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98화 (98/132)

< 건국조의 검 (3) >

"...유리병이군요."

얼음이 녹고 모습을 드러낸 건 자그마한 유리병이었다.

병 안에는 두루마리 종이 하나만이 달랑 들어있었다.

칼은 왕비를 쳐다본 뒤 종이를 꺼내들어 펼쳤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종이에 써있는 문자는 다름 아닌 바로 한글이었으니까.

이미 천검성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었었기에 이번엔 침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설마, 이게 세 번째 차원의 조각에 대한 단서인가?

"어떠한 문자 같은 것으로 보이는데...?"

당연히 데반과 왕비가 지구의 언어를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다.

칼은 두 사람의 반응을 무시한 채,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을 읽었다.

내용은 편지의 형식이었다.

가장 아래쪽에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 친애하는 벗 라스칼리아에게, 김선우가.

"......"

김선우.

말할 것도 없이 지구의 한국식 이름이다.

천검성에서 읽었던 전언에서도 똑같이 한국인의 이름이 있었다.

'수라검제 김하연이라고 했었지.'

대체 이들의 정체가 뭐길래 단서마다 계속해서 등장한단 말인가?

라스칼리아라는 이름 또한 어딘가 익숙했다.

기억을 더듬던 칼은 창염환의 비급 설명에서 봤던 이름이라는 걸 곧 떠올릴 수 있었다.

라스칼리아 마르하겔.

바로 마르하겔의 건국조의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건, 오래 전 이 세계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체 모를 지구인이 마르하겔의 건국조에게 보내는 편지인 것이었다.

'이 얼음을 만든 것도 김선우라는 자가 한 건가?'

그렇다면 그 또한 7서클의 대마법사라는 뜻이다.

문득 차원의 조각을 만든 대마법사와 동일 인물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든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

칼은 첫 문장으로 되돌아가 편지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

우선 축하부터 전하지. 마침내 거인족을 모두 몰아내고 왕국을 세웠다는 소식은 전해들었다.

지금쯤이면 너도 룬 대륙의 상황을 전해들었을지 모르겠군. 부디 이 편지가 그 전에 도착해야 할 텐데 말이야.

황제가, 제국이 우리를 배신했다.

늘 우려했던 일이었지. 교단들 또한 모두 등을 돌렸고, 이제 사방에 적들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는 끝까지 항전할 생각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혹시 이곳으로 넘어올 생각이라면 관둬라. 네가 우리를 위해서 희생할 이유는 없다. 이제 한 국가의 왕이 됐으니 그에 따른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되지 않겠나.

아무튼 이 편지가 마지막 인사다. 언젠가 우리들의 고향에 데려가 주겠다고 했던 약속은 못 지키게 되어 유감이야.

작별이다, 라스칼리아. 그곳에서 나라를 잘 다스리며 성왕으로 칭송받길 기원하마.

추신 - 제작해달라고 했었던 검은 툼그바르 영감에게 맡겨두었다. 나중에 찾아가라. 창염환으로 겉면을 불태우면, 검의 본신이 드러날 거다.

*

"......"

칼은 편지의 내용을 몇 번이나 재차 반복해서 읽었다.

데반과 왕비가 그 모습을 묘한 눈빛으로 지켜봤다.

"5왕자, 혹시 무슨 내용인지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까?"

칼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독특하게 생긴 문자다 싶어 한번 살펴봤습니다."

동시에 머릿속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지구인, 제국, 배신, 항전...'

편지의 내용을 대충 정리해보자면 이러했다.

마르하겔의 건국조가 살았던 시대에 지구인들이 이 세계에 존재했었다는 것.

그들이 제국과 어떠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끝내 배신을 당했다는 것.

이전에 천검성에서 봤던, 김하연이라는 인물이 남긴 전언과도 어느 정도 연결이 되는 내용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동료들이 처절한 항전 끝에 모두 전사했으며, 이 세계에 복수를 바란다고 했었었으니까.

순서를 보면 이 편지가 천검성에서 봤던 전언보다 앞 시간대에 써진 내용인 듯했다.

'대체 먼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제야 단서 퍼즐들이 조금 맞춰지며 내용이 정리되는 느낌이었으나, 반대로 생각은 더욱 복잡해졌다.

어째서 이 세계에 다른 지구인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인지.

그들은 지구의 몸 그대로 이 세계에 떨어진 건지, 아니면 이쪽과 비슷하게 게임 캐릭터로서 환생한 것인지.

제국과는 어떤 관계로 얽혀있었으며, 배신을 당했다는 건 또 무슨 일인 것인지.

'마르하겔의 건국조는 이 지구인들과 친밀한 관계였던 모양인데...'

친애하는 벗이라고 쓰인 것도 그렇고, 지구의 존재에 대해 아는 듯한 뉘앙스도 그렇고.

내용을 보면 한눈에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이 편지에 쓰인 언어 또한 그러했다.

건국조가 한국어를 이해할 수 있으니 대륙공용어가 아닌 한국어로 쓴 거겠지.

지구의 언어까지 가르쳐줬을 정도면 보통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무튼 여전히 알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재차 편지의 내용을 훑어보던 칼은 문득 깨달았다.

'그나저나... 메시지가 안 뜨잖아?'

원래 단서를 찾으면 충분한 단서를 획득했다는 메시지가 떠오르고, 다음 차원의 조각에 대한 단서가 주어졌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아무런 알림도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설마 이게 단서가 아니었다고?'

아니면 아직 충분한 양의 정보를 전부 획득하지 못했다거나.

칼은 미간을 좁히고 다시 편지의 내용을 살폈다.

그때 추신의 글귀가 왜인지 눈에 띄었다.

- 제작해달라고 했었던 검은 툼그바르 영감에게 맡겨두었다. 나중에 찾아가라. 창염환으로 겉면을 불태우면, 검의 본신이 드러날 거다.

검?

재차 생각에 빠져드려는데 앞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왕비가 이쪽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칼은 아차 싶어 그녀에게 종이를 건네주었다.

어차피 내용은 다 읽었으니 편지야 어쩌든 상관없었다.

"조금은 허무하군요."

편지를 가만히 훑어보던 왕비가 맥빠진 듯 중얼거렸다. 데반 역시 어딘가 허탈한 얼굴이었다.

녹지도 부서지지도 않는 얼음에 갇혀 왕실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던 물건의 정체가, 내용도 이해할 수 없는 쪽지였다니.

칼은 그런 두 사람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이 만빙이라는 것 말고도 또 왕실에 전해져 내려오는 건 없습니까? 예를 들면 검이라거나."

조금 뜬금없었으나, 흐름상 아주 이상한 질문도 아니었기에 왕비는 별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답했다.

"따로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던 건 이게 유일합니다. 나머지는 왕실 비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이 전부죠."

"......"

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왠지 모를 강한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차원의 조각의 마지막 단서 퍼즐은, 편지에 나온 바로 이 검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근데 잠깐만...'

얼음이 녹지 않고 편지가 미개봉 상태로 있었다는 건, 결국 건국조가 이 편지를 읽지 못했다는 게 아닌가?

그런 와중에 어떻게 또 후손들한테는 대대로 전해져서 지금까지 남아있었던 건지.

'툼그바르라는 사람은 또 누구야.'

아무튼 이래서야 편지에 나온 검의 행방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어쩐지 더 어려워진 것 같은 상황에 칼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하나 희소식이라면 지금까지 명확하지 않았던 방향성이 조금은 더 선명해졌다는 것이리라.

왕비는 여전히 편지를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다.

칼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재차 입을 열었다.

건국조의 편지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지만, 원래는 다른 대화를 기대하고 이 자리에 온 것이었으니까.

"왕비께선 이것 말고는 제게 더 묻고 싶은 말이 없으십니까?"

편지에서 시선을 뗀 왕비가 칼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의 여전히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창염환을 말하는 거로군요."

그녀가 편지를 병에 조심스레 도로 집어넣었다.

"5왕자. 잘 알고 있겠지만, 어느 누가 왕위를 잇든 내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

"그러니 건국조의 창염환에 대해서도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이 만빙의 존재를 그대에게 밝힌 것도 왕실의 일원으로서, 또한 보관자로서 최소한의 의무를 다한 것뿐입니다."

이어진 그녀의 말은 어딘가 씁쓸하게 들렸다.

"나는 딸아이와 나의 안위만 보존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딸아이라면 2왕녀를 말하는 것이었다.

칼은 잠시 그녀에 대한 정보를 상기했다.

'먼 지방에 위치한 가난한 백작가 출신.'

그녀와 선대 국왕의 인연이 대체 언제 어떤 자리에서 이루어졌던 건지 자세한 사정을 아는 귀족은 없다.

그 내막은 기껏해야 선대의 곁에 늘 붙어있던 가신들이나 알고 있을 터였다.

어쨌든 본래라면 절대 왕의 반려가 될 수 없었을 그녀가 왕비의 자리에 오른 건, 순전히 선대의 고집 때문이었다고 했었다.

왕족들과 귀족들, 모두의 반대를 눌러버리고 그녀를 기어코 3왕비의 자리에 앉혔던 것이다.

수호기사단의 존재부터가 방증이지만, 왕권이 특히 강력한 마르하겔의 정세상 가능할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3왕비는 왕실에서도 늘 여러 견제들을 받고 못마땅한 존재로 여겨졌었다.

다른 왕비들의 공백으로 왕위를 대행하고 있는 지금도 그저 허수아비와 다를 게 없었다.

당연히 이렇다 할 세력을 구성하고 있는 것도, 혹은 특정 세력을 지지할 힘이 있지도 않았다.

처지가 이러하니 다음 왕위를 어느 누가 계승하든 그녀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는 것. 눈에 띄지 않고 얌전히 중립만을 유지하는 것.

선대까지 없는 상황에 그것이 그녀가 왕실에 무사히 남아있을 수 있는 방법이었으니.

지금 그녀가 하는 말에 거짓이 섞여있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가장 적합한 인물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길 바랄 뿐입니다. 마르하겔의 미래를 위해서."

"......"

"뿌리만 튼튼한다면, 부족한 경험과 안목은 주변의 조력자들이 얼마든지 채워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시선은 칼에게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있었다.

부족한 경험과 안목.

아직 나이가 어린 쥬레인을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닐 터였다.

애초에 3왕비가 2, 3, 4왕자나 1왕녀를 좋아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기는 했다.

그들은 전부 3왕비에 대한 견제가 특히 심했다던 2왕비의 자식들이었으니까.

"그렇습니까."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3왕비의 뜻은 잘 알았다. 그녀는 굳이 걸림돌이 될 인물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게 대화를 마친 뒤 데반과 함께 왕비전에서 나오며, 칼은 생각에 잠겼다.

'검, 검이라...'

정체 모를 지구인들과 얽힌 건국조의 검.

당연히 행방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그 검이 제대로 건국조에게 전해진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애당초 너무 먼 과거의 일이었으니까.

"......"

그런데 어째서일까?

무언가 자꾸 묘하게 떠오를 듯 말 듯한 이상한 감각이 드는 건.

"바로 궁전으로 돌아가실 겁니까?"

데반의 물음에 상념에서 깨어난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이 제대로 전해졌던 거라면 어쩌면 왕실 비고에 있을 수도 있었다.

이제부터는 검에 대한 단서를 찾는 것까지 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우선은 왕실의 비고부터 한 번 다시 들려봐야겠군.'

그렇게 영문을 알 수 없는 거슬림을 뒤로한 채, 칼은 궁전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큭!"

고통에 찬 신음성이 방에 울렸다.

그에 치료를 진행하던 궁전 의사들이 움찔 놀라며 눈치를 봤다.

이윽고 팔에 감긴 붕대까지 전부 교체한 의사들은, 호위의 나가라는 턱짓을 보고 나서야 인사를 하고서 황급히 도망가듯 방을 빠져나갔다.

"끄으윽..."

치료가 끝났음에도 3왕자 카이번은 여전히 고통스러운 얼굴이었다.

붕대가 감긴 팔은 오한이라도 난 듯 부들부들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곁에 선 여인이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후우!"

간신히 진정을 한 카이번은 반쯤 탈진해서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살의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쥬레인..."

5왕자와의 대련에서 입은 부상은 카이번에게 큰 후유증을 안겨주었다.

내상뿐 이나라 화상을 입은 오른팔은 사제들의 신성력에도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끝없이 격통을 일으키고 있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상처를 입은 건 자존심이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처참히 패배했으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5왕자에게 말이다.

까드득!

다시금 떠오르는 기억.

카이번의 이가 부서질 듯 갈렸다.

완전히 놈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났다는 사실이 마음을 열화처럼 들끓게 했다.

연회를 기점으로 왕성의 분위기 또한 점점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늘 자부했던 카이번이었지만, 지금은 어떤 방식으로든 분노를 표출하지 않고서야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제가 찾아올 타이밍을 잘못 잡았나 봅니다."

그때 난데없이 방 안에 울리는 목소리.

여인이 흠칫 놀라며 검자루에 손을 올리고서 몸을 돌렸다.

어느새 창가 쪽에 시커먼 안개와 함께 사내와 노인이 서있었다.

아란헬의 조력자들.

카이번 또한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리곤 분노를 가라앉히듯 숨을 한 번 크게 내뱉고서 입을 열었다.

"또 무슨 일이오."

"그냥저냥 나눌 이야기가 있겠다 싶어 찾아왔습니다."

"...여유들이 넘치시는군. 저번에 전해왔던 정보 말고 뭐라도 더 알아내긴 한 거요?"

사내, 헤릴드가 싱긋 웃었다.

"2왕자에 관한 것보다도, 요즘 왕성의 상황을 보니 훨씬 더 급한 일이 생기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카이번의 인상이 재차 일그러졌다.

5왕자와 창염환.

이곳 3왕자전 최심부까지도 밥 먹듯 드나들 수 있는 이들이, 요 사이에 왕성에 일어난 일들을 모를 리가 없었다.

테이블로 가까이 다가간 헤릴드가 위의 바구니에 놓인 사과를 하나 집어들고 씹으며 말을 이었다.

"건국조의 심공이니 뭐니, 마르하겔의 왕가에도 여러모로 재밌는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

"창염환이라고 했었던가? 최근에 5왕자가 그것을 익히면서 무척이나 곤욕을 치르셨다고, 하핫... 주홍빛의 검기라는 게 어떻게 생겨먹은 건지 좀 궁금하긴 하더군요. 저희도 연회에 참여할 수 있었다면 좋은 구경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신경 끄고 맡겼던 일이나 제대로 하시오."

카이번의 퉁명스러운 말에 헤릴드가 능청스레 웃음을 지었다.

"왜 그리 냉정하게 벽을 치십니까. 전하와 저희는 이미 동반자와 같은 사이입니다."

"......"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전하께서 곤란하시면 저희의 처지 또한 곤란해진다고. 그저 말만 하면 될 것을 혼자 이리 끙끙 앓고 계시는 이유를 알 수가 없군요."

헤릴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5왕자 쥬레인 마르하겔, 저희가 죽여드리렵니까?"

< 건국조의 검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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