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쥬레인 마르하겔 (1) >
울데미르는 칼의 요구대로 무역선의 출항 일정을 최대한 앞당겼다.
사실 굳이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무역선이 섬에 여유롭게 머물고 있기는 힘들었다.
거미들의 침공 탓으로 루게시움도 이리저리 11구역 섬에 대해 처리할 일들이 많아졌으니까.
덕분에 휴식을 길게 취하지도 못한 선원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어쨌든 물자 공급을 마치는 대로 무역선은 곧바로 출항 준비를 마쳤다.
"조금만 더 머물다 가셔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배웅을 위해 직접 항구로 나온 울데미르가 아쉬운 표정으로 칼을 바라봤다.
양옆에는 헨리와 레일이, 그리고 뒤쪽으로는 흑상어 기사단과 3분대원들이 서있었다.
칼은 그들을 쭉 훑어보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이틀이면 충분히 쉴 만큼 쉬었습니다."
어차피 이제 배에 오르면 또 질리도록 쉬기만 해야 될 텐데 말이다.
처음 도착했을 때나 잠깐 신기했지, 지루한 건 이곳 섬이나 배 위나 마찬가지였다. 할 일도 없이 굳이 길게 머물 이유가 없었다.
"칼 공, 언제 한 번 반드시 세턴의 왕성을 찾아주십시오. 흑상어 기사단은 은인을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헨리도 나서서 말했다.
완전히 기사로서 예를 갖춘 태도였다.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상급자인 울데미르가 공대를 하는 상황에서도 평소처럼 격 없이 칼을 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있던 레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어째선지 흠칫 놀란 레일이 어색한 얼굴로 쭈뼛거렸다. 본래 성격을 생각한다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태도.
칼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바로 어제, 그녀가 칼에게 좋은 술을 대접하겠다고 벌인 술판에서 못 보일 꼴들을 꽤나 보였기 때문이다.
완전히 취해가지고 했던 말을 계속 반복하는 건 예사고, 갑자기 가문에서 쫓겨난 처지에 대해 신세 한탄을 하지를 않나, 종막엔 전사한 대원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엉엉 울기까지.
오히려 칼이 외부인이기에 허물 없이 속사정을 전부 털어놓을 수 있었던 걸까.
아무튼 덕분에 뒷정리는 칼이 혼자서 다 하고, 완전히 정신줄을 놓은 그녀를 손수 숙소로 옮기기까지 해야 했다.
포스로 들어올려 둥둥 띄우고 가는데 도중에 마주친 대원이 보냈던 괴상한 눈빛이 아직도 생생했다.
"레일 경은, 그..."
"......"
"힘내십시오."
칼은 뭔 말을 건넬까 고민하다 한마디만 했다.
그 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레일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솟아오르는 쪽팔림과 부끄러움을 억누르는 듯했다.
"...나중에 찾아오시면 훨씬 좋은 술을 대접해드리겠습니다."
결국 마지못해 내뱉는 인사말에 칼은 픽 웃고 말았다.
선박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역선이 출항했다.
칼은 갑판에 서서 점점 멀어져가는 섬을 바라봤다.
그만 남은 여정을 이어갈 시간이었다.
* * *
몬 대륙.
글로리어스 소울 세계관의 다섯 대륙 중, 룬 대륙과 더불어 인간들의 세력이 가장 우세한 땅.
그렇기에 보통 대륙이라고 한다면 인간의 입장에서는 룬과 몬 대륙만을 뜻하는 것이었다.
나머지 세 대륙 중 하나는 인간이 살 수 없는 마경이고, 둘은 인외의 종족들이 완전히 점령하다시피 한 땅이었으니까.
그렇다고는 하지만 사실 대륙들을 전부 합쳐 따져도 가장 우세한 세력은 인간 종족이긴 했다.
다섯 대륙 중 룬이 나머지 네 곳을 전부 합친 것만큼이나 거대한 대륙이고, 그 다음으로도 몬이 가장 컸기 때문이다.
가장 거대한 두 대륙을 인간이 지배하고 있으니 세력 규모도 그를 뒤따라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도착이군.'
따분했던 항해의 끝.
갑판에 선 칼은 선선한 해풍을 맞으며 저멀리 가까워지기 시작한 육지를 바라봤다.
마침내 몬 대륙에 도착한 것이다.
"저쪽 길목으로 쭉 나아가시면 마구간이 하나 있습니다. 말은 그곳에서 빌리시면 될 겁니다."
선원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고 바로 작별을 한 뒤, 칼은 거리를 걸으며 종이를 펼쳤다.
몬 대륙의 지도. 이 또한 선원들에게 미리 얻은 것이었다.
"국가 하나만 넘어가면 되나."
칼은 지도를 훑으며 중얼거렸다.
현재 위치는 레이먼드 왕국이란 곳의 항구도시인 론티올.
마르하겔 왕국에 도달하려면 왕도를 관통하여 쭉 나아가면 될 듯했다.
칼은 여관에 머물러 쉬지도 않고 곧장 말을 빌려 도시를 나섰다.
생전 처음 디디는 땅이었지만, 지도 한 장에 기대어 국가들을 넘나드는 거야 룬 대륙에서도 일상이었다.
방향만 맞으면 나아가는 길에 어떤 장애물이 나타나든 칼에게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끝없이 이어진 평야를 달리고, 숲과 협곡을 가로지르고, 종종 마주친 도적들에게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도시들을 거치고.
그렇게 칼은 마침내 목적지인 마르하겔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변경에 위치한 소도시, '셀록'에.
"어서오세요!"
대충 여관을 하나 골라 들어가서 자리에 앉은 뒤 적당히 음식을 주문했다.
동화 몇 닢을 팁으로 안겨주자, 어린 종업원 소년은 환하게 웃으며 최고의 식사를 내어오겠다고 거창한 장담을 하곤 주방으로 떠나갔다.
소란스레 떠드는 주변 사람들의 소음을 흘리며 칼은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의 계획을 정리하는 것이었다.
'우선은 정보부터.'
쥬레인 마르하겔.
왕국의 5왕자라는 그를 다짜고짜 찾아가서 차원의 조각을 내놓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애초에 만날 방법도 없다.
우선 쥬레인이라는 인물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고, 이후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 계획을 짜는 수밖에 없었다.
'넘어오기 전에 헤르란도에 한번 들려볼 걸 그랬나?'
워낙에 대형 정보길드니까, 다른 대륙의 국가라도 그럭저럭 도움되는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에야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돌아가는 현황을 파악하는 건 현지에서 정보를 구해야 가장 정확할 테고. 그냥 이곳에서 새로운 정보원을 찾아보는 편이 나을 듯했다.
바쁘게 돌아다녀야겠지만, 돈과 제 한 몸 지킬 무력만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칼은 마법으로 청력을 강화했다.
여관, 온갖 사람들이 모여 온갖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 장소.
질 좋은 정보를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현재 마르하겔의 정세 정도는 대충 파악할 수도 있을 터였다.
"씨벌, 빌어먹을 용병 놈들. 하여튼 돈만 받아처먹고 제대로 하는 일이 없다니까. 당장 내일 길드에 찾아가서 항의를..."
"자네 그거 아나? 이번에 8번가 골목에 도박장 하나가 새로 자리 잡았는데..."
쓰잘데기 없는 잡담들 속에서,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 귓가에 들려온 건 바로 그때였다.
"아, 분명 내 말이 맞다니까? 다른 왕자하고 왕녀들이 5왕자가 가만히 돌아오게 두겠냐고. 쓱삭해버리기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이 병신아, 목소리 낮춰!"
5왕자?
칼은 눈을 크게 뜨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에서 두 남자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한껏 취기가 올라 떠들고 있는 남자를 다른 남자가 말리고 있는 모습.
드르륵.
칼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다시 목소리를 낮춘 채 이야기하던 그들이 흠칫 놀랐다.
"방금 하던 이야기, 저한테도 좀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
두 남자가 조금 창백해진 표정으로 칼을 바라봤다.
좀 전까지만 해도 취해서 떠들던 남자도 술이 확 깬 듯한 얼굴이었다.
"누, 누구십니까...?"
아무래도 오해를 산 모양.
입 아프게 떠드는 대신, 칼은 품에서 은화 두 닢을 꺼내들어 테이블에 천천히 올려놓았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거금에 두 남자의 눈이 부릅 떠졌다.
"두 분께 해를 끼칠 생각은 없으니 들려주십시오. 이야기가 끝나면 똑같이 두 닢을 더 드리죠."
"......"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 앉자, 눈치를 살피던 두 사람이 은화를 한 닢씩 나눠가지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 정확히 뭘 말씀하시는 건지..."
"5왕자 얘기 말입니다. 다른 왕자하고 왕녀들이 쓱삭한다는."
"아."
주변을 둘러본 남자가 한껏 목소리를 낮추고서 말했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이번에 5왕자께서 성년이 되시니 왕가의 의식을 치르러 용각산맥으로 향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왕가의 다른 분들이 가만히 두고 볼 것 같지는 않다는... 뭐, 그런 방정맞은 소리였습니다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기에 칼은 다시 물었다.
"왕가의 의식이라는 게 뭡니까?"
그 물음에 오히려 두 남자가 이해가 안 된다는 반응이었다.
칼은 대충 짐작하고는 둘러댔다.
"좀 먼 곳에서 와서 마르하겔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설명을 계속했다.
"왕가의 의식이라는 건 마르하겔 왕실의 오랜 전통입니다. 건국조께서 용각산맥의 꼭대기에서 거인족 왕의 목을 베어버렸다는 설화는 유명하지 않습... 아아, 맞다. 이것도 모르시겠군요.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관심도 없는 왕국의 건국사 이야기가 줄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칼은 말을 끊어버리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 의식이라는 게 정확히 뭘 하는 겁니까?"
"아, 예. 용각산맥의 정상 봉우리에 올라서 그곳에 미리 대기하고 있는 왕실의 수호기사에게 검을 받아오는 거라고 합니다."
검?
"그리고 다시 왕도의 대광장으로 돌아와 왕족과 귀족들, 그리고 국민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왕가의 일원으로서 정식 임명을 받고 의식을 마무리하는 것이죠. 그날이 바로 왕국의 가장 큰 축제날입니다."
대충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느 국가에나 으레 하나씩 있는 번거로운 전통인 듯했다.
"그러니까, 지금 5왕자가 그 의식이라는 걸 치르기 위해 산맥으로 향하고 있다는 거군요."
"이제 그분의 성년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쯤 분명 왕성에서 나와 산맥으로 여정을 떠나셨겠죠."
남자가 한층 더 낮추고 속삭이듯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닙니다."
"......?"
"5왕자는 지금 왕실에서 완전히 내버려진 신세거든요. 그러니 다른 왕자와 왕녀들이 5왕자가 왕성을 벗어나는 이 좋은 기회를 놓치겠습니까? 아마 분명..."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슬그머니 자신의 목을 그었다.
왜 5왕자가 내버려진 신세라는 건지 궁금했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당장 급한 건 따로 있었다.
[중요 인물의 위험을 인지하였습니다.]
[쥬레인 마르하겔은 용각산맥의 어딘가에서 암습당할 것입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메시지에 칼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인물들 이름만 툭툭 던져주던 퀘스트가 이렇게 나온 적은 처음이었다.
'썩을, 어지간히도 시간이 없나 보군.'
지금 상황에 아쉬운 건 칼 본인이었다.
5왕자인 쥬레인 마르하겔은 차원의 조각을 보유한 인물이다.
그가 죽으면 지금까지의 고생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두 남자가 흠칫 놀라며 칼을 바라봤다.
"그 용각산맥이라는 곳이 어디입니까?"
쉴 틈도 없이 다시 여관을 나온 칼은 다시 서둘러 떠날 채비를 했다.
지도를 보며 두 남자가 말했던 용각산맥이 어디인지를 찾았다.
다행히 아주 먼 곳은 아니었다. 보름 내로는 도착할 수 있을 듯 싶었다.
그 안에 암습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당장은 최대한 서둘러서 이동해야만 했다.
말을 타고 도시의 북문으로 빠져나와 달리며, 칼은 생각에 잠겼다.
'...산맥에 도착한다고 해도 왕자를 무슨 수로 찾지? 지금 당장 어디쯤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아무리 칼이라도 산맥 전체를 뒤져서 사람을 찾는 건 불가능했다.
대충 그가 어떤 길을 통해 왕성에서 산맥으로 향했는지라도 알면 뒤쫓을 수 있겠지만, 그걸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칼은 다시 말 위에서 지도를 펼쳐 산맥 주변의 도시들을 살폈다.
바로 방금 나선 소도시 셀록과 근처의 다른 도시 둘.
왕자가 산맥으로 향한다면 분명 이 세 도시 중 하나는 거쳤을 것이었다.
굳이 따지면 산맥과 제일 가까운 셀록을 거쳤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긴 했다.
'도시에서 산맥까지 이어지는 길은 전부 평야다. 굳이 빙 돌아서 갈 것도 없이 직선으로 쭉 나아갔을... 아!'
생각을 이어가던 칼은 문득 떠오른 마법에 탄성을 터뜨렸다.
잠시 인벤토리에서 고대의 마법서를 꺼냈다.
이럴 때 유용하게 쓸 만한 마법이 분명 하나 있었다.
<리딩 어스 메모리 - 6서클, 비전>
땅의 기억을 읽어들여 땅 위를 지나간 생물체의 자취를 파악합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자취는 읽어들일 수 없습니다.
만약 왕자가 셀록을 통해 산맥으로 향했다면, 당연히 지금 나아가고 있는 이 대로를 지나쳤을 터.
['리딩 어스 메모리'를 습득하였습니다.]
칼은 고민할 것도 없이 수십만 SP를 소모하여 마법을 익히고서 즉시 펼쳤다.
방대한 서클의 마력이 일대의 넓은 반경을 모조리 훑고 읽어들인다.
이내 수많은 정보들이 칼의 머릿속에 물 밀 듯 밀려들었다. 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있다.'
짐승들의 난잡한 족적.
그리고 그 사이에 섞인 희미한 말발굽들. 앞쪽에 이어진 길을 따라 곧게 나아간 자취.
누군가 말을 타고 지나간 흔적이었다.
"......"
칼은 잠시 말을 멈춰세우고 자취들을 훑었다.
희미하게 세 쌍의 말발굽이 대로를 따라 이어져있었고, 시간차를 두고 그를 뒤따라가는 수많은 말발굽들이 있었다.
'추적당하고 있군.'
이로써 확실했다.
앞선 세 쌍의 말발굽이 왕자를 포함한 일행일 것이고, 수많은 말발굽들이 그들을 쫓는 암살자일 것이었다.
물론 완전히 다른 무리들일 수도 있겠지만 당장의 정황을 따져본다면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그리고 이제는 이 자취를 쫓아가보는 것밖엔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 자취를 찾아낸 것만 해도 엄청난 행운이었다.
칼은 다시금 말을 몰고 자취를 따라서 질주했다.
* * *
"...끝인가."
은발의 젊은 청년이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용각산맥의 초입에 위치한 숲.
그곳에 복면을 뒤집어쓴 일련의 괴한들이 세 사람을 둘러싸고 있었다.
아니, 이미 한 사람은 죽고 남은 건 청년과 그의 호위기사뿐이었다.
호위기사인 세피엘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나운 눈빛으로 괴한들을 둘러봤다.
괴한들 중 몇몇은 그녀의 검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널부러진 채였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녀 역시 심각한 중상을 입었다. 여기저기 찢기고 갈린 경갑에서 핏물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이제 몇 번의 공방만 더 나눈다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질 건 뻔한 일이었다.
"왕자님, 도망치십시오. 어떻게든 활로를 뚫겠습니다."
세피엘의 말에 청년, 쥬레인은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그건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설령 그녀가 목숨을 불살라 길을 뚫는다고 해도, 꼴사납게 발버둥치며 죽음을 잠시 유예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 상황에 살아나갈 방법 따윈 없었다.
"눈물겨운 충성이군."
괴한들 중 대장 격으로 보이는 남자가 세피엘을 바라보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멍청하게 죽은 덜떨어진 마법사 놈과는 달리 질기게도 버티는 걸. 그것도 이제 한계가 온 것 같지만 말이야."
"닥쳐라, 역적 놈이."
세피엘이 이를 까득 갈았다.
그녀의 뒤에 있던 쥬레인이 입을 열었다.
"테인스 형님의 짓인가?"
4왕자인 테인스 마르하겔.
그는 왕자와 왕녀들 중에서도 유독 쥬레인을 증오했다.
물론 테인스뿐 아니라 배 다른 형제들 모두가 그를 죽일 이유는 차고 넘쳤지만, 쥬레인은 확신할 수 있었다.
"별 의미도 없는 걸 묻는군, 5왕자."
물론 남자의 말마따나 중요한 건 아니었다.
어느 누가 보낸 암살자든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건 변함이 없었다.
"그러게 줄도 다 떨어진 신세에 적당히 설치셨어야지. 차라리 의식을 포기했다면 조금이라도 더 그 얕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 텐데."
쥬레인은 체념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렇게 꼬리를 붙이지 않으려고 신중을 다했는데...'
결국은 이런 최후인가?
애초에 가능성 없는 싸움이고 발버둥에 불과했다만, 허무한 끝이었다.
남자가 손가락을 까닥이자 괴한들이 다시금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세피엘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러 막았지만 결국 한계는 찾아왔다.
"...커윽!"
등을 깊게 베인 그녀의 몸이 땅에 허물어졌다.
쥬레인은 입술을 꽉 짓씹으며 그 광경을 지켜봤다.
콰악!
남자가 쓰러진 세피엘의 몸을 밟고서 쥬레인의 앞에 다가왔다.
한 손에 들린 검을 빙글빙글 돌리며 히죽 웃음을 지었다.
"살려달라고 빌지는 않나?"
"비천한 사냥개 놈 주제에 말이 많다. 어서 죽이고 돌아가서 형님에게 꼬리나 흔들거라."
담담하게 이어지는 그 말에 남자의 이마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푸욱!
검이 쥬레인의 복부를 찔렀다.
검날을 그대로 비틀자 핏물이 터져나오며 쥬레인의 몸이 직각으로 꺾였다.
"크학...!!"
남자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고귀하신 왕족께서 천한 놈에게 허리를 숙이면 쓰나? 계속 지껄여보라고, 응?"
속을 뒤트는 거침없는 칼질에 쥬레인도 이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남자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날을 다시금 치켜들었다.
그만 쥬레인의 목을 베어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때였다.
"......?!"
돌연 허공에서 검이 붙들려 멈추었다.
당황한 남자가 더욱 힘을 끌어올렸으나 검날은 굳은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무형의 힘에 붙잡힌 듯했다.
갑작스럽고도 비상식적인 상황.
남자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이내 발견할 수 있었다.
검날 너머 허공으로 보이는, 햇빛을 가린 형상을.
"......"
대체 언제부터였는지,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이쪽을 싸늘히 굽어보고 있는 한 청년의 모습을.
< 쥬레인 마르하겔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