저번과는 달리 완전한 저자세였다.
지금 구도에서 명백한 갑은 5왕자 쥬레인이었다. 그리고 1왕녀 클로아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2왕자와 3왕자 사이에서도 겨우 중립을 유지하던 그녀가 태도를 이렇게 뒤집듯 바꿔버린 건 놀라운 일이었다.
그 변화의 이유에는 한 명의 존재가 결정적이었다.
클로아는 힐끗 쥬레인의 뒤에 서있는 칼을 바라봤다.
'마법사 세이온...'
세피엘과 함께 줄곧 쥬레인의 곁에 남아있던 마법사.
조사한 바에 의하면 그는 3서클에 불과한 평범한 마법사였다.
한데 그런 이가 수호기사단의 부단장과 마법사장을 순식간에 제압한 괴한을 역으로 제압해버렸다.
적어도 성위의 경지일 초인을, 그것도 둘이나 혼자서 상대하고 살해해버린 것이다.
그 어마무시했던 전투의 모든 과정을 전부 지켜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녀는 당시의 상황을 일부분이나마 직접 목격했다.
3서클의 마법사? 코웃음도 나오지 않는 소리였다.
'최소로 잡아도 6서클의 성위마법사.'
이만한 괴물이 대체 왜, 그것도 경지를 숨기고 쥬레인의 곁에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정말 궁금했지만 그럼에도 클로아는 그날의 암습과 칼의 존재에 대해서 입 밖으로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쥬레인은 침묵을 권고했었고, 그 말을 어겨서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기에.
중요한 건, 쥬레인의 세력에 데반뿐 아니라 성위급의 초인이 한 명 더 존재한다는 것.
그것만으로 이 왕위 전쟁의 결말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어쩔 생각인진 모르겠지만, 당장 칼이 정체를 드러내기만 해도 세력 구도는 다시 한 번 큰 격변을 일으킬 것이었다.
그녀는 쥬레인이 다음 계승자가 되리라 확신했다.
그러니 중립을 깨고, 더 늦기 전에 서둘러 쥬레인에게 확실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쥬레인으로서도 그녀의 지리를 거부할 이유는 없었기에, 대화는 만족스레 끝이 맺어졌다.
그렇게 1왕녀 클로아가 떠나고 곧바로 누군가 이어서 찾아왔다.
바로 수호기사장 데반이었다.
< 결착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