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마법사로 살아가는 법-74화 (74/132)

< 6서클 (5) >

중앙섬으로 넘어간 헨리와 3분대는 칼이 말했던 대로 곧장 다리부터 끊어버렸다.

총관리자인 울데미르 백작에게 보고하고 시행할 틈 따윈 없었다.

몰려오는 거미 떼가 이미 지척까지 접근한 상태였으니까.

콰앙!

꽤나 간발의 차였다.

헨리는 검을 거두고 출렁이며 허물어지는 다리를 바라봤다.

곡선을 그리며 무너진 다리가 반대편 섬의 절벽에 부딪혀서 산산히 박살난다. 중간쯤까지 건너왔던 거미들은 맥없이 아래의 파도 치는 바다로 추락했다.

그렇게 당장은 거미들이 중앙섬으로 넘어오는 걸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우선 중상자들은 보고와 전력 지원 요청을 위해 복귀하는 인원과 함께 루게시움으로 돌아가고, 나머지 대원들은 계속해서 자리를 지켰다.

"부상은 좀 어떤가?"

근처의 나무에 기대앉은 채 있던 레일이 고개를 들었다.

헨리가 피곤에 찌든 표정으로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레일 특유의 자유분방함 때문에 두 사람은 썩 깊지 않은 친분과 나이 차에 비해서도 꽤나 격 없는 사이였다.

그녀가 고개를 도로 숙이며 입을 열었다.

"속이 다 꼬여서 뒈지기 일보직전이야. 그래도 참을 만은 해."

"...괜찮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모르겠군. 심각하면 그냥 자네도 돌아가지 그러나."

"참을 만하다니까. 사지 멀쩡히 검만 휘두를 수 있으면 됐지, 내상 좀 입었다고 빼면 쓰겠어? 그럴 거면 분대장 때려쳐야지."

그 말에 헨리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암울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한 억지 웃음이었다.

"그나저나 참 기괴한 광경이야..."

도로 고개를 들어올린 레일이 반대편의 11구역 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녀뿐만 아니라 대원들 모두가 질린 표정으로 그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섬 끄트머리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시커먼 산더미.

그야말로 대군단.

어마무시한 수의 거미들이 마치 군대처럼 뭉쳐 일제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광경은 지켜보는 이들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상황은 너무 급박하게 흘러갔다.

그것도 매우 나쁜 방향으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작 몇 마리 넘어온 것에 불과했던 거미들은, 순식간에 그 수가 수백수천 배로 늘어나 중앙섬을 위협하고 있었다.

"섣불리 고치를 건드린 게 잘못이었어."

많은 대원들이 죽은 것도, 거미 군단이 중앙섬을 향해 저렇게나 몰려온 것도.

레일은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었다.

우울함이 한가득 껴있는 그녀의 목소리에 헨리가 작게 혀를 찼다.

"자네는 그저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한 것뿐이지 않나."

"하지만 더 잘 판단해서 행동할 수도 있었지."

"애초에 그 고치가 그런 존재였을지는 아무도 몰랐네. 감히 예측할 수도 없었고. 그러니 쓸데없는 죄책감은 집어치우게."

"거 위로 한 번 더럽게 못하네..."

킥킥대며 작게 웃은 그녀가 크게 한숨을 내쉬고서 말했다.

"여왕... 거미라고 했던가? 저 많은 거미들이 전부 놈이랑 정신이 연결되서 지배당하고 있다 했었지."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나 거대한 군집을 정신 연결을 통해 지배하는 마수라니.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명백했다.

아무튼 그래서 칼이 여왕 거미를 찾아내기 위해 중앙섬으로 돌아오지 않고, 홀로 11구역 섬에 남은 것 아닌가.

놈만 처치하면 지금 보이는 것처럼 무시무시하게 뭉친 거미들이 모두 흩어질 테고, 당장의 위기는 해결될 테니까.

"...괜찮을까? 그 사람."

레일이 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상황이 급박했던 터라 시키는 대로 하긴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곳에 달랑 혼자 두고 빠져나온 건 미친 짓이었다.

헨리 역시 비슷한 심정이었기에 떨떠름한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으나, 그럼에도 칼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는 있었다.

"다 생각이 있을 테지. 칼, 그 친구는 젊지만 굉장한 마법사니까."

굉장한 마법사.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레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번쩍이던 섬광, 거미 괴수의 몸체로 벼락이 내리꽂히던 그 충격적인 광경이 아직도 머릿속에 선하다.

또 그런 마법 실력도 실력이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설명해준 사람 역시 칼이었다.

문득 처음에 마주쳤을 때 애송이라고 놀렸던 게 떠오른다.

'아, 쪽팔리네...'

레일은 얼굴이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애꿎은 목덜미를 긁적였다.

나중에 돌아오면 제대로 사과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한편 헨리는 그늘진 얼굴로 생각했다.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아까의 거대한 거미 괴수의 모습은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지만, 놈이 나타난다면 대치는 순식간에 깨질 것이었다.

그 어마무시한 도약력이나 거미줄을 물대포처럼 쏘던 걸 생각하면 이 정도 거리는 충분히 넘을 수 있을 테니까.

놈 같은 괴물이라면 단 한 마리만 중앙섬으로 넘어와도 재앙 그 자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이젠 그저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참으로 무력하기 그지없는 처지군.

헨리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건너편 섬의 거미들을 응시했다.

한시라도 빨리 칼이 여왕을 찾아내서 처리할 수 있기를 기원하며.

* * *

거미 여왕 케인벨라.

먼 옛날부터 존재해왔던 고대의 마수인 그녀에게 과거의 기억은 흐릿하기만 했다.

떠오르는 게 있다면 어마무시하게 강했던 인간들과의 전투, 패배, 겨우겨우 살아남아 도주한 뒤, 해류를 타고 어찌어찌 이 섬까지 흘러들어온 것. 그리고 부상의 회복을 위해 긴 영겁의 시간 동안 숙면에 빠졌던 것까지.

망각된 기억은 그 오랜 숙면에서 비롯된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만큼은 여전히 생생히 남아있었다.

긴 숙면에서 깨어난 당시의 케인벨라는 부상은 회복했지만 본신의 힘을 많이 잃어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회복은 어렵지 않았다.

이 섬에는 온갖 몬스터들이 존재했고, 그것들은 케인벨라에게 있어 모두 질 좋은 영양분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사냥과 영양분 흡수, 그리고 탈피를 반복하며 그녀는 점점 힘을 회복했다.

남는 힘으로 새끼들을 번식하고 군집의 크기를 늘리며 세를 넓혔다.

그러던 중 이곳과 떨어진 다른 섬에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인간에 대한 증오만큼은 고스란히 남아있는 케인벨라였기에 당장에 사냥에 나서고 싶었으나, 그녀에게는 본능을 억누를 수 있는 지성이 있었다.

몹시 강했던 인간 무리에게 죽기 직전까지 몰렸던 과거의 기억이 그녀에게 인내심을 불어넣었다.

그곳에 얼마나 강한 인간들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더욱 힘을 회복하고 군집을 키워 확실히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또다시 긴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그 준비에도 끝이 보이는 듯 싶었다.

일반 개체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정예 개체들을 양산해냈으며, 군집의 최정예인 군장급 개체들까지 몇몇 탄생시켰다.

한데 그 과정에서 약간의 충돌이 빚어졌다.

건너편 섬에서 넘어온 인간들이 감히 북쪽 외곽에 지어두었던 고치를 파괴하고, 이제 막 개화할 준비를 하고 있던 군장 거미까지 죽여버린 것이다.

분노한 케인벨라는 더 지체할 것 없이 전쟁을 시작하기로 했다.

군집의 전력을 대부분 동원하여 인간들이 존재하는 섬으로 보냈다.

어차피 이제 탈피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이번 7번째 탈피만 마치면 본신의 힘을 완전히 되찾을 수 있을 듯 싶었으니까.

11구역의 섬 어딘가의 어두운 동굴.

그 가장 깊숙한 곳에 공동 전체를 꽉 채울 정도로 거대한 거미가 웅크리고 있다.

거미의 전신은 핏빛처럼 붉었는데, 금방이라도 터질 듯 외피가 부풀었다 말았다를 반복하며 형형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뿌드득...

연신 몸체에서 울려퍼지는 불안한 소리.

한창 탈피의 마무리 단계를 진행 중인 케인벨라는 극심한 고통에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녀가 느끼는 감정은 환희와 기대감 따위였다.

이제 이 고통스러운 과정만 지나면, 마침내 길었던 탈피가 끝나고 본신의 힘을 되찾게 될 테니까.

그리고 그때가 바로 섬에 있는 인간들이 멸망할 날이었다.

탈피가 끝나는 대로 군집에 직접 합세하여 이 섬에 존재하는 인간이란 인간들은 모조리 잘근잘근 씹어먹을...

- ......?

어느새인지 돌연 앞쪽에 거미 한 마리가 있었다.

멀뚱히 서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는 일반급 개체의 거미.

얘는 뭐지?

케인벨라는 순간 혼란에 빠졌다.

군집의 대부분 전력은 인간들의 섬으로 보냈고, 이쪽으로 오라고 명령한 거미는 없었으니까.

무엇보다 감히 여왕을 직접 알현하고도 이 불손한 태도는 뭐란 말인가.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노여움을 표하려던 그녀는 이내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눈앞의 거미는 자신의 정신적으로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연결이 끊기기라도 했단 말인가? 그건 불가능한 일...

저벅.

한창 혼란스러운 와중 누군가 뒤이어 공동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 번째 불청객의 정체를 확인한 케인벨라의 수십 쌍 눈이 크게 확장되었다.

다름이 아닌 바로 인간이었다.

* * *

"드디어 찾았네."

칼은 공동에 웅크린 거대한 거미를 빤히 바라봤다.

[Lv.68]

[거미 여왕, 최상급 마수]

거미 여왕 케인벨라.

감지 마법을 넓게 펼쳐도 동굴에 놈 말고 다른 거미는 존재하지 않았다. 전부 예상한 상황이었다.

케인벨라는 본래 탈피 중에 다른 거미들을 곁에 두지 않는다.

탈피 중에는 군집 개체들에 대한 정신 지배력이 약해지고, 거미들이 그 틈을 타서 여왕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강한 거미들은 더더욱. 군장급 개체의 붉은 고치가 섬 한가운데 똑 떨어져 부화를 진행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기에 인게임에서도 거미 여왕 케인벨라를 상대하는 방법은 두 갈래로 나뉘었었다.

다 집어치우고 그냥 케인벨라만큼 강해진 다음에 놈을 상대하거나, 아니면 지금과 같이 탈피를 하는 틈을 노리거나.

한마디로, 지금부터 여왕 거미를 상대하는 데 끼어들 방해꾼은 아무도 없었다.

끄그극...

케인벨라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핏빛으로 진하게 물들고 말기를 반복하는 몸체, 반쯤 벗겨지다 만 외피가 질질 끌리며 바닥을 긁었다.

키이익...!!

한눈에 봐도 정상적으로 보이는 상태는 아니었다.

지금도 겨우겨우 몸을 일으켜서 당황한 듯 이쪽의 눈치를 보고 있지 않은가. 한낱 방해꾼 인간따위는 바로 죽여버리면 그만일 텐데.

68레벨.

원래라면 몇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상대할 수 없는 강적이겠지만, 칼은 확신했다. 지금이라면 놈을 상대할 수 있다고.

실제 전사 직업을 플레이할 때도 탈피를 진행 중인 케인벨라를 55레벨 때 잡아본 경험이 있었다. 겨우겨우 컨트롤로 버티고 버티면서 잡아낸 거긴 하지만.

심지어 지금은 2레벨이 더 높은 57레벨이지 않은가.

칼은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곧바로 마법을 캐스팅했다.

【레이 버스터】

콰아앙!!

거대한 백색 광선이 케인벨라의 머리를 강타했다.

< 6서클 (5)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