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조의 검 (4) >
카이번이 헤릴드를 노려봤다.
"그리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오. 마르하겔의 왕실을 대체 뭐로 생각하는 거요?"
단순히 5왕자를 죽인다고 쉽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암살의 성공 여부는 둘째다.
문제는 그 후의 뒷감당이었다.
왕족이 왕성 내에서 암살을 당하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터였으니까.
더군다나 이제 5왕자는 수호기사들의 지지까지 한 몸에 받고 있다.
데반은 그저 신변 보호를 위할 뿐이라고 입장을 내세웠지만, 그것이 허물에 불과한 말이라는 걸 모르는 이는 없었다.
뭐가 됐든, 5왕자는 마르하겔의 역사 최초로 건국조의 유산을 이어받은 기재다.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현재 왕성의 모든 세력들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이었다.
한데 그런 상황에 5왕자가 암습으로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 후에 발생할 일들은, 특히 수호기사장 데반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카이번도 감히 예측할 수 없었다.
온갖 변수들이 너무나 넘쳐났으니까.
최악의 경우엔 5왕자의 피살과 관련되었다는 내막이 만천하에 드러날 수도 있었다. 더불어 아란헬과의 연결고리까지도.
왕실의 권위가 크게 떨어질 것을 감수하고 5왕자를 암살한다고 하더라도, 이렇게나 감당해야 할 부담들이 많은 것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이들을 너무 깊게 끌어들여선 안 된다.'
본래 카이번이 두 사람에게 요청했던 일은 2왕자 카몬에 대한 뒷조사였다.
그가 1왕자의 죽음에 연관되어 있다는 건 누구나 짐작하고 있는 사실이었다. 단지 정확한 증거가 없을 뿐.
때문에 카이번은 아란헬을 이용해 뭐라도 흔적을 찾아내고자 했었다.
세인피어 공작이 2왕자의 편을 들고 있는 이상 세력에서 우세를 점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고, 남은 방법이 있다면 2왕자가 숨기고 있는 비밀을 캐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것만으로 아란헬은 이미 충분히 왕위 전쟁에 깊게 간섭하고 있었다.
이 이상 끌어들였다간 일이 전부 잘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문제였다.
단순한 뒷조사와 왕족 암살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문제.
아란헬이라는 대 테러리스트 집단에 치명적인 약점을 하나 붙잡히는 셈이었으니까.
"생각이 너무 많으시군요."
헤릴드가 눈웃음을 지었다.
카이번의 고뇌를 전부 꿰뚫어보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전하께서 지금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실 텐데 말입니다."
"......"
"이대로면 가망이 없습니다. 아니면 달리 해결안이라도 있으십니까?"
카이번의 입이 꾹 다물렸다.
그 말대로였으니까.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단 며칠 만에 왕성의 분위기는 완전히 뒤집혔고, 이제 사실상 5왕자보다도 자신의 왕위 서열이 아래로 밀려났다는 걸.
건국조의 심공과 수호기사들의 지지는 그만큼이나 강력한 것이었다.
심지어 건국 연회에 모두의 앞에서 5왕자에게 그리 꼴사납게 패하기까지 했으니.
"그러니 저희가 대신 깔끔히 처리해드리겠다는 겁니다."
여전히 대답이 없는 카이번을 바라보며 헤릴드가 히죽 웃었다.
"뭐라도 흔적이 남을까봐 고민하시는 거라면 쓸데없는 염려라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
"누구도 5왕자의 죽음에서 전하와의 연결고리나, 저희의 존재를 밝혀낼 수 없을 겁니다. 더해서 아예 2왕자를 상황에 얽어버리는 것도 가능합니다만."
카이번이 헤릴드에게로 시선을 홱 돌렸다.
"2왕자도 조만간 나서서 분명 무언가를 하려 들겠지요. 이쪽에서 먼저 선수를 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5왕자를 죽이고 2왕자에게 그 누명을 뒤집어씌우겠다는 뜻이었다.
카이번의 미간이 좁아졌다.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를. 그런 게 가능할 리가..."
"하하, 전하께선 아직도 저희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계시는군요. 신뢰가 이리도 부족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헤릴드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정말로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눈동자 안쪽에서 불길한 어둠이 넘실거리는 것만 같은 느낌.
순간 등골에 오싹한 소름이 일었다.
카이번도 잘 알고는 있었다.
눈앞의 두 사람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훨씬 뛰어나고 위험한 존재들이라는 것을.
첫 접선 때도 그렇지만, 이후로도 이들이 간간이 내보여온 능력은 언제나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방금의 어처구니없는 계획도 이들이라면 정말 가능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순간 머릿속에 스쳤다.
"물론 빼도 박도 못하게 완전히 얽어버릴 수는 없겠지만, 5왕자를 죽인 후의 상황을 전하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것 정도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만약 5왕자의 암살에 성공한다고 해도 본래의 난관이었던 2왕자가 남아있다.
정말 헤릴드의 말대로 2왕자를 암습의 흑막으로 엮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 수호기사들이 2왕자와 척을 지게 만든다면, 상황을 단번에 역전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단지 문제는, 모든 일의 흐름을 두 사람의 능력을 믿고서 온전히 맡겨야만 한다는 것.
'빌어먹을...'
카이번이 입술을 짓씹으며 욱씬거리는 팔을 매만졌다.
이쪽을 지지하던 귀족들 사이의 분위기 또한 심상치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더 악화되면 악화됐지, 나아질 일은 결코 없었다.
이대로 대회담이 다가온다면 다음 왕좌의 계승자는 결국 2왕자나 5왕자가 될 게 뻔했다.
그러한 다급함과, 모두의 앞에서 내보였던 추태에 대한 굴욕, 그리고 5왕자에 대한 분노가 카이번의 이성을 흐트러뜨렸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카이번의 입이 끝내 열렸다.
"...광명전은 수호기사들이 지키고 있소. 그리고 5왕자의 바로 곁은 부단장이 호위하고 있고."
뒷감당을 떠나서 5왕자를 암살하는 게 가능하겠냐는 물음이었다.
그에 헤릴드의 뒤쪽에 서있던 노인, 게록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같잖다는 듯한 비웃음이었다.
카이번이 인상을 찌푸리며 재차 말했다.
"부단장 카블라드는 수호기사장과 세인피어 공작을 제외하면 왕국 최강의 기사나 다름없소. 쉬이 생각할 상대가..."
"그런 허수아비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니 염려 마십시오."
헤릴드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전하께선 그저 가만히 앉아 기다리고만 계시면 됩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을 들고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요."
* * *
3왕비와 만나고 며칠의 시간이 흘렀다.
칼은 그동안 한 일은 왕실의 비고에 들어간 게 전부였다.
목적은 물론 편지에 나온 건국조의 검을 찾기 위함이었다.
광명전에 들어온 수호기사들, 특히 쥬레인의 바로 지척에서 호위하고 있는 부단장 카블라드 때문에 쥬레인으로 변하여 비고에 입장하는 데 훨씬 어려움이 더해지긴 했으나, 어떻게든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며칠간 꾸준히 비고에 들락거리며 얻은 수확은 없었다.
편지의 내용에서는 검의 겉면을 불태우면 본신이 드러난다고 했었다.
하지만 비고를 뒤지며 창염환에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는 검은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하..."
막막함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왕실에도 건국조의 검이 없다면 달리 찾을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툼그바르인가 뭔가에게 검을 맡겨놨다고 나오긴 했지만, 수백 년 전 과거 인물의 흔적을 찾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답이 없네, 진짜."
검을 찾는 건 그냥 포기해야 하나?
하지만 분명 단서와 결정적인 관련이 있을 물건인 것 같은데.
찾을 방법이 없으니 뭘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다.
똑똑.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데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찾아온 사람은 쥬레인과 세피엘이었다.
뒤쪽에는 카블라드가 호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두 사람을 안으로 들인 뒤 칼은 방문을 닫았다.
안 그래도 혹시 쥬레인이 검에 대해 뭐라도 알고 있는 게 있을까 물으려 가던 참이었었는데.
표정을 보니 쥬레인 또한 급하게 할 말이 있는 듯한 기색이었다.
"클로아 누님께서 비밀리에 만나고 싶다고 뜻을 전해왔네. 바로 방금 전에."
1왕녀가?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인 태도에 고개가 조금 갸웃거려졌으나, 목적이야 대충은 예상이 됐다.
"그래서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누님 쪽에서 직접 광명전으로 찾아오겠다 했으니 수락할 생각이다.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
칼은 잠시 방음막을 둘렀다.
"이번에도 제가 대신입니까?"
잠시 고민하던 쥬레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엔 직접 만나겠습니다. 항상 공께만 의지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쥬레인은 괜히 미안함이 담긴 표정이었다.
확실히 근래 칼이 쥬레인을 대신한 일들이 여러모로 많기는 했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데반도 아니고, 1왕녀를 만나는 거야 쥬레인이 직접 나서도 상관은 없었으니까.
"그래서 언제쯤 찾아오겠답니까?"
"당장 오늘 밤입니다."
"뭐, 그럼 일단 저도 함께는 하겠습니다."
1왕녀 쪽에서 찾아오는 것이고, 부단장 카블라드도 있으니 딱히 쥬레인의 안전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자리에서 빠질 이유도 없었기에 칼도 함께하기로 했다.
혹시 모를 만약에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으니까.
* * *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날이 저물고, 깊은 밤.
수호기사들의 경계 아래 쥬레인의 방으로 두 사람이 들어왔다.
1왕녀인 클로아와 궁정 마법사장 살라딘이었다.
"오셨습니까."
클로아가 차분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살라딘은 앉지 않고 그녀의 뒤에 호위처럼 섰다.
빤히 쥬레인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연회에서 봤을 때와는 어딘가 또 달라진 것 같구나."
상당히 날카로운 감이었다.
그녀가 연회에서 봤던 5왕자는 쥬레인이 아닌 칼이었으니까.
아직 대화 한마디도 제대로 나누지 않았음에도 이질감을 느낀 것이었다.
"그래서 어쩐 일로 찾아오신 겁니까, 누님?"
쥬레인이 태연한 얼굴로 물었다.
폴리모프 마법이야 누구도 눈치챌 수 없다고 칼이 단언했었으니까.
이미 칼에 대한 신뢰가 깊은 쥬레인이 고작 이 정도로 당황할 일은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쥬레인의 뒤쪽에 서있는 카블라드와 세피엘, 칼에게로 향했다.
"살라딘 공을 물릴 테니, 가능하면 단둘이만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느냐?"
그에 카블라드의 인상이 미약하게 찌푸려졌다.
어떤 상황에서도 5왕자 쥬레인을 지척에서 호위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선 1왕녀의 말이 달가울 리가 없었다.
하지만 딱히 걱정할 일도 없이 쥬레인이 먼저 단호히 거절했다.
"어차피 제 사람들도 전부 알게 될 이야기입니다. 이대로 말씀하십시오."
그에 살라딘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뭐라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쉬워서 이 밤중에 이곳까지 찾아온 건 자신들이지, 5왕자가 아니었으니까.
1왕녀와 5왕자, 둘 사이의 입장은 이전에 연회에서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클로아도 더 말을 하지 않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너를 찾아온 것은 해답을 구하고자 함이다."
"...해답이라 하심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나는 왕위를 계승하는 것에 큰 미련이 없다. 애초에 지금의 세력으로는 그럴 능력도 부족하고."
그녀가 궁정 마법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다음 왕위와 관련된 문제가 아니었다.
쥬레인 또한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연회에서 내게 말했었지. 앞으로의 처신을 잘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
"내 앞으로의 행보를 결정하려면, 우선 네가 품고 있는 뜻부터 확실히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클로아가 쥬레인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다음 왕위인지, 그렇다면 별달리 내게 바라는 것이 있는 것인지..."
쥬레인의 뒤쪽에 선 칼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방금의 말로 1왕녀가 오늘 쥬레인을 찾아온 이유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불안했던 거였군.'
1왕녀를 포함해서 쥬레인과의 관계를 새로이 정립한 세력은 수호기사들을 제외하고 아직 아무도 없었다.
1왕녀 클로아는 2, 3왕자와 달리 다음 왕자를 반쯤 포기한 입장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지금의 상황이 그녀와 관계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다음 왕위를 계승할 인물에 5왕자 쥬레인을 조금도 가정한 적이 없었을 테니까.
갑작스레 일어난 격류에 대비하려면 그녀 또한 가만히만 있을 수는 없는 처지였다.
한마디로, 그녀는 지금까지와 같이 중립을 지켜도 될지 쥬레인에게 허락을 구하러 찾아온 것이었다.
만약에 쥬레인이 다음 왕위를 잇게 된다면 자신 또한 숙청의 대상에 포함되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칼이 연회에서 처신을 잘 하라는 말까지 남겼었으니 그녀로서는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칼은 별다른 생각 없이 방해나 되지 말라고 했던 말이었지만.
칼은 시선을 돌려 쥬레인을 바라봤다.
1왕녀 클로아를 적극적으로 압박할지 아닐지를 결정하는 건 그의 몫이었다.
각자의 장단점이 있겠지만 칼은 이왕이면 압박하는 쪽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제 뜻은..."
짧은 망설임 끝에 쥬레인의 입이 열리려는 순간이었다.
"......?"
칼이 미간을 좁히며 방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몇 박자 늦게 카블라드와 살라딘도 흠칫 놀라며 문으로 시선을 놀렸다.
"......"
잠깐의 침묵.
철컥.
그리고 난데없이 열리는 문.
모습을 드러낸 이는 정체 모를 흑색의 안개를 몸에 두르고 있는 사내였다.
유유히 방 안으로 들어온 그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귀한 분들의 밀담을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 건국조의 검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