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염환 (3) >
"......"
한참을 눈만 깜박거리던 칼은 천천히 손을 뻗어 비급을 집어들었다.
화려한 금테가 둘린 묵색의 표지.
더 자세한 정보를 활성화하여 창염환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았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를 파악하기 위해서.
<창염환>
마르하겔 왕국의 건국조 '라스칼리아 마르하겔'이 창시한 고유 서클링입니다. 통상의 서클링과는 다르게 서클을 단전에 형성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해당 서클링을 활성화할 시, 마력이 극도로 순수한 화의 성질로 변화하며...
칼은 진지한 표정으로 길게 이어진 설명을 읽어내려갔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다.
마르하겔 왕가의 상징, 지금껏 누구도 익히지 못한 건국조의 심공.
창염환은 오러 심공이 아니라 서클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점이 있었다.
"...서클을 단전에 형성한다고?"
마력 서클은 심장에, 오러 심공은 단전에.
이 세계에선 진리나 다름없는 상식이다.
한데 이 창염환이라는 건 서클을 심장이 아닌 단전에 형성한단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지만, 시스템이 정보를 왜곡했을 리도 없으니 분명한 사실일 터였다.
자연스레 의문이 이어졌다.
'왜 지금껏 아무도 몰랐던 거지?'
여태 수많은 마르하겔들이 본판의 창염환을 익히려다 좌절하고, 폐인이 됐다고 하지 않았던가.
창염환이 오러 심공이 아닌 서클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당연히 일어나지 않았을 일들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모두가 착각에 눈이 멀어 진실을 알지 못했다니.
"......"
생각해 보면 아주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긴 했다.
그 누가 단전에 서클링을 형성할 수 있다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적어도 기존의 상식으로는 절대 통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단전에 서클을 형성하는 창염환을 오러 심공으로 착각해온 것도 무리는 아닐 터였다. 게다가...
파라락.
어차피 안쪽의 내용은 이해할 수 없겠으나, 칼은 비급을 펼쳐서 페이지를 주르륵 넘겨보았다.
서적의 상태는 굉장히 깔끔했다.
종이도 낡지 않고, 안쪽에 쓰여진 문자의 상태 역시 흐릿함 없이 선명했다.
'전대 국왕이 11대라고 했으니까...'
이게 건국조 시대에 만들어진 서적이라면 적어도 백 년은 가볍게 넘은 물건일 것이다.
한데도 이렇게 깔끔한 상태라면, 보관을 잘한 것도 있겠지만 당연히 여러 번 필사를 해서 옮겼을 것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내용의 왜곡이나 누락이 조금도 없지는 않았을 터.
'그리고 건국조는 무인이라 했었잖아.'
선천적으로 아주 드물게, 몸 내에서 오러와 마력이 충돌하지 않는 체질을 지닌 이들이 있다.
아무래도 마르하겔의 건국조가 바로 그런 체질을 지닌 이가 아닌가 싶었다.
건국조가 창시한 서클링이니 당연히 본인이 익혔을 텐데, 그런 체질을 지닌 게 아니라면 마법사가 아닌 무인으로 알려진 게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마르하겔은 건국조 때부터, 역대 국왕들 모두가 뛰어난 무인인 것으로 역사 깊은 왕국이었다.
그러니 건국조가 남긴 유산이 오러 심공도 아닌 서클링이었을 줄을 후손들 중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그런 것들이 전부 합쳐져 지금껏 아무도 창염환의 진실을 알지 못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당장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이가 없네, 진짜..."
헛웃음을 터뜨린 칼은 창염환의 정보를 계속 읽었다.
위쪽의 구구절절한 설명은 스킵하고 효과를 살펴봤다.
<창염환>
화염계 마법에 대한 파괴력 100% 증가.
화염계 마법에 대한 마력 소모 20% 감소.
극도로 정제된 순수한 화기가 몸에 침투한 독성을 불태우며, 독에 대한 '완전 내성'을 가집니다.
서클의 단계가 상승할수록 효과가 상승하거나 진화합니다.(현재 6서클)
화염계 마법에 대한 피해량 증가와 마력 소모 감소.
속성만 다르지, 지금 익히고 있는 아르자크류 서클링과 효과가 대체로 비슷했다.
아니, 전체 마력 증가 옵션은 없으니 조금 떨어진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 눈에 띄는 효과가 있었다.
"독에 대한 완전 내성이라..."
이것 때문에 가격이 비싼 건가?
뭐가 됐든 무척이나 탐이 나는 효과였다.
웬만한 건 다 있어도 독에 대한 대응책은 현재까지 칼에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큐어 마법이 있긴 하지만, 마력을 제약당하는 독에 당하면 애초에 마법을 못 쓰는데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것만 익히면 앞으로 독 걱정은 안 해도 되겠... 아.'
순간 칼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서클링은 한 번에 하나만 익힐 수 있다.
한마디로 창염환을 익혀버리면 현재 익히고 있는 아르자크류 서클링은 사라지는 것이었다.
독 완전 내성 효과가 탐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 서클링을 포기하면서까지 익히긴 좀 아까운데...
"...잠깐만."
이거 심장이 아니라 단전에 형성하는 서클링이잖아?
그럼 중복해서 익힐 수도 있지 않나?
칼은 설마 싶어 창염환의 세부 설명을 더 뒤져봤다.
그리고 곧 원하던 내용을 찾아낼 수 있었다.
- 심장에 형성된 다른 서클링과 중복하여 습득이 가능합니다.
칼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어디 쓸만한 마법 좀 없나 들어와본 비고에서 중복 습득이 가능한 서클링을 찾아내다니. 정말 상상도 못한 수확이었다.
[350,000SP를 소모하여 '창염환'을 습득하겠습니까?]
"당연히 습득해야지."
망설임 없이 곧장 익히려던 칼은 멈칫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SP가 얼마나 남았더라?
[보유 SP: 170,000]
"......"
칼은 이마를 짚었다.
"망할 폴리모프."
원래 넉넉하게 남겨놨었는데, 폴리모프를 익히느라 한 번 더 크게 썼던 걸 잠시 깜빡했다.
SP도 부족한데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창염환을 익히려면 지금 보유한 SP의 배는 더 필요했다.
칼은 입술을 깨물며 고민에 잠겼다.
이걸 어쩐다?
어디 SP가 들어올 구석도 당장은 없는데...
* * *
깊은 밤.
3왕자전 금천전의 외곽.
"이렇게 초대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왕자님."
3왕자 카이번은 언짢은 표정으로 눈앞의 인형들을 바라봤다.
젊은 사내와 노인.
바로 아란헬에서 찾아온 인물들이었다.
응답을 기다리고 있기는 했지만 예고도 없는 갑작스러운 방문.
거기다 왕성 내에 멋대로 침입한 행태에, 카이번은 약간의 불쾌함을 느끼고 있었다.
"초대라... 내 쪽에서 먼저 접선을 요청하기는 했지만, 이곳까지 멋대로 들어와도 된다고 전한 기억은 없는데?"
날이 선 음성에 사내가 능청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저희도 나름 신중할 필요가 있어서 말입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왕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만 움직였다가 뒤통수를 맞을 일은 방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혀 진중하지 않고 어딘가 장난스러운 태도.
카이번의 뒤쪽에 서있던 여인이 사나운 눈빛으로 사내를 노려봤다.
사내는 그런 여인을 슬쩍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튼 노여움을 푸시길. 제 입으로 말하긴 뭐 하다만, 원래 저희가 이리 가볍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아니랍니다? 그만큼 이번 만남에 대해서 무척 중요하게 생각하고 최대한 격식을 차렸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하는군요."
"하긴, 테러나 일삼는 무뢰한들이 무슨 예의를 알까."
"하하, 그리고 왕자님께선 그런 무뢰한들의 힘이 필요해서 이곳까지 헐레벌떡 나오셨고 말입니다."
"놈, 무례하다."
여인이 검자루에 손을 올렸다.
카이번이 손을 들어 그런 여인을 저지하고는 말을 이었다.
"거래에 대한 이야기나 하지. 당장 이 자리에서 내용을 확실히 하고 싶다만, 설마 그 정도 결정 권한도 없지는 않겠지?"
그 말에 사내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카이번은 전혀 알지 못했다.
눈앞의 두 사람이, 대륙 최악의 테러 조직이라는 아란헬에서 얼마나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괴물들인지를.
"거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완전히 매듭 지어질 겁니다. 왕자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든."
"그렇다면 다행이군. 한데 말이야..."
"......?"
"나를 신뢰하지 못해서 이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온 만큼, 나 역시 자네들에 대한 신뢰가 필요하지 않겠나?"
카이번이 고개를 까닥이자 여인이 곧장 앞으로 나섰다.
의미를 이해한 사내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아아~, 그렇군요. 실력에 의구심이 드신다는 거군요. 왕성 내까지 아무도 모르게 들어온 정도로는 부족하십니까?"
"혀가 길군. 설마 자신이 없는 건가?"
도발에 사내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린아이의 재롱을 구경하듯 같잖다는 듯한 미소였다.
"그렇게 원하신다면야."
촤앙!
동시에 섬전처럼 검을 뽑아든 여인이 사내의 목을 찔렀다.
아니, 찌르려고 했다.
"......"
여인은 앞으로 검을 뻗은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느새 덤불처럼 솟아난 어둠이 그녀의 온몸을 휘감아버렸으니까.
그리고 그 옆에서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서있는 사내.
"단순한 호위치고는 그럭저럭 괜찮은 실력이군요. 왕자님께서 꽤 공들여 키우신 수하인가 봅니다?"
"......"
여인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먼저 선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을 당했다.
카이번 역시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비록 양지에 내보이진 않았지만, 그녀는 왕성 내의 무인들 중에서도 충분히 손에 꼽을 정도의 실력자였으니까.
사내가 장난스레 여인의 목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저 말고 저기 영감님한테 덤볐으면 팔 한 짝이 날아갔을 겁니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해도 굉장히 까칠하신 분이라서요. 최근에는 경매품 하나 못 건졌다고 거기 참가한 사람들을 싹 다 죽여버린 전적도 있으시고 말이죠. 하하."
"닥치고 쓸데없는 말은 말게, 헤럴드."
노인, 게록의 퉁명스런 말에 헤럴드가 씩 웃으며 손가락을 거두었다.
"실력을 제대로 시험하고 싶다면 왕실의 수호기사장은 데려와야 할 겁니다."
"......"
"그래서,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하셨른지?"
카이번은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봤다.
방금 한 말이 허세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두 사람의 경지가 감히 이쪽이 가늠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만족했네."
무척 위험하지만, 그만큼 강력한 카드가 생긴 듯 싶었다.
2왕자를 상대하기에도 차고 넘칠 만큼 강력한 카드가.
"이제 거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카이번의 눈에 강렬한 희열이 차올랐다.
* * *
왕궁 비밀고에 출입하고 며칠이 흘렀다.
비고에서 나온 뒤부터 칼의 머릿속은 온통 창염환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대체 SP를 어디서 얻지?'
18만 SP.
창염환을 익히기 위해선 18만이라는 SP가 더 필요했다.
그런데 SP가 나올 구석이 없다.
칼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괜히 허공에 대고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야, 퀘스트 내놔봐."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빌어먹을 퀘스트는 이럴 때만 얌전했다.
"뭐라도 하나만 좀 줘보라고."
단서 때문에 왕성에 묶여있는 것도 짜증나는데, 보상은 있어야 동력이 될 거 아니야?
그럼에도 시스템은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빌어먹을 새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칼을 보며 옆에 있던 세피엘이 이상하게 쳐다봤다.
칼은 그 시선을 무시하고서 나무에 몸을 기댔다.
오늘도 여전히 쥬레인은 비고에 들어갔고, 두 사람은 쥬레인이 나오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해가 지고 나서야 중앙전 입구에 쥬레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까이 다가가는데 쥬레인의 뒤쪽으로 한 무리의 기사들이 우르르 지나쳐갔다.
"뭡니까, 저건?"
칼이 묻자 세피엘이 대신 대답했다.
"왕궁 소속의 롬펠 기사단입니다."
왕궁에 소속된 기사단은 수호기사단만 있는 게 아니었다.
총 7개단으로 구성된 왕실 기사단.
그들은 왕실을 수호하는 임무보다는 왕성 바깥의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물론 그 전력과 권위 역시 수호기사단보다 훨씬 떨어지며, 수호기사단과 다르게 권력의 흐름에도 큰 영향을 받는 조직이었다.
"롬펠 기사단은 그중에 3왕자 파벌에 속해있는 이들입니다. 한데 단체로 어딜 저렇게 가는 건지..."
쥬레인이 알고 있는지 입을 열었다.
"소도시 케르만델로 향할 준비를 하는 거라더군."
"케르만델?"
"미노타우로스 무리가 나타나서 도시를 나드는 행상인들을 습격하고 있는 모양이야. 그쪽의 영주가 영지의 병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서 지원을 요청했다던데..."
동시에 칼의 머릿속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하였습니다.]
<돌발 퀘스트: 미노타우로스 토벌>
케르만델에 출현한 미노타우로스 무리를 토벌하십시오.
어쩌면 불청객들이 난입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 역시 모조리 처치하고 5왕자를 지키십시오.
퀘스트 보상: 200,000SP
칼은 눈을 깜박이며 퀘스트를 읽었다.
그리고 다시 쥬레인에게 물었다.
"롬펠 기사단이 3왕자 파벌이라고 했죠."
"그렇네."
"근데 4왕자도 3왕자의 밑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갑자기 그건 왜..."
"그럼 저희도 토벌에 참가하겠다고 하면, 4왕자가 눈이 뒤집어져서 전하를 묻어버리려고 하겠네요?"
쥬레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칼을 바라봤다.
칼이 씩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바로 가서 요청 넣으십시오. 저희도 기사단과 함께 왕성을 나가서 토벌을 돕겠다고."
SP도 벌고, 동시에 4왕자 쪽 세력도 한 번 크게 쓸어버릴 기회가 왔다.
< 창염환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