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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96화 (96/132)

< 건국조의 검 (1) >

중앙전의 왕가 집회실.

자리에 착석하고 있는 이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심란함이 떠올라있었다.

각자 맡은 바 지위도 파벌도 다른, 거의 모든 왕가의 일원들이 정기 집회도 아닌 날 한자리에 모였다.

그만큼이나 모두가 며칠 전 건국 연회에서 벌어졌던 일에 거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본래 이틀은 더 이어져야 했던 연회는 당일로 즉시 마무리되었다. 칼이 선보인 창염환의 여파였다.

당장 그까짓 연회 따위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날의 밤을 기점으로 왕실의 수호기사들은 완전히 5왕자의 편으로 돌아섰다.

지금도 광명전의 곳곳에 경계를 서서 5왕자의 신변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대로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는 없소!"

원로 하나가 나서서 소리쳤다.

자리에 앉은 이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어서야 안된다는 걸 지금 누가 모르겠는가?

문제는 수호기사장 데반이 대놓고 칼의 지지를 표하고 나선 마당에, 그에 대해 별달리 대처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었다.

"수호기사장의 의지가 무척이나 확고하오. 평범한 방법으로는 어떻게 찔러볼 구석이 없소."

이미 며칠 동안 5왕자를 만나기 위해 광명전으로 몇 번을 찾아갔었다.

하지만 얼굴조차 내비치 않고 돌아오는 거절에 수차례 헛물만 들이켜야 했다.

수호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마당에 어떻게 광명전에 억지로 들어갈 방법도 없었다. 만남 자체를 완전히 차단당한 것이었다.

수호기사들은 오로지 데반의 명만을 듣기에 그들을 광명전에서 빼내는 것 역시 불가능했다.

데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설득을 해보려 해도 들은 척조차 하지를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억지 명분을 앞세워 그의 행동을 강제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성위의 경지에 오른 초인을 그 누가 감히 제어하려 들 수 있겠는가?

"그리고 지금 문제는 단순히 수호기사들뿐만이 아니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귀족들의 동요였다.

5왕자가 선보인 본판의 창염환. 3왕자를 쓰러뜨렸던 일검.

그리고 지금껏 누구도 지지해오지 않았던, 왕국 최강의 기사인 수호기사장의 변심.

연회에 참석하여 그것들을 두 눈으로 직접 목도한 귀족들은 말 그대로 거대한 충격에 빠졌다.

왕실이 이렇게 뒤집어진 만큼, 현재 귀족들 역시 각자 머리를 싸매고 선택의 기로에 놓이거나 주변의 눈치를 보는 것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두들, 이 자리에서 똑똑히 확인하도록.]

[다음 왕좌를 계승해야만 하는 이가 과연 누구인지를.]

며칠 전까진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지만, 이대로면 정말 5왕자가 다음 왕위를 잇게 되는 일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만큼이나 본판의 창염환이 가져다주는 파급력은 어마무시한 것이었다. 마르하겔 왕실의 상징과도 같았으니까.

"이래서 진작에 싹을 잘라버렸어야 했거늘..."

누군가의 작은 중얼거림.

못 들은 척 무시하면서도 주변에 앉은 모두가 속으로 격하게 동의했다.

아무리 허울뿐인 왕자라 하더라도 의식을 끝마치기 전에 어떻게든 제거했었다면, 이런 상정조차 하지 않았던 어처구니없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일은 벌어졌고, 후회는 부질없는 것.

"이렇게 된 이상, 다음 궁정 회의에서 어떻게든 강하게 밀어붙이는 방법밖에는 없소."

왕성의 모든 행사를 주관하고 결정하는 회의.

궁정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은 아무리 수호기사장이라도 정면에서 대립할 수 없다.

5왕자에 대한 수호기사단의 지지력을 어떻게든 떨어뜨릴 남은 방법은 이제는 그것이 거의 유일하다시피 했다.

단지 문제는, 각 세력들이 모두 참가하는 회의인 만큼 뜻이 합치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는 점.

그렇기에 당장 이 자리에서 사전적인 합의가 필요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끼리 다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 않소?"

"맞습니다. 우선을 힘을 합쳐 5왕자에 대한 문제부터 어떻게든 해결해야 합니다."

"5왕자가 익힌 것이 진정한 창염환이 아니라는 방향으로 밀고 나가는 게 어떻겠소이까? 어차피 실체야 아무도 모르는 수백 년 전의 심공일 뿐이니, 여론의 중심만 잘 잡으면 되지 않겠소?"

"그거 괜찮군. 애초에 5왕자의 처참한 무재야 모두가 알 정도로 정평이 나있었으니, 그런 둔재가 창염환을 익힌 게 이상하다는 의구심도 계속해서 퍼뜨리면..."

한쪽 자리에서, 그 열띤 토의를 한심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노인이 있었다.

바로 왕궁 비고의 수호자인 크라센이었다.

'...정말 가관이군.'

문득 머릿속에 5왕자의 말이 떠올랐다.

왕성이 아주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그 말이.

지금의 꼴을 보니 조금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건국조의 심공이 다시금 세상이 모습을 드러낸 마당에, 왕가의 일원이라는 자들이 그에 대해선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단지 창염환을 익힌 5왕자를 어떻게 깎아내리고 짓밟을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역겨운 담화들이나 나누고 있을 뿐.

마치 돼지들이 꿀꿀거리는 모습이 겹쳐보이는 것만 같다.

자신들이 쌓아온 권력이 모래성처럼 무너질까 꼬리에 불이 붙어 펄쩍거리는 꼴들이 그리 우습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저야말로 숙조부께 실망입니다.]

문득 5왕자가, 어린 종손이 했던 말이 크라센의 머릿속에 스쳤다.

이어 부끄러움이 차올랐다.

분명 쥬레인의 눈으로는 자신 또한 이들과 별다를 게 없이 보였을 것이 분명했기에.

[숙조부께선 지금껏 대체 뭘 한 겁니까?]

[길게 남지도 않았을 목숨줄이나 간수하자고, 지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이곳에서 계속 비고나 지키고 있었던 겁니까?]

[왕성이 아주 개판으로 돌아가고 있단 말입니다. 한데 왕가의 일원이라는 자가 그걸 바로잡기 위해 나서지 못할 망정...]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말마따나 고작 목숨이나 간수하자고 왕성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외면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빈 왕좌를 차지하기 위한 암투는 어떻게든 일어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건 고작 자신 하나가 나선다고 바꿀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수면 밑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막자고 왕실의 질서를 해친다면, 그것이야말로 크나큰 해악이 되는 일이라 여겼었으니까.

하지만 5왕자가 창염환을 선보인 뒤 흘러가는 상황을 보니 그런 믿음이 깨질 것만 같았다.

새삼 환멸감을 느낀 크라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 대화가 끊기고 시선들이 크라센에게로 집중되었다.

"난 빠질 테니 알아서들 하게."

이어진 말에 모두가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 번 말해야 알아듣겠나? 5왕자고 창염환이고, 나는 추호도 간섭할 생각 없으니 알아서들 하란 소리네."

그 말에 원로장 투바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일이 어떻게 되든 무사할 거란 자신감이오?"

"좋을 대로 생각하게."

"크라센 공, 그대가 아무리 지금껏 중립을 지켰다고 한들 지금이 그럴 때인 것 같소?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일이 전부 끝난 후에 공도 감당해야 할 일들이 많을 거요."

그 말에도 크라센은 코웃음을 치며 집회실을 나섰다.

뒤쪽에서 원성 어린 말들이 들려왔지만 싸그리 무시한 채.

'고작해야 이 정도뿐이군.'

그를 따르는 몇몇 가신들이 5왕자의 앞길을 저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

크라센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뿐이었다.

아무리 오랫동안 수호자의 직위를 맡아온 그라도 왕실 전체가 뭉치려는 상황에, 홀로 큰 목소리를 내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남은 일은 연속해서 의외의 면모들을 보여주고 있는 5왕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상황의 흐름을 잘 이끌어가냐에 달렸다.

크라센은 묘한 기대감을 느꼈다.

이미 예고했던 대로 왕성을 뒤집어놓겠단 말도 완벽히 지켜낸 그였으니까.

크라센은 복도를 가로질러 집회실 건물을 빠져나왔다.

부디 어린 종손이 끝까지 난관을 헤쳐나가 목표했던 바를 이룰 수 있길 기원하며.

* * *

5왕자가 거주하는 광명전.

"들어가게."

방문을 지키고 서있는 자는 수호기사단의 부단장인 카블라드였다.

칼은 시큰둥하게 그를 한 번 쳐다보고는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껏 관심도 없던 놈들이 유난은 엄청 떠네.'

연회에서의 일이 있고 난 이후로, 며칠 전부터 광명전에 들어선 수호기사들은 거의 총력을 다해 쥬레인을 호위하고 있었다.

궁전 외곽은 물론이고 지금과 같이 쥬레인이 거주하는 건물 곳곳에도 배치된 상태.

그중 쥬레인의 방 바로 앞은 부단장이 직접 지키고 서있었다.

수신호위까지 세피엘을 대신해서 맡겠다는 건, 쥬레인이 극구 거절한 탓에 이쯤에서 끝난 것이었다.

'사실 호위 따윈 필요도 없지만.'

수호기사들을 세력으로 끌어들인 이상, 그들의 간섭을 아예 배제할 수도 없었기에 이 정도는 감수해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딱히 행동에 제약이 생긴 건 아니었다.

지금껏 유일하게 쥬레인의 곁에 남아있던 충신인 세피엘과 세이온에게까지 수호기사들이 간섭할 자격은 없었으니까.

단지 궁전 여기저기에 널려있으니 신경에 좀 거슬릴 뿐이지.

아무튼 전부 수호기사장 데반이 그만큼 5왕자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였다.

데반 본인은 직위가 직위인 만큼 여러모로 바쁜 일들이 있기에 직접 쥬레인의 호위에 나서진 않았다.

물론 이 정도만 하더라도 충분하다 못해 과할 정도의 전력이었지만.

철컥.

방 안으로 들어서자 쥬레인의 모습이 보였다.

곁에 서있던 세피엘이 언제나처럼 고개를 꾸벅 숙여왔다.

"왔는가."

"예, 전하."

칼은 평소보다 조금 더 공손한 투로 대꾸했다.

이젠 밖에서 듣고 있는 귀가 있기에 말을 더 조심해야 했다.

잠시 이런저런 근황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며칠 동안 광명전에 찾아온 건 왕가 쪽의 인물들만이 아니었다.

쥬레인의 외조부인 듀러플 공작 역시 찾아왔었으나, 다른 이들처럼 마찬가지로 얼굴조차 내비치지 않고 돌려보냈다.

권력에 미쳐 제 혈육조차 냉정하게 내버린 배신자를 상대해줄 이유 따윈 없었으니까.

"아직까지는 다들 잠잠한 것 같더군."

쥬레인의 말에 칼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에게 창염환을 선보인지도 며칠이 흘렀다.

그리고 아직까지 특별히 눈에 띄는 반응을 보이고 있는 세력은 없었다.

현재 왕성에 일고 있는 모든 소란의 중점은 5왕자와 본판의 창염환이었다.

아예 상상조차 못했던 게 튀어나왔으니, 다들 그에 대해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느라 바쁠 터였다.

"가장 먼저 나선다면 아무래도 3왕자 쪽이 아니겠습니까?"

세피엘이 조심스레 의견을 말했다.

연회 때 칼에게 당한 굴욕이 있으니, 다시 한 번 그날의 대련을 문제 삼아 걸고 넘어질 수 있었다.

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그러지는 않을 겁니다."

모두가 지켜봤던 공정한 대련이다.

어쨌든 부상을 당한 쪽은 3왕자이니 꼬투리를 잡으려면 어떻게 잡을 수야 있겠지만, 결국 별 타격도 입히지 못할 사안으로 제 체면만 계속 깎아먹으며 물고 늘어질 리는 없었다.

3왕자보다도 신경이 쓰이는 쪽은 2왕자 카몬이었다.

다른 이들보다 2왕자는 특히 더 창염환의 등장에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었다.

본래의 흐름대로라면 무난히 왕위를 이었을 인물은 바로 그였으니까.

어찌 됐든, 이제부턴 왕성에서도 마음을 놓고 있을 수많은 없었다.

2왕자나 3왕자나 뭐라도 숨겨놓은 힘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바로 당장은 아니라도 상황이 극단적으로 흘러가면 정말 왕성 내에서도 암습을 당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일에 대비하여 현재 수호기사들이 철저하게 광명전을 지키고 있는 것이었지만.

심지어 수호기사단의 부단장인 카블라드까지 나서서 직접 쥬레인을 호위하고 있는 상황이다.

'암습은 감히 엄두도 못 내기야 하겠지만...'

언제나 만약이라는 게 존재하는 법이니까.

막말로, 수호기사들의 호위조차 소용없는 강자가 난데없이 튀어나와 습격을 해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물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이야기였다.

부단장 카블라드조차 제압할 수 있으려면 성위급의 초인은 되야 할 텐데, 아무리 그래도 그런 터무니없는 전력을 2왕자나 3왕자가 숨기고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

문득 떠오른 생각에 칼은 주변에 은밀히 방음막을 두르고 입을 열었다.

이건 바깥에 있는 카블라드가 들어선 안 되는 이야기였다.

"방음막을 쳤으니 편히 얘기해도 됩니다. 일이 전부 끝난 후엔 어쩔 생각입니까?"

1왕자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끝내 밝혀낸 이후를 말하는 것이었다.

이미 쥬레인은 건국조의 유산을 이어받은 최초의 마르하겔이 되어버렸으니까.

물론 일을 벌이기 전부터 쥬레인도 충분히 각오한 부분이었지만, 칼은 자신이 떠나고 난 뒤 홀로 남은 그가 과연 뒷일을 어찌 감당할지가 궁금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형님의 죽음에 대한 진실만 밝혀낸다면 왕좌엔 아무런 관심도 없다고."

쥬레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모든 일이 끝난다면... 그땐 그냥 아무도 모르게 왕성을 나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신분을 버리고 사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당장 생각해본 건 그 정도입니다."

"......"

"아, 물론 공께서 도움을 주셔야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말입니다."

칼은 쥬레인을 빤히 쳐다보다가 픽 웃었다.

지금껏 곁에서 지켜봤으니 진작 알고야 있었지만, 이 왕자는 정말이지 권력에 대한 야망이 조금도 없는 인물이었다.

"어째 일은 제가 벌였으니 마무리까지 확실히 하라는 것처럼 들립니다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

"만약 전하가 왕성을 떠나면 세피엘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러자 세피엘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어디를 가시든 항상 곁에서 따를 것입니다."

언제 봐도 그렇지만 쥬레인에 대한 그녀의 충성심은 단순한 군신 관계를 넘는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크게 관심은 없었기에 굳이 과거사에 대해 물은 적은 없었지만.

"뭐, 당장 떠들기에 이른 얘기이긴 하군요."

본격적인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격류가 언제부터 시작되어, 또 언제야 끝날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생각보다도 훨씬 빠른 시간 내에 모든 일이 끝날 수도 있었고.

뭐가 됐든, 그 끝에선 쥬레인과 자신 모두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길 바라는 칼이었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칼은 마력을 거두고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문을 두드린 건 부단장 카블라드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가 뒤쪽에 있는 쥬레인을 바라보며 공손하게 입을 열었다.

"전하, 데반 단장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건국조의 검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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