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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87화 (87/132)

< 창염환 (2) >

첫 시도는 처참하게 실패했지만 쥬레인은 순순히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같이 아침 일찍 비밀고에 들어가서 해가 저물 즈음에나 나오길 반복했다. 그만큼이나 쥬레인은 필사적이었다.

방법이 이것뿐이었으니까.

본판의 창염환을 익혀야만 어떻게든 첫걸음이라도 뗄 수 있었으니까.

하다못해 아주 자그마한, 보잘것없는 성취라도 이룰 수 있기를 기대하며 도전을 멈추지 않고 계속했다.

그러나 노력과 의지만으로 세상의 모든 것이 이루어질 리 있겠는가?

그랬다면 애초에 쥬레인이 성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형편없는 수준의 레벨에 머물고 있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쥬레인의 무재는 형편없었다.

그리고 본판의 창염환은 그런 처참한 재능으로 도전하기에 아득히 높은 벽이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천재라 불렸던 수많은 마르하겔들을 좌절시키고 폐인으로 만든 심공.

누구도 익히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모순적이게도 왕가의 상징과 다름없는 비기.

연공을 시도해보기는 커녕 쥬레인은 그 내용조차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보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도록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칼과 세피엘은 새벽부터 연무장에 나와 가부좌를 틀고 있는 쥬레인의 모습을 지켜봤다.

보름 동안 비밀고를 들락거렸으니 창염환 비급의 핵심 내용이야 전부 외운 상태였다.

물론 그뿐이었다.

한참을 씨름하듯 미간을 좁힌 채 앉아있는 쥬레인에게서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내부 기운을 살펴도 아주 미약한 양의 오러가 단전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게 느껴졌다.

심공 수련의 기본인 순환조차 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

세피엘이 착잡한 눈빛으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았던 칼은 무심한 표정이었다.

"...하아."

이윽고 눈을 뜬 쥬레인이 숨을 내뱉었다.

탄식에 가까운 한숨이었다.

칼이 가까이 다가가서 입을 열었다.

"그만 포기하는 게 좋겠습니다."

"......"

"더 해봐야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제가 계속 말하지 않았습니까. 창염환에는 미련을 버리고 다른 방법을 찾아보라고."

칼은 지금 상황을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쥬레인이 창염환의 연공을 조금 시도할 수 있었으면, 분명 끝까지 미련을 못 버리고 포기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해서 다다를 종착지는 시간 낭비 아니면 폐인 엔딩밖에 없다.

쥬레인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지금까지 들인 노력이 전부 물거품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밖에는..."

쥬레인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도 반쯤 체념한 표정이긴 했다.

입을 우물거리던 쥬레인이 주먹을 꽉 쥐고서 고개를 들었다.

"...아직 출입 기간이 일주일 정도 더 남았으니, 그때까지만 더 해보겠다."

하여튼 고집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칼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눈을 반짝였다.

"한데 전하."

"......?"

"왕궁의 비밀고라면 창염환 비급 말고도 귀한 물건들이 이것저것 많을 거 아닙니까? 예를 들어 마법서라거나."

쥬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끄덕였다.

"창염환 비급 말고 다른 건 둘러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만... 아마도 있겠지. 마도구로 보이는 물건들이 있었으니 마법서도 오러 심공과 따로 분류되서 있을 거네."

"그럼 저도 좀 들어가봅시다."

"...응?"

"어차피 핵심이 되는 구결은 다 외우신 것 아닙니까? 오늘 하루는 전하 대신 제가 비밀고에 들어가겠습니다."

쥬레인이 당황스런 표정을 지었다.

"대신 들어가겠다니, 어떻게... 아."

잠시 칼의 능력을 깜빡하고 있었다.

세이온의 모습으로도 감쪽같이 변했는데 다른 사람이라고 안 될 건 없었다.

"그럼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어딘가 조금 신나 보이기까지 한 칼의 모습에, 쥬레인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밖으로 가지고 나오는 건 금지되어 있는데..."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아, 전하께서는 오늘 얌전히 방에만 계십시오. 제가 비고에 들어가서 있는 동안 궁전 내에서 모습을 보였다간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간만에 조금 기대감이 차올랐다.

과연 마르하겔 왕가의 비고에는 어떤 보물들이 있으려나?

* * *

즉시 쥬레인의 모습으로 폴리모프한 칼은 여느 때와 같이 궁전 입구에 서서 수호기사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수호기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도착했다.

선두에 선 부단장이 이쪽을 보고 조금 의문스런 눈길을 보내는 것이 보였다.

평소와 달리 수하들을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나왔기에 그런 것이었다.

"이동하지."

칼은 태연하게 수호기사들에게 말을 건넸다.

어차피 이들과 이야기를 나눌 일도 없으니 말투는 걱정할 필요 없었다.

곧 수호기사들이 칼을 호위하고서 중앙전으로 인솔을 시작했다.

중앙전의 입구를 지나 길게 이어진 대로를 따라 쭉 나아가서 도착한 궁정.

거대하고 화려한 전경을 감상하며 칼은 기사들을 따라 궁정 안으로 들어섰다.

쥬레인이야 보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왔으나 칼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들킬 일이야 없겠지만, 왕성의 최고 중심부에 들어왔다고 생각하니 신경이 조금 예민하게 곤두섰다.

거대한 홀, 대리석 같이 매끈한 바닥 위로 깔린 붉은 카펫.

계속해서 나아간 방향은 위가 아니라 아래였다.

길게 이어진 복도의 한쪽 끝에 거대한 문이 있었다. 그 앞엔 기사들이 궁정의 입구보다도 삼엄한 기세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이 칼과 수호기사들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짧게 경례를 올렸다.

"허가서를 보여주십시오."

매일같이 찾아왔어도 절차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왕궁의 비밀고는 그만큼이나 중요한 곳이니까.

칼은 쥬레인에게 받은 허가서를 보여주었다.

확인을 마친 기사들이 다시 한 번 경례를 올리고 길을 비켜주었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나타난 것은 둥글게 말린 계단.

짙은 어둠을 벽면 곳곳에 걸린 발광 마도구가 밝히고 있었다.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고 나니 또다시 긴 복도가 나타났다.

복도를 가로지르며 칼은 주변에 숨겨진 기척들을 느낄 수 있었다.

하나하나가 제법 상당한 실력자들이었다.

'별 게 다 있네.'

은신한 상태로 비밀고 입구를 지키는 건가?

하긴, 무려 왕궁 비밀고인데 이 정도 보안은 되야겠지.

그렇게 복도의 끝에 다다르자 보인 건 비밀고의 입구로 보이는 문과, 그 앞에 의자를 두고 앉아있는 노인이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그 앞까지 다다르자 수호기사들은 미련 없이 돌아섰다.

칼은 다시 품에서 허가서를 꺼내들었다.

노인의 정체는 쥬레인에게 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Lv.59]

[마르하겔 왕궁 비밀고의 수호자]

전전대 국왕의 형제들 중 하나.

그러니까 쥬레인에게는 숙조부가 되는 인물이었다.

또한 최상격 수준의 고위마법사이기도 했다.

비밀고의 최심부를 수호하는 임무는 왕가의 인물이 맡고 있는 것이었다.

"......"

허가서를 본체만체한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열쇠를 꺼내들었다.

쿠구구...

그것을 중앙에 위치한 구멍에 끼워넣자 두꺼운 철문이 서서히 열렸다.

노인이 칼에게 고개를 까닥였다.

"들어가거라."

칼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안쪽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노인이 목소리가 다시 발걸음을 붙잡았다.

"네 형은 암살을 당한 게 아니다."

칼은 고개를 돌려 노인을 바라봤다.

주변이 어둡고 주름이 자글자글 졌기에 표정을 쉽게 읽을 수 없었으나, 노인의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 연민이었다.

"설령 암살을 당했다고 해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네 힘으로는 결코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왕성을 빠져나가거라. 마르하겔의 성을 버리고, 아무도 못 찾을 곳에 숨어 새로운 삶을 살거라. 그러다 보면 결국은 전부 잊어낼 수 있을 것이다."

칼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순간 노인이 1왕자의 암살과 관련된 것인가 생각이 스쳤으나, 눈빛을 보니 그저 쥬레인을 걱정할 뿐인 듯 싶었다.

"신경 끄십시오."

그것과 별개로 불쾌함을 느낀 칼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아마 쥬레인이었어도 같은 기분을 느꼈을 것이었다.

노인의 말은 형제의 죽음을 외면하고서 혼자 살기 위해 도망치라는 뜻이었으니까.

"......"

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 의자에 앉았다.

끝에 한마디를 덧붙이며.

"기어코 끝까지 할 생각이면 수호기사들의 지지를 받을 생각은 버리거라. 창염환이라는 닿을 수 없는 허상은 그만 쫓고 조금이라도 가능성 있는 계획을 세우란 말이다."

그건 칼 역시 동감하는 바였다.

노인은 그걸로 할 말을 전부 마쳤다는 듯 입을 굳게 닫았다.

칼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마저 비밀고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안쪽에 하나 더 있던 두 번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드디어 비밀고 안의 풍경이 드러났다.

"오."

칼은 짧은 감탄사를 터뜨렸다.

천장 높은 곳에 매달려 비고 전체를 환하게 밝히고 있는 거대한 발광 마도구.

그 아래로는 수많은 상자들이 통로 양쪽으로 겹겹이 쌓여있었다.

슬쩍 들여다 보니 아무래도 대부분이 금은보화인 듯 싶었다.

'여긴 그냥 재화들뿐인가?'

칼은 관심도 주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마력이 느껴지는 걸 보니 더 안쪽에 마도구들이 있는 모양인데.

예상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벽면 한쪽에 나열되어 있는 수많은 물건들이 나타났다. 전부 마도구였다.

[얼음 숨결의 지팡이]

[케트라샤의 반지]

[멸화의 구]

.

.

.

어떤 용도로 쓰이는 마도구들인지 확인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마법서든 마도구든, 마법과 관련된 물건이라면 전부 시스템의 능력으로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칼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도구들의 정보를 훑었다.

"오, 이건 좀 괜찮은데..."

제법 탐이 나는 것들도 있었지만, 당연히 밖으로 가지고 나가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몰래 숨겨서 가지고 나갔다간 바깥을 지키고 있던 노인에게 들킬 수밖에 없으니까.

인벤토리는 완전히 소유로 인정된 물건만 보관할 수 있기에 활용할 수 없다.

물론 그런 것들 이전에 양심의 문제였다. 애초에 왕가의 보물을 훔칠 생각도 없었다.

칼은 이내 마도구들에서 관심을 끄고 반대편 통로로 걸음을 옮겼다.

이쪽 방에는 물건들이 쌓여있으니 반대쪽에는 서적들이 있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곧 수많은 책장들과 함께 그 안에 꽂혀있는 엄청난 양의 서적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마법서들은 심공서와 분류되어 오른쪽 책장들에 위치해있었다.

"여기들 있었군."

칼은 씩 웃으며 마법서들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유롭게 둘러보며 어떤 마법들이 수록되어 있나 정보를 확인하려는데, 문득 더 안쪽으로 이어진 통로가 눈에 띄었다.

"......?"

통로 끝에는 검은빛의 반투명한 비석 같은 게 덩그러니 있었다.

그리고 그 틀에 비스듬히 놓여있는 한 권의 서적.

서적의 정체가 무엇일지는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저게 본판의 창염환 비급인가 보네.'

마르하겔 왕가의 상징이 담겨있는 비급.

그것을 바라보는 칼의 눈빛에는 어떠한 흥미도 없었다.

아무리 귀하다 한들 마법사에게 오러 심공서가 뭔 쓸모가 있겠는가?

관심을 끄고 다시 마법서들을 둘려보려던 때였다.

"......?!"

순간 두 눈을 부릅 뜬 칼이 재차 창염환 비급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에 홀린 듯 비급이 있는 통로 끝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

칼은 비석에 놓여있는 창염환 비급을 멍하니 바라봤다.

무척이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무런 말도 없이 계속.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르하겔 건국조의 비급서]

[창염환의 형성법과 운용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익히기 위해선 SP를 지불해야 합니다.]

[창염환(350,000SP)]

[350,000SP를 소모하여 '창염환'을 익히겠습니까?]

머릿속에 떠올라 사라지지 않고 있는 메시지를 읽으며, 칼은 중얼거렸다.

"뭐냐, 이거..."

아니, 오러 심공이라며?

서클링도 아닌 걸 왜 익힐 수 있는 거지?

< 창염환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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