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박의 죄수들 (6) >
바혼은 강했다.
57레벨이면 고위기사 사이에서도 굉장한 강자에 속한다. 만만치 않은 상대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의 검격과 움직임은 순간순간 폭발적인 속도를 내곤 했는데, 검술에 대해 잘 모르는 칼도 그것이 쾌검의 일종이라는 건 금세 깨달을 수 있었다.
콰과과광!!
다만, 속도라면 칼도 누구보다 자신있는 분야였다.
칼이 마법을 펼치는 속도는 바혼의 신속함 이상이었다.
몰아치는 전격을 피하면 그 다음에는 충격파가, 그걸 막아내면 또 어느새 새로운 마법들이 날아들고 있다.
촤아악!
측면에서 뻗어오는 빛의 줄기들을 한 번에 잘라낸 바혼이 황급히 몸을 날렸다.
곧 거대한 빛의 기둥이 서있던 자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멀찍이 떨어진 갑판의 한구석으로 회피한 그가 거친 숨을 고르며 검을 다시 바로잡았다.
반면 칼은 전투를 시작할 때와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었다. 지친 기색 하나 없는 얼굴.
하지만 바혼은 칼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처음보다 훨씬 미약해졌음을 인지했다.
"자네도 꽤 지친 모양이군. 하긴, 마력이 무한한 게 아니고서야 그만큼 마법을 난사하고서도 멀쩡할 리가 없지."
최소한 상대도 똑같이 지쳐가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바혼이었다.
칼은 대답 없이 손을 내저었다.
다음 순간 허공에서 무언가 나타나더니 칼의 손에 들려있었다. 푸른색 액체가 담긴 포션이었다.
꿀꺽!
칼은 그것을 단숨에 삼켜버리곤 바닥에 빈 병을 내던졌다.
동시에 칼에게서 느껴지는 마력이 다시금 강해지며 폭발할 듯 격동했다.
"이쪽에는 신경 끄고 당신 걱정이나 하십시오."
"......"
바혼의 입가에 허탈한 웃음이 걸렸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 연신 일어나고 있었다.
저만한 마력을 눈 깜짝할 사이에 회복시키는 물약이라니.
포션에 대한 지식은 없지만, 그게 터무니없는 일이라는 것 정도는 바혼도 알았다.
'이대로면 곧 끝나겠군.'
그렇지 않아도 불리하기 그지없던 전황이 이제 완전히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머릿속에 패배와 죽음의 미래가 스쳤다.
저 젊은 마법사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지금껏 상대했던 마법사들이 전부 반쪽짜리로 느껴질 정도로.
왜 하필 자신이 운송되는 때, 운송선에 이런 인물이 함께 탄 건가 억울함마저 솟아오를 지경이었다.
'꼴사나운 생각을...'
바혼은 남은 오러를 끌어올려 검기를 압축시켰다.
각력을 극한까지 강화하고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한순간 그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칼의 지척에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집중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리고 있던 칼은 곧장 대응했다.
속박과 빙결 마법이 몰아치며 바혼의 접근을 저지했다.
콰앙!!
순간 바혼의 몸이 한 번 더 가속했다.
마지막 남은 오러를 바닥까지 끌어올려 펼친 비기였다.
그는 몰아치는 마법들을 기어코 전부 뚫어낸 뒤 칼의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짙은 핏빛 검기가 압축된 검날이 가공할 속도로 휘둘러졌다.
가능하다면 이대로 실드를 박살내버리고 안에 있던 칼까지 한 번에 베어버릴 의도였다. 그러나...
푸욱!
순간 바혼의 몸이 휘청였다.
중심이 흐트러진 검격은 칼의 실드에 큰 타격을 주지 못했다.
"......"
바혼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심장을 관통한 얼음창을 바라봤다.
어째서지? 분명 틈은 충분했는데...
울컥하고 터져나오는 핏물. 치솟는 격통 속에서 바혼은 뒤늦게 깨달았다.
'더... 속도를 올릴 수 있었군.'
간단했다.
칼 역시 지금까지 전력으로 마법을 펼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승부를 낼 때, 지금과 같은 치명적인 일격을 안겨주기 위하여.
'괴물 같은 놈.'
풀썩.
바혼의 몸이 갑판 바닥에 허물어졌다.
주변의 기사들이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그때 몸을 일으킨 헨리가 비척이며 바혼을 향해 다가왔다.
그 역시 가슴팍을 꽤나 깊게 베였기에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칼이 물끄러미 바라봤으나 헨리는 괜찮다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그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죽어가는 바혼을 내려다봤다.
바혼의 입에서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난... 후회하지 않네."
"......"
"복수에 미쳐 날뛰며 살인귀가 된 걸 후회하지 않아. 죽어가는 지금도 남는 건 아쉬움밖에 없군. 더 많이, 더 잔혹하게 죽일 수 있었는데, 놈을 그렇게 쉽게 죽여선 안 되는 거였는데..."
헨리의 눈에 분노를 동반한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반면 바혼의 눈에서는 점점 생기가 사라졌다.
"그래도 자네에게는 미안하군. 정말 지옥이 존재한다면 필시 난 그곳에 떨어질 테니... 죗값은 거기서 기꺼이 치르겠네."
이윽고 바혼의 숨이 끊어졌다.
긴 밤의 혈전이 끝났다.
수많은 선원과 기사들이 죽었고, 그들을 죽인 죄수들도 모두 죽었다.
어느새 지평선 너머에선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동틀 녘의 노을이 반파된 선박과 그 위를 뒤덮은 핏물을 반짝이며 비추었다.
* * *
전투, 특히나 칼과 바혼 간의 전투의 여파로 선박 이곳저곳이 많이 박살난 상태였지만, 긴급히 수리하여 남은 항해까지는 버틸 수 있을 정도였다.
헨리를 비롯하여 살아남은 인원들은 칼에게 깊은 감사를 전했다.
본래도 격식은 차렸지만, 칼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처음보다 훨씬 더 공손해진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난밤 칼이 보여준 신위는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니까.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들은 전부 죽고, 선박들은 모조리 죄수들에게 점령당했었을 테니까.
지금껏 전례가 없던,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갑판과 선박 내부에 이리저리 널린 시체들을 처리하고, 죽은 선원과 기사들의 장례를 배 위에서 간소하게 치루는 한편, 기사들은 죄수들의 시체도 꼼꼼히 확인했다.
혹시나 기존에 태웠던 것과 머릿수가 맞지 않을 수 있으니까.
이리저리 형체도 못 알아보게 죽은 시체들이 많아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전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다.
"......"
선원과 기사들이 뒷정리를 하는 동안 칼은 방에 얌전히 박혀 책만 읽었다.
안 그래도 다들 바쁜데, 또 많은 이들이 죽어 침울한 분위기인데 괜히 이쪽에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혼을 죽이며 레벨은 55에서 56으로 상승한 상태였다.
솔직히 레벨업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의외였다.
보통 게임에서 보면 고렙이 저렙들을 학살한다고 레벨업이 되진 않는다.
자신보다 낮은 레벨의 상대를 처치하면 얻는 경험치가 대폭 줄어드는 등의 패널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칼이 플레이했던, 지금은 게임 캐릭터가 되어버린 글로리어스 소울은 그런 부분에 있어 다른 게임들보다 훨씬 극악했다.
비슷한 레벨은 커녕, 웬만큼 더 높은 레벨의 적을 처치한 게 아니고서야 경험치가 잘 쌓이지도 않는다.
실제로 레벨이 어느 정도 오르고 난 뒤로는 목숨의 위협을 느낄 만한 강적을 처치한 게 아니면 레벨업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
크루크 키메라, 대주술사 가르두카, 그리고 유적 탐사에서 처치했던 악마 등이 그런 강적이었었다.
'그런데 이번 건...'
떨거지 죄수들이나 주술사는 말할 것도 없다.
유일하게 이쪽보다 레벨이 높았던 바혼도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는 강했지만, 큰 위협을 느낄 정도의 난적은 아니었으니.
'레벨업까지 남은 경험치가 그렇게 많지 않았었나?'
경험치의 정확한 누적 현황은 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경험치 바 같은 게 딱히 가시적으로 표시된 것도 아니니까.
한층 더 강해진 서클의 마력을 느끼며, 칼은 그만 상념을 접었다.
잠시 물끄러미 창밖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방문을 열고 들어온 건 메이린이었다.
그녀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절도 있는 경례를 마치고는 말했다.
"곧 있으면 스테믹 군도에 도착하여 소식을 전해드리려고 왔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드디어 도착인가?
어차피 또 배를 갈아타서 몬 대륙을 향해 한참을 가야겠지만, 잠깐이나마 육지 땅을 밟을 생각을 하니 기분이 조금은 전환되는 느낌이었다.
갑판으로 나서니 뱃머리에 헨리가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아, 나왔는가."
가까이 다가가자 헨리가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회복 마법으로 치료를 받긴 했지만, 헨리나 기사들이 당한 부상은 고작 며칠 만에 회복될 게 아니었다.
"멀쩡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럭저럭 버틸 만하네. 이 정도 부상도 못 버텨서야 기사 직위는 내려놔야겠지."
헨리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자네에게는 그저 감사한 마음뿐이네. 세인달 님께도 모자라 제자인 자네에게까지 갚을 수 없을 큰 빚을 졌어."
벌써 며칠 동안 열 번도 더 넘게 들은 말이었다.
헨리가 또 일장연설을 펼치기 전에 칼은 화제를 돌렸다.
"저 멀리 보이기 시작한 게 스테믹 군도겠군요."
짙은 안개 속에 가려진 섬.
헨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몬 대륙으로 향하는 무역선은 섬에서 얼마나 머물다가 출발합니까?"
"음, 적어도 사흘에서 일주일 정도는 머무를 거라네. 몬 대륙으로 향하는 항로는 지금까지 온 것보다 훨씬 더 머니까. 물자도 공급받고 선원들도 휴식을 취하고, 이것저것 할 게 많겠지."
섬에 점점 가까워질수록 주변의 안개 역시 서서히 짙어졌다.
한참 동안 안개를 뚫고 나아가니 어느새 부쩍 가까워진 섬의 모습이 드러났다.
닻을 조종하고, 돛을 접고, 선원과 기사들이 갑판 위에서 분주히 움직이며 하선할 준비를 했다.
"도착하면 단원들의 장례부터 제대로 다시 치뤄줘야겠군."
헨리가 물끄러미 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길었던 항해의 끝.
드디어 중간 지점인 스테믹 군도에 도착했다.
* * *
"그래, 거기로 판자를 내리라고. 짐 좀 편하게 옮겨야 될 거 아니야."
"2층 말고 3층 창고부터 비워. 중요한 짐은 다 그쪽으로 옮겨놨..."
바쁘게 짐을 나르는 선원들.
칼은 기사들과 함께 먼저 땅으로 내렸다.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으며 어딘가 스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칼도 오면서 들은 이야기가 있기에 스테믹 군도에 대해서는 제법 알게 되었다.
죄수들을 수감하는 루게시움이 위치한 이곳이 바로 군도의 중심부고, 나머지 자잘하게 붙은 섬들은 대부분이 미개척 지대라고 했던가.
그래서 죄수들을 앞세워 희생해 지금도 꾸준히 개척을 시도하고 있다고.
기사들은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에게 형식상의 신분 확인부터 받았다.
죄수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자 병사들은 의아한 기색이었으나, 헨리에게 사정을 전해듣고 충격받은 표정으로 황급히 길을 터주었다.
꽤 한참을 섬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저멀리 서서히 탑의 형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게 바로 루게시움이군요."
"그렇네."
거대한 탑을 중심으로 크고 작은 건물들이 수없이 모여 군집을 이루고 있는 광경.
"죄수들을 수감하는 곳이 바로 저 탑과 옆에 붙은 건물들이고, 나머지는 전부 관리인들의 생활 공간이지."
칼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물들을 구경했다.
그때 반대편에서 일련의 무리가 걸어왔다.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죄수를 이끌고 어딘가로 이동하고 있었다.
"어? 헨리?"
선두에 서서 투구를 쓰고 있던 이가 인사를 건네왔다. 울리는 목소리로 보아 여인이었다.
"오랜만이네. 벌써 다음 죄수들이 도착할 때가 됐던가? 섬에만 처박혀서 지내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네."
헨리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헨리의 뒤쪽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죄수들은? 이미 탑으로 이송을 마친 건가?"
"레일, 자네도 바쁜 것 같은데 이야기는 나중에 나누도록 하지."
여인이 콧소리를 내며 헨리를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좋아. 그럼 그러자고. 그런데..."
그녀의 시선이 헨리의 옆에 선 칼에게로 옮겨갔다.
"이 애송이는 또 뭐야? 설마 선원이 여기까지 들어왔을 리는 없고, 흑상어 기사단에 신입이라도 새로 들인 건가?"
< 선박의 죄수들 (6) > 끝