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105화 (105/132)

< 결착 (1) >

회상이 끝나고 재차 현실의 풍경이 펼쳐졌다.

칼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

6서클에 오른 이후 웬만한 강자들과의 전투를 제외하곤 이렇게 심장이 격동한 적은 처음이었다.

툼그바르의 기억에서 마지막에 펼쳐졌던 광경이 그만큼이나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뭐였지, 그건...?'

언데드 대군단?

이 세계에 그런 말도 안 되는 죽음의 군세를 이끌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밖에 없다.

아니, 한 명밖에 없었다. 적어도 칼이 알기로는.

'마왕.'

흑마법의 창시자.

순리를 거슬러 망자들을 되살리고, 악신들과의 거래를 통해 마계의 문을 열고, 세계를 멸망의 위기에 빠뜨렸던 만악의 근원.

그를 추종했던 흑마법사 세력들은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대륙 곳곳에 숨어 온갖 잔악한 짓들을 벌이고 있다.

또한 멀지 않은 미래엔 그런 흑마법사들과의 대전쟁이 다시 한 번 일어날 예정이고.

아무튼 흑마법이란 마왕이 사용했던 세 가지 마법류의 총칭이다.

망자 소생, 생명 융합, 그리고 악마 계약.

딱히 흑마법사라고 인간의 영혼이나 생명력을 쥐어짜내 마력을 늘린다거나, 그딴 설정은 없다.

물론 어딘가에는 그런 방식으로 마력을 쌓는 미친 마법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그 마법사의 비전일 뿐이지 흑마법사와 마법사를 구분 짓는 정확한 기준은 아니었다.

마법사와 흑마법사가 사용하는 힘의 근원은 동일하다.

흑마법사들 또한 보통의 마법사랑 똑같이 정상적인 서클링을 통해서 마력을 쌓고 경지를 진전시킨다는 것이었다.

단지 문제는, 그들이 사용하는 마법의 악랄함.

망자들을 피와 살점에 미친 살육 기계로 되살리고, 생명을 융합하여 키메라로 만들고, 마계에서 온갖 악마들을 불러와 현세를 산지옥으로 만드는 마법은 흑마법이라 칭해지기에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망자 소생, 그러니까 칼이 현재 익히고 있는 '레이징 더 데드'는 마왕의 가장 대표적인 흑마법이었다.

그가 이끄는 망자의 대군에 먼 과거 얼마나 많은 왕국들이 허물어지고 사라졌다고 했던가?

끝내 제국과 남은 국가들의 연합이 마왕을 쓰러뜨렸다곤 하지만 당시 대륙이 피해는 괴멸적이었었다고 한다.

칼은 툼그바르의 기억을 더듬으며 침음을 흘렸다.

'그 남자는 분명 지구인이었어.'

흑발에 동양적인 외모를 지녔던 남자.

지구인의 존재를 직접 입에 담기까지 했는데, 지구인이 아닐 리가 없었다.

한데 대체 왜 그가 그런 어마무시한 언데드 군세를 조종하고 있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달되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마왕의 정체가... 다른 누구도 아니라 지구인이었다는 건가?'

머릿속이 혼잡하다.

칼도 그 시기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선 정확히 알고 있는 게 없었다.

그 시대를 배경으로 플레이한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고대를 배경으로 플레이한 전사 직업은 그보다도 전 시간대였고, 나머지 것들은 전부 그보다 훨씬 이후의 시간대였다.

이제 와서 문득 생각해보니 어딘가 이질감이 들기는 했다.

마치 게임이 의도적으로 그 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의 정보를 차단한 것만 같지 않은가?

또 아무리 먼 과거의 일이라지만, 지구인들의 존재에 대한 흔적이 왜 이 세계에 남아있지 않은 건지도 의문이었다.

생각나는 건 전쟁에서 승리한 제국이 의도적으로 지구에 대한 정보를 은폐했다는 것밖에 없었다.

- 역시 우리들은 이 세계에 섞일 수 없는 이방인, 그저 쓰다 버릴 도구에 불과했었나 봅니다.

- 바랐던 건 권력도 뭣도 아닌, 그저 본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는데.

- 제국을 멸하고, 룬 대륙에 존재하는 국가들을 모조리 지워버릴 겁니다.

그나마 확신을 가지고 추측해볼 수 있는 건 남자의 말에서 몇 가지 건졌다.

칼은 그것들을 종합하여 생각을 정리했다.

먼 과거에 존재했던 지구인들이 아세라 제국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그들을 도왔다는 것.

지구인들은 지구로 돌아가고자 했지만, 끝내 제국에게 배신을 당해 몰살당했다는 것.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지구인이 그런 제국에 복수를 행하고자 했다는 것.

그 지구인이 다름 아닌 '마왕'이었으며, 그렇게 대륙의 역사에 큰 재앙으로 남은 대전쟁이 발생했다는 것.

"...제국이 완전히 개새끼인데, 이거?"

물론 칼이 당시의 정확한 내막에 대해서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드러난 것만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마치 제국이 만악의 근원과도 같았다. 마왕을 탄생시킨 근본적인 원인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 남자의 정체가 정말 마왕이었는지도 완전히 확신은 못하지만, 아무튼...'

[신검 '라스칼리아'로부터 충분한 단서를 획득하였습니다.]

[메인 스토리가 연계됩니다.]

[마지막 차원의 조각에 대한 단서가 주어집니다.]

[아세라 제국 - 황립 루블리온 아카데미]

아무튼 이것으로 그토록 찾던 단서는 전부 얻은 듯싶었다.

칼은 미간을 좁힌 채 마지막 네 번째 조각에 대한 메시지를 읽었다.

이번에는 어째서인지 어떤 인물이 조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아세라 제국, 황립 루블리온 아카데미?'

제국의 중심, 황도 포바스에 위치한 루블리온 아카데미.

칼도 루블리온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해마다 온갖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는, 주변국들뿐만 아니라 심지어 몬 대륙의 국가들조차 인재들을 유학 보내는 대륙 제일의 아카데미를 모를 리가 있겠는가.

'...이게 마지막 조각에 대한 단서라고?'

근데 이걸로 뭘 어쩌라는 건진 모르겠다.

인물 이름만 달랑 알려주는 것보다 찾아가는 데에는 훨씬 낫긴 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어느 누가 차원의 조각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장소에 숨겨져 있는 건지 따위는 전혀 알려주지 않았으니까.

달랑 루블리온 아카데미라고만 하면 거기서 대체 뭘 어쩌라는 건지 어떻게 알겠는가?

다른 단서들도 죄다 불친절하기 그지없긴 했지만, 이번 건 유독 심했다.

생각이 복잡해서 그런지 욕도 안 나온다.

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래, 마지막 조각이다 이거지."

마지막 네 번째 차원의 조각.

그것까지 끝내 모은다면 그토록 고대하던 지구로의 귀환을 이룰 수 있었다.

"......"

문득 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이어지던 상념이 현재 상황에까지 닿았기 때문이다.

단서도 다 얻은 마당에 더 이상 왕성에 있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일을 이렇게 크게 벌인 마당에 그냥 나 몰라라 떠나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단서를 얻으려면 결국 창염환을 익히고 드러냈어야 하는 건 맞다.

그로 인해 3왕비에게서 지구인의 편지를 얻고 검의 존재를 알아낸 거였으니까.

단지, 이제 더 이상 왕성에 있을 이유도 없는데 벌인 일들에 대한 처리를 하자니 성가심이 몰려올 뿐이었다.

"하, 이거..."

어떻게 깔끔히 뒷정리를 마치지?

칼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쥬레인이 원하는 건 왕위가 아닌 1왕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이다.

칼 또한 그를 돕기 위해 지금의 판을 만든 것이고.

하지만 이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칼이 쥬레인의 계획에 따른 건 어쨌든 단서가 그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이다.

단서를 다 찾아낸 지금이야 굳이 그 계획을 계속 유지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단순히 쥬레인이 원하는 게 1왕자의 죽음과 얽힌 진실이라면, 다른 효율적인 방법은 얼마든지 더 찾아볼 수 있을 터였다.

증거만 없을 뿐이지 흉수는 2왕자 카몬이 거의 확실했으니까.

그렇기에 앞으로 할 일은 명확해졌다.

1왕자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내고 뒷정리를 한 뒤, 최대한 빠르게 왕성을 뜨는 것.

솔직히 단서도 다 얻은 마당에 더 이상 쥬레인을 도울 이유는 없었다.

애초에 처음에 원하는 걸 얻으면 곧장 떠나겠다는 경고도 했었다.

하지만 칼의 성격이 그 약속을 칼같이 지킬 정도로 냉혹하지는 못했다.

아무리 이쪽의 일이 급하고 절실하다 한들 마무리는 확실히 지어야 할 것이었다.

'일단은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군.'

칼은 걸음을 옮겨 도로 쥬레인의 숙소로 돌아갔다.

* * *

2왕자전인 청성전.

넓고 화려한 방에 한 명의 남자가 앉아서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온갖 휘황찬란한 장식들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만 같은 방 내부.

달그락.

이윽고 찻잔을 내려놓은 남자, 2왕자 카몬이 입을 열었다.

"상황이 몹시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화 상대가 없었다.

방 안에 존재하는 사람은 분명 카몬 한 명이 전부였다.

그럼에도 카몬은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멍청한 동생 녀석이 괜한 일을 벌였지요. 이번 일을 계기로 5왕자의 입지가 더욱 상승할 겁니다. 수호기사들도 골치 아픈 마당에..."

찻잔의 손잡이를 쓰다듬던 카몬의 표정이 돌연 찡그러졌다.

슈우우...

그의 몸에서 불길한 보랏빛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는 허공에서 꿈틀거리며 뭉쳐지더니 곧 인간의 형상처럼 뭉쳐졌다.

도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온 카몬이 고개를 들고 형상을 바라봤다.

- 지금 재촉이라도 하는 것이냐?

이마에 뿔이 달린 아름다운 여체의 모습.

그러나 보이는 모습과 달리 그 목소리는 쩍쩍 갈라져서 울려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마치 악마의 그것처럼.

- 무능력한 놈. 나는 이미 네게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

카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걸 모를 리 있겠습니까. 다만 상황이 너무 예상을 벗어나서 흘러가고 있을 뿐입니다."

- 그깟 미꾸라지 하나 때문에...

"그 미꾸라지가 누구도 익히지 못한 건국조의 심공을 익히고, 성위급 무인인 수호기사장의 지원을 받고 있죠. 앞으로는 1왕녀 쪽의 궁정 마법사들까지 5왕자를 은연중에 지지할 것이고, 최근에 암살을 당할 뻔했으니 웬만한 행위들에 대한 명분도 얻었습니다."

- ......

"최근에 듀러플 공작가 쪽까지 분위기가 묘하더군요. 아무리 세인피어 공작과 국왕파 귀족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한들, 이 흐름이면 제겐 가망이 없습니다. 그러니 조금만 더 도움을 주십시오. 제가 왕위에 올라야 당신과 했던 약속 또한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공에 이리저리 넘실거리던 그녀가 카몬의 바로 앞까지 얼굴을 들이밀었다.

- 현혹은 세인피어 공작 하나만 유지하고 있는 것도 벅차다고 분명히 말했을 터인데.

"알고 있습니다."

- 쯧쯧, 네가 내 힘을 회복하는 데 조금만 더 공을 들였어도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올 일은 없었다.

카몬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본신의 힘을 전부 회복하면 이따위 왕위 다툼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의 능력은 정말이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경이로운 것이었으니까.

이 세상에 과연 어느 인간이 성위급 무인의 정신을 은밀히 홀리고 조종할 수 있을까?

그런 건 오직 그녀와 같은 존재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악마의 권능.

적어도 카몬에게 있어서, 그것은 어느 마법이나 주술보다도 특별하고 강력한 힘이었다. 현혹 또한 그녀의 능력의 일부에 불과할 뿐이니.

단지, 카몬은 그녀의 힘을 회복시키는 데에 큰 힘을 들일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었다.

그녀의 존재를 들키기라도 한다면 지금까지 공들인 모든 일들이 완벽히 물거품이 될 터였으니까.

하지만 이대로면 들여온 공이고 뭐고 전부 부질없었다.

결단이 필요한 때였다.

조만간 찾아올 기회에 왕성을 피로 물들일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법을 모색할 것인지.

잔에 담긴 찻물을 바라보며, 카몬은 곧 마음을 정했다.

-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이냐? 네놈의 말대로면...

"본신의 힘은 얼마나 회복하셨습니까?"

- ......?

"아무래도 끝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카몬의 눈에 한 줄기 광기가 일렁였다.

"지금까지 답답하셨겠지만, 이번에는 당신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걸림돌들을 한 번에 전부 제거해버릴 생각이니."

< 결착 (1)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