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94화 (94/132)

< 창염환 (9) >

홀의 소란스러움이 다시금 가라앉았다.

1왕녀 클로아 마르하겔.

그녀의 등장에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입구 쪽으로 집중되었다.

뿐만 아니라 테이블에 앉아있던 귀족들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선 상태였다. 그녀의 파벌에 속하지 않은 이들을 포함해서.

파별과 별개로 왕족에게 보여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차리는 것이었다.

"허."

명백히 차이나는 귀족들의 태도를 보며 칼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등장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난 귀족이라곤 고작 몇몇이 전부였었으니까.

1왕녀와 달리 쥬레인에겐 왕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차리는 이가 없었던 것이다.

저벅.

금테가 둘린 화려한 녹색 드레스.

길게 펼쳐진 카펫을 따라 클로아가 기품 있는 걸음걸이로 연회장에 들어섰다.

그런 그녀의 뒤를 따르는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굳이 정보를 확인할 필요도 없이 칼은 그들의 정체를 짐작했다.

전부 마법사로 구성됐고, 1왕녀를 따르는 이들이라면 뻔했다.

'왕실 소속의 궁정 마법사들.'

[Lv.58]

[마르하겔의 궁정 마법사장]

특히 그들의 선두에 위치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은 무려 궁정 마법사장이 되는 거물이다.

또한 1왕녀의 마법 스승이라고도 했었던가.

칼은 그동안 별달리 신경 쓰지 않고 있었던 1왕녀 클로아에 대한 정보를 상기했다.

'궁정 마법사장을 포함해서, 왕실 소속 마법사들의 지지를 한몸에 받고 있다 했던가?'

[Lv.42]

[마르하겔의 1왕녀]

1왕녀는 다른 왕자들과 다르게 무인이 아니라 마법사였다.

또 마법에 상당한 자질을 지녔다고 했으니 궁정 마법사들의 지지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의 나이가 이십대 후반이라고 했었으니, 그 나이에 4서클 초입이면 천재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출중한 수준이긴 했다.

클로아가 마법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왕위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설령 그녀는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차지할 직위가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2, 3왕자가 서로 대립 관계인 것과 달리 어느 세력과도 특별히 척을 지고 있지 않았으니까.

다른 왕자들 중 누가 왕위를 잇든 그녀는 궁정 마법사로서 별 문제 없이 왕실의 일원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그렇게 위험 부담을 감수하고 있지 않은 만큼 1왕녀는 세 사람 중 가장 왕위 서열에서 밀려있기도 했다.

애초에 클로아를 지지하는 마법사 세력은 그녀를 계승자로서 지지하는 것과는 거리가 조금 멀었다.

왕위 전쟁이 끝난 뒤, 그녀가 무사히 왕실에 남아있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다른 세력들을 견제하는 것에 가까웠지.

무인이 아닌 마법사라는 점 또한 상당한 마이너스 요소였다.

마르하겔은 왕위는 건국조 때부터 대대로 뛰어난 무인들만이 이어왔으니까.

'요즘 행보를 보면 1왕녀도 왕좌를 반쯤 포기한 것 같다고 했었지.'

그녀는 왕위를 잇는 것보다도 왕실의 차기 마법사장으로 훨씬 기대되는 인물이었다.

문득 칼의 머릿속에 별 맥락도 없이 샤론이 떠올랐다.

'저번에 봤을 때가 아마 48레벨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쯤이면 5서클에 올랐으려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어렵겠지. 마지막으로 본 게 아직 반 년 정도밖에 안 됐으니 말이다.

아무튼 1왕녀 클로아는 크게 신경 쓸 이유가 없는 인물이었다.

해서 그만 관심을 끄려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클로아가 이동을 멈춘 채 이쪽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걸음을 돌리더니 테이블을 향해 천천히 접근해왔다.

"먼저 와있었느냐, 쥬레인."

칼은 잠시 대꾸할 말을 찾다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누님도 오셨습니까."

클로아가 묘한 눈빛을 지었다.

"네가 나를 누님이라 부르는 걸 들은 것도 오랜만이구나. 선대께서 승하하신 뒤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도통 없기는 했었지."

"......"

"연회는 만족스레 즐기고 있었느냐?"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물음이었다.

혼자 홀 구석에 동떨어져 앉아있는 사람한테 지금 즐겁냐고 묻는 건가?

칼은 앞쪽에 먹다 만 음식이 담긴 접시를 팅 두드리며 답했다.

"보시다시피 즐겁게 먹고는 있습니다. 누가 요리했는진 몰라도 음식 맛이 아주 좋더군요."

태도가 무례하다 여겼는지 뒤쪽에 서있던 노인, 마법사장 살라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반대로 클로아는 별달리 언짢음을 표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요새 왕성을 여러모로 떠들석하게 만들었더구나."

"다 살자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형님들께서 쉬지 않고 절 쪼아대니 말입니다."

"말투도 어딘가 바뀐 듯하고. 전보다 당당해진 모습은 보기 좋다만, 거기서 더 나아가면 결국 부러질 것이다."

칼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클로아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빛엔 담긴 감정은 미약한 연민이었다.

칼은 그것을 전혀 긍정적인 의미로 생각하지 않았다.

용각산맥에서 만났던 수호기사도, 비고를 지키는 쥬레인의 숙조부도, 그리고 지금 눈앞의 1왕녀도.

그들이 쥬레인에게 내비친 동정과 연민의 눈빛은 전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들에 불과했으니까.

그저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를 불쌍히 내려다보는 듯한 그 시선.

"그러니 이쯤에서 멈추거라, 쥬레인."

"......"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널 걱정하여 하는 말이다. 무엇을 한들 바뀔 것은 없..."

"누님."

칼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끊었다.

"어서 연회를 즐기셔야지 않겠습니까. 저는 식사나 마저 하겠습니다."

그 말에 궁정 마법사들이 기가 막힌다는 듯 칼을 쳐다봤다.

클로아가 역시 칼을 응시하다 작게 한숨을 내쉬곤 몸을 돌렸다.

칼은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마지막으로 말했다.

"누님이야말로 앞으로의 처신을 잘 하셔야 할 겁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많은 것들이 바뀔 테니까.

그 뒷말까지는 굳이 잇지 않았다.

마법사장 살라딘이 고개를 돌리고 칼을 노려봤다.

"5왕자, 무례한 언행에 왕녀께서 얼마나 더 인내심을 베푸셔야..."

"살라딘 공."

클로아가 그런 그를 말리고는 마저 걸음을 옮겼다.

더 상대할 가치도 없겠다는 태도였다.

궁정 마법사들이 미친놈 보듯 칼을 한 번씩 쏘아보고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칼은 유유히 의자에 몸을 기댔다.

연회장 벽면의 거대한 창으로 아름다운 노을빛이 비추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서서히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다음으로 3왕자가 모습을 드러낸 건 완전히 날이 저물고 저녁이 된 때였다. 4왕자인 테인스와 함께.

"3왕자 전하, 그리고 4왕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 구석에 앉은 칼을 발견한 테인스는 대놓고 적의 가득한 시선을 보내왔다.

카이번의 시선 또한 차가웠으나, 클로아처럼 칼에게 말을 걸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단지, 시선을 돌리기 전 알 수 없는 기분 나쁜 미소를 내보였을 뿐.

의외로 별다른 충돌은 빚지 않고 자리로 이동해서 앉는 카이번이었다.

그와 함께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낸 귀족들 중에 눈에 띄는 자가 있었다.

칼은 이쪽을 힐끔 바라보고는 다시 냉정하게 시선을 돌려버리는 노인의 모습을 바라봤다.

듀러플 공작.

쥬레인의 외조부이자, 국왕파 귀족들의 이탈과 함께 곧바로 쥬레인을 내버려버린 인물.

세인피어 공작과 대대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그가 옮겨탄 줄은 다름 아닌 3왕자 카이번이었다.

한마디로 권력의 유지를 위해 손자를 버린 역겨운 자였다.

미리 연회장에 도착해있던 3왕자 파벌의 귀족들이 공손히 예의를 차리며 카이번과 듀러플 공작을 맞이했다.

칼은 그들에게 곧 관심을 꺼버렸다.

'역시 2왕자가 제일 늦나.'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마지막으로 2왕자가 등장했다.

"2왕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홀 전체에 순식간에 고요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1왕녀나 3왕자가 등장했을 때보다도 훨씬 경직된 분위기.

귀족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연회장 입구를 응시했다.

"......"

천장만 따분히 올려다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던 칼도 시선을 내렸다.

2왕자 카몬 마르하겔.

현재로선 다음 왕위에 가장 가까운 인물.

그가 뒤쪽으로 많은 이들을 대동한 채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왕가의 의식 때 처음 봤던 것처럼, 여전히 감정 하나 내비치지 않는 차가운 인상이었다.

[Lv.60]

[세인피어의 가주]

그리고 그 옆에 위치한 중년의 사내.

세인피어 공작 역시 2왕자 카몬과 함께 등장했다.

그가 은연 중에 풍기는 기세에 한순간 무거운 압력이 홀 전체에 깔린 듯했다.

연회장 홀을 한 차례 둘러본 카몬이 준비된 좌석으로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칼은 그렇다 쳐도, 3왕자 카이번이나 1왕녀 클로아에게조차 인사는 커녕 눈길도 주지 않고서.

일부러 무시한다기보다도 그저 지독한 무관심에 가깝게 느껴지는 태도였다.

2, 3, 4왕자, 그리고 1왕녀는 모두 2왕비의 슬하에서 난 이들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런 광경을 보고 있자면 저들이 정말 같은 배에서 난 형제들이 맞기는 한가 생각이 들었다.

칼은 홀의 한쪽 자리로 멀어져가는 카몬과 세인피어 공작의 모습을 응시했다.

왕자와 왕녀들은 다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남은 건...

"...왕비께서 입장하십니다!"

왕성의 밤이 완전히 깊은 뒤에야 무대의 마지막 주역들이 등장했다.

귀족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3왕비와 왕가의 요인들을 맞이했다.

그중엔 2왕녀와 익숙한 얼굴의 노인도 있었다. 왕실 비고의 수호자인 크라센이었다.

크라센 또한 칼을 발견하고는 잠시 쳐다보더니,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들을 뒤따르고 있는 수십의 기사들.

칼 역시 몸을 일으키고 서서, 그런 기사들의 행렬을 눈을 빛내며 바라봤다.

[Lv.62]

[마르하겔의 수호기사장]

왕실의 수호기사단.

그리고 그들의 수장이자, 마르하겔 왕국 최강의 기사인 수호기사장 데반.

세인피어 공작이 등장했을 때처럼 무거운 위압감이 연회장에 내려앉았다.

'이제야 다 모였군.'

이것으로 전부 다 모였다.

"우선, 마르하겔의 건국일을 맞이하여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기꺼움을 표한다..."

계단을 올라 단상에 선 왕비의 국왕 대리 연설이 이어졌다.

연설이 끝나자 귀족들이 박수갈채를 보냈고, 그 다음부터는 본격적인 밤의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주로 젊은 귀족 공자나 영애들이 짝을 찾아 연회장 중앙의 홀에서 무도를 즐겼고, 나이가 지긋한 귀족들은 그 광경을 흐뭇하게 구경하며 담화를 나누었다.

파벌이 갈라져 묘하게 냉랭했던 분위기도 음주와 무도가 곁들어지자 보다 부드럽게 풀렸다.

애초에 이 연회에 참석한 이들 중에는 왕위 전쟁과 전혀 상관이 없는 지방 귀족이나 신진 귀족들도 많았으니까.

물론 그런 그들을 포섭하기 위한 은밀한 대화 또한 테라스나 연회장의 구석 자리 곳곳에서 이루어졌다.

1왕녀와 3왕자, 4왕자 또한 분위기에 어울려 무도를 즐겼다.

여전히 테이블에 앉아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건 칼과 2왕자뿐이었다.

2왕자는 서늘한 분위기 때문에 영애들이 춤을 청하려 다가가지 못했고, 칼은 다른 이유로 영애들이 접근해오지 않았다.

왕위 전쟁과 크게 관련이 없는 귀족들도 알 건 다 알고 있다.

허울뿐인 5왕자와 어울리고 싶어 할 영애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춤을 청해와도 전부 거절할 생각이었던 칼에겐 기꺼운 상황이었다.

잡다한 연회 예법들이야 혹시 몰라 한 달 동안 속성으로 배웠지만, 춤 실력까지는 어쩔 수가 없었으니까.

점점 깊어가는 밤.

그 사이에도 계속해서 새로운 귀족들이 연회장에 들어오기도 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뒤늦게 왕성에 도착한 이들이었다.

반대로 피곤을 느껴 연회장에서 빠져나가는 귀족들도 몇몇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귀족들은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다.

무도회가 마무리된 다음에 어떤 볼거리가 이어지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술과 음식, 무도와 더불어 큰 규모의 연회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는 요소.

바로 기사들의 검투였다.

무도가 얼추 끝난 뒤, 홀의 중앙 공간을 대련장 삼아서 기사들이 한둘씩 나서기 시작했다.

혹시 모를 불미스런 일에 대비해 수호기사들 몇몇이 대련장을 둘러싸고 경계하듯 섰다.

대련의 진행 방식은 승자가 계속해서 상대를 지명하거나 도전을 받아 대련을 행하거나, 대련장이 비면 새롭게 나선 이가 다시 도전을 받거나 상대를 지명하는 식이었다.

"테이드 가문의 톰센이라 하오! 함께 어울려 검을 맞대볼 자는 나오시오."

부드러웠던 연회장의 분위기는 칼날이 거칠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속한 가문의 이름을 빛내기 위해, 혹은 단순히 검술을 뽐내기 위해 많은 귀족가의 기사들이 대련에 참가했다.

뛰어난 검술을 보여준 승자에게는 환호와 찬사를, 그리고 패자에게는 은근한 무시가 담긴 위로와 격려가 이어졌다.

간혹 아슬아슬한 접전 끝에 간신히 승패가 갈렸을 때는 승자와 패자 모두에게 우레 같은 환호가 쏟아지기도 했다.

"전하."

그런 기사들의 검투를 구경하던 칼은 뒤쪽에서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세피엘이 긴장으로 완전히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기다려봐."

지금 바로 나서도 되겠지만, 칼은 좀 더 인내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보다 완벽한 순간이 곧 알아서 찾아올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좀 전의 치열한 검투로 승자와 패자가 모두 내려와 대련장이 비었을 때, 새롭게 나선 기사가 크게 소리쳤다.

"5왕자 전하의 기사, 세피엘 경에게 대련을 청하겠소!"

로메논 백작가의 기사 더프.

그의 외침에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칼에게로 쏠렸다.

칼은 대련장에 선 기사를 응시했다.

[Lv.40]

[로메논 가문의 기사]

그리고 고개를 돌려 연회장의 한쪽 자리를 바라봤다.

로메논은 그의 파벌에 속한 백작 가문이었다.

로메논 백작을 포함해 3왕자의 곁에 앉아았는 귀족들이 이쪽을 향해 조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나올 것 같더라니.'

3왕자의 의도는 뻔했다.

거의 모든 왕가의 일원과 가신들, 그리고 귀족들이 모인 자리.

칼이 오늘 이 자리를 무대로 정한 만큼, 카이번 또한 이런 좋은 기회를 가만히 흘려보낼 리가 없었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5왕자 쥬레인을 최대한 깔아뭉개려는 것이었다.

더프가 말을 이었다.

"경께서 이전의 미노타우로스 토벌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쳤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소. 고위기사인 베로프 경께서도 차마 생환하시지 못한 사지에서 홀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고."

"......"

"필시 경의 무위가 알려진 것보다도 훨씬 대단하기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겠소? 부디 그 뛰어난 검술을 견식해보고 싶소만."

대놓고 비꼬는 말이었다.

귀족들이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칼을 응시했다.

이런 상황에 대련을 거부한다면 모두의 앞에서 꼴사납게 꼬리를 마는 셈이었다.

[Lv.35]

[마르하겔 5왕자의 기사]

하지만 세피엘의 실력으론 저 기사를 감당할 수 없다.

그의 눈가에 미약한 살기가 떠오른 것이 보였다.

'적당히 끝낼 게 아니라 죽일 생각이군.'

단지 연회의 흥을 띄우기 위해 펼치는 대련에서 살인이 허용될 리가 없었지만, 불의의 사고까지는 어쩔 수 없는 법이다.

기사들이 서로 대련을 펼치다 사망하는 건 흔히 발생하는 사고다.

목검도 아니고 서로 진검을 맞대는 일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대련에 나선다는 것 자체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뜻이었고.

더군다나 상대가 다른 누구도 아닌 5왕자 쥬레인의 기사에 불과하니 뒷감당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만약 더프가 세피엘을 죽인다면, 그건 그저 안타까운 사고로 남고 아무 파장도 없이 지나갈 터였다.

재차 고개를 돌리니 3왕자 카이번이 이쪽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요청에 응한다면 세피엘이 죽을 것이고, 거절한다면 굴욕이다.

또 거절한다고 해도 이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남은 연회 동안 카이번은 계속해서 쥬레인을 짓밟으려 들 터였다.

어느 쪽도 택하기 힘든 상황.

하지만 또 다른 선택지는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칼이 오늘 하루 긴 시간 동안 지루하기 그지없는 연회를 참고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유였다.

"세피엘은 입은 내상이 있어 대련을 행하기 곤란한 상태라네."

진부한 변명에 상황을 지켜보던 귀족들 중 몇몇이 비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이어진 칼의 말에 모두가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내가 대신 나서도록 하지."

자리에서 일어난 칼이 뒤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세피엘, 검을."

세피엘이 망설임 없이 허리춤의 검을 공손히 바쳤다.

검을 받아든 칼은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

왕족과 귀족, 그리고 수호기사들과 궁정 마법사들.

모두가 황당한 얼굴로 대련장에 올라서는 칼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중 제일 황당한 사람은 당연히 대련을 청한 장본인인 더프였다.

그는 무척이나 당혹스런 눈빛으로 앞쪽에 선 칼을 바라봤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

"아아, 내 안위가 신경 쓰이는 모양이군. 그 부분은 염려하지 말도록. 내 이름과 왕실의 명예를 걸고, 이 대련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고에 자네의 책임은 없으니까. 설령 내 목숨이 끊어진다고 해도 말이야. 왕족이란 신분을 방패 삼아 명예로운 기사들의 검투를 더럽힐 수는 없

지."

그 미친 발언에 다시 한 번 귀족들이 경악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카이번조차 두 눈을 부릅 떴다.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스쳤다.

'5왕자가 미쳐버린 건가?'

5왕자 쥬레인의 형편없는 무재야 왕국에서도 소문이 자자했다.

한데 백작가의 정식기사와 검술 대련을 펼치겠다니? 그것도 목숨까지 걸고?

더프가 고개를 돌려 로메논 백작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시선을 받은 백작이 옆쪽에 앉은 카이번을 슬쩍 바라봤다.

카이번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죽일 수는 없다.'

이건 왕실의 명예 문제였다.

왕족의 죽음은 단순히 기사가 대련 중에 사고로 죽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는 문제였다.

심지어 이렇게 귀족들 모두가 보는 앞에서라면 더더욱.

아무리 5왕자 본인이 스스로의 명예를 걸고 더프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 맹세했다 한들 말이다.

카이번도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5왕자의 목숨을 끊어버리고자 했지만, 적어도 지금 이 자리에선 아니었다. 하지만...

'모욕 정도는 얼마든지 줄 수 있지.'

카이번이 서늘한 눈빛으로 칼을 바라봤다.

자신을 죽이지 못한다는 걸 확신하고 대련에 직접 나서기라도 한 건가?

정말로 그런 거라면 멍청하기 그지없는 생각이 아닐 수가 없었다.

설령 죽이진 못하더라도, 그 외에는 대련이 지속되는 동안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니까.

"건방진 동생의 버릇을 조금 고쳐줄 필요가 있겠네."

카이번의 낮은 중얼거림.

고개를 끄덕인 로메논 백작이 더프에게 눈짓으로 뜻을 전했다.

"...왕자 전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촤앙!

더프가 곧장 검을 뽑아들었다.

칼 또한 천천히 세피엘의 검을 뽑아들며 말했다.

"단순한 대련은 이미 앞의 기사들이 많이 보여주었으니, 다른 방식은 어떻겠나?"

"......?"

"일검투로 깔끔하게 합을 내도록 하지."

일검투.

단 일검만을 서로 전력을 다해 부딪혀 승패를 정하는 검투.

그리고 웬만해선 펼치지 않는 형식의 검투이기도 했다.

전력을 다해 서로 검을 부딪히면 결국 어느 한쪽은 크게 다치게 되니까.

"그래도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내 안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을 터인데. 다시 맹세라도 해줘야 하는가?"

헛웃음을 흘린 더프가 칼을 향해서 검을 겨누었다.

'곧 네 발로 바닥을 기게 해주지.'

백작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이 멍청한 왕자에게 본때를 보여줘야겠다고 다짐하며.

"왕자 전하께선 검기를 사용할 수 없으시니, 저 또한 검기를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좋을 대로 하게."

칼은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도 충고해주자면, 검기를 사용하는 편이 좋을 텐데."

더프가 같잖다는 듯 웃으며 검을 치켜세웠다.

얼마든 공격해보라는 듯한 태도였다.

칼은 사양치 않고 먼저 검을 휘둘렀다.

제대로 된 준비 동작도 없이 한 손으로 대충 휘두르는 자세.

그 엉성한 검격에 더프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지켜보던 이들 또한 더프의 반격에 칼이 형편없이 나가떨어질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어진 결과는 모두의 눈을 의심케 만들었다.

콰앙!!

거대한 폭음.

동시에 피를 내뿜으며 튕겨나간 더프가 꼴사납게 바닥에 처박혔다.

반대로 대련장 위에는 멀쩡한 모습으로 선 칼이 유유히 검을 거두고 있었다.

"......"

칼은 주변을 둘러봤다.

모두가 경악하거나 넋을 놓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

지금껏 표정 변화가 없던 2왕자 카몬조차 눈을 크게 뜬 채였다.

또한 수호기사장 데반과 세인피어 공작의 무표정했던 얼굴에도 균열이 일어난 것이 보였다.

눈치챘을까?

최대한 은밀히 사용하긴 했지만, 두 사람 정도 되는 강자라면 아마 방금의 힘이 마력이라는 걸 알아챘을 것이었다.

하지만 칼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지금 이 순간은 5왕자 쥬레인을 완전히 내보이기 위한 자리였고, 절정은 아직 따로 남아있었으니까.

"카이번 형님."

한쪽으로 시선을 옮긴 칼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이 동생이 형님께 대련을 청해도 되겠습니까?"

"......"

넋을 놓고 있던 카이번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변의 시선들은 어느새 그에게로 몰린 채였다.

'대체 어떻게...'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상황.

하지만 역으로 당했다는 건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이번은 지금 이 대련 요청을 거부할 수가 없었다.

"설마 거절하진 않으시리라 믿겠습니다."

그 도발에 카이번이 입술을 꽉 짓씹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칼의 앞으로 다가가 섰다.

"여태껏 잘도 주변을 속여왔군."

칼은 그저 입꼬리를 올려 대답했다.

카이번이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확실히 놀랍기는 하다만, 자만이 도를 넘어섰구나."

"......"

"아무리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 한들 네놈이 내 검을 받아낼 수 있을 성 싶더냐?"

사아아.

이어 검날에 맺히는 눈부신 적광.

일반적인 것보다도 훨씬 더 밝은 광채의 검기가 카이번의 검을 휘감았다.

그 광경을 보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창염환..."

창염환.

다만 본판의 창염환이 아닌 열화판의 창염환이다.

비록 건국조가 펼쳤다던 주홍빛의 검기는 아니지만, 열화판의 창염환은 보통의 오러보다 밝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칼은 그것을 보며 그저 웃기다고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건국조가 남긴 본판의 창염환은 심공이 아닌 서클링이니까.

애초에 근원이 되는 힘이 오러가 아닌 마력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 카이번이 펼치고 있는 건, 그리고 지금껏 마르하겔의 왕족들이 익혀온 것은, 사실 열화판조차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창염환과 아무 관련도 없는, 그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심공에 불과할 뿐이지.

[Lv.46]

[마르하겔의 3왕자]

확실히 카이번은 스스로의 실력을 자부할 정도는 되었다.

마침내 칼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이 자리에서 똑똑히 확인하도록."

세인피어 공작, 수호기사장 데반, 그리고 2왕자 카몬과 1왕녀 클로아를 포함한 왕가의 모든 일원과, 귀족들.

연회장에 지독한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그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다음 왕좌를 계승해야 하는 이가 과연 누구인지를."

화르륵!

동시에 검날을 휘감고 화염이 타올랐다.

열화판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눈부신 주홍빛의 화염이.

"......!!"

소리 없는 경악성이 번졌다.

넋을 놓고 있다가, 한 박자 늦게 상황을 파악한 귀족들이 입을 쩍 벌렸다. 들고 있던 술잔을 떨어뜨리는 이까지 있었다.

왕가 쪽의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다른 왕자와 왕녀, 왕비, 그리고 지금껏 쥬레인에게 일말의 관심조차 없던 왕가의 원로들도.

수호기사들은 전원은 물론이고 그들의 수장인 데반까지도.

모두가 거대한 충격에 빠진 채 칼의 검을 휘감고 이글거리고 있는 주홍빛 화염을 바라봤다.

마르하겔 왕가의 상징이자, 그 누구도 얻지 못했던 건국조의 유일한 유산.

허상과도 같았던 그것이 지금 순간 현실이 되어 모두의 눈앞에 펼쳐졌다.

"방식은 방금과 같이 일검투입니다."

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서있는 카이번을 보며, 칼은 씩 웃었다.

"죽일 생각까진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화아악!

전신을 거칠게 덮쳐오는 불꽃에 카이번이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두 검날이 충돌하는 순간 태양처럼 눈부신 빛이 번쩍 터져나왔다.

콰아아앙!!

섬광이 가시고, 결과가 드러났다.

"커헉...!!"

바닥에 무릎을 꿇은 카이번이 피를 울컥울컥 토해냈다.

검을 맞댔던 팔은 화상으로 흉측하게 타버린 채였다.

유유히 검을 거두고 있는 5왕자의 검에선 여전히 선명한 주홍빛의 화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수백 년 전의 건국조가 살아돌아온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는 그 압도적인 광경을, 모두가 한참이나 넋을 잃은 채 바라봤다.

< 창염환 (9)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