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발 (1) >
5왕자전인 광명전.
이른 아침부터 궁전 내의 연무장에 세 남녀가 모여서 있었다.
검술 훈련을 하고 있는 쥬레인과 세피엘,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칼이었다.
"...상단이 또 비었습니다!"
온몸을 땀으로 흠뻑 적신 채 힘겹게 세피엘이 휘두르는 검을 힘겹게 막아내는 쥬레인.
칼은 따분한 표정으로 연무장 한편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봤다.
쥬레인의 검술 실력은 한눈에 봐도 무척이나 형편없었다.
세피엘이 최대한 합을 맞춰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격 한 번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정말 재능이 없기는 없군.'
듣기로 쥬레인은 처음 검을 잡았을 때부터 하루도 검술 훈련을 게을리 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Lv.11]
[마르하겔의 5왕자]
그럼에도 성년이 다 된 지금까지 기사는 커녕 정규병만도 못한 수준의 레벨이라니.
스스로 말했던 대로 쥬레인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무재가 없었다.
세피엘이 검을 거두자마자 쥬레인이 기진맥진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침 훈련의 끝.
칼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서 말을 건넸다.
"배고픈데 이만 식사하러 갑시다."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연무장을 빠져나온 세 사람은 식사를 위해 걸음을 옮겼다.
왕성에 들어오고도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칼이 한 일이라고는 별 것 없었다.
혹시 모를 암습에 대비해 쥬레인에게 주의를 기울이며 궁전 생활에 적응해나간 것이 전부였다. 본래의 세이온처럼 행동하면서 말이다.
별달리 어려운 부분은 없었다.
5왕자 파벌인 세이온은 왕성의 마법사들 사이에서도 버림 받은 신세였기에 내전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거의 없었으니까. 당연히 주변에 가까운 인물도 쥬레인과 세피엘밖에 없었다.
애써 공들여 세이온처럼 행동하려 하지 않아도 크게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창염환은 언제쯤 익히기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요청은 왕성에 도착한 날 바로 넣었으니 곧 허가가 떨어질 것이다."
주변에는 그들뿐이었지만 쥬레인은 칼에게 하대를 했다.
평소에 조심해야 남들이 보는 앞에서도 실수를 할 일이 없을 테니까.
창염환의 본판 비급은 왕궁 비밀고의 최심부에 위치해있다.
쥬레인은 얼마 전에 왕가의 의식을 마쳤으니 이제 본판의 창염환을 익힐 자격을 얻었다.
괜히 일부러 시간을 끄는 건지 아직까지 허가가 내려오진 않았으나, 계속 막고 있을 수도 없을 테니 빠른 시일 내에 그곳에 들어가 비급을 읽을 수 있을 터였다.
'별 의미도 없는 짓이겠지.'
칼은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요사이 쥬레인의 처참한 무재를 몇 번 직접 보니 더욱 확신이 됐다.
남은 방법이 본판의 창염환을 익히는 것밖에 없다곤 하지만 그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과연 이 무력한 왕자에게 또 다른 계획이 있기나 할지.
그때 반대편에서 일련의 무리가 다가왔다.
쥬레인이 걸음을 멈췄다. 옆에 있던 세피엘은 미약하게 표정을 굳혔다.
다가오는 이들의 선두에 선 자의 정체가 다름 아닌 4왕자 테인스였기 때문이다.
이윽고 바로 앞에 멈춰선 그가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딜 가던 중이었나, 쥬레인?"
"...형님."
쥬레인은 저편에 멀리 떨어진 기사를 힐끗 바라봤다.
궁전의 입구를 지키는 기사, 그가 테인스를 이곳까지 안내해서 온 것이었다.
아무리 4왕자라지만 외부인이다.
미리 연락조차 하지 않고 이곳에 멋대로 들어온 건 대놓고 쥬레인을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하물며 궁전의 경비 기사라는 놈은 그걸 막지도 않고 되려 안내를 하고 있으니.
애초에 세피엘을 제외하고 이 궁전에서 쥬레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기사는 누구도 없었다.
쥬레인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여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어쩐 일이긴. 굳이 이유가 필요한가? 형님이 동생 얼굴 보러 찾아올 수도 있는 거지."
쥬레인이 대답 없이 빤히 바라보자 테인스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농담이고. 설마 내가 시간아깝게 네 한심한 얼굴이나 보자고 왔을 리가 있나?"
"......"
"바쁜 걸음 옮겨서 친히 소식을 전해주러 온 거다. 허가가 떨어졌으니, 중앙전으로 가서 왕비께 정식으로 허가서를 받으라고."
"그렇습니까."
쥬레인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돌연 테인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 근데 정말 웃기지도 않는군. 창염환의 열화판도 입문을 못한 놈이 본판을 익혀보겠다니. 뭐, 그런 부질없는 발버둥이라도 쳐야 되는 게 네 지금 처지기야 하겠다만."
한참을 웃던 테인스가 돌연 웃음을 뚝 그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다, 동생아. 그것 말고도 따로 하나 궁금한 게 있어서 물으려고 온 거거든."
이게 본 목적이었다는 듯 테인스의 눈빛이 싸늘하게 굳었다.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거냐?"
"......"
"옆의 두 떨거지들로는 턱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아니면, 네가 실력을 숨기고 있기라도 한 거냐? 응? 지금껏 머저리인 척 연기라도 한 거냔 말이다."
말하면서도 그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건 테인스 스스로도 잘 알았다.
쥬레인이 무심한 투로 대답했다.
"궁금하면 직접 알아보십시오. 형님을 따르는 이들이 참 많은 듯 싶던데 말입니다."
음지의 사냥개들을 비꼬아 말한 것이었다.
잠시 쥬레인을 노려보던 그가 재차 입꼬리를 올렸다.
"몸 간수 잘 하거라. 그 얕은 목숨줄이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까."
쥬레인과 뒤쪽에 선 세피엘, 칼을 차례로 훑어보고는 몸을 돌렸다.
테인스와 함께 왔던 호위기사와 마법사 여인이 그 뒤를 따랐다.
"......"
칼은 빤히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정확히는 마법사 여인 쪽을 응시했다.
그녀가 돌아서기 전에 이쪽을 향해 영문 모를 웃음을 지었기 때문이다.
"저 여자, 누군지 아십니까?"
이윽고 완전히 모습이 멀어진 뒤에야 칼은 쥬레인에게 물었다.
테인스의 만행에 분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새피엘이 대신 대답했다.
"마학사 헤일라입니다. 전하를 배신하고 떠나간 수많은 마법사들 중 하나입니다."
본래 1왕자 파벌에 속해 이곳 광명전에서 생활했던 마법사라는 뜻이었다.
"저 여자와 제가 아는 사이였습니까?"
"...아마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을 겁니다. 대화를 나누던 걸 몇 번 본 기억이 있습니다."
하긴, 같은 공간에서 생활했으면 뭐가 됐든 조금이라도 아는 사이긴 했겠지.
4왕자 파벌의 4서클의 마법사.
칼은 금세 여인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딱히 신경 쓸 인물은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과 다르게 여인과의 만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이루어졌다.
* * *
그날 저녁.
칼은 갑작스레 찾아온 하인에게 이상한 말을 들어야만 했다.
"세이온 님, 헤일라라는 분께서 찾아오셨습니다."
"......?"
헤일라라면 아까 낮에 찾아온 4왕자의 곁에 서있던 여인이었다.
그녀가 뜬금없이 해가 다 저문 저녁에 다시 찾아온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현재 칼은 본래 세이온의 숙소가 아닌 쥬레인의 보호를 위해 그의 거주전이 위치한 바로 옆 건물에서 머물고 있었다.
칼은 잠시 고민하다가 밖으로 나섰다.
궁전의 어디에 있든 쥬레인이 위치한 곳까지는 감지 범위 안이기에 별 문제는 되지 않았다. 실드 마도구를 따로 건네주기도 했고.
그리고 애초에 왕성 내에서는 암습을 당할 가능성 자체가 희박했다.
아무리 지닌 바 힘이 없더라도 쥬레인은 왕자다.
왕족이 왕성 내에서 암습을 당해 죽기라도 한다면 그건 왕가의 명예에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
다른 왕자나 왕녀들이 그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왕성 내에서의 암살을 시도할 일은 없는 것이었다.
허울뿐인 5왕자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없었으니까. 정말 죽이려 했다면 진작에 수백 번도 더 죽였을 것이다.
4왕자 테인스도 괜히 의식 날까지 쥬레인이 왕성 밖으로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암살자들을 보낸 게 아니었다.
물론 쥬레인이 정말 본판의 창염환을 익힌다면, 그땐 정말 왕성 내에서도 암습을 당하는 개막장 상황이 펼쳐질 수 있겠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궁전 외곽 객전의 응접실에 들어가자 그곳에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헤일라였다.
"세이온."
그녀가 싱긋 웃으며 먼저 칼에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아까 낮에 봤을 때는 제대로 인사도 못 했는데."
칼은 말없이 헤일라를 빤히 바라봤다.
그녀가 콧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내가 별로 안 반가운 모양이네. 뭐, 배신자한테는 할 말도 없다는 건가."
"......"
"근데 너도 솔직히 후회하지? 끝까지 5왕자의 곁에 남은 거... 뭔가 기대하는 게 있으니까 안 무시하고 여기까지 나온 거잖아?"
딱히 할 말을 못 찾아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던 것뿐인데,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여대고 있었다.
드르륵.
칼은 의자를 끌어 반대편에 앉았다.
"용건은?"
"너무 뻣뻣하게 굴지 말지그래. 나름 옛정을 생각해서 너한테 기회를 주려고 찾아온 건데."
동시에 응접실 주변으로 마력의 막이 형성되었다.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펼친 것이었다.
뭘 하는 거냐는 듯 칼이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리자 그녀가 픽 웃었다.
"뭐, 좋아. 빠르게 본론만 꺼낼게."
이어 헤일라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보라색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이었다.
칼이 의문 섞인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자 그녀가 말을 이었다.
"본판의 창염환."
"......"
"그게 기존의 오러 심공과는 형식이 완전히 다르다고 하지? 그래서 잘못 건드렸다가 폐인이 되거나 죽은 마르하겔들도 있다고 하고. 근데 마침 이번에 5왕자가 거기에 도전하겠다네?"
약병을 탁자에 내려놓은 헤일라가 그것을 툭툭 건드리며 사악하게 웃었다.
"몸의 혈류를 막아버리는 독이야."
"...허."
칼은 작게 탄식을 터뜨렸다.
약병을 꺼낼 때까지만 해도 설마 싶었는데, 진짜였다.
이 미친년은 지금 자신에게 5왕자의 독살을 사주하려는 것이었다.
그것도 어디 밀실이 아니라 5왕자전 내의 객전에서 당당히.
칼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자 헤일라가 턱을 괴며 싱긋 웃었다.
"오러 심공을 연마하다가 흔히 발생하는 부작용 중 하나지. 무리한 심공 수련을 행하다 그만 숨을 거둔 5왕자. 심지어 그 오러 심공이 보통의 것도 아니라 창염환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불운한 사고사 아니겠어?"
왕성 내에서 왕족의 암살은 왕가의 권위에 치명적.
그러나 암살이 아닌 그저 불운한 사고라면 문제는 없었다.
독살을 오러 심공 연마의 부작용으로 꾸미려고 하는 이 여자처럼 말이다.
모두가 그 진상을 의심한다 한들 겉으로 보이기에만 자연스럽다면 뭐 어쩌겠는가?
더더욱 그 대상이 아무런 힘도 없는 5왕자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새삼 쥬레인이 놓인 처지를 칼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돌아온 지 고작 일주일이 지났는데 벌써부터 이 꼬라지다.
이러니 그토록 절박하게 도움을 바랐던 것이겠지.
"4왕자의 지시인가?"
"주제 넘는 소리는 함부로 지껄이지 말고."
헤일라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변했다.
"왕성 밖으로 나갔다 돌아오면서 느낀 게 없어? 이번에는 어찌어찌 겨우 살아남은 모양이지만 5왕자가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
"세이온, 좀 솔직해지자고. 너도 순수한 충심으로만 남은 게 아니었잖아? 네 실력에 다른 줄로 갈아타기도 힘드니, 다시 국왕파 귀족들이 마음을 돌릴 거라는 부질없는 기대나 하면서 5왕자의 곁에 남았겠지. 그리고 지금 결과를 봐. 5왕자를 포함해서 너나 세피엘 그 년이나,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하루살이 신세잖아."
헤일라가 약병을 향해 턱을 까닥였다.
"이게 마지막 기회야. 다 침몰해가는 배에서 내릴 마지막 기회. 그러니 개죽음 당하기 싫으면 그만 고집 부리고 잡아."
칼은 말없이 약병을 집어들었다.
수락의 의미라고 생각했는지 그녀가 입가에 비웃음을 걸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이었다.
"효과는 한나절이 지나서 천천히 나타나기 시작할 거야. 거기 담긴 양의 절반만 먹여도 효과는 충분하고."
"......"
"무취에 가까운 독이라 향이 강한 음식에 섞으면 티도 안 날 거야. 5왕자가 창염환을 익히기 시작하는 시점에만 맞춰서 먹이면 돼. 뒷감당도 걱정할 것 없어. 5왕자가 죽은 뒤에는, 마력이 독 성분을 거의 흔적도 없이 증발시킬 테니까. 꽤 공들여 직접 제작한 약물이거든."
약병을 만지작거리는 칼의 모습을 바라보며 헤일라는 여유롭게 대답을 기다렸다.
이윽고 칼의 입이 열렸다.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야."
"......?"
"다 제쳐두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찾아와서 이런 소리를 하는 거냐? 내가 당장 기사들을 불러와서 널 구속할 거라고는 생각해본 적 없나?"
그 말에 헤일라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곧 폭소를 터뜨렸다.
"뭐? 구속? 푸하핫...!!"
"......"
"세이온, 네가 마법 실력은 형편없어도 딱히 멍청하다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네."
그녀가 같잖다는 듯 조소를 지으며 문 밖으로 고개를 까닥였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든가. 그러고도 뒷감당이 가능할 것 같으면 말이야."
헤일라의 자신만만한 태도에서 칼은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 이 만남이 그녀에게 있어 별다른 위험을 감수한 것이 아님을.
그녀를 구속할 명분이라고 해봐야 지금 들고 있는 독약 하나가 끝.
한마디로 정황 증거가 전부였다.
물론 정황뿐이라고 해도 이 늦은 시각 왕자의 궁전에 독약을 들고 방문했다는 것 자체가 반역죄로 처형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지만, 그녀는 4왕자의 사람이었다.
4왕자가 그녀를 변호하고 들면 상황은 얼마든지 역전될 수 있었다.
막말로 헤일라가 5왕자의 독살을 사주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이온이 4왕자의 독살을 사주하기 위해 헤일라를 이곳에 부른 거라 상황이 조작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지금의 대화를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고 증거라고는 이 독약 한 병이 전부니까.
헤일라를 처벌하기는 커녕, 그런 식으로 누명이 씌워지는 걸 막을 힘조차 쥬레인에게는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좀 좋게 말했더니 잠깐 주제 파악을 잊은 거 아니야? 네가 내 허락 없이 이 방에서 나갈 수나 있을 것 같아? 아카데미 졸업도 3번을 낙제했던 3서클 나부랭이 따위가?"
헤일라가 서클의 마력을 끌어올렸다.
4서클의 마력이 응접실 전체를 채우고 칼을 압박했다.
그녀는 곧 칼이 숨도 제대로 못 쉬며 벌레처럼 꿈틀거릴 것을 의심치 않았다.
즐겁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그 꼴사나운 모습을 감상하려 했다.
"......"
그러나 칼은 여전히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약병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마력장의 압박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듯, 그녀에겐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어?"
예상을 벗어난 광경에 헤일라가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약병에서 시선을 뗀 칼이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내가 널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일주일간 왕성에서 지내며 필요성을 느끼긴 했었다.
얌전히 쥬레인만 지키고 있을 게 아니라, 무언가 격류를 만들어야 한다는 필요성.
어차피 쥬레인이 본판의 창염환을 익히는 데 성공할 가능성은 0에 가까웠으니까.
1왕자 암살과 관련된 진실을 알기 위해선 다른 왕자와 왕녀들, 특히 가장 유력한 흉수인 2왕자를 도발해야만 했다.
완전히 전면에 나설 수는 없겠지만 꽁꽁 숨어있기만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지금 이건 오히려 좋은 상황이었다.
고작 이걸로 4왕자를 엮어서 보내버릴 순 없겠지만, 모두에게 보내는 개전의 신호로는 더없이 적합할 테니까.
칼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순간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낀 헤일라가 다시금 마력을 끌어올리려던 순간이었다.
뿌드드득!!
무언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양팔이 기괴한 방향으로 꺾였다.
< 도발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