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조의 검 (6) >
쿠과과광!!
무너지는 건물에서 세 사람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한 번 더 크게 도약하여 하늘 높이 떠오른 칼은 곧바로 다음 마법을 캐스팅했다.
아래쪽에서 날카롭게 빚어진 안개가 가시덤불처럼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푸화악!!
주홍의 불꽃이 회오리 형태로 몰아치며 안개를 불살라버렸다.
달밤 아래 눈부신 적광이 번쩍이며 일대의 어둠을 모조리 몰아냈다.
불꽃은 단지 안개를 소멸시키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중심에 있던 헤릴드에게까지 맹렬한 기세로 뻗어나갔다.
"윽...!!"
몸이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은 열기에 헤릴드가 짧은 신음성을 뱉었다.
아직 불꽃이 완전히 도달하지조차 않았는데도 이 정도였다.
창염환 심공의 효과로 칼의 화염 마법은 경지에 비해 그 위력이 배였다.
헤릴드의 몸에서 다시금 피어오른 안개가 방어막 형태로 압축되며 주변을 둘러쌌다.
그럼에도 안개를 뚫고 침입해오는 화기, 정면에서 막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헤릴드는 그 상태 그대로 황급히 옆으로 몸을 날렸다.
칼은 회피하는 헤릴드에게 계속해서 불꽃을 쏟아붓지 못했다.
왼편 아래쪽 사각에서 붉은 선들이 섬전처럼 쏘아져왔으니까.
쩌저정!!
실드를 타고 느껴지는 묵직한 충격.
새삼 놀랄 것도 없었으나 고작 단검을 쏘아낸 공격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이다.
만약 이런 공격을 끝없이 허용한다면 아무리 6서클에 오른 지금이라도 실드가 버티질 못할 것이었다.
물론, 칼 역시 가만히 방어만 하고 있을 리는 없었기에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지만.
【라이트닝 웨이브】
빠지지직!!
마력이 심장 쪽으로 몰려 회전하며 서클이 아르자크의 형으로 뒤바뀌었다.
공중을 딛고 돌진하는 게록에게 그물과 같은 전격이 떨구어졌다.
아래에서 본다면 하늘 전체를 뒤덮은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마력이었다.
게록은 재빨리 몸을 틀어 피했고, 그대로 하강한 전격은 아래쪽의 지면과 무너진 건물 잔재들을 통째로 폭발시켰다.
'...멍청한 놈!'
설마 이렇게 큰 공격을 허공이라 피하지 못하리라 생각한 건가?
게록은 칼의 멍청한 판단을 비웃으며 재차 공중을 딛고 도약했다.
마법과 마법의 연계 사이의 텀.
그것은 초월의 영역인 7서클에 닿지 않는 이상에야, 그 어느 마법사도 극복할 수 없는 약점이다.
물론 서로 비슷한 상대 간의 전투에서나 작용하는 약점이지만, 게록과 헤릴드는 칼과 동일하게 성위의 경지에 오른 강자였다.
범인은 인지조차 못할 아주 자그마한 텀도 그들에게는 전투를 한순간에 결정지을 수 있는 치명적인 빈틈이었다.
슈와악!!
게록의 신형이 직각 방향으로 뒤틀리더니 순식간에 칼에게로 솟구쳤다.
이대로 지척까지 접근하여 실드를 산산히 깨부숴버릴 생각이었다.
설령 막아낸다 하더라도 헤릴드 역시 태세를 추스르고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생각보다 쉽게 전투가 끝났다.
그러나 이어진 광경에 게록은 자신이 완전히 착각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대체 어느 새에 마법이 완성된 건지 수많은 화염구들이 이쪽을 향해 폭우처럼 몰아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기겁한 게록이 반대쪽으로 몸을 튕겨 물러서며 검을 휘둘러 몰아치는 화염들을 막아냈다.
동시에 한편에 꾸물꾸물 끼어있던 안개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칼을 향해 날아들었다.
안개가 압축되어 만들어진 거대한 흑창.
만약 칼이 보통의 마법사였다면 이렇게 절묘한 시간차를 두고 몰아치는 연격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했을 것이었다. 보통의 마법사였다면 말이다.
번쩍!!
허공을 가로질러 나아가던 안개의 창이 백색 광선에 그대로 꿰뚫렸다.
어둠을 찢으며 깜빡깜빡 명멸하던 백광은 순식간에 안개의 창을 깔끔히 소멸시켜버렸다.
칼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다음 공격을 준비하려는 헤릴드에게 한 발 먼저 마법을 쏘아냈다.
몰아치는 전격. 헤릴드는 재차 안개를 뭉쳐 몸을 보호했지만 충격의 여파에 지면으로 추락했다.
슈우우...
달밤 아래 번쩍이던 빛들과, 대기를 찢고 부수던 굉음이 잠시 멎었다.
칼은 흙먼지와 안개로 흐릿한 지면을 가라앉은 눈으로 내려다봤다.
무너진 건물들과 갈라진 대지.
잠깐의 전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충격의 여파로 광명전은 이미 절반이 넘는 범위가 폐허가 된 상태였다.
'...생각보다 할 만한데?'
60레벨 초반의 상대 둘.
솔직히 상당한 고전을 예상했었는데 이건 생각보다도 훨씬 더 우세를 점하고 있었다.
전체 마력랑 증가에, 위력 증폭에, 마력 소모량 감소 등등.
단순히 6서클에 오른 것뿐만 아니라 서클링이 이것저것 많이 강화된 효과가 큰 것이었다. 거기에 최근에 익힌 창염환까지.
애초에 칼은 지금 상황이 목숨이 위험할 정도라고 판단하지 않았었다.
어차피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는 건 저쪽이었으니까.
이대로 조금만 버티며 끌어도 왕실의 기사와 마법사들, 특히 수호기사장 데반이 올 것이다.
하지만 직접 놈들과 부딪혀서 가늠해보니 굳이 지원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상황이 더욱 애매해졌다.
칼의 미간이 좁아졌다.
'지원이 오면 계속 전투를 이어가기도 난감하다.'
대놓고 정체가 노출되는 꼴이다.
이미 1왕녀 쪽과 부단장 카블라드가 목격하긴 했지만, 그 정도 소수의 인원과 모두의 앞에서 정체가 드러나는 건 감당해야 될 뒷일의 규모가 달랐다.
물론 창염환으로 이미 왕성에 난장판도 벌였겠다, 여기까지 와서 끝까지 철저하게 정체를 감출 생각도 없긴 했지만...
'일단은 전력을 다해 제압해봐야 되나.'
칼이 지면을 내려다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는 와중.
헤릴드와 게록 역시 허공에 떠있는 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체 저런 괴물이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헤릴드의 짜증 섞인 중얼거림에 게록도 인상을 찌푸렸다.
6서클의 성위마법사.
이런 말도 안 되는 전력이 5왕자 쪽에 존재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5왕자고 자시고 애초에 마르하겔엔 성위기사는 존재해도 성위마법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헤릴드의 말마따나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도무지 정체를 알 수가 없는 상대였다.
저런 괴물이 5왕자의 곁에 붙어있는 줄 알았다면 암살 같은 건 애초에 시도하지 않았을 계획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놈이 이쪽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조금만 있으면 사람들이 몰려들 지금 상황에서도 헤릴드와 게록이 후퇴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였으나, 흘러가는 상황은 어렵기 그지없었다.
"저놈 저거, 마법 연계에 텀이 없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이긴 합니까?"
게록 역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상대는 마법사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을 완전히 극복하고 있었다.
문득 게록의 머릿속에 한 인물의 모습이 스쳤다.
자신을 두 번이나 농락했던 애송이 마법사.
놈 역시 마법을 펼침에 있어 연계 텀이 비정상적으로 짧았었다.
설마 싶어 허공에 떠있는 칼은 다시 바라봤으나, 역시 다른 얼굴이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애초에 지금 눈앞에 있는 상대는 성위마법사다.
그 애송이 놈이 아무리 천재라고 한들 그렇게나 젊은 6서클에 오르는 건 불가능했다.
어쩌면 눈앞의 마법사와 그 애송이가 서로 관련이 있을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법에 텀이 없는 건 아마 고유한 서클링이나 마력 운용 방식의 효과일 터였으니까.
두 사람이 같은 비전을 공유한 거라면 아귀가 맞았다.
'...설마 그 애송이 놈의 스승이라도 되는 건가?'
당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아무튼 소모전으로 간다면 모를까, 이대로면 사람들이 몰리기 전에 놈을 제압하거나 살해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두 사람 역시 수호기사장 데반의 존재는 신경 쓰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그가 이곳에 도착하리란 것 역시 잘 알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고 있는 이유는, 아직 숨겨둔 치명적인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쯤 멀리 숨어 지켜보고 있겠지.'
시선을 교환한 두 사람이 다시금 전투를 준비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없었다.
살육과 전투에 이골이 난 베테랑 중의 베테랑들.
지금부터 전투를 어떤 식으로 이끌어갈 것인지는 굳이 입 아프게 떠들지 않아도 두 사람의 뜻이 합치되었다.
화아악!!
헤릴드의 몸에서 순식간에 퍼져나온 어둠이 일대를 자욱하게 뒤덮었다.
"요란스럽기는."
전투의 재개.
칼은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전 방향의 시야가 가려졌으나 칼이 당황하는 일은 없었다.
이 정도로 격이 높은 강자들 간의 전투에 시야의 차단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요소였으니까.
작은 형체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칼은 두 사람의 행동을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런 건 또 처음 보는군.'
상대하다 보니, 이 정체 모를 안개의 근원력이 무엇인지는 대충 깨달을 수 있었다.
오러와 주력이 뒤섞인 형태의 힘.
이 안개는 단순한 오러가 아니라 주술의 요소가 혼합된 힘이었던 것이다. 칼이 무인은 아니지만, 애초에 일반적인 오러로는 이런 식의 다양하고 광범위한 운용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었다.
확실히 흔히 볼 수 있을 만한 건 아니다.
하지만 말이 안 되는 현상은 아니었다.
마력이든 오러든, 어떤 종류의 힘과도 충돌하지 않는 특성을 지닌 힘이 바로 주력이었으니까.
그래서 고대 주술 부족의 전사들은 주술과 함께 오러를 연마하기도 했었다.
터어엉!!
어둠을 뚫고 기습적으로 튀어나온 안개 가시가 칼의 실드를 강타했다.
칼은 손을 휘저어 헤릴드가 있는 쪽으로 전격을 쏘아보냈다.
곧바로 어둠의 반대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게록이 거대한 검기를 내뿜으며 검을 휘둘러왔다.
칼은 충격파를 날림과 동시에 매직 부스터를 이용해 게록과의 거리를 벌렸다.
꿀렁, 꿀렁...
전투가 지속되는 와중에도 주변에 안개가 뭉쳐지며 하나둘씩 구체를 이루고 있었다.
사방에 난잡하게 떠오른 수십 개의 안개 구체들.
구체는 죽은 듯이 미동도 않고 있다가 불시에 칼을 향해 날카로운 가시의 형태로 뻗어왔다.
칼은 끈질기게 달라붙는 게록을 다시 한 번 튕겨내고 전격 마법을 캐스팅했다.
【체인 라이트닝】
빠지지지직!!
대기를 찢으며 뻗친 전광이 구체들을 연쇄적으로 소멸시켰다.
먹구름처럼 낀 불길한 어둠에 시퍼런 전광이 번쩍이며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울렸다.
'확실히 어렵긴 어려워.'
끝없이 두 사람을 향해 마법을 쏟아붓는 칼의 인상이 미약하게 찌푸려졌다.
이쪽이 여전히 몰아붙이고 있는 상황이긴 하지만 헤릴드와 게록, 두 사람 역시 60레벨 초반대의 성위 무인.
승기를 잡을 치명타는 좀처럼 입히기가 힘들었다. 그건 단순히 마법의 파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왜인지 아까부터 묘한 거슬림이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묘하게 적극적이지가 않아.'
쉴 새 없이 몰아붙이고는 있다지만, 왜인지 정말 공격을 성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보다는 이쪽의 정신을 난잡하게 만드는 데에 집중한 느낌.
그래, 마치 다른 쪽에는 신경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쐐애액!!
게록에게서 날아든 검이 실드와 충돌했다.
동시에 검에 가득 압축되어 있던 오러가 폭발하더니 실드에 다시 한 번 충격을 주었다.
그에 칼이 게록에게 반격함과 동시에 실드의 마력을 다시 구축하려던 순간이었다.
쩌엉!!
사각에서 가공할 속도로 쏘아온 창 한 자루가 칼의 신드를 산산히 박살냈다.
"......!!"
실드를 부수는 데에 힘을 모두 소진한 창은 직접적인 피해를 주진 못했으나, 충격의 여파로 칼의 신형이 지면으로 추락했다.
공격이 쏘아져온 곳은 안개의 내부가 아니라 바깥.
그제야 칼은 두 사람의 노림수가 뭐였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한 명이 더 있었구나.'
저멀리 떨어진 장소에 흐릿한 존재감이 느껴졌으나, 이제 와서 알아채봐야 늦었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사방의 안개들이 날카롭게 뭉쳐지며 칼을 향해 일제히 쇄도했다. 그 사이로 헤릴드가 함께 안개로 뭉쳐진 거대한 대검을 휘둘러왔다.
게록 역시 이미 칼의 지척까지 접근하여 검을 찔러오고 있었다. 극한까지 압축된 검기가 검날에 핏빛으로 넘실거렸다.
'끝이다.'
헤릴드와 게록, 두 사람 모두 승리를 확신했다.
실드는 박살났고 다른 마법을 펼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이대로 칼의 전신이 갈기갈기 찢기고 뚫릴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터어엉!!
이어서 울린 소리는 살점이 갈기갈기 찢기는 파육음 따위가 아니었다.
어느새 칼의 전신에는 알 수 없는 칠흑이 둘러싸여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갑옷처럼.
"......?!"
헤릴드와 게록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떠졌다.
완벽한 틈을 노렸던 필사의 공격은 그 어둠에 모조리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다크 아머 - 6서클, 비전>
먼 고대에 존재했던 데이어스 학파의 수장인 셰릭 데이어스가 창시한, 절대 방어의 비전 마법입니다.
모든 종류의 피해를 일정치까지 고스란히 흡수하고 저장하는 어둠을 전신에 두릅니다.
저장된 피해는 외부로 재방출이 가능합니다.
"오히려 고맙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는 둘을 보며, 칼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완벽한 기회를 만들어줘서."
꾸드드득...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격동하는 어둠을 보며 헤릴드와 게록이 뒤늦게 몸을 물리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헤릴드의 수많은 안개창, 그리고 게록의 검격.
갑옷에 흡수된 그 모든 충격이 재방출되어 고스란히 두 사람을 향해 되돌아갔다.
콰아아앙!!
< 건국조의 검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