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97화 (97/132)

< 건국조의 검 (2) >

데반을 만나는 건 칼이 폴리모프를 통해 대신하기로 했다.

진짜 쥬레인이 데반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되도록이면 피하는 것이 좋았으니까.

더군다나 그가 무슨 연유로 궁전에 찾아왔는지 예측이 되는 지금은 더더욱.

'창염환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나누고 싶어 찾아왔겠지.'

연회 날 이후, 수호기사들을 광명전에 남겨두고 홀로 떠난 데반은 아직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였다.

호위를 비롯한 이런저런 잡다한 문제들은, 현재와 같이 부단장 카블라드가 대신 쥬레인에게 보고하고 허락을 구하며 처리하고 있었다.

벌인 일이 있으니 그 역시 며칠간 여러모로 처리할 일들이 많았을 테니까.

제대로 다시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

칼은 카블라드와 함께 객전으로 향했다.

쥬레인으로 교체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데반은 객전의 응접실에서 기다리게 둔 채였다.

"오셨습니까."

응접실에 들어서자 데반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네왔다.

누군가 본다면 두 눈을 의심할 정도로 그의 태도는 깍듯하기 그지없었다.

수호기사장이자 성위급의 초인인 그는 국왕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특별히 격식을 차릴 필요가 없는 인물이었으니까.

솔직히 칼도 의외라고 여기고는 있었다.

그래도 시간이 좀 걸릴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데반은 창염환을 선보였던 순간 그 자리에서 즉시 5왕자의 편에 서겠다는 결정을 마쳤으니까.

그가 얄량한 권욕보다도 왕국의 공익과 책임감으로 움직이는 인물이라는 걸 확실히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제 건국조의 심공을 이은 유일무이한 이가 된 5왕자는 마르하겔의 광명을 위하여, 더욱 찬란한 미래를 위하여 허무하게 죽어선 안 될 인물이었으니.

'한데 정작 같은 핏줄이라는 왕가 쪽에서는 그 지랄을 해댔지.'

연회장에서 목에 핏발을 세우고 어떻게든 5왕자를 깎아내리려 했던 원로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쳤다.

권력에 미친 왕실의 노괴들.

그들에게 있어 5왕자는 건국조의 유산을 이은 자랑스런 왕가의 일원이 아닌, 그저 자신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적이었다.

어떻게 5왕자를 모함하고 깎아내릴까, 아마 지금도 한창 머리를 싸맨 채 궁리하고들 있지 않을까.

건국조가 이 한심한 후손들의 모습을 봤다면 분명 뒷목을 부여잡았겠지.

카블라드는 데반에게 목례를 한 뒤 도로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칼이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여러모로 바쁘실 텐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잠시 칼을 빤히 바라보던 데반이 재차 입을 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 이것저것 전하와 의논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왕실과 귀족들 쪽의 반응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칼은 그게 데반이 찾아온 진짜 목적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상대로 데반은 바로 다음 말을 뱉었다.

"또 전하께서도 제게 들려주셔야 할 이야기가 있으시겠지요."

"창염환에 대한 거라면..."

데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건국 연회 날의 검투 대련."

"......?"

"전하께서 3왕자와의 대련에 앞서 백작가의 기사를 제압할 때 사용하신 힘은 분명 오러가 아니었습니다."

칼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고 보니 그걸 잊고 있었군.

데반에게는 창염환보다도 그것이 더한 의문일 터였다.

오러와 마력은 한 몸에서 공존할 수 없는 힘.

하지만 5왕자가 연회장에서 내보였던 힘은 분명 마력이었다.

그런데 건국조의 심공인 창염환까지 동시에 익히고 있다.

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데반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었다.

잠시 말없이 데반과 눈을 마주치던 칼은 이내 입을 열었다.

"저도 뒤늦게야 알았는데, 제 체질이 그렇더군요."

"......"

"그리고 창염환은 오러만으로는 익힐 수 없는 심공입니다. 아마 건국조께서도 저와 같은 체질을 지니셨었을 겁니다."

맥락 없이 이어지는 말.

하지만 데반은 그 의미를 곧장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걸로 모든 의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됐을 터였다.

5왕자가 어떻게 마력을 사용했는지, 또 어떻게 아무도 익히지 못한 본판의 창염환을 그가 익힐 수 있었는지.

지금의 말로 데반은 5왕자가 오러와 마력을 동시에 쌓을 수 있는 극히 희귀한 체질을 지녔으며, 본판의 창염환은 그런 체질을 지닌 자만이 익힐 수 있는 심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실상은 심공이 아니라 그저 서클링일 뿐이지만.

굳이 완전한 진실까지 알려줄 이유는 없었기에 적당한 대답을 고안한 것이었다.

애초에 창염환에 대한 부분은 아예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창염환은 어디까지나 왕실의 소유, 수호기사인 데반이 그에 대해 의문을 가질 자격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그냥 입을 닫고 있는 것보다 나쁠 건 없겠지.'

이로써 데반은 모든 의문을 해결하고 5왕자에 대한 더욱 확실한 신뢰를 얻었을 것이었다.

"충분한 대답이 되었습니까?"

그 생각대로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데반의 눈빛은 방금 전과는 언뜻 달라진 채였다.

희미하게 엿보이던 일말의 의심은 사라지고 온전한 신뢰가 느껴지고 있었다.

성위의 경지에 오르며 칼이 얻은 건 단순히 강함이 전부가 아니었다.

레벨이 오를수록, 경지가 오를수록 그에 따른 안목과 통찰력 또한 범인을 초월하고 있음이 확실히 체감되었다.

데반 정도 되는 강자의 눈빛에서 드러나는 감정을 읽는 것도 별 어려움 없이 가능했다.

"창염환에 대한 이야기는 잊겠습니다."

다른 곳에 발설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어쩌든 별 상관은 없었기에 칼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칼 또한 데반에게 확실히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경께선 제가 왕위를 잇기를 원하십니까?"

잠시 침묵하던 데반이 대답했다.

"수호기사단은 왕실을 수호하기 위해 존재할 뿐, 본래 왕위 계승 문제에 뜻을 내비추거나 간섭할 수 없습니다."

"......"

"하지만 그것과 5왕자 전하의 신변을 보호하는 것은 별개지요. 또한, 그것이 다른 이들의 눈에 어떻게 비쳐질지까지는 고려할 부분이 아닙니다."

칼은 피식 웃었다.

결국은 지지한다는 말을 빙빙 돌린 것에 불과했다.

이런 부분에서는 또 능구렁이 같은 모습을 보이는 데반이었다.

애초에 선대 때부터 왕성에서 몇십 년은 지내온 인물이 정치질에 익숙치 않을 리가 없었다.

그가 아무리 권력의 흐름과 무관한 수호기사장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 뒤로는 앞서 말했던 대로 왕성의 정세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얘기가 끝날 즈음이었다.

"그리고 왕비께서 왕자 전하와의 자리를 원하십니다."

"...예?"

"길게 이어질 이야기는 아닐 터이니, 원하시면 지금 바로 왕비전으로 이동하셔도 됩니다."

뜬금없는 말에 칼은 두 눈을 깜박였다.

* * *

그 자리로 곧장 칼은 데반과 함께 3왕비의 궁전으로 이동했다.

데반은 왕비가 만남을 원하는 이유를 아는 듯했으나 가보면 안다고 일축하고는 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왕비전에 도착하고 하인들의 안내를 받아 곧장 왕비가 있는 방으로 이동했다.

객전에서 만나는 것도 아닌 방까지 부르는 거라면 꽤나 중요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었다.

"어서오십시오, 5왕자."

3왕비가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반겼다.

테이블에는 미리 준비되어 있던 찻잔들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마찬가지로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은 칼은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봤다.

3왕비 셀리아드.

2왕녀의 모이자, 현재 비어있는 왕좌의 섭정을 맡고 있는 인물.

그녀는 처음 봤을 때부터 도통 속을 알 수가 없는 인물이었다.

왕가의 의식 때도, 또 연회장에서 봤을 때도 도통 감정을 얼굴에 내비친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마주보고 앉아있는 지금도.

애초에 그녀가 현재 위치해있는 포지션이 굉장히 애매한 것도 한목했다.

다른 왕비들의 공백에 어쩔 수 없이 대리로 왕좌를 맡고는 있으나, 왕실에서의 존재감이 크지도 않다.

무언가 눈에 띄는 행동을 보인 게 없으니 그 뜻이나 의도를 읽기가 힘든 건 당연했다.

그런 지금까지의 태도와 정반대로, 그녀가 이렇게 따로 만남을 요청한 것은 굉장히 의외의 상황이었다.

'별 이상한 수작을 부리려는 거야 아니겠지만...'

칼은 힐끔 곁에 선 데반을 바라봤다.

그는 왕비가 만남을 원한 목적을 알고 있는 기색이었다.

알면서도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건 적어도 해가 될 무언가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현재 방 안에는 칼과 데반, 그리고 3왕비 세 사람이 전부였다.

바깥으로도 다른 사람들의 기척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방 안에 감돌던 침묵을 3왕비가 입을 열고서 깼다.

"어째서 제가 왕자를 불렀는지 궁금하겠지요."

서론 하나 없이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는 말이었다.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이 가는 부분이 있다면 창염환과 관련된 일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타이밍을 보면 그랬으니까.

그리고 하나 더.

"그 상자와 관련된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만."

왕비의 앞쪽에 놓여있는 작은 상자.

칼은 상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물었다.

저게 단순한 상자가 아니라는 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바로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대체 안에 뭐가 든 건지 상자의 내부에서 어마무시하게 압축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으니까.

"맞습니다."

3왕비가 살짝 놀란 듯한 얼굴로 칼을 바라봤다.

"이건 마르하겔의 역대 국왕들에게 대대로 전해져오던 물건입니다."

"......?"

"그리고 선대께서 승하하기 전, 마지막으로 제게 맡기신 유산이기도 합니다."

설명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상자는 마르하겔의 국왕들이 비밀리에 간수해온 물건인데, 그 비밀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국왕과 더불어 왕비들고 수호기사장뿐이라고 했다.

선대가 승하하고 다른 왕비들이 모두 없는 지금은 그녀가 상자를 맡고 있는 것이었고.

칼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해하기에 어려움은 없는 내용이었기에 전부 알아들었다.

문제는 대체 왜 그런 이야기를 뜬금없이 이쪽을 불러 전부 털어놓고 있냐는 것이었다.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가 상자에 손을 올리고서 말을 이었다.

"왜 제가 갑자기 왕자를 불러 이런 비밀을 말하고 있는지 궁금하겠지요."

"......"

"그건 이 상자와 더불어 전해져 내려오는 문구가 하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엇이냐 묻기도 전에, 옆쪽에 서있던 데반이 입을 열었다.

"오로지 주홍의 불꽃만이 만빙을 녹일 수 있을 것이다."

만빙?

이어 왕비가 상자를 열었다.

칼은 눈을 가늘게 뜨고 상자 안에 들어있던 내용물을 바라봤다.

주먹 정도 크기의 얼음.

굉장히 작은 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얼음에서 뿜어져나오는 냉기가 순식간에 방 전체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순백의 얼음 안쪽으론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림자처럼 희미하게 보였다.

칼이 놀란 이유는 단순히 상자 안에 든 것이 얼음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얼음에 대한 정보가 선명히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하겔의 만빙 - 마법 결정>

정체 모를 대마법사가 빙결계의 비전 마법을 통해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낸 얼음입니다.

안쪽에 다른 내용물이 존재합니다.

7서클의 빙결계 비전 마법.

이 얼음이 바로 그런 어마무시한 마법을 통해 만들어진 얼음이란다.

대체 이런 것이 왜 마르하겔의 왕실에 있는 걸까.

"지금껏 많은 국왕들이 이 얼음을 녹이기 위해 수많은 시도들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보시다시피 성공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녀가 천천히 칼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5왕자, 연회장에서 보였던 창염환으로 이 얼음을 녹여줄 수 있겠습니까?"

상자를 받아든 칼은 물끄러미 안의 얼음을 바라봤다.

그러다 다시 왕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이 자리에서요?"

"물론입니다."

"아니, 그보다 대대로 전해져온 물건이라면서... 녹이고 말고를 멋대로 결정해도 되긴 하는 겁니까?"

"녹여서 아니 될 물건이었다면 선조께서 오로지 창염환만이 얼음을 녹일 수 있다는 문구를 남기지도 않았겠지요."

그게 또 그렇게 되나?

칼은 잠시 상자와 두 사람을 번갈아봤다.

왕비는 여전히 차분한 눈빛으로 칼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데반 역시 안의 내용물이 궁금하긴 했는지 묘하게 기대하는 눈빛이었다.

'난데없이 이게 뭔 상황인지.'

물론 칼 역시 얼음 안에 뭐가 들었는지 궁금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머지 않아 얼음에 손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화르륵!!

이어 창염환을 피어올리자 만빙이 서서히 녹기 시작했다.

특히 데반이 놀랍다는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선대 때부터 한참 전에 만빙의 존재를 알고 있던 그는 이 얼음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물질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전력을 다한 검기로 내리쳐도 자그마한 흠집조차 낼 수 없었던 얼음이니까.

이윽고 얼음이 전부 다 녹은 뒤에야 안쪽의 내용물이 드러났다.

"......!!"

세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을 바라봤다.

< 건국조의 검 (2)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