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서클 (1) >
순간 기사단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에 여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반응들이 왜 그래? 아, 혹시 좀 귀한 손님이셨나? 내가 말실수를 한 모양이네."
헨리가 미간을 좁혔다.
"알티우스 학파의 마법사이시다. 그리고 우리 기사단에 있어 중요한 은인이지. 레일, 어서 갈 길이나 가라."
"뭐? 알티우스?"
여인은 조금 놀란 기색이었다.
그녀가 칼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쩐지 복장부터 이상하더라니. 난 또 흑상어 기사단이 요즘은 마법사도 단원으로 들이는 줄 알았잖아."
애초에 헨리와 나란히 서서 걷고 있는 것부터가 보통의 신분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대단한 알티우스의 마법사께서 이 섬에는 무슨 일이실까? 은인은 또 무슨 소리고?"
"레일."
"아, 그래. 알겠다고. 안 그래도 이제 가려고 했어."
여인이 손을 들어 바이저를 위로 올렸다.
투구 틈으로 드러나는 주홍빛 눈동자.
그녀가 눈웃음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럼 마법사 님도 나중에 또 보자고. 이 섬에는 이것저것 흉악한 게 많으니까 안 잡아먹히게 조심하고."
어쩐지 어린아이를 놀리는 듯한 말투.
칼은 그녀의 정보를 확인했다.
[Lv.52]
[루게시움의 분대장]
이내 여인과 기사들이 뒤쪽의 죄수들을 이끌고 마저 가던 길을 갔다.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헨리가 입을 열었다.
"실례했네. 여기서 지내는 자들은 언행이 좀 거침없는 감이 있지. 특히나 그녀는 더 그렇고."
이 음산한 분위기 속에서, 죄수들을 끼고 지내는 게 일상이니 그럴 만도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게시움의 3분대장인 레일 캐럿이네. 죄수 관리보다는 미개척 지대 탐사에 가장 힘을 쓰고 있는 분대지. 죄수들을 이끌고 가는 걸 보니 이제 막 임무에 나서는 모양이군."
"이것저것 흉악한 게 많다는 건 죄수들 얘기입니까?"
"음, 그것보다는... 가끔 중앙 섬으로 미개척 지대의 몬스터들이 넘어올 때가 있어서 그렇지. 아주 드물게 일어나는 일이니 신경 쓸 건 없네."
칼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칫했다.
"캐럿...?"
그 의문 섞인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헨리가 칼을 힐끗 바라봤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 캐럿이 맞네. 왕국의 세 공작가 중 하나지."
방금의 레일이라는 여인이 공작가의 일원이라는 소리였다.
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말들이 많이 생략됐지만 알아듣기엔 무리 없는 질문이었다.
왜 공작가의 영애가 이런 곳에서 직책을 맡아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그것도 위험천만하다는 섬 개척에 직접 나서기까지?
칼이 세턴 왕국의 정치 사정에 대해 뭘 자세히 알고 있는 건 아니었으나, 이곳 스테믹 군도는 누가 봐도 대귀족가의 핏줄이 있을 만한 곳은 아니었다.
전공을 쌓기 위해 전선에서 지휘관을 맡은 것도 아니고, 이곳은 그저 죄수들을 관리하는 거대한 감옥에 불과하지 않은가.
"혹시 이 섬에 뭔가 엄청난 자원이라도 숨겨져 있는 겁니까?"
그래서 섬을 개척하는 공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거나?
헨리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겠는가? 내가 그쪽 가문의 사정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하나만 말하자면 그녀는 서녀라네."
정실의 핏줄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것만으로 칼의 머릿속에는 상황이 어느 정도 그려졌다.
귀족가마다 다르겠지만, 첩의 자식이라면 가문 내에서 찬밥 신세가 되는 경우가 허다했으니까.
"내가 흑상어 기사단에 입단하여 운송 임무를 맡기도 전부터 그녀는 섬에 있었지. 그때는 분대장도 아니라 그냥 일반 대원이었었는데... 벌써 17년 전 이야기로군."
그 말에 칼은 또다시 놀랐다.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지는 않던데요."
"그럴 수밖에. 내가 그녀를 처음 봤을 때가 성년도 안된 꼬마였으니 지금은 서른이 조금 넘었겠군. 그래서 분대장들 중 나이는 가장 어려도 섬에서 지낸 경력도 가장 긴 베테랑이라네. 아무리 죄수들을 앞세운다고 해도 개척 임무를 맡고서 20년 가까이를 살아남기는 보통 힘든
일이지."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초면부터 내뱉는 말을 보니 성격은 좀 무례한 듯했지만.
레일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걷자니 어느새 한 건물에 도착했다.
중앙탑과 가까이 붙은 위치에 있는 건물이었다.
칼은 헨리에게 최상층에 위치한 넓은 숙소를 하나 내어받았다.
"섬에서 머무는 동안은 이곳에서 지내면 되네. 무역선이 언제 출항할 예정인지는 바로 알아보고 전해주지."
"경께서는?"
"난 지금부터 보고를 올리러 가야 되니,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다른 단원들에게 이야기하면 되네."
칼은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죄수들이 전부 죽은 건 어떻게 보고하실 겁니까?"
그들을 전부 죽인 게 이쪽이니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칼은 원래라면 운송선에 탑승할 수 없는 외부인이었다.
헨리가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자네에게는 결코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테니 염려 말게. 책임이 있다면 전부 나와 단원들의 책임이지, 자네는 죄수들의 준동을 막은 영웅이 아닌가?"
뭘 영웅씩이나.
"저는 그냥 아무런 탈 없이 조용히 넘어가기만 하면 족합니다. 뭣하면 제 얘기는 빼고 보고하셔도 됩니다만."
"음, 그건 좀 힘들 것 같네. 형식적이라지만 조사도 들어갈 텐데 거짓 보고를 올릴 수는 없으니..."
그냥 해본 말이었기에 칼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아서 피해 없게 잘 보고하겠지.
"그런데 보고는 누구에게 하는 겁니까?"
"아,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헨리가 입가에 미약한 웃음을 지었다.
"루게시움의 총관리자인 울데미르 백작님께 올리는 것이지. 공명정대하고 융통성이 있으신 분이니, 자네에게도 공을 치하하면 치하했지 결코 책임을 물으시진 않을 거네."
그럼 푹 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헨리는 건물 밖으로 나섰다.
잠시 방을 둘러보던 칼은 탁자 위의 바구니에 있던 사과를 하나 집어들고 베어물었다. 입안에 확 퍼지는 달콤한 맛.
순식간에 하나를 해치운 뒤 침대에 걸터앉았다. 바로 옆에 놓인 책꽂이에서 대충 책을 하나 집어들고 펼쳤다.
'몬스터 도감?'
서적의 내용은 몬스터에 관한 것이었다.
약간의 흥미를 느낀 칼은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겼다.
뒤로 넘어갈수록 온갖 흉악한 모양새의 몬스터들 그림과 나타났다. 머리가 두 개 달린 사자, 제 몸길이만큼이나 이마에 거대한 뿔을 단 황소, 채찍 같이 길고 날카로운 꼬리를 지닌 괴조 등등...
밑에는 첨부된 설명들을 읽으며 칼은 살짝 감탄했다.
보통 이런 류의 서적은 실존하는 몬스터들의 도감이 아니다. 야매 모험가들이 상상력을 동원하여 쓰는 소설이지.
하지만 이 책은 소설 같은 게 아니라 정말 제대로 된 도감이었다. 누가 썼는지는 몰라도 설명들도 제법 자세하고 정확했다.
장소가 장소니까 필독 도서 같은 걸로 뿌려둔 건가?
"뭐야, 마수까지 있네."
집채만큼이나 거대한 원숭이 그림을 보며 칼이 중얼거렸다.
마수.
악신들이 마계의 통로를 열었을 때, 악마들과 함께 이 세계에 풀려난 괴생물체들의 총칭.
전에 유적 탐사 때 마주했던 케르스 역시 마수의 일종이었다.
몬스터와 다른 점을 꼽자면 마수들은 모두 하나 이상의 괴능력을 지니고 있다.
불이나 전기를 뿜어내는 건 예사고, 정신 지배와 같은 능력을 사용하는 놈들도 있었다. 또 대체로 몬스터보다 지능도 높다.
마수 역시 악마들처럼 지금도 대륙 곳곳에 숨어있는 놈들이 있었다.
문득 이 군도의 대부분이 미개척 지대라는 걸 떠올리니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섬 어딘가에도 마수가 숨어있을 수 있겠는데...'
칼은 그만 책을 덮었다.
몬스터 도감 밖에도 이것저것 서적들을 살펴보고 읽으며 시간을 때웠다.
꽤 한참을 그러고 있자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헨리였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칼은 침대에 기댄 몸을 일으켰다.
더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벌써 보고를 마치고 돌아온 모양이었다.
헨리가 뜬금없이 물었다.
"자네, 잠깐 시간은 괜찮나?"
"시간이요? 물론이죠."
바로 아까 섬에 처음 도착한 사람이 뭐 바쁜 일이 있을 리가 있나. 당연히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헨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바로 함께 중앙탑으로 가지."
"...예?"
"백작님께서 자네를 직접 만나고 싶어 하시네. 물론 나쁜 의미가 아니라 좋은 의미로 말이야."
* * *
칼은 곧장 헨리의 뒤를 따라서 중앙탑으로 이동했다.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와 기사들을 몇 차례나 지나쳐 최상층으로 오르니, 복도 끝에 방 하나가 덩그러니 위치해있었다.
총관리자 집무실.
헨리가 문에 대고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중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드러난 방의 풍경은... 생각보다 별 거 없었다.
그닥 넓지도 않고, 화려한 장식품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책상이나 의자 등의 필요한 가구들이 전부.
방 한편에 놓인 책상에 앉아 서류를 훑어보고 있던 자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멋들어진 콧수염을 기른, 묘한 위엄이 서린 인상을 지닌 중년의 사내.
그가 바로 루게시움의 총관리자인 울데미르 백작이었다.
그가 헨리의 옆에 선 칼을 빤히 바라보더니, 곧 온화한 웃음을 얼굴에 피웠다.
"자네가 바로 그 친구로군. 기사와 선원들을 구해주어 진심으로 고맙네. 우선 앉게나."
칼은 헨리와 함께 집무실 중앙에 응접용으로 놓인 쇼파에 앉았다.
울데미르가 서류를 마저 정리하고는 그 반대편에 다가와서 앉았다.
"상황은 헨리 경에게 모두 전해들었네."
"아, 예."
"왕실 측에서 조사원이 파견을 나오긴 하겠지만, 내 이름을 걸고 자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없도록 하겠네. 뿐만 아니라 공을 제대로 치하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지."
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괜찮습니다. 이제 곧 떠나야 해서 별 문제 없이 잘 마무리만 되면 족합니다."
울데미르가 빤히 칼을 바라봤다.
사실 그는 칼이 누구인지에 대해 어느 정도까진 파악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대륙과 동떨어진 섬에서 지내야 하는 만큼, 울데미르는 바깥의 정보에 무척이나 민감한 인물이다.
아직 크게 소문이 나진 않았지만, 근래 알티우스 학파에서 큰 화제가 되고 있는 젊은 천재 마법사를 모를 리가 없었다.
헨리의 보고를 듣고서 칼의 정체를 바로 떠올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세인달 원로의 숨겨진 제자, 이 젊은 나이에 5서클에 오른 불세출의 천재...'
실제로 마주하니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렸다.
저런 순진한 얼굴로 죄수들을 모조리 학살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는 느낌.
하지만 헨리가 거짓 보고를 올렸을 리도 없고, 직접 목격한 선원과 기사들도 한둘이 아니라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울데미르가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남은 시간은 많으니, 이 부분에 대해선 후에 다시 이야기를 나누지."
셋은 이야기의 화제를 돌려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나, 죽은 사람들의 장례에 대한 거나, 이따가 저녁 만찬을 함께 하자는 등의 이야기였다.
자리가 얼추 마무리될 즈음 헨리가 울데미르에게 물었다.
"한데 백작님. 아까 보니 레일 분대장이 죄수들을 이끌고 나가던데, 오늘이 미개척 구역 탐사일이었습니까?"
울데미르가 고개를 저었다.
"정규 탐사일이 아니라 따로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렇다네. 11구역의 섬에서 웬 곤충형 몬스터들이 다리를 타고 넘어왔었거든. 거대한 거미 몇 마리였지."
루게시움에서는 중앙섬에 붙은 미개척 섬들을 구역 번호를 붙여 관리하고 있었다.
"해서 기사들을 파견하여 그쪽 섬을 잠시 둘러보니 이상한 게 발견되었네."
"이상한 거라 하심은...?"
"어떤 거대한 고치에 그 거미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고 하더군. 그래서 더 규모가 커지기 전에 죄수들과 분대를 파견하여 처리하려고 하는 거네."
그 말에 칼의 표정이 굳었다.
"방금 거대한 고치라고 하셨습니까?"
"음? 그렇네."
"...혹시 그 고치가 붉은색이지는 않았습니까?"
울데미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네가 그건 어떻게 알았나? 맞네. 붉은색 실로 짜인 거대한 고치였다고 하였..."
"당장 분대를 복귀시켜야 합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울데미르와 헨리가 얼떨떨하게 칼을 바라봤다.
칼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고치를 조금이라도 건드렸다간 죄수고 기사들이고 전부 다 죽을 겁니다."
< 6서클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