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서클 (8) >
전멸한 거미 군단.
사실 완벽한 전멸은 아니었다. 무리의 바깥쪽에 있다가 간신히 어스퀘이크 반경에서 벗어난 일부 거미들은 진작 사방으로 흩어졌으니까.
군집의 규모가 워낙에 어마무시했다 보니 완전히 다 마법의 범위에 담지는 못한 것이다.
칼은 굳이 놈들까지 쫓아 한 마리도 남기지 않고 척살할 생각은 없었다. 귀찮게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좀 오버하긴 했나."
칼은 눈앞에 펼쳐진 전경을 다시 한 번 훑어봤다.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은 거미들, 벼락 세례의 여파로 시뻘겋게 들끓는 대지.
뜨거운 열기가 이곳까지 퍼져와서 피부에 닿아 느껴진다.
몸에 차오르는 가벼운 탈력감. 마력은 거의 바닥난 상태였다.
아무리 6서클의 경지에 오르고 아르자크류 서클링도 진화했다지만, 방금과 같이 터무니없는 재앙을 일으키고도 마력에 여유가 있지는 않았다.
['돌발 퀘스트: 대청소'를 완료하였습니다.]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500000SP를 획득하였습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메시지.
'레벨은 안 올랐네.'
퀘스트 완료 알림이 끝이고 레벨업 알림은 없었다.
60레벨대에 올랐으니 앞으로의 성장이 더욱 극악해질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설마 이만큼을 학살했는데도 안 오를 줄이야.
뭐, 레벨이 낮은 일반 거미들을 제외하면 경험치가 들어올 만한 놈은 군장급이 전부이긴 했지만...
'그래도 대충 레벨업 직전까진 찼겠지.'
칼은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시선을 돌렸다.
몰살당한 거미 군단을 넘어 저멀리 보이는 일련의 사람들.
헨리, 레일, 울데미르, 그리고 그 밖에 기타 등등이었다.
그들의 존재는 진작 인지하고 있었다.
'거미들을 뒤쫓은 건가? 그나저나 여기까지 왜 온 거야?'
혹시나 도울 일이 있으면 도우려고 왔나.
마음은 고맙다만 오히려 방해였다.
거미들과 조금만 더 가까이 붙어있었으면 마법을 펼치기가 곤란할 뻔했으니까.
후웅.
칼은 공중에 몸을 띄워 그들을 향해 나아갔다.
전방의 땅이 완전히 용암 지대가 됐으니 걸어갈 수는 없었던 탓이다.
이내 그들의 앞에 사뿐히 내려서자 다양한 표정들이 보였다.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극심한 경악이 담겨있었다. 인간을 초월한 무언가를 보는 듯한 눈길.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할 말은 많은데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기색들이다. 그래서 칼은 먼저 입을 열었다.
"여왕 거미는 처리했습니다."
그 말에 모두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여왕... 애초에 찾아서 처리할 필요가 있었던 건가?
방금 거미 군집을 혼자서 싹 괴멸시켜놓고서?
"...자네, 어떻게."
제일 먼저 헨리가 간신히 입을 열고서 한 말이었다.
운송선에서 일을 겪으며 칼의 실력이야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바로 좀 전에 목도한 광경은... 대체 뭔가 싶었다.
정도를 한참 벗어난 신위였다. 마치 뇌신의 분노가 현세에 강림한 듯했다.
아무리 칼이 대단한 마법사라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마법을 펼칠 정도는 분명 아니었을 터다.
헨리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옆에 서있는 고위마법사 켄젤은 여전히 혼이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문득 그가 중얼거렸던 소리가 머릿속에 스쳤다. 6서클이라고.
굳이 그의 중얼거림이 아니더라도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았다. 마법사가 아니더라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지진과 벼락 폭풍, 그야말로 천재지변.
방금의 것들은 고위마법사 수준으론 절대로 펼치는 게 불가능한 마법이었으니까.
'성위마법사...'
충격이 좀 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그들은 정확히 직시할 수 있었다. 이 젊은 청년이 도달한 마법의 경지를.
전신에 돋아나는 소름에 레일이 반사적으로 팔뚝을 문질렀다.
칼은 머리를 한 번 긁적이고는 답했다.
"케인... 여왕 거미와 싸우면서 깨달음이 좀 있었습니다."
여왕 거미와의 전투로 벽을 넘었다는 뜻이었다. 5서클에서 6서클로.
깨달음이라는 게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건가 싶었으나, 눈으로 직접 본 게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내 가장 먼저 정신을 추스린 울데미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모로 지치는군.'
거미 군단은 괴멸했다.
어쨌든 더 이상 대원들이 희생당할 일이 없으니 잘 된 일이었다.
그렇게 갑작스러웠던 거미들의 침공은 허무하리만치 순식간에 해결되었다.
단 한 사람의 마법사에 의해서.
* * *
이후의 뒤처리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부상자들을 옮기고, 전사자들의 시체를 회수하고, 거미들의 시체는 한 곳에 모아서 불태워버렸다.
동굴에서 죽은 여왕의 시체는 루게시움 측에서 따로 회수했다. 물론 칼의 허락 아래 이뤄진 일이었다.
대충 정리가 끝난 뒤, 칼은 울데미르 백작과 집무실에서 다시 마주하고 앉게 되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공께서 도와주시지 않았다면 지금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을지..."
울데미르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말투는 어느새 완전한 공대로 바뀐 상태였다.
그의 직위는 왕국의 백작이자 루게시움의 총관리자였지만, 또 칼보다 한참 연장자였지만, 그럼에도 예를 차리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오히려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6서클, 성위마법사.
그 지고한 경지에 다다른 이는 대륙 전체로 따져도 극소수에 불과하다.
당장 세턴 왕국만 해도 6서클의 마법사는 궁정 마법사장인 플립 하인스 말고는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대륙의 패자인 제국에도 성위의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나 마법사는 열 명을 넘지 못했으니.
울데미르는 속으로 침음을 흘리며 반대편에 앉아 눈을 깜박이고 있는 칼을 바라봤다.
순진무구하게만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 실체는 운송선의 죄수들을 몰살하고, 지진과 벼락 폭풍을 일으켜 거미 군단을 전멸시킨 괴물이다.
'도저히 실감이 안 나는군...'
울데미르는 새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존재를 마주하고 있는지를.
저토록 젊은 나이에 6서클이라니.
그게 정말 가능할 수가 있는 일인가?
불세출의 천재라는 말로도 한참 부족했다.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도 전례가 없는 수준이 아닌가.
음유시인들이 노래하는 영웅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그런 터무니없는 존재가 정말 현실에 존재해서 눈앞에 있다.
성격은 보통의 귀족과 멀지만, 울데미르 역시 귀족인 만큼 앞으로 뒤바뀔 대륙의 정세부터 버릇적으로 따져보게 되었다.
'알티우스 학파의 마법사라고 했었지.'
잠시 수를 되뇌어보았다.
알티우스의 부학장, 원로원에 넷, 전투부에 둘, 그리고 마학부에 하나.
현재 알티우스 학파에 존재하는 6서클의 마법사는 총 8명이다.
그리고 이제 칼까지 더해졌으니, 알티우스에 속한 성위마법사의 수는 총 아홉이 된 셈이다.
'...알티우스가 다시 한 번 큰 도약을 하겠군.'
단지 숫자 하나가 더해진 의미로 끝나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칼의 나이였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6서클에 다다른 전례 없는 천재다.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더 말도 안 되는 성장을 이뤄낼까?
울데미르는 확신했다.
걸라면 반평생을 함께한 자신의 애검도 걸 수 있었다.
알티우스의 수장인 헤라 룬슬렛, 제국의 수호마법사이자 칸데이엄 학파의 수장인 로메인 페이지, 그리고 흑탑주.
멀지 않은 미래, 세계가 곧 세 대마법사에 이은 네 번째 신성의 탄생을 맞이할 것이라고.
흑탑주는 알려진 바가 없어 모르지만, 헤라와 로메인도 서른이 넘기 전에 6서클의 경지에 도달하진 못했었다고 했다.
눈앞의 젊은 청년은 현존하는 두 대마법사의 과거를 이미 뛰어넘은 것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막아주어 칼에게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친분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공께서 원하시는 바가 있다면 얼마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제 능력이 닿는 선에서라면 뭐든 답례를 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울데미르 스스로가 생각해도 칼에게 보상으로 줄 만한 건 없었다.
그나마 하나 있다면 허울뿐인 귀족 작위 뿐인데, 그딴 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성위마법사라면 대륙의 어느 국가를 찾아가든 백작 이상의 고위귀족위를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검성이나 대마법사 같은 천외천의 존재를 제외하고, 성위급의 무인과 마법사는 사실상 한 국가가 지닐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전력이니까.
물론 영토를 하사받는 건 또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그건 울데미르 스스로가 그럴 능력이 되지 않았다.
"음, 답례라..."
칼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에 울데미르가 긴장하며 침을 꿀꺽 삼킬 때였다.
"몬 대륙으로 향하는 무역선의 출항 시간을 최대한 당겨주실 수 있습니까?"
"......?"
전혀 예상치 못하게 튀어나온 말에 울데미르가 눈을 깜박였다.
칼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굳이 원하는 게 있다면 그것뿐입니다. 제가 서둘러 몬 대륙으로 가야 해서요."
"예, 그 정도야 얼마든지..."
얼떨떨하게 대답하는 울데미르였다.
잠깐 잊고 있었다.
처음 마주했을 때, 운송선에서 죄수들을 제압했던 것에 대해서도 칼이 딱히 보상 같은 걸 바라지 않았었다는 걸.
이 젊은 마법사는 속세의 욕심에 어딘가 초탈한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건가?'
아무튼 맥이 빠지는 대답에 울데미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칼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혹시 마법서 같은 건 가지고 계십니까?"
"...마법서, 말입니까?"
"예. 뭐라도 특별한 마법서가 있다면 한번 살펴보고나 싶은데..."
울데미르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죄송하게도 그런 건 없습니다."
아무리 넓고 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섬이라고는 하지만, 결국엔 죄수 수감소다.
6서클 마법사의 눈에 들 만한 특별한 마법서 같은 게 왜 이런 곳에 있겠나?
"그렇습니까."
칼도 그냥 한번 꺼내본 말이었기에 바로 기대를 접었다.
울데미르가 칼의 눈치를 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공께서 원하신다면 최대한 빨리 왕실에 보고를 올려서..."
"아, 그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칼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갈 길도 바쁜데 미쳤다고 다시 룬 대륙으로 돌아가서 세턴 왕궁으로 향하겠나?
물론 왕실쯤 되면 이것저것 탐이 나는 마법서들이 있긴 하겠지만, 왕실 차원에서 보상을 받는 건 상당히 꺼려지는 일이었다. 애초에 진짜배기 비전 마법 같은 건 당연히 내어줄 리도 없고.
이미 알티우스 학파의 소속이니 끌어들이려고 수작을 부리진 않겠지만, 자꾸 쓸데없이 관심을 가질 것도 뻔했다.
'전에 얻었던 것처럼 고대 마법서 같은 거라도 있으면 좋았을... 어?'
칼은 순간 멈칫했다.
오크들의 침공을 막아주고 루브덤 가문에서 얻었던 고대 마법서.
그러고 보니 그게 있었지?
인벤토리에서 꺼낼 일이 없으니 완전히 존재를 잊고 있었다.
전에는 서클이 부족해서 못 익혔는데, 이제 6서클에 올랐으니 분명 뭐라도 익힐 마법이 있을 것이었다.
< 6서클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