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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93화 (93/132)

< 창염환 (8) >

"대, 대체 어떻게... 공께서..."

혼란과 경악에 빠진 쥬레인과 세피엘에게 칼은 간결히 요약하여 설명을 해주었다. 창염환의 숨겨진 비밀에 대해서.

설명을 모두 들은 두 사람은 충격에선 간신히 벗어났지만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창염환이 심공이 아닌 서클링이었다니..."

대체 칼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내고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익히기까지 한 건지 의문이 차올랐으나, 지금껏 겪은 일들이 있기에 새삼 놀라울 것도 없었다.

침음을 흘리던 세피엘이 퍼뜩 칼에게 물었다.

"그, 그럼 비밀을 알았으면 전하께서도 이제 본판의 창염환을 익히실 수 있는 겁니까?"

"글쎄요, 그건 아닐 것 같습니다만..."

칼이 애매한 눈빛으로 쥬레인을 바라봤다.

창염환의 숨겨진 비밀을 알았다고 한들 그 본연의 격이 어디로 가겠는가?

칼도 SP를 소모하여 익힌 것뿐이었기에 순수히 자력으로 창염환을 익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어마무시했던 가격과, 아무리 심공으로 착각했다고 한들 지금껏 어느 마르하겔도 비밀을 파헤치지 못했던 점들을 고려해보면, 그 안의 내용이 얼마나 난해할지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당장 쥬레인만 봐도 내용을 아예 이해 못해서 연공조차 시도를 못하지 않았었는가?

쥬레인 역시 스스로의 수준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피엘, 아무리 비밀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창염환을 익히기는 어려울 것이다.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분명 아득한 시간이 걸리겠지."

"하지만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건지는 잘 알겠습니다."

쥬레인이 굳은 얼굴로 칼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께서 제 모습으로 변해 모두의 앞에서 창염환을 선보이겠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정확합니다."

세피엘이 헛숨을 들이켰다.

쥬레인 행세야 비고를 들락거리며 이미 몇 번 했었으나, 이건 일의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건국조 이래 최초로 본판의 창염환을 펼치겠다니...

"선택은 전하가 하십시오."

칼이 검을 거두며 말했다.

그러나 대답은 이미 정해져있었다.

"공의 뜻대로 하겠습니다."

쥬레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건 모두의 이목을 끌어내는 것.

수호기사들의 지지를 얻어내고, 그로써 다른 왕자와 왕녀들에게 위기감을 안겨주는 것. 그뿐이다.

칼이 쥬레인을 연기할 수만 있다면 창염환을 실제로 누가 익혔는지 따위는 아무 상관도 없었다.

세피엘이 나서서 물었다.

"한데 판을 짜겠다는 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당장 수호기사들에게 사실을 알릴 생각이 아니십니까?"

지금 바로 쥬레인이 본판의 창염환을 익혔다는 사실을 수호기사장 데반에게 알리고 증명하면 되는 게 아닌가?

칼이 말한 '판'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칼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보다는, 이왕이면 훨씬 더 강렬한 게 좋지 않겠습니까?"

보는 눈이야 많을수록 좋았다.

단순히 사실을 전해듣는 것과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건 당연히 충격의 정도가 다르니까.

왕가의 모든 일원과 가신들,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 누구도 예상 못한 때에 5왕자 쥬레인이 마르하겔 왕가의 상징과 같은 주홍빛 불꽃을 피어올리는 것.

칼이 원하는 그림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리고 아직은 수호기사장을 완전히 믿을 수도 없고.'

이야기가 어디서 새나가버리면 창염환을 선보이는 데에 지독한 방해들이 들어올 건 뻔한 일이었다.

쥬레인이 왕가의 의식을 마치고 왕성으로 돌아왔을 때.

아니면 의식을 치르러 떠나기 전 미리 성년을 기념하는 연회가 열렸을 때.

이 둘 중 어느 때라도 창염환을 선보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겠지만,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는 것.

이미 생각해둔 판은 있었다.

칼은 쥬레인에게 물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달 뒤가 마르하겔의 건국기념일이지 않습니까?"

쥬레인과 세피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챘기 때문이다.

마르하겔의 건국일.

흉포한 거인족들을 땅에서 몰아내고 지금의 마르하겔 왕국을 있게 한, 건국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는 날.

그날은 왕가 쪽과 고위귀족들은 물론이고, 대부분의 지방 귀족들까지 왕성에 모여들게 된다.

칼이 씩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그날, 모두의 앞에서 창염환을 선보일 겁니다."

남은 일은 조금만 더 웅크린 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한 달의 시간은 빛처럼 빠르게 흘렀다.

건국일을 맞이한 왕성의 입구는 아침부터 빼곡히 들어선 마차들의 행렬로 발 디딜 틈도 없어 보였다.

가문의 영지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온 귀족들, 축하 선물을 보내려고 찾아온 왕가와 연결점이 있는 상단들, 그리고 그들을 검문하는 많은 기사와 병사들...

어느 국가든 건국일이 국가의 중대한 기념일인 건 당연한 일이다.

마르하겔은 건국조의 업적과 설화가 깊이 뿌리내린 만큼 더더욱 그렇고. 왕가의 의식과 더불어 가장 큰 규모의 기념일이었다.

정말 웬만한 일이 아니고서야 건국일 연회에 불참하려는 귀족은 없었다.

단지 왕실의 눈치를 봐야 하기 때문은 아니었다.

평소 마주할 일이 없는 가문의 이들과 서로 안면을 트고 친목을 다지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이기도 하니까.

연회는 이른 낮부터 바로 시작될 예정이었다.

본래는 앞쪽에 다른 일정들, 특히 왕성 바깥으로 나가 국민들이 모인 자리에서 국왕의 연설이 있었으나, 지금은 왕좌가 비어있기에 생략되었다.

왕비가 연설을 대신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2왕녀를 슬하에 두고 있는 3왕비.

현재 3왕비가 섭정을 하고 있는 건, 그저 다른 왕비들이 모두 일찍 세상을 뜨고 없기에 그녀에게로 자리가 돌아간 것이었다.

아니면 순차도 밀리고 외가의 힘도 별 대단치 않은 그녀가 대리로나마 왕좌를 맡을 수 있었겠는가.

물론 그렇다고 해도 대리인 만큼 별 대단한 권한도 없고, 다음 계승자가 정해지면 곧바로 자리에서 물러날 이일 뿐이다.

왕가의 의식 때야 어쩔 수 없었지만, 건국일 연설까지 그녀가 행하며 만민의 앞에 얼굴을 비추는 건 누구도 원치 않았다.

어쨌거나 그녀는 2왕녀의 모가 되는 인물이었으니까.

아직 왕가의 의식조차 치르지 않았다지만, 2왕녀에게도 다음 왕위에 대한 권한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별 쓰잘데기 없는 견제였다.

아무튼, 그렇게 시간은 흘러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되었다.

중앙전의 대연회장.

사방에 걸린 화려한 조명 아래, 수많은 귀족들이 각자 자리를 잡고 모여 활발히 담화를 나누고 있다.

물론 안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그 사이사이가 보이지 않는 선으로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왕자와 3왕자, 그리고 1왕녀 파벌.

귀족들은 각 파벌대로 아예 구역을 나누고 모여 서로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왕위 계승자를 확정하는 대회담이 부쩍 가까이 다가온 만큼 파벌이 다른 귀족들 간의 분위기는 냉랭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어느 파벌에 속한 이들이든 대부분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는 대체로 비슷했다.

바로 5왕자인 쥬레인 마르하겔에 관한 것이었다.

"요즘 미꾸라지 한 마리가 왕성의 물을 흐리고 있다던데 말이오."

그 말을 뱉은 자는 3왕자 파벌에 속한 로메논 백작이었다.

주위에 동석한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꾸라지가 누구를 의미하는 건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았다.

"대체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롬펠 기사단도 당했다더군. 음지 사냥개들의 천박한 힘이라도 빌린 건지... 쯧."

"3왕자 전하께선 어째서 가만히 계시는 겁니까? 무언가 조치가 필요한 게 아닙니까?"

"다 이유가 있으시겠지. 그보다 대회담까지 이제 반 년도 안 남았다네. 다른 쪽에 신경을 기울이시는 것만 해도..."

귀족들 모두가 힐끗 멀리 떨어진 한쪽의 자리를 바라봤다.

2왕자 파벌의 귀족들이 모인 자리.

그들의 수장 격인 세인피어 공작은 아직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3왕자 파벌의 귀족들의 안면에 심란함이 서렸다.

현재 왕위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2왕자 카몬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3왕자인 카이번 또한 외가인 포하엔 공작가와 듀러플 공작가의 지지를 한꺼번에 받고 있었지만, 왕국의 두 성위기사 중 하나인 세인피어 공작의 후광에는 미치지 못했다.

웬만한 대군단조차 홀로 능히 전멸시킬 수 있는 괴물.

그것이 성위라는 명칭이 지니는 의미다.

또 다른 성위기사인 수호기사장 데반의 지지를 얻을 수만 있다면 상황은 역전되겠지만, 그건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카이번이 본판의 창염환을 익히는 데 성공하지라도 않는 이상 말이다.

"전하께서 어서 다른 묘수를 찾으셔야 할 텐데 말이오."

귀족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1왕녀 클로아는 그렇다 쳐도, 이대로면 도저히 2왕자를 넘어설 방도가 없었다.

이야기의 화제는 서서히 2왕자에 관한 것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귀족들의 태도는 5왕자를 이야기할 때와 달리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요즘 왕성에 상당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5왕자에 대한 문제는 모두의 머릿속에서 금세 사라졌다.

아직까지 각 파벌의 귀족들에게 5왕자 쥬레인에 대한 인식은 눈엣가시 정도였다.

그저 거슬릴 뿐, 왕위 전쟁에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는 상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무엇을 숨기고 있든, 또 무슨 발버둥을 친다 한들, 쥬레인은 외가에조차 버림받고 결국 어느 누구의 지지도 못 받고 있는 허울뿐인 왕자였으니까.

그렇게 점점 연회의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던 때였다.

"5왕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연회장의 입구 쪽에 서있던 가신의 목소리가 선명히 울려퍼졌다.

"......"

서서히 홀의 소란이 멎으며 귀족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붉은 카펫이 이어진 통로.

그곳에 한 청년이 천천히 걸음을 옮겨 연회장의 홀로 들어서고 있었다.

5왕자 쥬레인 마르하겔의 등장이었다.

* * *

'생각보다 훨씬 많네.'

칼이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느낀 감상이었다.

마르하겔의 모든 귀족이 이곳에 모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수.

아직 연회가 시작된 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진 않았으니 이것도 다 모인 건 아닐 터였다.

'더없이 좋은 무대군.'

수많은 시선들 속에 칼은 연회장 한쪽으로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근처에 서있던 귀족들이 천천히 양옆으로 비켜섰다.

칼의 뒤를 따르는 세피엘은 긴장했는지 평소보다 굳은 얼굴이었다.

워낙 보는 시선들이 많으니 칼의 정체가 들키기라도 할까 조마조마한 모양이었다.

대충 구석의 빈 테이블에 앉은 칼은 홀 내부를 슥 둘러봤다.

홀의 분위기는 곧 다시 떠들석해졌으나, 여전히 이쪽을 향해 은근한 시선들이 꽂히고 있었다.

그중 유독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곳이 있었는데, 칼은 그들의 정체를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3왕자 파벌의 귀족들인가 보네.'

칼은 그들을 향해 씩 미소를 지어주었다.

한 귀족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지는 걸 보고 다시 한 번 웃으며 이내 관심을 꺼버렸다.

테이블 위에 플레이팅되어 있던 과일을 하나 집어들고 씹었다. 사과가 아삭하니 맛있었다.

다른 왕자와 왕녀들, 왕가의 주요 인사들, 그리고 특히 수호기사단.

귀족들은 얼추 모인 것 같지만, 아직 주역들이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걱정하지는 않았다.

사흘에 걸쳐 이어지는 연회라도, 첫날인 오늘은 전부 모이는 때가 올 수밖에 없다고 쥬레인이 이야기했었으니까.

여유롭게 식사나 하기로 한 칼은 주변 귀족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테이블의 음식을 하나둘씩 먹기 시작했다.

아무렇게나 선택해서 앉은 테이블의 음식에 독이 있을 리도 없지만, 독이 있다고 해도 창염환을 얻은 지금에야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였다.

"1왕녀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목소리와 함께 연회장의 입구에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 창염환 (8)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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